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가?

조회 수 103 추천 수 0 2019.06.10 17:03:22

(민14:13-19)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가?

구약성경강해 (27) / 민수기강해(17)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7)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민14:13-19)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

 

믿음이라곤 아예 없다시피 했던 열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면서 그들의 군대는 물론 모든 족속들이 슈퍼 거인이라는 거짓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움에 빠트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선동에 넘어가 당신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백성을 전염병으로 진멸하고 모세로 크고 강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선포했습니다.(12절)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그 심판 예고에 대해 모세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상 최대의 거역에 대해 사상 최대의 형벌로 심판하려는 참에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은혜를 베푸는 근거가 신자의 순전한 믿음과 기도 때문이 아니라는 지난주의 제 설교가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표면적 결과만 그렇게 보일뿐 내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꾼 것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 모세의 기도에서 따져볼 과제는 둘입니다. 첫째 “내용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와, 둘째 “어쨌든 그런 하나님의 표면적인 변화라도 얻으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입니다.

 

첫째로 개인이든 단체든 각기 추구하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뿐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세부적이고도 단기적인 목표는 여럿일 수 있습니다. 최후에 도착할 종착지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 종착지란 개인과 단체가 생성되었고 존립하게 만드는 가치와 의미인데 그것이 바뀌면 개인이든 단체든 사실상 죽어 없어지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로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백성들을 진멸할지라도 여전히 모세의 후손을 통해서 그 계획을 달성하겠다고 했습니다.(12절) 이스라엘을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뜻과 계획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최종 목적지가 너무나 좋으므로 반드시 그곳에 도달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계획을 포기도 변경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날 모세의 후손은 아무 공로 없음에도 그 복을 누리게 됩니다. 출애굽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공과 의는 단 하나도 반영되지 않고 오직 영원히 불변한 하나님의 의지만 작용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세의 후손이라도 지금 심판 받을 백성들과 같은 잘못을 범하면 그 복을 받지 못합니다. 역으로 따지면 당신만 따라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지금 백성들의 죄만 사해달라고 기도했지 가나안 정복 계획을 취소 내지 변경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잘 살펴보면 그 계획은 강력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기도로 하나님의 최종 목표와 계획에 수정된 사항은 없습니다. 그 계획을 달성할 사람만 모세의 후손으로 제한되었다가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로 가나안에 진입시키겠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모세 후손으로 그러겠다고 계획을 바꾸었다가 모세의 기도로 다시 원래 계획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럼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이 수정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원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세부적인 단기 계획만 잠시 바뀌었다가 취소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꾸짖는(?) 기도

 

둘째로 살필 과제는 모세가 과연 어떻게 기도했기에 하나님이 세부적인 계획이라도 바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모세의 기도 내용이 굉장히 저돌적이다 못해 불경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도무지 하나님답지 않은 얼토당토 않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하나님을 꾸중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여호와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능이 없어서 광야에서 죽였다고 열방들이 비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5,16절) 모세가 기도한 내용(13-16절)을 이해하기 쉽도록 시쳇말로 바꿔보겠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해내고 생존 불가능한 광야에서도 온갖 이적으로 보호하여 이 자리에까지 인도해놓고 이제 와서 다 죽인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헛수고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 동안 뭐 하러 그 짓거리를 했습니까? 애굽에서 열 재앙 때나 광야의 이적들로 인해 애굽은 물론 열방들이 이스라엘 신의 능력을 최고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신들은 감히 대적할 수 없다고 지레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이 여호와도 영 별 볼일 없는 신이라고 조롱 멸시할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 정신 차리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체면에 금가는 일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한 것입니다. 열방들 사이에 지금 최고조로 올라가 있는 당신의 영광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이백만 명을 한 명을 죽이듯이 단번에 전염병으로 진멸한다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능력입니다. 애굽과 여러 족속들이 여호와에 대해 이미 품고 있는 두려움이 더욱 크질 것입니다. 당신께 거역하는 죄를 범하면 가차 없이 심판하는 정말로 무서운 신이라고 판단할 것인데 그럼 당신의 이름은 더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 계획도 전혀 변경 취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견고해졌습니다.

 

그럼 모세가 기도하는 내용이 사실상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핀트가 어긋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예언과 모세의 기도의 초점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선 가나안 정복계획을 이 백성으로는 이루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에 맞춰 비록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나 이 백성을 용서하여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뤄달라고 한 것입니다.

 

모세의 후손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면 앞으로 수백 년이 더 걸려야 합니다. 몇 명 안 되는 후손들을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애굽이나 이방 족속의 위협에서 지켜내려면 이번에는 바벨론의 노예로 수백 년을 고생시켜야할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출애굽 시킨 의미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모세의 바로 궁정의 40년과 미디안 양치기 40년의 연단도 헛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목숨을 걸고 충성한 아론 여호수아 갈렙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이 여호와를 조롱하는 근거

 

나아가 애굽의 열 재앙으로 우상 신들의 허상을 드러낸 이적은 완전히 허사가 되고 잊혀져버립니다. 특별히 마지막 열 번째 재앙으로 죽은 애굽의 그 수많은 장자들은 정말로 개죽음을 한 꼴이 됩니다. 따라서 모세는 지금껏 행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한 번 재미삼아 해본 것밖에 더 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지 말라는 뜻인 셈입니다.

 

알다시피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능력의 다툼이라고 여겼습니다. 애굽이나 열방은 여호와가 전쟁에서 가장 능한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을 80노인 한 명이 나서서 열 번 싸워 열 번 다 무참하게 이겼고, 도무지 살아나올 수 없는 광야에서도 만나 메추라기 반석의 생수로 생생하게 살아 지금 자기들 앞에 섰습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들이 애굽의 모든 신들이 패배했다면 여호와 앞에 이길 신들 즉, 나라는 없겠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정작 가나안 족속 앞에서 물러서면 대규모 전쟁에는 능한 신이 아니라고 오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여호와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가나안의 슈퍼 거인 족속 앞에는 힘 한 번 못 쓰는구나라고 조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로 그런 이유로 심판하겠다고 하면서 여호와 본인이 똑같이 그러면 완전히 자가당착이라고 다그친 셈입니다.

 

주목할 것은 모세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렇게 따진 것이 아닙니다. 신들의 능력만 따지는 이방인들은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더러 불신자들이 착각 내지 오해할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신들의 능력만 따진다는 것은 자기들에게 좋은 일을 일으켜 주는 신만 신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능력을 받기 위해서 인간이 치성과 제물을 많이 바쳐야 합니다. 또 바치는 만큼 즉, 잘 믿는 만큼 비례해서 그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 됩니다. 역으로 그러지 못하면 일일이 그에 맞추어 벌을 주는 신입니다.

 

모세는 지금 여호와는 그런 신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지 않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 어느 것과도 다른 하나님만의 거룩하심을 내보이시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모든 우상은 그 신에게서 능력만 받아서 현실 고난을 벗어나거나 위로를 받으려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허상이라 아예 실존조차 않는 신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다 통치하시는 유일한 분이지 않습니까? 이 땅 전부를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주관하시는 분임을 만천하가 똑똑히 보게 하십시오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전례대로 따르십시오.

 

모세의 기도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이 또 있습니다. 무작정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했습니다. 용서를 하되 당신의 이름이 손상되지 않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용서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백성 전부를 다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했습니다.

 

바로 17-18절이 그 내용입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처음에 “이미 말씀하신대로”라고 시작하여서 마지막 부분에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모세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전수 받을 때에 우상을 새겨 절하며 섬기지 말라는 둘째 계명을 주실 때에 함께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께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므로 우상숭배 자는 반드시 삼사 대까지 벌하신다고 했습니다.(출20:5) 이 말씀으로 그쳤으면 언뜻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까지 물리는 연좌제의 즉, 심판만 즐기는 무서운 하나님이 될 뻔 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어서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고 덧붙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그 후손 천대까지 은혜 받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천 대의 은혜와 삼사 대의 형벌이라고 말한 것은 은혜와 형벌 둘 중에 은혜가 형벌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뜻을 나타내려는 과장 강조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한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자가 광대하지만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으니 모세도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꼭 벌 받을 자는 당연히 벌 받아야 하지만 거짓 선동에 넘어가 두려움에 휩싸인 자들에게는 인자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로선 이런 심판 예고를 두 번째로 듣습니다. 시내 산에 율법을 전수 받으러 가있는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로 강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심판을 선언했습니다.(출32:10) 이때도 모세는 본문처럼 그러면 출애굽 자체가 헛것이 되고 애굽 사람이 하나님을 조롱할 수 있으므로 제발 하나님의 이름에 금이 가는 심판은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출32:11-13)

 

여호와도 모세의 그 기도에 맞추어서 응답했습니다. 당신의 인자가 심판보다 앞서나 벌 받을 자가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법은 없다고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대로 심판을 행했습니다. 금송아지 배역 사건에 직접 능동적으로 가담한 자 삼천 명만 심판하고 나머지는 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본문 19절에서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법률 용어로 표현하면 이미 판결을 내렸던 전례대로 판결하라는 청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만 행해주십시오.”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악의를 갖고 거짓말로 선동한 열 명의 정탐꾼만 재앙으로 죽이고 나머지 백성들의 생명은 살려주었습니다.(민14:37)

 

금송아지 사건에서나 본 가데스 바네야의 거역 사건에서나 모세가 하나님에게 기도한 내용은 동일했고 단순했습니다. 하나님더러 반드시 하나님다우심을 드러내 보이라는 간구였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영광에 금가는 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울며불며 끈질기게 기도하여서 그분의 뜻을 바꾸려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고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정복 계획을 취소 수정해달라고 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잘못이 없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다시 수백 년 뒤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 출애굽 때에 죽은 애굽 장자들은 하나님의 심심풀이 노리개 감밖에 안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상기시켰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만 해달라고 했으니 당연히 그분의 궁극적 계획과 뜻을 취소 혹은 변경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이 두 번의 모세의 기도와 여호와가 응답하는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마치 모세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이 그대로 응해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따져서 당신께서 응답해주지 않으면 안 될 내용만을 갖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잘못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이제 모세의 기도에 비추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분의 뜻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천일 작정 새벽기도나, 열흘 금식 기도나, 응답과 교환하여 뭔가 큰 것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면 응답이 잘 되고 하나님의 뜻마저 바꿀 수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만약 기도의 회수, 금식 작정 서원 같은 기도의 형식을 취하면 바로 응답이 되고 하나님 뜻마저 바꿀 수 있다면 누가 그러지 않을 바보가 있습니까? 신자 중에 형통하지 않으면 그만한 바보도 없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무병장수하고 최고로 출세 형통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반대이지 않습니까?

 

이런 가르침은 치성을 바치는 만큼 비례해서 복을 주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이방 우상 종교의 가르침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기도의 형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형식을 취하는 기도들이 종종 등장하는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 헌신 충성하고 있는 종들이 자신들의 순전하고 간절한 믿음을 필연적으로 그런 식으로 표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서 응답을 잘 받아 보려고 시도나 의도를 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물론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응답을 잘 받는 데에만 관심을 두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말씀만 찾습니다. 그것도 그 의미도 정확히 모르고 마치 주문 외우듯이 기도 중에 그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말하면서 그대로 해달라고 떼를 씁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말씀입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이는 영적 진리인 것은 틀림없으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행한 것은 바울이었지 하나님이 바울 대신에 모든 것을 행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자기가 기도만 하면 그대로 하나님이 다 해주는 것으로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또는 바울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모두 받았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모두 주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 될 것처럼 설칩니다. 아담의 원죄에서 하나도 진전된 점이 없습니다.

 

신자들이 이 한 구절의 문자적 의미에만 그것도 잘못된 해석에 묶여있습니다. 앞뒤 문맥에서의 뜻은 전혀 안중에도 없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든 행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궁핍에 처하게 하든 풍요하게 주시든 자족했다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뜻이 있다면 신자로 가난과 핍박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모든 능력을 주시되 오직 풍요하게만 해달라고 합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자기를 어떤 여건에 처하게 하던 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궁핍 풍요가 그 소명을 성취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강권적으로 은혜를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진 이후로 지금껏 믿음으로 씨름하고 충성한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입니다.

 

실제로 받은 약속이 있어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대로 행하라고 촉구하듯이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의 분명한 체험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많되 벌할 자는 반드시 벌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십계명의 둘째 계명인 우상숭배 금지에 나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이며(출20:13), 이어서 출21:12에선 살인자는 반드시 쳐 죽이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이 동일한 장소에서 짧은 시간 안에 연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은 모세가 누구입니까? 바로 살인죄를 범한 자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받을 때에 머리에 해머로 두들겨 맞는 것 같은 쇼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율법을 받고 있는 자기부터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지금 자기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난 당신의 일을 맡기셨으니 그 인자가 얼마나 광대한지 몸으로 절감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온 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 사십 년을 목동으로 보낸 이유는 애굽으로 돌아가면 잡혀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목숨만 유지하려 도피 생활만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동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어도 조금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자 생명을 살해한 그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또 뉘우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또 빌었을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여호와가 임재했을 때도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살인죄만으로도 이젠 틀림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죽이지 않고 출애굽의 소명을 맡겼습니다. 정말로 믿기지 않는 인자인지라 과연 자기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다섯 번이나 여호와께 묻고 또 물으며 따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당신은 노하기를 더디한다고 당신께서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지난 80년간 애굽과 미디안의 우상 신들의 행태에 즉, 잘못하면 일일이 벌 받는 모습에 아주 익숙해 있던 모세인지라 여호와의 인자가 다른 이방신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새삼 절감했을 것입니다.

 

본문 19절에서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용서해 달라고 했는데 그 간구가 또 달리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 같은 살인자도 사하시고 이 큰일을 맡기셨지 않습니까? 저들은 살인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 저를 용서하신 전례에 따라 그들도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였습니다.

 

그것도 무조건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저처럼 사십 년이라는 회개 자숙의 기회라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세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그대로 응답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참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사십년 방황하다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자기가 받은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이 지난 신앙 여정 가운데 그대로 실현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약속은 살아있는 진리, 아니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생명을 걸고서 당당하게 따지듯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극히 일부라도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최고 약점

 

이런 원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자 개인과 그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계획도 절대 변하지 않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선 모든 신자 개인에 대해선 부활 승리의 영광입니다. 어느 신자에게나 천국이 최종 도착지입니다. 그곳으로 걸어가야 할 이 땅의 삶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까지 자라는 것이 어렵다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처럼 충성 순종하는 종으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도 하나뿐입니다. 당신의 택한 믿음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변화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만을 주인으로 삼아 섬기는 세상과 전혀 다른 공동체를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지금 가나안에 입경시켜서 행하시려는 것과 동일하게 말입니다.

 

이 계획을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 변경 타협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현실적으로 궁핍 혹은 풍부에 처하든, 아무리 기도해도 고난이 해결되지 않고 새로운 고난이 겹치든, 그분에 대한 믿음에 기복이 생겨서 영적인 갈등과 고뇌를 하던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도리어 당신께서 신자를 최종 목적지로 데려 가기 위한 그분의 세밀한 간섭입니다. 정작 신자가 기도로 바꿔야 할 것은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에 내가 기꺼이 동참할 수 있도록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 합니다.

 

만약 신자와 그 공동체가 그분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방향이 어긋나면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때로는 당신의 백성을 징계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혹은 그 전에 신자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본문처럼 징계를 유보시켜 주기도 합니다. 원래 고난이나 강권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거나 신자의 기도로 징계를 유보시켜주는 것도 하나님이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눈에 당신의 뜻이 일부분이나마 수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몇 번 예를 들었지만 이 원리를 가장 잘 반영하기에 다시 들겠습니다. 아프리카를 최초로 전부 탐험하며 선교했던 리빙스턴은 사자에게 한 쪽 팔이 물려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소명을 내가 완수할 때까지는 그분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므로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immortal)고 담대히 선언하며 자신의 사역을 끝까지 다 감당했습니다.

 

신자가 이처럼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궁극적인 계획을 확신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떤 큰 고난이 닥쳐도 염려 불안해하지 않고 세상의 비방 멸시 천대 핍박도 담대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분의 못 자국이 난 손바닥과 창으로 찔린 허리도 만져 보았습니다. 신자가 도달할 최후의 종착지를 미리 가본 셈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에, 특별히 우상에게 절할 수는 결코 없었으며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일에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처음 금송아지 배역사건 때에는 자기를 하늘의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즉, 지옥에 보내더라도 이 백성은 용서해달라고 탄원했습니다.(출32:32) 이번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부터 차라리 자기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백성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절대로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담보로 간구했고 두 번째는 백성들에게 그랬습니다.

 

본문의 모세의 기도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최고 약점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만 행하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들어줄 수 없는, 반드시 들어주어야만 하는 내용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람으로 근심과 고생케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귀한 그분의 인자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자들은 본문처럼 혹시라도 잘못을 범하면 바로 회개하며 그 인자에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도 모세, 바울, 리빙스턴처럼 내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달라고 매달릴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아직 그런 약속을 받은 적이 없어도 좋습니다. 어쨌든 하나님 뜻대로만 행하라고, 죽이면 죽이라고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오직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비로소 부분적이나마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는 놀라운 인자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궤도수정조차 우리의 최종목적지인 천국으로 당신께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서 궤도를 이탈하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6/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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