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이웃사랑을 잘할 수 있습니까? 

 

[질문]

 

요즘 들어 삶이 너무 허무합니다.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안 들고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때문도 있겠지만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니 자연히 가까운 동료는 한 명도 없고 동료에 대한 갈망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 인간적인 예술에 깊이 심취하여 원래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성격이 과도하게 표현되는 것 같네요. 예술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데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니 인생을 사는 의미가 사라져 허무해지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니 죄를 짓는 것 같아 고민이 많이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이웃 사랑은 아가페 사랑.

 

예수님은 최고 큰 율법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22:34-40)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마음으로 원하여서 열심히 노력해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어서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질문자님처럼 신자로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계명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 없거나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고 여러 모로 여유가 없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에 대해 부족하게 혹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니 당연히 마음은 소원이나 실천하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평소 서로 친밀하게 지내며 여러모로 잘 맞거나 최소한 부담을 주지 않는 이웃은 그런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주님은 그런 이웃에 대한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대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실천할 수 있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헬라어 단어 넷의 의미부터 살펴봅시다. 남녀 간의 육신적 사랑은 에로스, 가족 간의 사랑은 스테르고, 친구 사이의 우정은 필레오, 그리고 예수님이 베푸신 신적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첫 세 가지 남녀, 가족, 친구끼리의 사랑은 누구나 믿음과 상관없이 큰 어려움 없이 자연스레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 넷 중에 어디에 해당됩니까? 주님이 육신으로 계셨던 공사역 기간 중에 유대인 형제들에게 베푼 모습이 이웃 사랑의 모범이었습니다. 결국 이웃에게는 주님처럼 아가페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감히 시도도 못할 사랑입니다. 주님은 또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불구자, 불치병자, 세리, 창녀 등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만나 한 결 같이 순전한 사랑으로 상담 치유 기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홈리스만 만나도 가까이 가기도 썩 내키지 않습니다. 그냥 깡통에 동전 몇 잎 던져주고는 황급히 되돌아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 적선(積善) 밖에 안 된다는 점도 잘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이 이웃 사랑을 이성간의 사랑이나 최소한 가족이나 친구의 사랑과 모든 면에서 같은 수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감정에 친밀도가 아주 커야 하고, 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이 따라야하고, 아무리 자기가 손해 보거나 희생해도 전혀 아깝지 않고, 아무 주저함 없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연스레 행하되, 행함 중에도 마음의 충만함이 넘치고, 결과도 서로에게 만족과 기쁨이 안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푼 아가페 사랑도 사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예수님의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예쁜 측면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기에 미움과 저주를 안 받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주님에게 강렬한 기쁨, 즐거움, 만족 같은 감정의 충만함이 수반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신이 택한 제자들과 또 소외된 불쌍한 사람들과 포도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며 즐겁게 교제했습니다. 제자들과는 삼년 간 합숙하며 동고동락했습니다. 감정적으로 기쁘고도 뜨겁게 사랑했던 측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한 수제자 베드로를 꾸중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인간을 향한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친구 나사로가 죽어 묻혀 있는 무덤 앞에서 주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흐느껴 우셨습니다.(요11:33-35) 이제 곧바로 소생시켜서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재회할 것을 아니까 구태여 통분히 여기거나 우실 이유가 없음에도 그랬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의 저주 아래에서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노예처럼 묶여 있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했던 것입니다. 또 인간의 영혼을 그렇게 타락시킨 사탄은 물론 지금 그 하수인이 되어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유대종교의 거짓 목자들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은 아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랑(love)이라기보다는 자비와 긍휼(mercy)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기쁘고 뜨거운 감정으로 그것도 기꺼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들어선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감히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도 주님처럼 죄에 노예가 되어 있거나 아직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웃의 영혼이 정마로 하염없이 불쌍해져야만 비로소 이웃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준비가 겨우 된 것입니다.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해결되어야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내가 정말 최고로 불쌍한가?

 

단순히 이웃만 불쌍히 여기면 영적인 적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자신도 같거나 더 불쌍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자기가 이웃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섬기다가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섬김에 대한 온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를 비난하거나 섭섭해 하며 섬김을 중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시나 이 땅에 연약하고 비천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바꿔 말해 죄인의 자리에까지 당신을 낮추었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여기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도덕적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차원으로만 섬기게 됩니다. 같은 교회 교인이니까, 매일 마주치는 이웃이니까, 내가 교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이니까, 심지어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큼 남보다 의로우니까 섬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으나 아무 공로 자격 없이 주님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부터 썩고 또 썩어 단 한 치의 의로운 면이 없었음을 절감한 것입니다. 자신은 천하죄인 중의 괴수로 세상에 자기보다 더 죄 많은 자는 없다고 성령의 간섭으로 고백했던 자입니다.

 

신자의 이웃사랑은 비유컨대 사형수가 아무 이유 없이 사면되었기에 함께 감방에서 자기보다 더 가벼운 죄를 지었음에도 사형수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대한 진정한 안타까움을 갖는 것입니다. 말기 암에서 신음하는 자라야 현재 같은 암을 앓고 있는 자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서 어떤 이해타산, 교만, 자존심, 체면, 자기 자랑,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나 의로움 등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진정으로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마음을 갖고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상대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준다는 인식이 자연스레 생겨야 만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웃 사랑에 내 쪽에 뜨겁고 기쁘고 신나는 감정이 생겨야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상대를 향한 진실한 긍휼함, 안타까움, 애통함 등을 갖고 상대의 고통에 동참하여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상대의 정신적 짐을 덜어주고 그래서 상대와 마음과 나의 마음이 교통하여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하지 말라.

 

“예술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데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술은 좋고 기쁘고 신나는 감정으로 또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져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술을 불쌍하고 애처로워서 사랑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이웃은 반대로 애처롭고 불쌍해서 섬기는 것이지 예쁘고 신나고 가슴이 뜨거워져서 섬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상대라는 인격체, 그 사람 자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 존재 전부가 하나님 앞에서 나와 똑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한 죄인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도 모든 인생에 계속해서 온갖 문제와 고난이 따르기에 다들 불쌍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실제로 자기만의 큰 문제가 없는 인생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 자체를 섬기라는 것은 그 사람의 특정한 일부 측면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말과 행동 뿐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태도 성격 기질 등에도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인정하여 다르게 대하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나머지 나와 같은 점에선 당연히 수준 차이가 벌어질 수 있고 또 다르게 대하는 것과 진정으로 불쌍해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전부가 너무 불쌍해져서 그 사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나보다 현실적으로 조건과 상태가 뛰어나도 예수 십자가 앞에서 벌거벗은 영혼과 영혼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 받았다는 즉,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의미도 우리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외적으로 그것도 부분적으로 따져서 도저히 자녀가 될 수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자녀로 받아들여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定意)

 

당연히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 사랑도 한 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람에 대해 참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바울이 열거한 사랑의 특성 전부는 참아주는 것과 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상기 구절에서 상대를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의미는 사실상 없습니다. 유일하게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진리 안에서 영적 교제를 나눔으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이웃 사랑은 현실적인 섬김도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상대를 특별히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예수 구원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병을 고치러 몰려오는 자들을 물리치고 복음부터 전했습니다.(막1:35-38)

 

결론을 맺자면 상대를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상대를 받아들일지 아니 할지부터 그리고 그 사람과 끝까지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아닐지를 먼저 결정하십시오. 그후에 상기에 인용한 고린도전서 사랑에 관한 설명에다 사랑하려는 상대의 이름을 대입해서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행한 마지막 배신이나 그전의 불신앙적인 행위들은 전여 염두에 두지 않고 그라는 존재 전체를 끝까지 용납해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한 사랑이 전부 그랬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끝까지 그 사람을 참아주고 용납하십시오. 물론 그 전에 그 사람의 영혼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한 시라도 필요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누군가 전도를 먹을 것을 발견한 거지가 동료 거지에게 먹을 것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의 이웃 사랑이 그러합니다. 똑같이 굶어죽어 가는데 다 같이 먹고도 남을 식량이 쌓여있는 곳을 즉, 예수님의 사랑을 정확히는 긍휼을 발견했는데 어찌 초대하지 않고 그냥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 실력, 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면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주님의 긍휼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나부터 너무나 불쌍하기에 주님의 긍휼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절감했기에 상대 또한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것이 주님의 긍휼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상대도 나만큼 불쌍해져야 비로소 진정한 섬김이 가능해집니다. 이 길 외에 신자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11/19/2018 


ff7777777

2018.11.20 21:49:14
*.170.222.1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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