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8:24-30) 창세기로 되돌아가는 인류의 미래
구약성경강해(7) / 레위기강해(7)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r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8:24-30)
포르노 같은 성경기록
레위기의 주제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도 제사법과 정결법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결하게 유지하는 계명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사건도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할 것인지에 관한 것 셋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배운 아론의 아들들이 드린 두 종류의 제사(10장)와 앞으로 살펴볼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자가 돌에 쳐 죽임을 당한 사건(24장)이 그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18장의 성적순결에 관한 계명은 인간끼리의 문제인지라 레위기 주제와는 부합하지 않고 조금 생뚱맞은 것 같습니다. 이 장에 열거된 성적 범죄는 은혜가 안 되어 읽지 않았지만 근친상간(6-18절), 간음(22절), 동성애(23절), 짐승과 교접하는 수간(獸姦)(23절), 등입니다.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 사이가 아닌 상대와의 성관계가 전부 망라되었습니다.
종교경전은 일반적으로 경건하고 심오한데 이런 추잡한 일을 자세히 진술한 것은 성경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적 성찰이나 각성을 통해 인격을 갈고 닦는 차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죄의 본성과 육신적 정욕이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들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상과 치열하게 씨름해 나가는 삶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려면 성적으로 순결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레위기에 성범죄를 포함시킨 것은 성적범죄가 인간끼리 수평적 관계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죄라는 뜻입니다.
레위기 20장에선 그 전부를 엄격히 사형으로 다스리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엄청난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사형으로 다스린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확정되었기에 구원 받으리라고 기대는커녕 꿈도 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최근 비교적 보수적인 한국에서도 간음이 형법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 대다수가 간음은 형벌을 받을만한 죄가 아니라고 동의한 것입니다. 성범죄는 하나님 앞에 죽어야 할 죄라고 하면 앞뒤가 꽉꽉 막힌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라는 비방만 들을 것입니다.
물론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문자적 계명이 폐지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주는 본을 보였습니다.(요8장) 그러나 누차 말했듯이 율법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이 성범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로 접근하는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럴 양이면 경제적 사회적 죄도 레위기가 언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고기 가마 곁이 그리웠던 진짜 이유
다시 18장 초반을 살펴봅시다.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따르지 말라고 합니다.(3-5절) 가나안 땅의 규례란 그들 족속의 종교적 계명입니다. 가나안 신들을 섬기는 절차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성적 순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몰렉 신에게 자녀들을 불 태워 바치는 관습을 좇지 말라고 명한 것입니다.(21절)
알다시피 당시의 우상 종교는 신전 앞에서 단체로 난잡한 성행위를 함으로써 자기들 신에 대한 예배 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그 전에 호사스런 음식을 먹었고 음주 가무는 당연한 순서로 따랐습니다. 한마디로 신에게 제사지내며 인간의 육욕적 쾌락을 다 채웠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방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맛도 없는 만나에 지쳐서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는 타령을 늘어놓았습니다. 고대에는 고기가 귀하고 비싸서 신전 제사 때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다는 뜻이지만 애굽 우상들을 섬길 때의 그 난잡했던 파티가 너무 아쉽다는 뜻도 포함된 것입니다.
기어이 그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고 없는 사이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불렀습니다.(출32:18,19) 애굽에서의 추잡했던 제사 방식을 재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레위기의 제사법에는 음주 가무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대신에 여리고 성 전투할 때에 찬양대를 가장 앞장 세웠습니다. 또 다윗이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찾아오면서 춤추고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에선 하나님을 찬양할 때만 춤추고 노래했지 인간끼리 신나게 놀라는 법은 없었습니다.
고대에는 참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해준 율법을 소지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종교들이 신전에서 그런 추잡한 행위를 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자기 자식들을 불에 태워 바치는 것도 자기들 신에게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24절에 앞으로 쫓아낼 족속들이 이 모든 일에 더럽혀졌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차고 넘쳤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보다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진멸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수기 16장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반기를 든 즉, 여호와의 뜻을 거역한 고라 가문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습니다. 레위 지파가 아닌 르우벤 족속들이 성막에서 분향하자 레위기 10장 사건에서처럼 여호와에게서 즉, 성막의 지성소에서 불이 나와 250명을 즉사시켰습니다. 또 그 일에 회중들이 모세에게 원망하자 전염병으로 14,700명을 심판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족속에 대해선 이스라엘이 미처 다 정복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그들도 자국민처럼 잘 대우해주라고 율법에 명시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 26절도 이 규정을 타국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이스라엘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은 물론 모든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뿐입니다. 당신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모두를 지으시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기에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바 요점은 성적계명 이전에 가나안 신들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것이며 그럼 반드시 죽음의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유
몰렉 같은 우상은 당연히 실존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서 배운바 대로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인생사가 자기 계획대로만 안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또 수시로 자연재앙이 덮쳐서 기껏 이뤄놓은 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죽는 등 큰 피해를 입힙니다. 그래서 뭔가 눈에는 안 보이는 인간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가 분명히 있다고 여겨지고 그 신들이 심술을 부린다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그 신들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눈에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까 실제로 볼 수 있는 존재 중에 가장 힘이 센 사자나 독수리 같은 금수(禽獸)의 형상을 본떠 신상을 만듭니다. 사자 머리에 독수리 날개를 한 애굽의 스핑크스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 우상들에게 최대한의 치성을 드려서 자기 소원을 아룁니다. 예상치 못한 나쁜 일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아침저녁으로 빕니다. 그래서 인생을 자기들 뜻대로 사는데 훼방만은 말아달라고 빌고 또 빕니다.
그렇게 하는 근본적인 생각은 인생은 죽음으로 종결을 짓고 이 땅이 전부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최대한 신나게 즐기며 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성과 양심을 동원해 자연이나 인간의 정밀하고 오묘하며 완벽한 모습을 살펴보면 절대로 우연히 생겨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으며 누구도 모른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가 따로 있음을 안다면 그 존재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상종교를 믿는 민족들도 실상은 그 신들을 진심으로 섬길 마음이 없습니다. 모든 신들이 자기들이 만들었기에 인간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그 안에 참 하나님은 없습니다.
거기다 이 땅에서 최대한 풍요롭게 살려면 당연히 생산과 번식이 최대한 많아야 합니다.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상은 죄송하지만 유방이 수십 개가 붙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신상에 제물을 바치며 자식을, 이왕이면 아들을 많이 낳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은 노동력으로 활용되었기에 자식이 많을수록 부자가 되고 집안이 흥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다처제를 시행했고 가능한 첩도 많이 두었습니다. 자식이 없으면 신께 벌 받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 풍요로운 생산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우상 예배는 신전에서의 난잡한 성행위로 마친 것입니다.
그럼 결국 자기들 신에게서 Free Sex에 대한 허가를 받은 셈입니다. 자연히 민간에도 난잡한 성 풍속으로 오염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규례뿐 아니라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명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똑같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간음이나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데 이 땅이 전부이므로 자기들 마음대로 즐기자는 뜻입니다. 그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이므로 풍요롭게 살며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라고 해서 무조건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윤리나 법체계가 더 엄격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좋은 것을 최고로 많이 최고로 빨리 차지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경쟁과 다툼이 유발됩니다. 그러면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쾌락을 더 많이 추구할수록 질서도 엄하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주는 일만은 중한 벌로 다스리게 됩니다.
역으로 말해 최대한 즐기며 살려는 주의이므로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만 안 주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되고 그런 사람들은 아주 선하다고 착각합니다. 나아가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절제를 잘 하기에 인간끼리 선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얼마든지 서로 힘을 합쳐서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은 아예 안중에도 없습니다.
간음과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 생각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 큰 성인들끼리 서로 합의한 것을 제 삼자가 뭐라고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규정하고 그대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실존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설령 있다고 쳐도 인간을 간섭할 권한은 신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서 모든 인간의 삶을 통치하고 있다는 기독교의 신은 인권을 제한하는 아주 미개한 신으로 치부해버립니다.
두 부류의 인간
결국 레위기 18장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오직 두 종류로만 나눈다는 뜻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 기준이 사실상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나 그 계명의 실천 여부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뉩니다.
첫째로,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통치하는 것이 확실하고 자기는 그분이 만드신 고귀한 존재라고 확신하는 자입니다. 비록 죄의 본성을 타고 났어도 예수 십자가 은혜로 구원하여서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에부터 그분이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실증해보여 주셨음을 압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그분이 거룩하니 자신도 거룩하게 살기로 헌신하는 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이 땅은 우연히 물질에서 시작되어 물질로 끝나며 죽음으로 인생은 완전히 멸절되기에 자신과 내 가족들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안락하게 신나게 사는 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돈 벌어서 여유가 좀 생기면 가까운 치지나 친척에게 조금씩 나눠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은 선하지만 오직 이 땅의 풍요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첫째는 성적 범죄를 하나님 앞에 죽을죄라고 철저히 인식하는 자이고 둘째는 폭력으로 강압하지만 않고 상호 합의 하에 행한 성은 죄가 아니며 얼마든지 즐겨도 된다는 자입니다. 물론 나 자신이 그러기는 조금 찝찝해서 하지 않는다 해도 남들이 그러는 것을 구태여 간섭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간섭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본문 24절은 어떻게 말합니까?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성적범죄는 자신이 자신에게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라는 단어는 남과 아무 관계없이 혼자만의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차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런 죄를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정말로 살아계셔서 일분일초도 빠트리지 않고 눈동자같이 자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오직 그렇게 하는 것만이 삶을 살아가는 첫째, 아니 유일한 지표를 삼아서 그래도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토함을 당하지 말라.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더럽힌 자는 자기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성범죄로 땅을 더럽히면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낸다고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들은 성범죄가 죽을죄라는 개념이 전혀 없기에 기독교를 고리타분하다고 비방합니다. 또 그렇게 이 땅이 전부라고 인식하는 자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에 정의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인간끼리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성범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이 땅에 올바른 사회를 결코 건설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대는 인간 이성과 윤리가 최고급한 단계에 다다랐습니다. 삶이 아주 윤택해지고 편리해졌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인권과 자유는 한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선 역사상 최대한으로 신장되었습니다. 옛날 왕들이 누리지도 못하는 호사와 쾌락을 지금은 아무나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삶이 기쁘고 행복한지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도 통계는 없지만 인류 역사상 부정적인 응답률이 가장 높을 것입니다. 갈수록 삶이 피폐하고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할 것입니다. 결혼, 직장, 자녀에도 뭔가 확실한 만족과 기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살율도 역사상 최고이며 불행하게도 그 중에서 한국이 제일 높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폭락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다들 죽지 못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기독청년들과 개인적으로 상담을 많이 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불쌍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구조 문제도 있지만 전혀 소망이 없고 무엇보다 정신적 영적으로 너무나 암울하고 비참한 지경에 빠져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바는 인간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땅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도 뚜렷하지 않으니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이며 실제로 지금 세계도처에서 그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어쨌든 앞으로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 성경적으로 따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지금껏 인간끼리 노력하여 물질문명의 열매는 최첨단 최고조로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영적인 열매는 갈수록 참담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고 그 이유도 아주 간단합니다. 이 땅이 물질로 시작해서 물질로 끝난다고 믿기에 물질만 죽으라고 개발했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만이 이 땅의 주인이 되면 불완전하고 어리석고 죄에 찌들어 있고 삶과 죽음조차 통제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참 기쁨과 만족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인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는 방안은 정치도 도덕도 종교도 아닙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자원과 능력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준 깊은 뜻을 제대로 알고 그 사랑에 항복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나면서부터 연약하고 죄에 찌든 본성을 지녔습니다. 레위기 18장에 열거한 성적 범죄를 가끔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 그럴수록 정말로 우리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 당신의 무한한 긍휼로 용서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그렇게 그분의 자녀가 딘 신자에겐 성령님이 내주하여서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진정으로 겸손히 섬기면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물론 기쁨과 만족도 충만하게 해주십니다.
인류의 미래는 신자에게 달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예수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이 점차 퇴색 실종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러니까 간음 동성애를 기독교가 너무 그렇게까지 반대할 필요가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신자들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주체가 되면 이 땅의 장래는 어떻게 변할 것 같습니까? 오래 전 멜깁슨이 주연한 영화 매드맥스(Mad Max)처럼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가장 뛰어나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여 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진작시키려 애쓰는 미국 할리우드가 만든 영화입니다. 그들도 이대로 가다간 인류의 미래가 매드맥스처럼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이 어디 있어? 예수가 밥 먹여주느냐?”라고 반발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이 간음이나 동성애를 즐기는 일을 방해 밖에 못하는 미개한 훼방꾼이라고 욕합니다. 간음이나 동성애를 아주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의 또 다른 특성입니다. 또 그런 영화를 우리 자녀들이 보고 자랍니다. 이런 판국에 과연 인류의 장래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이, 아니 앞으로의 미래가 어느 때와 같습니까? 창세기 4장의 라멕의 시대로 돌아가는 셈입니다. 힘으로 남의 아내도 제 멋대로 빼앗는 것이 바로 매드맥스 영화의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인과 라멕의 후손과는 별개로 셋과 노아의 계열로 극히 소수이지만 당신의 남은 자들을 택해 당신을 진정으로 경외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신자입니다. 지금껏 드린 이야기가 불신자만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의 기독교와 교회와 신자들이 스스로 정말로 온전한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동성애나 간음이 분명히 하나님 앞에 큰 죄이길 압니다. 그 죄들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분명히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미개하고 무식하게 취급하고 비방하니까 어느 샌가 자꾸만 교회 안으로만 모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끼리만 교회에 모인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큰 박해를 받는 때가 올 것이며 지금부터도 이미 서서히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신앙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세에 믿음으로 이겨내는 자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내주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교회 밖의 땅들이 거민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안전지대에서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예수 십자가 사랑을 몰라서 흑암의 세력에 농간 당하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몰라서 신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자는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럼 우리가 믿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교회만 사랑하고 교회 밖은 외면 무시하는 냉정하고 잔인한 신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어쩌면 지금 예수님 혼자서 교회 밖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믿음이란 물질이 궁핍해져 아무리 불편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정신적 영적인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히 바울처럼 예수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됩니다. 세상 밖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지금 곳곳에 땅의 거민을 토해내는 징후들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죄로 타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교회 밖의 성벽이 무너지는 곳을 발견해서 소리치는 파수꾼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무너지면 세상도 멸망합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셔도 그렇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만 잘 믿고 있으면 어차피 금방 망하게 됩니다. 지금 신자들이 줄고 있습니다. 우리의 2세 3세들이 교회 출석이 엄청나게 급속히 줄고 있지 있습니까?
신자는 세상 앞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서야합니다. 가정에서부터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 주변에서부터 누룩처럼 서서히 번지게 해야 합니다. 겨우 개인적으로 안락 형통하는 문제에 붙들려 끙끙거리고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스스로 우리는 물론 땅을 더럽혀선 안 됩니다.
10/21/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