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 마28:1-10)

조회 수 502 추천 수 3 2015.02.01 23:23:53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http://youtu.be/9s-lOXKEru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는지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1-10)


천사가 부활을 돕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월절 전날 오후 늦게 십자가에서 내려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장되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갈 것을 염려한 대제사장은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파숫군을 세우고 무덤을 인봉했다. 인간 사회 최고 권력자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하여 예수 파동을 잠재우려고 마지막으로 무덤에까지 울타리를 둘러싼 것이다.

제자들로선 로마 총독과 유대 대제사장 둘을 다 상대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며 대적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무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무덤이 비어진 사건은 인간 세상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하나님만의 놀랍고도 오묘한 역사라는 뜻이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예수라는 한 랍비가 위대한 일을 많이 한 후에 희생적으로 죽었기에 귀하게 여기고 천사를 보내어 부활시켰거나 부활을 돕도록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혼자서 목숨을 걸고 결연히 맞섰다. 그가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것을 하나님이 가상히 여겨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간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큰 지진이 난 후에 천사가 돌을 굴리곤 그 위에 앉아있었다.(2절) 무덤 안에 들어가 예수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수직하던 자들이 떨며 죽은 사람 같이 된 것은 큰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의 번개 같은 형상과 눈처럼 흰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다.(4절) 인간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영광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기에 연약하고 진토 같은 인간으로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돌을 굴려내었기에 무덤 안이 드러났는데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돌을 굴려내기 전에 이미 부활하시어 무덤에서 스스로 사라졌다는 의미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밤중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착고가 다 풀렸다. 수직 중인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착각하고 자결하려 했다. 죄수가 탈옥하면 죄수가 받아야 할 형벌과 동일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아마도 십자가 처형을 받을 반역 죄인도 있었기에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자기 칼에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 무덤에 보초를 선 사람들은 로마 군병은 아니다. 빌라도가 너희 파숫군으로 지키라고 명했으니 대제사장의 하속들이다. 우선 예수의 시신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대제사장에게 추궁당할 것을 염려했다. 궁극적으로는 로마 총독의 명령을 어긴 셈이므로 로마의 관습에 따라 십자가 처형에 당할 것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기에 더 두려웠던 것이다.

또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말을 총독이 듣게 되더라도 너희의 근심이 되지 않게 잘 변호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마28:14) 대제사장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무덤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으므로 자신의 충복들로 보초를 서게 했다.  그들의 진술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준 까닭이다. 나아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천사가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한 적이 많았기에 천사의 출현에 그리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부활 예수의 다리를 붙들었다.

만약에 천사가 돌을 굴리고 무덤에 들어가 예수를 일으켜 세웠다면 예수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고 본문의 기사는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어쨌든 육신을 입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파숫군 여러 명이 덤벼들어 예수를 체포하려 시도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으니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다.(6절) 또 여인들이 예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빨리 전하라는 당부를 받고 달려가는 중에 주님을 만났다. 예수의 발을 붙들고 경배했으니(9절) 주님은 인간의 손에 붙들릴 수 있는 육신을 입고 부활한 것이다.

말하자면 보초들이 주님을 붙들 틈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돌이 굴리기 전에 신령한 부활 육신을 입고 바위를 통과해 나왔다는 결론 밖에 내릴 수 없다. 요한복음 20:19에 따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음에도 주님이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섰다고 한다. 문을 열지 않고 문 자체를 순간적으로 통과했다. 아무리 큰 물체가 가로 막아도 전혀 구애받지 않고 공간 이동을 하신 것이다.

주님은 바위의 무덤을 터트리기는커녕 굴릴 필요도 없었다. 무덤의 돌이 터지고 자던 성도들이 걸어 나온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직은 마지막 때의 신령한 육신으로의 부활이 아닌지라 성도들은 생물적 육체를 지닌 채 소생한 것뿐이었다. 바위가 막히면 걸어 나올 수 없었기에 예수의 부활 생명이 그곳에도 충만히 임해 바위를 터트려 주어야만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주겠다고 빈정댔다. 유대 대중들도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주는지 두고 보자고 조롱했다. 그 때까지는 예수님에게 목숨이 미약하나마 붙어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렀다. 무덤을 인봉하기 전에 죽었는지 재차 확인했다. 남자 장정 여러 명이 붙어야 겨우 굴릴 수 있는 큰 돌로 막혀 있다. 캄캄한 무덤에 완전히 갇혀 있었다.

그런데 무덤 안에서 소생하려고, 또는 침상에서 일어나려 몸부림 친 흔적이 전무했다. 깔끔하게 세마포는 접혀 있었다. 입구의 돌도 그대로 막힌 채 육신만 사라졌다. 그리고 무덤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여인들을 만났다.  

누가 참람 죄를 범했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로 사칭했다고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멸시 비방하며 처형시켰다. 예수님은 죽기 전이나 지금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에게 일언반구 꾸중, 변명,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깨끗하게 비워진 무덤의 누었던 자리로 당신이 하나님 아들임을 입증했다. 들리는 소리 하나 없어도 이만큼 크고 확실한 외침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온 천하 만민은 그 선포를 부인할 없고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아직도 주님을 멸시 조롱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얼마나 가증한가? 아니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참람 죄를 범하여 십자가에 죽을 자는 이천 년 전의 나사렛 시골 출신의 한 랍비가 아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을 우습게 혹은 인간으로만 쳐다보고 있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다.

대제사장과 빌라도는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했고 보초도 굳게 세웠다. 인간으로서 최고 최선의 방책을 다 동원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 앞에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었다. 휴지는 구겨진 흔적이라도 남지만 지금 그 큰 돌에 바늘구멍 하나 나지 않았다. 지상 최고의 권력, 지성, 종교성으로 짜낸 모략은 주님 앞에 완전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은 아무런 회개도 반성도 하지 않았고 깨달음조차 없었다. 또 다시 치사하고 비겁하게 헛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전 백성을 대표하여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일대일의 대면을 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을 자행했다. 돈이라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사람들 사이에 지우려 정말 보기에 불쌍할 정도로 안간 힘을 다하고 있다.

천사가 돌을 굴리고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돌 위에 앉은 목적은 결국 하속들로 빈 무덤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엘리야가 와서 예수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죽음 전에 승천시킨 분이 예수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어떤 큰 바위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주님은 지구의 물질계의 제한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미명에 부활하셨다.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서셨다. 그 전에는 본문처럼 소수의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만나주셨다. 지구의 시공간의 틀과 무관해졌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적용되는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활동하셨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그 견고한 바위를 그대로 두고 무덤 밖으로 나올 수는 없다. 그 큰 돌이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다. 만물이 그로 인해 그를 위해서 그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골1:16)

본문의 이 짧은 기록만 정확히 해석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기독교 밖에서 예수는 위대한 선각자로 기독교를 창시한 인간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조차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가 가졌던 믿음을 본받자고 한다. 예수님을 단순한 도덕선생 즉, 한 명의 인간으로 격하하려는 자들이 최근에 급격히 늘어났다.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잃지 않았거나,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처럼 아예 예수를 싫어해서 처음부터 예수 믿을 생각이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

주님은 토요일인 안식일 후의 첫날 즉,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 율법의 제사 시대가 종결되고 십자가의 은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유대교는 하나님께는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의에 치중했다. 무엇보다 현실의 형통만 우선시 하는 가식적 종교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는 받지도 보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마당만 밟고 갔고 하나님은 급기야 성전의 문을 닫았다.

대신에 주님이 오시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언약을 심령에 새겨주었다. 성도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과 일대일 개인적 교제가 가능해졌다. 종교는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령이 자라게 만들어주는 생명으로 대체되었다.

그런 새 생명을 지닌 자들이 이젠 주일에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신자의 믿음도 없다. 요컨대 인류가 구원은 물론 아무 소망 없이 버려진 상태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바위를 통과하는 신령한 육체로 부활하셨다. 그럼에도 여인들이 그 다리를 붙들 수 있었다. 나중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구운 생선도 드셨다. 의심 많은 도마에겐 손의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고 만지게 했다.

이 땅에서 불구자였던 자가 불구인 채로 부활된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나팔이 불면 자던 자 불구자들도 홀연히 일어나 변화된다는 것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입는다. 본문의 천사처럼 눈이 부시도록 흰 세마포를 입고 온전한 육체로 부활한다. 사망이 예수님 십자가 이김의 삼킨 바가 된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서 그분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 또한 그분의 재림 때에 육체까지 부활되는 영광을 누린다. 제자들더러 당신의 부활체를 보이시고 만지게 한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교제를 나눈 것이다. 실제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영광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승천하기까지 40일 지상에 머문 것은 당신의 부활 생명을 나눠주는 바로 이 마지막 사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그런데 그런 영광을 누릴 자는 한정되어 있다. 천사(5절)와 예수님(10절)은 여인들을 향해서만 동일하게 “무서워 말라”고 말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의 돌이 굴러지고 그 위에 번개 같은 형상의 천사가 앉은 것은 여인들과 보초들이 함께 보았다. 여인들도 보초들처럼 천사 앞에 똑 같이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천사가 파숫군들에게도 너희가 예수를 조롱하고 멸시한 죄를 용서해주겠다든지, 두려워말라고 위로해 주어야 하나님의 긍휼한 성품에 합당하지 않는가? 그러나 천사는 오직 여인들만 향해서 “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만 만나주셨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본문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린 후에 놀라서 방으로 뛰어들어 가보니 아무도 안 보였다.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았다. 감방 안이 아주 어두웠거나 다른 방에 있던 바울 일행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결하려고 칼을 잡는 순간 바울이 큰 소리로 만류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가 새 생명을 다시 얻은 셈이다.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는 일은 이교도인 그에겐 생전 처음 겪는 이적이었다. 나아가 자기와 대적 관계인 바울 일행이 자기를 죽이고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위로하며 사랑으로 대우하는 것은 완전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예수믿는 신자들의 사랑에 감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생들아!”라고 호칭까지 바꾸어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했다.(행16:30) 그로선 평생에 처음으로 인간 세상에서의 출세와 형통과 안락과는 관계없는 자기 실존에 관한 궁극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동안에는 전혀 눈에 보이지 않던 영적 세계를 지금 눈앞에서 똑똑하게 목도하게 되었다. 사후세계의 하나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껏 하나님을 부인 대적하면서 온갖 우상들을 섬겼고 돈만 주인으로 삼아 방탕하게 살았던 자기 같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지 물은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빌립보의 간수는 예수를 믿는 바울 안에서 예수를 발견했고 만났으며 그 예수 앞에 자기 전부를 걸며 항복했다.

이때는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한참 후다. 하늘의 부활 생명을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그 간수에게 넘치도록 임한 것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예수 새 생명으로 되살아났고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특권을 얻은 것이다. 나중에 빌립보 교회까지 세우는 영광스런 신자가 되었다.  

이에 비해 본문의 파숫군들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빌립보 간수와는 달리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 대제사장의 하속들인지라 24시간 365일 종교적 환경에서 생활하며 경건하고 거룩한 의식과 행위를 보았고 따라서 실천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 그저 죽을까봐 무서워 떨기만 했다. 앞뒤 되어가는 상황을 그대로 판단하면 로마 백부장처럼 예수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실토라도 했어야 했다. 빌립보 간수처럼 천사에게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했다. 최소한 지난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기라도 했어야 했다.

대신에 혹시 당장에 천사에게 벌 받아 죽지는 않을지,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추궁에 어떻게 대처할까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 뒤의 행적이 그런 사실을 증명한다.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꾸중과 형벌을 피하는데 급급했고 거짓의 대가로 검은 돈까지 받았지 않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앞에서조차 이 땅의 안락에만 생각이 고착되어 있었다. 여호와를 인간사회에서 자기들 형통하는데 도움이 될 때만, 혹은 그런 목적으로만 경배하고 따랐다. 하늘에 영원한 소망을 둔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알 것을 예고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 리는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무덤을 지키고 있는데도 지금의 이적을 예수와 전혀 연결시키지 않았다. 한마디로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인정한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두 번째의 완전한 죽음

얼마 전에 TV에서 미국 영화를 하나 봤는데 제목과 스토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귀가 번쩍 열리는 대사가 하나 있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람이 육신이 죽는다고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의 완전한 죽음이 남았다고 했다. 신앙이 전혀 없는 불신자 주인공이 그런 말을 해서 유심히 지켜봤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죽은 사람을 더 이상 회상하고 기억해주지 않을 때에 비로소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러나 본문의 파숫군들 같은 불신자들의 인생관을 그만큼 여실히 드러내는 말도 없다. 인생의 소망을 오직 이 땅에만 둔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치장하고 높이는 목적으로만 사는 것이다. 죽은 후에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에는 어떤 관심도 없다.

인간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으로 따지자면 히틀러나 오사마 빈라덴 같은 자가 최고이지 않는가? 사람이 사회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여 존경해준다면 아주 좋은 일이다. 신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복음을 케케묵은 기독교의 헛소리라 치부한다. 절대적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있다 해도 자기들이 이 땅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모습이, 그것이 설령 악한 쪽이라 해도, 쿨(cool)하면 최고라고 믿는다. 남들이 자기를 정말로 멋지고 신나게 살고 있는 자로 기억해주기만 바란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또 그 모름으로 인해 자기들을 치명적인 가장 큰 실패이자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인간에게 오래도록 기억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기는커녕 아예 알지도 못한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에 나오는 부자처럼 땅에서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즐겨도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져 고통을 겪을 것이다.

완전한 죽음이 사람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모른다. 사람의 살고 죽음을 사람 스스로 절대 컨트롤하지 못한다. 자기 의지, 생각, 계획과 전혀 무관하게 나고 죽는다. 인생 만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아래에 있다.

살고 죽음에 인간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해주느냐 못하느냐로 완전한 죽음을 따질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살고 죽음의 유일하며 참 주관자인 하나님이 그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 것만큼 완전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나아가 그런 하나님을 거부 대적하는 것만큼 그분에게 완악한, 아니 사악한 큰 죄가 없다.  

신자가 정말로 신자가 된 표시는?

천사와 예수님은 여인들에게만 “너희는” 무서워말라고 했다. 지금 큰 지진이 일어나고 번개 형상의 천사가 나타났기에 그 장엄함에 오금이 저리는 두려움만 위로 진정시키려는 뜻만이 아니다. 너희들만은 죽음을 절대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너희들의 무덤도 어떤 큰 바위로도  막을 수 없고 부활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주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고 왔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써 순전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누가복음의 그 비유로 치며 거지 나사로처럼 세상에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릴 수 있다. 개들이 그 헌데를 와서 핥을 것이다. 그럼에도 천사들이 받들어서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에 들어 올리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의 이름은커녕 그가 존재했음도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이미 그 이름이 올라가 있고 그분의 손바닥에까지 새겨져 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관념해주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신자가 정말로 신자가 되었다는 표시는 그래서 바로 인간의 칭찬과 호응에 목마르지 않게 된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치장하여 높이는 일에 아무런 기쁨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의로워질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갖게 된 자다. 현재 자기가 처해있는 위치와 소속에서 자기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주위에 증거하고 나눠주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 된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인생의 유일한 소망과 목적이 된 자다.

최소한도 예수님 말씀대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는 하나님”만 두려워하기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상사람”(마10:28)은 두려워하지 않게 된 자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사람들의 눈지만 본 본문의 파숫군들과는 정반대가 된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과 부활이 확보되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의 권능이 빌립보 감옥에 기적을 일으키고 간수와 그 온 집을 일순간에 부활 생명으로 변화시켰다. 그런 하늘과 땅의 온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신자가 가는 곳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나와 지금도 동행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의 실상이자 믿음의 실체다. 그분과 정말로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신자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은 신자에게 항상 “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은혜와 권능을 삶에서 넘치도록 누리고 살고 있기에 세상 어떤 것에도, 특별히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신자라는 것을 본문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2/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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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믿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16 - 창2:15-17) [1]

목숨 걸고 믿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살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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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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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범죄는 인간 최고의 의로움이다. (창세기강해 #15 - 창2:15-17)

선악과 범죄는 인간 최고의 의로움이다. 창세기 강해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살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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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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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 창2:7-9)

에덴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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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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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창세기강해 #13 - 창2:1-3)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 창세기 강해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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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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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 창2:1-3)

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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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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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창2:4-7)

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耕作)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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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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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 창1:26-28)

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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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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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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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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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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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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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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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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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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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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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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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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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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