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웃픈 대제사장의 심문
마태복음강해 (244)



http://youtu.be/g-aGmG0H8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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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26:60-68)


사형에 해당하는 증거

재판은 반드시 객관적 중립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절차상 하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 결격사항이 제거된 후라야 재판을 속개할 수 있다.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재판에는 절차상 하자사항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세 율법을 대놓고 위반한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오밤중에 졸속적으로 진행한 까닭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59절)

그럼 아무리 엉터리 재판이라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제시해야 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일반적인 민법과 형법 어떤 것에도 저촉될 만한 잘못은 단 하나도 범하지 않았다. 유대 공회가 보는 관점에선 종교사상 범인이기에 꼬투리도 그런 방면에서 찾아야 했다.

주님의 공사역 기간 내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논쟁을 걸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에서 생명이 끊어져야 한다고 즉,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율법(출31:14)은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이 안식일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율법의 문자적 준행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율법의 근본 뜻이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너희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가축을 살리지 않느냐고, 그럼 사람은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느냐 따지자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되었다.

주님은 또 매 안식일마다 회당이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모범을 보였다. 결국 공회원들은 안식일 계명 위반으로 주님의 옭아매려는 모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자기들 자존심만 잔뜩 상해서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결의만 더 굳어졌다.

이제 남은 사형 죄목인 신성모독에 관한 증거를 반드시 제시해야 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했다고 한다.(60절) 고소한 죄목이 사형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이 사람은 율법을 어긴 죄인과 교제했다고 고소해도 유대사회에서 추방하면 그만이지 사형은 아니다. 또 부정한 창기나 문둥병자와 접촉했다는 증언도 정결례를 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케 된다.  

거짓 증인들은 어쨌든 대제사장의 환심을 사서 이득을 보겠다는 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어쩌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거나 가나 혼인잔치에서 새 포도주를 맛보았거나 오병이어 기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서 어제의 동지가 일순간에 오늘의 적으로 바뀌며, 생명의 은인마저 단칼에 무 자르듯이 배반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란 존재다. 이 증인들의, 아니 모든 인간의 실상이다.

너무나 교묘한 거짓 증언

마태는 “후에 두 사람이 와서”(60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주 간단한 진술이지만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능한 증인을 많이 세우려고 대중들을 먼저 앞세워보았지만 자질구레한 것으로만 고소하고 그마저도 서로 일치하지 못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결국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가르쳐서 정확하게 입을 맞추도록 했다. 법정이 요구하는 최소의 증인 정족수 2명을 급조했다. 서너 명이 넘어가면 또 다시 진술이 일치하지 않을까 딱 두 명만 내세웠다.

그들이 내건 죄목이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고 한다.(61절) 성전을 헌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부인하는 것이기에 명목상으로만 보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교묘한 거짓말이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셨다. 당신께서 성전을 직접 헐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대인더러 헐라고 했다.

그러나 성전을 하나님이 임재 한 신성한 곳으로 믿고 또 여호와의 이름조차  일컫지 않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헐 리가 없다. 당시 그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명소가 된 헤롯 성전을  헐 수도 없다. 유대인이 절대 헐지 않을 것임에도 주님이 헐 것이라고 기대하고 말했을 리도 만무하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공사역 첫해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청소한 후였다. 성전의 장사치와 환전상을 야단치며 쫓아내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메시아뿐이라고 믿는 유대인들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2:18)라고 다그쳤다. 예수님더러 메시아인 증표를 보이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표현한 것이었다.(요2:21) 그 2년 뒤에 너희 유대인들이 성전인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이지만 사흘 뒤에 부활함으로써 당신의 메시아 됨을 증명해보이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선 제자들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부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두 거짓 증인들은 예수님이 헐 것이라고 그 행동 주체를 살짝 바꾸었다. 성경 어딘가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는가? 바로 사탄이 아담을 시험할 때에 토씨, 단어 하나만 비틀어서 정반대의 뜻으로 만든 것과 동일한 수법이었다.

성립되지 않는 신성모독죄

그런데 설령 지금 그 거짓 증언대로 주님이 말씀하셨다 쳐도 신성모독죄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어쨌든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했으니 성전제도를 부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새 것으로 바꾸겠다는 뜻일 뿐이다.  예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은 이것이다.

“내가 성전을 청소했다고 너희들은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내가 청소하지 않고 너희의 기존 행태대로 둔다면 하나님이 너희의 기복적, 위선적, 우상숭배의 크나큰 죄악을 반드시 징계하실 것이다. 나중에 하나님이 이방인 로마를 채찍으로 사용하여 이 엄청난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도록 완전히 파괴 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성전 자체를 없애거나 당신 백성의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다. 파괴된 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대리석 건물일 뿐이다. 대신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주님이 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될 것이다. 주님 당신께서 그들의 성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의 언약을 이전처럼 돌 비석에 새기지 않고 당신 백성의 마음에 새기는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렘31:33) 이제 그 언약을 실제로 수행하려 직접 오신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의 그 언약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거짓 증인들조차 주님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짓겠다고 말했다”(막14:58)고 증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는 것은 최단 시일 내에 성전제도를 회복시킨다는 의미다. 성전제도를 더 강화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더 높이는 일이다. 정 문제 삼으려면 3일 만에 짓는다는 얼토당토 않는 허풍이었다. 예수님을 살짝 맛이 간 사람으로 취급하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이 말씀을 처음 접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요2:20)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코웃음 쳤다.

그 때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가 지금은 주어 단어 하나 교체해선 사형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코웃음 쳐야할 차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도무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63절)은 정말로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던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오해

이처럼 인간은 너무나 치사하고 추하고 비겁하다. 어리석다 못해 가련하고 애처롭지 않는가?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최근 유행하는 “웃프다”는 신조어가 있다. 웃기지만 동시에 슬픈 일을 뜻한다. 지금 이 재판이 역사상 최고로 웃픈 일에 해당될 것이다.

인간 중에 최고의 지성, 도덕성, 종교성을 지닌 대제사장이 지금 거짓 증거를 가지고 굉장히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예수님께 따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설령 예수님이 성전을 헐겠다고 말했다 쳐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재판관이라면 증언으로 성립되지 않음을 분별하여서 증거로 채택하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억지로 꾸며낸 거짓은 그 자체 내에 모순과 불합리가 내포되어 있기에 반드시 탄로 나게 마련이다. 예수님이 잠잠히 계시며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거짓은 거짓으로 판명난다. 혹시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진리인 십자가가 세워지면 모든 거짓은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면 흑암의 세력은 물러가게 된다.

예수님이 잠잠 하자 대제사장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줄 오인했다. 묵비권은 주로 두 가지 이유로 행사한다. 우선 거짓을 꾸며냈을 때 증언을 계속하다 보면 앞뒤 모순이 쉽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짜로 할 말이 없을 때인데 본문의 예수님은 이 후자의 경우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유대 동족의, 아니 당시 세계 전체에서 최고의 영적지도자가 겨우 이런 수준이고 공회원들과 랍비들이 모두 동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후에 심히 좋았던 그 모습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극상품 포도를 심었더니 먹지도 못하고 썩어서 땔감으로밖에 쓸 수 없는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 포도밭은 들짐승들의 놀이터로 변해버렸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들이 당신 백성의 공동체를 지배하고 성전마저 좌지우지 하고 있다. 그 앞잡이인 대제사장은 율법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아무 가책도 없이 자행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 지혜의 한계

대제사장은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사형에 해당하는 또 다른 증거를 추가하려 했다. 첫 증거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주님이 묵비권을 행사하니까 그 잘못을 시인한 것으로 오해했을 것이다. 더 꼼짝하지 못할 죄목으로 얽어맬 작정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절)고 추궁했다. 그에 대해 주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64절)고 순순히 수긍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고 단순히 옳다, 아니다만 말하라고 가르쳤다.(마5:33-37) 당신 말씀대로 하자면 첫째 증거는 아니다라고 부인해야 하지만 그럼 논쟁의 빌미만 제공하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변명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기에 아예 대꾸하지 않은 것이다.  

이 두 번째 증거에 대해선 사실 그대로 옳다고 답했다. 맹세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솔선수범했다는 정도가 아니다. 거짓은 가만 두어도 거짓으로 판명되지만 진리는 반드시 드러내야 한다. 진리가 진리로서 선포되어야만 하므로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다.

대제사장이 주님에게 단순히 그리스도인지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를 덧붙였는데 교묘한 노림수가 있었다. 유대인의 관점에선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메시아라도 구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종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참람(僭濫, blasphemy) 즉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성립된다. 주님이 그런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렇다고 담대히 선포한 것이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정적으로 직접 소개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주님 당신께서도 실제로 그렇게 선포하셨다.

대표적 예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고 하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당신을 그 아들의 위치에 두었다. 심지어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고까지 단언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신성모독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한다.

이 말씀도 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행려병자를 주님이 완벽히 고쳐주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 일을 행했다고 예수를 핍박하게 되었다.(요5:2-16) 그러자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반박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안식일이라고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하는 일을 중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생명을 풍성케 주시는 일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신다. 안식일은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에게 일주일에 하루를 따로 구별해서 진정으로 감사하고 경배하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제 주님이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다고”(5:18) 주님을 더욱 죽이려 했다. 이런 일련의 치유 사건, 토론, 논쟁, 시비들이 대제사장에게 보고되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 그것을 바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했고 대제사장의 예상대로 만장일치로 사형판결을 유도해냈다.  

대제사장은 분명 뱀처럼 지혜로웠다. 문제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해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속으로는 탐욕 즉 재물이 주인이 되어 있었다. 필연적으로 그의 지혜는 음흉하고 사악해졌고 그도 최고급 살인 기술자가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혜의 원천으로 믿는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철저히 믿고 가르치는 대제사장의 지혜가 이런 수준이다.

로마 군병과 유대 관원들이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때렸는데(67절), 뺨을 때리며 모욕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다니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 너를 모욕하는 나를 이 자리에서 즉사시켜 보라고 도발한 것이다.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말도 “인간 선지자도 안 되는 주제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벌리다니”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만약 당시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모른 상태에선 똑 같은 짓을 자행했을 것이다. 대제사장을 포함한 인간들의 지혜의 한계는 여기까지일 뿐이다.

예수님이 하신 맹세(?)

본문에서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이 단순히 당신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는 답변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겐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맹세와 방불한 말씀을 덧붙였다. 비록 대제사장이 맹세코 바로 대답하라고 닦달한 것에(63절) 그대로 반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어기면서까지 선포해야할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즉 지금부터 말하는 약속에 걸고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뜻이다.  

먼저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 즉, 당신께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곁에 앉은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당연히 계셔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또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 즉, 재림하시어 마지막 심판하는 것을 너희들이 목도하게 된다고 한다. 이 두 사실을 보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곳에 모인 군병과 하속들로선 분기탱천할 수밖에 없었다. 대제사장의 법정에 꼼짝 없이 잡혀와 있는 주제에 하나님 보좌에 올라간다고 했다. 또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신분이면서  거꾸로 자기들을 심판하러 오겠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할 말이 아니었다. 정말 미친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주 죄송한 표현이지만 미친놈에겐 몽둥이가 약이라는 식으로 두들겨 팼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 자기변호는 기가 찬 헛소리가 아니라 너무나도 심각하고 엄청난 의미를 지녔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 시기와 방식까지 예고했고 정확하게 그대로 실현했다. 인간으로선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부활 예고가 그대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지금 이 예언도 그대로 실현된다는 보증이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아무런 변명 하나 하지 않으셨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3일 후에는 당신의 메시아 되심과 당신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이 부활로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갈까봐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이 또 다시 인간적 지혜를 총동원해 방비했음에도 주님은 실제로 부활하셨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텅 비어졌다. 의심 많은 도마는 못 자국이 난 주님의 손을 직접 만질 수 있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눈에 보이게,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확증했다. 그 부활생명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경이롭게 역사하여 산 채로 맹수 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주님을 찬양케 했다. 주님과 그 무리를 코웃음 치며 멸시했던 유대인들로 입이 딱 벌어져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예수 믿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다.

따라서 신자가 본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은 바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주님의 맹세 아니 약속이다. 이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우리 모두가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생생한 사실로 증험될 것이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라는 약속도 가시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주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모독한 참람 죄로 돌에 맞아 최초의 순교를 당할 때에 하늘 보좌 우편에 서계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했지 않는가?(행7:55.56)

주님은 이천년 전 과거에 당신의 부활을 가시화 시켰다. 주님은 지금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임재하고 계심도 가시화시켰다. 미래에 하늘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오실 것도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가시화 될 것이다. 이 어찌 엄청난 일이 아닌가? 영원하고 절대적 진리가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임을 절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 선언이 진리임을 스데반과 바울을 비롯해 초대교회 신자들은 입증했지 않는가? 십자가 우편의 강도도 그날로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옮겨졌지 않는가?

우리도 본문의 대제사장, 하속과 군병들처럼 예수가 밥 먹여주나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주님을 모욕했다.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반쯤 미친 사람 취급했다. 우린 예수 믿을 의도가 추호도 없었고 그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정반대로 그분과  원수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다. 성경의 모든 진술이 절대적 진리임을 알게 해주었다.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인간의 상식과 지혜로 어떻게 믿어지겠는가? 아니 이해조차 안 되지 않는가? 그것들이 믿어진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이다. 그만큼 큰 기적도 사실상 없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정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발가벗겨서 데리고 와선 그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너무나 웃픈, 비참하고 애처롭고 가련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내 속에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던 탐욕, 재물, 사탄을 쫓아내주고 주님께서 나의 주인으로 좌정해주셨다. 이천 년 전의 골고다 사건이 나에게 실제로 가시화되고 체험케 되었다. 신자는 이미 주님의 부활 생명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우리를 당신처럼 영광스런 존재로 완성시켜 주실 것도 절대적 사실로 확정된 것이다.

하나님을 다시 웃프게 만들지 말라.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당신 혼자만의 변론으로도 충분하다.(요8:14) 당신과 또 당신과 함께 하신 성령님과 성부 하나님을 합치면 법정 증인 정족수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실제로 침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강림하고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요한복음뿐 아니라 공관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순간에 그 사실은 또 다시 변호할 필요가 없다. 사흘 뒤 부활로 입증될 것이다. 대신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선 미리 가르쳐 주실 필요가 있었다.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자 비로소 앞으로 있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 주었듯이, 주님은 이제 십자가 이후의 미래 일을 가르쳐 주어야만 했다.

본문 64절의 약속이 앞으로 핍박 받을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을 일을 지어내어서 립 서비스 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스스로 당신의 가르침을 어겨가면서까지 맹세하실 만큼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다.

신자는 예수 십자가로 구원 받았다는 그 사실을 감사하는 것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주님은 언제라도 불시에 다시 오시어 이 땅을 온전히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우리와 함께 이 땅을 세세토록 거룩하게 통치하실 것이다. 그분의 약속에 대해 우리가 보일 반응은 예로 대답하는 것 하나뿐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에게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금 대접에 담아서 성부께 중보하고 있다.(계5:8) 이 땅에선 신자를 위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신다.(롬8:26) 나아가 히브리서에선 천사들을 신자들이 부리는 영이라 했다.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 신분과 특권을 소지했다는 뜻이다.(히1:14)  

주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요10:28a)라고 약속하셨다. 거기다 덧붙이길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8b)고 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다 말인가?

현재 이 땅에서 겪는 고난, 상처, 시련 들이 분명히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고난은 허락지 않으신다. 또 그 고난도 잠시면 지나갈 지극히 경(輕-가벼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좋은 것들이 우리를 위해 이미 확보되어 있다.

신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중요하게는 자기가 자신을 볼 때에 더 이상 웃픈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한 가지만 주의하면 된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손의 힘이 빠져나가지 않게만 하면 된다. 주님이 우리를 붙드는 손에 힘이 빠져 나갈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현실 고난에 눈이 팔려 인간적 지혜를 쫓는 순간 또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웃프게 보신다는 사실만 절대로 잊지 않으면 된다.

11/1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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