(레10:1-7)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첫째 요소

구약성경 강해 (1) 레위기 강해(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레10:1-7)

 

냉혹하신(?) 하나님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성막을 완성하고 가나안 땅으로 진군을 시작하고 곧바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론의 장남과 차남으로 제사장 역할을 했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불로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즉사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지정한 불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성소에 분향을 했습니다. 또 제사장의 직분이 아무리 막중해도 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자기를 위해 속죄제를 드리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신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한 번의 실수 같은데 용납하지 못하고 심판하시니 하나님이 아주 냉혹 잔인하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고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면 우선 본문 사건의 배경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성막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성막에서 드릴 예배에 대한 규정을 자세하게 지시했고 그 내용이 레위기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9장에선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이 제사법에 따라 첫 제사를 드린 내용이 나옵니다. 회막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백성을 축복했습니다.(레9:23)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처음 드린 제사를 기쁘게 열납했다는 뜻입니다. 아론의 개인적 판단이나 종교적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서 단 위의 제물을 태웠습니다.(레9:24) 하나님이 직접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확증해서 보였습니다.

 

본문 10:1의 앞에는 어떤 접속사도 없습니다. 아론의 첫 제사와 시간이 그리 많이 경과하진 않았어도 별개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맡은 일은 성소 중안에 있는 분향단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향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번제단의 불을 작은 향로에 담아 들고 들어가서 그 불로 향을 피워야 했습니다. 그 향로는 항상 성막 안에 비치되어 있었고 성소로 들어가려면 번제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다른 불을 붙이는 것이 오히려 더 번잡스럽습니다.

 

요즘처럼 일회용 라이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지깽이로 숯을 들고 옮겨서 붙여야 합니다. 대체 어떤 불을 사용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입니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본문 안에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

 

나답과 아비후 두 사람을 죽인 불(레10:2)과 아론의 첫 제사 때에 번제물을 태운 불(레9:24) 둘 다 “여호와 앞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하늘 위에서 수직적으로 떨어진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막에서 수평적으로 뻗쳐 나온 불입니다.

 

짐승 제물의 피를 받아서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는 언약궤를 모셔 놓은 곳이 지성소입니다. 언약궤와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 하신다는 상징이지만 어쨌든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지성소와 성소는 알다시피 크고 두꺼운 휘장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분향은 휘장 밖 성소에서 이뤄집니다.

 

지금 그 휘장은 태우지 않는 초자연적인 레이저 광선 같은 불이 분향 중에 있는 그들을 즉사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선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아론의 첫 제사 때도 그 불은 휘장을 뚫고 성소 문도 거쳐서 성막 마당의 번제단까지 뻗쳐 나와 제물을 태운 것입니다.

 

엘리야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갈멜 산에서 대결한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때도 동일한 성격의 불이 등장합니다. 대결 전에 삼 년간 가뭄이 계속되었기에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습니다. 그런데 불이 물에 흥건하게 젖은 제물과 나무는 물론이고 도랑의 물까지 핥듯이 태웠습니다.(왕상18:38)

 

물건을 태워서 난 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직접 나온 불입니다. 성령의 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에도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을 “옷을 입은 채”로 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5절) 향로의 불을 잘못 다루다가 옷에 옮겨 붙어서 옷이나 시신이 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불이 순간적으로 그들의 생명만 끊어버린 것입니다.

 

레위기 6:12,13에 특이한 규정이 있습니다.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리기 전에 모세가 받은 제사법에 계시된 것으로 제사장이 맡은 중요 의무 중의 하나가 번제단의 불을 꺼트려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릴 때는 사람들이 제물에 먼저 불을 붙여서 태웠고(레9:17), 그 짐승의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렸습니다. 그 제사를 열납했다는 증거로 여호와에게서 불이 나와 번제단에 이미 타고 있던 제물을 삼킬 듯이 다 태웠습니다.

 

인간이 붙여 놓은 불을 하나님이 당신의 불로 직접 대체한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불이 보태어진 것입니다. 그 후로는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의 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불이 꺼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을 꺼버리는 셈이 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지정하지 않는 불 즉, 번제단의 불이 아닌 불로 분향했다는 것은 바로 항상 피어올라야 할 번제단의 불을 꺼트렸다는 뜻입니다. 다른 불을 붙이는 것은 더 번잡했으므로 그런 해석이 틀림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된 이유를 본문과 바로 이어지는 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고 합니다. 본문 사건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규례인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불을 예사로 여긴데다 술을 마시고 덜 깬 상태로 분향을 한 것입니다.

 

번제단 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번제단에 불을 꺼트리지 말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할 백성들의 죄가 그렇게 끊임없이 제물을 태워야 할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따지면 율법에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언제든 용서해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막이 완성될 때에는 모세조차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충만히 임재 했습니다. 그때의 영광이 떠나지 않고 백성들 곁에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생생한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 불을 꺼트리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잠시나마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는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신약성경에도 나오는데 바로 잘 아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땅을 판 돈을 전부 교회에 헌금하기로 약속했으나 일부를 숨기고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성령의 계시를 받은 베드로가 이것이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개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는 뻔뻔하게도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거짓말을 하였고 똑같은 모습으로 연이어 심판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불로 죽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말씀 한마디에 즉사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였기에 죽음의 심판이 행해졌습니다. 성령이 행하는 첫째 역할은 예수를 믿느냐 마느냐, 구원이냐 심판이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말씀으로 죽음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을 경시했기에 바로 그 하나님의 불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때로는 목사직분을 경시할 때가 있고 감사 헌금을 하려고 작정했다가 속인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자면 벌써 죽었어야 마땅했고 그럼 또 이 자리에 없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초대 교회가 막 설립되려는 초기였고,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워져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시작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엄격히 말씀대로 집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처음부터 규정을 느슨하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제사장들과 교회의 일군이 될 자들인지라 더욱 엄격한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특이한 장례 절차

 

이 두 사람에 대한 장례 절차가 특이합니다. 아버지 아론과 동생들더러 머리를 풀지 말고 옷을 찢지 말라고 합니다. 둘 다 애도를 표시하는 모습인데 그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대제사장에 한해 가족의 장례에 참석 못하게 되어있으나(레21:10) 셋째 넷째 아들도 아론의 후계자가 될 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맡긴 소명을 일상의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가족보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섬겨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지만 부친의 장사를 지낸 후에 그러면 안 되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눅9:60) 부모를 존경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신자는 이미 천국에 간 가족의 장례에 개인적으로 슬퍼하면 안 된다거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세상의 관습은 무시하라는 등의 의미는 전혀 어닙니다.

 

처음의 “죽은 자들”이 문자적으로 죽은 자를 뜻하면 시신들끼리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럴 수는 없기에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한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그들로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라고 합니다.

 

지금 장례를 치러야할 아버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인간이 육신적으로 죽으면 구원과 심판 둘 중의 하나로 완전히 판결이 났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당신을 성자 하나님이자 구주로 영접하는 자와 아닌 자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죽어 마땅한 가운데 스스로 겸비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러 오신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당연히 그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기 아버지는 이미 구원과 심판 둘 중에 하나로 결정 났으니까 나가서 아직도 죄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백성을 대표하여 자신과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서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집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열납하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만약에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고 양육하는 신약 시대의 목사와는 다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며 그런 역할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아들이자 형이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그것도 제사장이, 죽었기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백성이 안 볼 때는 애통해해도 백성들 앞에선 공개적으로 머리를 풀고 옷을 찢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자칫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거나, 완전히 수긍하지 못하겠다든가, 일말의 원망이 있다는 표시로 백성들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그 의미를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의미를 반감시켜버립니다. 쉽게 말해 목사가 이단에 빠진 자와 개인적으로 교제는 해도 되지만 혹시라도 이단을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는 의미를 줄 수 있기에 그들과 공적인 관계는 절대 맺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살려라.

 

제사장들은 영적인 지도자로서 예수님 말씀대로 백성들의 영적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에 그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과 영혼 둘 다를 죽이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자신의 육신과 영혼의 살고 죽음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분이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고,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의 삶을 통해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만 거룩해져선 안 되고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가르쳐진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게 성령의 인도 아래 백성들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제사장들,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도 자기 속에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누가 찾아와도 하루 24시간 자신과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자기 심령 속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아서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당신의 영광을 얻겠다고 선언했습니다.(3절)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즉,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율법규정 한두 개를 어긴 한 번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고 헌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에 하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할례를 육신에 받았을지라도 그 영혼에 할례는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자면 육신은 살아있을지라도 벌써 그 영혼은 죽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이 긍휼로 참아주시다가 마침 때가 정확히 이른 것입니다. 당신 백성들은 물론 오늘날의 성경을 읽는 신자들까지도 여호와 앞에서 성령의 불이 나와서 즉사하는 심판을 내린 것을 보게 하여서 그 심판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히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마솥의 불이 꺼지지 않는 오뎅 가게

 

일본 동경에 가면 아주 유명한 오뎅 가게가 있습니다. 건더기를 더 달라고 하면 공짜로 줄지언정 국물은 돈을 받고서야 더 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뎅 국물을 끓이는 가마솥의 불을 집안 대대로 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국물은 너무 진하고 다른 가게가 도무지 흉내를 낼 수 없는 깊은 맛을 냅니다.

 

일본 사람은 알다시피 대체로 무슨 일이든 신실하게 행하고 자기 맡은 분야에 최고 전문가가 되려는 장인정신이 투철합니다. 집안의 장남이 의사 변호사 회사 사장일지라도 아버지가 죽으면 그 일을 그만두고 가업을 이어받습니다. 사회적 신분은 물론 수입이 훨씬 적어질 수 있어도 그러합니다.

 

그 이유는 그 일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손님에게 최고 품질의 제품을 제공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일은 반드시 대대로 이어갈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뎅 국물 가마솥에 불을 안 꺼트리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성가시고 지루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집이 하루 불을 꺼트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솥에 불이 안 꺼지는 집이라고 선전을 전혀 못할 것이며 국물에 따로 돈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전통 명성 영예가 다 무너집니다.

 

하물며 오뎅 가게도 그럴진대 하나님의 번제단의 불을 끄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용서해주시는 사랑과 권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 일에 특별한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짜 사랑으로 대체하고선 하나님 앞에 사기 치려다 들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 절대적 사랑, 절대적 생명은 절대로 타협 왜곡 수정 포기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의 선포가 중지되어선 더더욱 안 됩니다. 그러니까 즉, 복음 전파를 하루도 쉬지 말고 행하라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갖고 신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대제사장직을 승계할 첫째 둘째 순위였습니다.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제사를 드려야 하고, 백성들의 이런저런 고통을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해주어야 하고, 제사가 열납 되고 기도가 상달되면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을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자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의미와 가치조차 몰랐습니다. 여호와의 불을 꺼트리고 당신께서 지정하지 않은 불로 분향을 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도 끊어진다는 인식을 아예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복되는 단순하고 손쉽고 지루한 일이라 예사로 여겼습니다.

 

번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는 것이 매일 캠프파이어 하며 즐기라는 즉, 술 마시며 놀라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흉악한 죄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리면 언제든 다 용서해주신다는 표식을 온 백성이 항상 보고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을 꺼트린 것은 말하자면 에덴동산에 심겨진 선악과나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뽑아서 던져 버린 셈입니다.

 

불을 안 꺼지게 하는 최선의 수단

 

짐작하신 대로 본문은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복음을 전해야 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다보면 지루하고 갑갑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탐욕과 의와 자랑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평생토록 현실적으로는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다 오해와 누명과 손해와 핍박을 도리어 덮어써야만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방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화끈하거나 풍성한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전도의 열매도 잘 열리지 않습니다. 그저 일상의 사소한 일을 하며 평생을 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너무 외롭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호응은커녕 동행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자기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고 순전한 믿음과 기도로 전하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와 내 주변의 육적인 생명에 화려함과 거창함은 없으나 점차 나와 내 속과 내가 섬기는 사람들, 가족 이웃 직장 교회는 물론 불신자들 사이에 영적인 열매가 조금씩 열립니다. 그래서 참 사랑, 참 은혜, 참 진리, 참 생명이 무엇인지 깨달을 뿐 아니라 실제 삶에 넘치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불을 꺼트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번제단의 불처럼 숯을 피우는 것입니다. 생나무를 한 번 불에 태운 것이 숯입니다. 신자에게 연단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 모든 연단과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써 어떤 비방과 멸시와 오해와 핍박 중에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 성령의 불을 세상사람 앞에 피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후에 분홍빛 카펫을 깔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많은 역경을 겪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지겹도록 아무 맛도 없는 만나만 먹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지겨운 가운데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전혀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감사 헌신하는 자를 고르기 위해서입니다. 사십 년간의 그런 시험을 알다시피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통과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사소하고 지루하고 아무 생색도 나지 않는 일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입장에선 그 사소한 일 가운데 사소한 기쁨을 누리는 자에게 더 큰일을 즉, 나중에 대제사장직을 맡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손쉬운 길도 없습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씩 평생을 주님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화끈하고 거창한 열매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대한 나답과 아비후를 가장 멀리 하여서 죽음으로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무료해도 앞서 가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이름도 빛도 없이 기꺼이 따라가는 신자를 단 한 명이라도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신자에게 일부러 연단과 훈련만 주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참 은혜와 참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8/2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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