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질문]

 

저는 갑자기 미치도록 하나님이 생각나서 당장 교회로 달려가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교회 다닌 지 이제 1년이 갓 넘었는데 아직 믿음도 많이 부족하며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으며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눈물까지 뚝뚝 흐르며 하나님이 미치도록 그리워지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순수함을 되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그분이 심어놓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에 대한 저의 감정적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답변]

 

진정으로 기뻐할 내용은?

 

체스트톤이라는 신학자가 “인간은 기생집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술 마시고 향락을 즐기면서도 기도하고 말씀 본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존재인지라 무의식중에라도 영원하신 궁극적 절대자를 찾고 또 그분께 돌아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론적인 갈망이 충족되지 않으니까 기생집에 가서도 그 허무함을 채우려 드는 것인데 엄밀히 따지면 그런 방탕함조차도 하나님을 갈구하는 몸부림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그분이 심어 놓은 본성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질문자님처럼 눈물이 흐르고 기쁨으로 그분을 경배하려는 감정은 완전히 훼손 파괴되었습니다. 그분을 찾아서 경배하려는 소원조차 상실했습니다. 모두가 원죄 하에 태어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은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 본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깨닫는 자도 두려워하는 자도 없어졌습니다.(롬3:9-18)

 

다른 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분리가 이뤄졌습니다. 그분과의 분리로 인해 자기 자신과도 분리가 되어서 까닭모를 채워지지 않는 내적 갈증은 물론 죄책감 수치심 공포심이 생깁니다. 그 결과로 다른 사람과도 분리되어서 시기 질투 경쟁 분쟁 분노 저주하며 윤리적인 죄까지 짓게 된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일반인의 타락된 영적 실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질문자처럼 갑자기 미치도록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고 그분을 생각하면 눈물까지 난다면 분명히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점검해볼 사항은 단순히 인간 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실존하고 그분이 나의 모든 현실 삶에 복을 주셨기에 감사한다면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심지어 불신자도 힘들면 하나님을 찾으며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달라고 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탄의 미혹 아래 있는 영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그분과 화해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한 죄인의 영에 간섭하여야만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중생의 씻음과 진정한 회심(回心)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거역해왔던 삶이 실패를 넘어 사망이었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그분과 분리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오직 더러운 죄악 덩어리였음을 절감하고 자기 전부를 하나님께 벌거벗겨 내어드리는 진정한 회심이 일어납니다. 그런 후에야 이전에 지었던 타인과의 분리 즉, 모든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悔改)도 따릅니다.

 

따라서 신자가 진정으로 경배하고 찬양할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현실 삶을 보장해주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를 내 대신에 십자가에 죽이고 그 생명과 맞바꾸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지금도 거룩하게 자라게 해주시는 그 사랑을 찬양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이전에 그분이 나를 택하여서 구원을 베풀고 이제 나를 당신의 역사에 참여시켜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벅차야 합니다.

 

이런 기쁨은 신자가 자기 지정의에 따라 스스로 생성시킨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한 죄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시킨 후에 그 영혼에 좌정하여서 내주한 결과입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예수가 주는 것 없이 너무 싫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너무 좋아지는데 바로 성령이 역사한 까닭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내 대신 달리신 예수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면서 그와 동시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 처음 예수 믿은 신자의 감정 상태라는 뜻입니다.

 

수시로 감정이 메마른 까닭은?

 

그런데 문제는 질문하신 경우처럼 그런 감정이 한 결 같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차갑게 식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크게 둘입니다. 첫째는 자기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죄의 본성과, 둘째는 자기 밖의 현실 고난과 세상 죄악과 사탄의 훼방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를 믿었다고 당장 모든 죄와 멀리할 만큼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속에 남은 죄의 본성이 죄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추악한 행동으로 쉽게 옮기는 성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다시 말하지만 자기를 하나님보다 위에, 아니 대신하여 높임으로써 그분과 분리가 발생한 것입니다. 또 그 분리로 인해 세상 안에서도 윤리적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은 후에 신자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은 자꾸만 자기를 앞장세우려는 습성입니다. 하나님과 분리하려 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이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반대편으로 가려는 관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서 미치도록 기쁘고 당장 교회로 달려가 예배를 드리고 싶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신자 외부의 현실적 고난이 너무 심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정상의 기쁨은 아무래도 식어집니다. 그러나 고난이 심할수록 오히려 그분께 기도 예배하여 그 고난을 빨리 해결 받으려 합니다. 현실적 고난은 이런 감정상 기복의 원인으로 깊이 논의할 필요가 사실상 없다는 뜻입니다. 고난 중에 간절히 기도하여서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면 더욱 기쁘고 믿음도 성숙됩니다. 하나님 그분이 신자를 연단하여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반면에 세상의 죄악과 사탄의 훼방은 아주 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그분의 권능과 은총이 부재하는 세상은 향락 재물 권력 명예 등을 서로 많이 먼저 차지하려 싸우는 난장판입니다. 신자도 종종 사람들 앞에 자기를 내세우려는 본성이 되살아나 세상 유혹에 넘어집니다. 하나님을 찾다가도 다시 세상으로 고개를 돌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생깁니다.

 

그럼에도 신자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분명한 영적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심하여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해서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육신은 신체(body)가 아니라 완전히 없애지 못한 자기를 앞세우려는 옛 습성, 하나님을 멀리할 때에 성령의 거룩하고 신령한 역사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임합니다. 영적인 눌림이 생기거나.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자 대신 간구해주며, 심지어 필요하면 강권적으로라도 신자를 다시 주님 앞에 엎드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나갈수록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일이 발생하는 빈도수나, 세기나, 그 간격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고 싶어지고 주님께 기도도 더 자주 하게 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이유 없이 예수님이 좋아졌지만 성경 말씀을 알아나가면서 주님의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으며 나에게 지금도 어떻게 역사하고 있고 앞으로 나를 통한 구원의 완성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성경의 진리를 조금씩 알아나가면 감정의 기복도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처음 믿었을 때는 가슴이 앞섰다면 이제 지성과 이성을 동원해서 주님의 권능 은총 사랑의 깊이 넓이 높이 무게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반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각을 헤아리며 그분 말씀의 진의를 분별하여서 비록 세상에선 핍박과 멸시를 당하며 외롭고 고달프지만 그분만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때로 후퇴할지라도, 그 빈도와 세기가 현저히 감소하므로, 자기도 나중에는 놀랄 정도로 그리스도와 닮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소한 불신자 시절의 자기와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두 가지 염려되는 사항은?

 

다시 말하지만 질문자님이 갑자기 하나님이 너무 좋다가도 금방 식어진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내면의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나 외부의 영적 훼방 때문에 모든 신자가 일상적으로 겪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염려되는 사항이 있습니다. 믿은 지 1년 밖에 안 되는데 본인이 스스로 염려하여 질문할 정도로 감정상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일 년밖에 안 된 기간에는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대체로 열정 감격 충성 헌신이 넘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기쁨의 눈물이 흐릅니다. 교회에 붙어서 살고 싶고 말씀 기도 찬양 예배에 더욱 정진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 내지 자극이 들어가면 가장 먼저 감정이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나아가 헛되고 헛되다 못해 죽음의 심판 아래 있던 자기가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은 세상 어느 것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기에 그런 충만한 감정이야말로 올바른 믿음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자기 의지로 기독교 교리에 수긍하여서 믿어보기로 결심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이 아닌 메마르고 습관적인 교회생활만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감정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감정이란 외부 자극에 대한 일차적이고도 자연스런 반응이므로 그 자극이 있을 때는 쉽게 타오르지만 자극이 없어지면 쉽게 식어버립니다. 감정의 효력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충만한 감정이 생겼다면 더더욱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적용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주하신 성령이 신앙생활을 갓 시작한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부어주고 성경을 배우는 시간과 기회로 인도하며 그 배운 바를 조금씩 자기 삶에 실현하도록 해주십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배우고 나면 감정적으로 심한 기복은 사라지고 차분히 또 꾸준히 주님과 말씀을 통한 교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믿음이 성숙되어지는 첫 단계입니다. 바울 서신서는 매번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길 바란다는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죄에서 구원 받은 예수 십자가의 은혜 안에 붙잡혀 있어야 하고 그럼 그 영혼도 항상 평온한 자유를 누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 년 안에 스스로 이상할 정도로 감정상의 기복이 심한 데는 신앙을 잘못 오해하고 있거나 실제로 심리적인 이상이 있거나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싶습니다. 첫째는 감정이 뜨거워져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며 지금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내 믿음도 좋거나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정적 충만이 따르지 않으면 금방 실망에 빠지고 심지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는 은사나 체험에 신앙의 방점을 두는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또 아직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배워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원인이 어디 있던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만 해결됩니다. 구원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이 실제로 자신이 완전히 뒤집어졌던 체험적 진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 중생 체험에 대한 의미와 앞으로 어떻게 내 삶에 적용되어질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정서적으로 너무 불안할 경우에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이는 중생이나 구원 여부와 관계없으며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드린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두뇌 결함으로 인해 정서적인 이상 내지 혼란이 생겼다면 자신의 의지로도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고 성실하고 온유한 신자라도 외부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가끔 감정 통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 기복의 세기, 빈도, 간격이 걱정될 정도로 과도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잘 판단해보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감정적 기복이 너무 심하다든지, 오래 동안 종교적 생각에만 강박적으로 집중하다가 금방 정반대로 너무 세속적으로 바뀐다든지, 등은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심리 전문가와 상담해보셔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먼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하나님에 대한 감정상의 기복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정진하면 처음 믿었을 때의 그런 감격은 없으나 어지간한 외부 시험과 삶의 고충에도 심령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더욱 말씀을 파고 들며 기도해야 합니다. 믿은 지 일 년도 안 되어 자기가 생각해도 걱정될 정도라면 믿음의 출발이 올바르게 된 것이지, 아니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지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4/3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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