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일찍 잃은 부모를 위로하려면?
[질문]
제 주변의 어떤 분이 2년 전 사고로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신지 얼마 안 되셨는데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시면서 마음의 안정을 많이 찾으신 듯합니다. 그래도 또래 남자아이들만 지나가면 자꾸 바라보십니다. 천국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신자들은 천국에서 다시 아들을 볼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으니 괜찮으시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분의 아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게 생각났습니다. 혹시라도 구원받지 못한 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더 크게 아프실 것 같았습니다. 신자 부모가 불신자 아들을 천국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까? 언뜻 죽은 자의 구원에 대한 기도를 허용(?)하는 가톨릭이 더 타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분이 저에게 상담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옆에서 보자니 너무 안타깝고 저부터도 고민이 되어서 질문 드립니다.
[답변]
아예 위로할 생각을 하지 말라.
어린 자녀를 불의의 사고로 졸지에 잃게 된 부모에게는 어떤 위로나 섬김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오래 투병 생활하다 죽는 경우는 그런대로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기간이 있어서 순전히 상대적인 의미로 따져 고통이 조금 덜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사고로 죽으면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이 끔찍한 고통 가운데 비참하게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마음이 찢어질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의 경우는 무의식중에라도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 아닌가 싶은 곤혹감과 불안감이 겹쳐서 더더욱 힘듭니다. 거기다 대고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천국에 먼저 가있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니 슬픔을 씻고 힘내시라는, 심지어 감사해야 한다는 식의 기독교 특유의 위로는 도리어 절대 금기 사항입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부모는 신자이지만 자녀는 아직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모로선 지금껏 교회에서 배워온 교리로 따져보니 나중에도 만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옥의 참혹한 형벌까지 상상이 됩니다. 사고로 죽은 날 이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을 자식의 모습이 떠오를 것입니다. 아무리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같은 교회의 같은 구역식구라도 그런 부모는 근처에 가기도 극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자녀의 죽음 뿐 아니라 이런저런 형태로 큰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도 섣불리 위로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자칫 서로 상처만 주고받게 됩니다. 같은 성도나 이웃이기에 즉,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해야겠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의를 높이려는 교만이 작용하여 쉽게 죄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히 위로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신자가 가장 먼저 행할 일입니다. 그들이 먼저 구체적인 도움을 청하면 최선을 다해 섬겨줄 수 있을 뿐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본인들이 죽은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를 서서히 하고 있거나 위로를 받고 싶다는 신호입니다. 그 때에도 진정한 공감을 표하면서 대꾸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끝까지 들어주면서 함께 있어주기만 해야 합니다.
공감과 동정
문제는 똑같은 처지에 있어보지 않는 한 진정한 공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린 자녀를 잃은 것은 같지만 사고의 종류가 다르면 부모가 느끼는 고통의 의미와 크기도 달라져 진정한 공감이 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공감(共感)이 안 되면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불완전성과 어리석음과 죄의 본성들이 어우러져 싸구려 동정(同情)에 그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공감과 동정 두 가지 외의 표현이 없고 그 두 단어 뜻도 명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empathy와 sympathy 두 종류의 공감이 있습니다. 접두사에 따라 그 뜻이 미세하게 달라지는데, em은 in이라는 뜻으로 다른 이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고통(감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sym은 same이라는 뜻으로 다른 이와 같거나 비슷한 고통(감정)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동정은 여러 표현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pity 즉,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녀가 죽은 시기와 죽을 때의 상태와 부모가 처한 여건 등등이 다르기에 부모가 느끼는 감정과 의미도 천차만별이 됩니다. 나자마자 불치병으로 인큐베이터에만 있다가 죽은 경우, 미숙아나 불구로 커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경우, 건강하고 착한 우등생으로 장래가 촉망받았는데 원인 모를 병이 걸려 손도 써보지 못하고 며칠 만에 죽은 경우, 대기업에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까지 두었는데 출장 가서 과로로 죽은 경우 등등 그 고통의 깊이가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큰 틀에서 자식 잃은 슬픔은 같기에 그 부모들끼리만은 공감(sympathy)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예를 든 세월호 사건의 피해 부모들의 경우는 모든 상황이 거의 비슷해서 아무 말 없이 같이 있기만 해도 상대의 감정과 고통이 자기 것으로 다가오고 자기의 것도 상대의 것이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따로 위로의 말은 물론 기도와 성경 말씀의 권면조차 없어도 됩니다. 서로 부둥켜안고서 우는 것으로 아니 함께 손만 잡아도 최고의 위로입니다. 정말로 똑 같은 감정과 고통 안에 들어가는 이런 경우가 참 공감(empathy- 우리말로는 흔히 감정이입으로 번역되지만)입니다.
최소한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제 삼자로선 당사자의 그 애끓는 고통과 감정에 절대로 자신을 일치 내지 대입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그 외적인 모습만 보고 참으로 불쌍하다, 너무 안타깝다, 얼마나 힘들까, 정도의 감정은 갖습니다. 이것은 공감이라고 할 수 없고 동정(pity)입니다. (한자어 同情의 문자적 의미는 sympathy이지만 이런 경우 그 내용적 의미는 pity에 그칩니다.)
길가에 엎드려 구걸하는 거지를 보면 아주 불쌍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갖고 있는 돈을 줍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어떤 출신 배경을 지녔고, 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생각과 계획으로 살아갈 것인지 등등에 대해선 묻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물론 일일이 거지를 가족처럼 봐줄 수는 없고 전문 구제 기관이 맡아서 할 일입니다.
어쨌든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전혀 갖지 않거나 가질 생각 없이 그냥 불쌍한 마음에서 내가 가진 여유와 시간과 돈을 일부 쪼개어 도와주는 것은 그냥 동정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타인의 고난에 대해 신자들이 갖는 감정이나 대하는 행동의 대부분이 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하게 알고 또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칫 싸구려 동정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자녀를 잃은 경우는 위로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공감해주려면?
참 공감(empathy)을 실현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모라비아 형제단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문둥병자들과 인도의 노예들에게 선교하려고 시도하자 관계당국으로부터 그들이 사는 곳으로 일단 들어가면 다시는 일반 세상으로 나올 수 없고 평생을 그들과 같은 신분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감수하겠다면서 십자가 복음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자녀를 일찍 잃은 부모를 진정으로 위로하거나 공감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이들처럼 같거나 비슷한 체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선교의 경우는 영원한 절대적 생명을 소개 초대하는 일이므로 평생을 헌신해야 했고 그런 참 공감으로 복음이 온전히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성격도 원래부터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기독교의 구원교리로 위로해야 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상 어떤 자선사업가나 선교사보다 더 순전하여서 100%의 참 공감을 실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와 고통과 수치와 연약함을 다 감당하시고 참 생명을 주려고 죽으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위로로 채워서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이기적 욕심은 물론 인간적 의라곤 단 한치도 개입되지 않은 참 공감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생은 고통으로 점철되지만 천국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이런 참 공감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꿔 말해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은 제 삼자로선 아이를 읽은 부모에게 예수님의 위로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실제로 그것밖에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그 부모의 심령 깊숙이 임하여 즉,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파고들어가서 역사함으로 주님만 바라보게 하고 천국의 비밀을 깨달아서 끝까지 그것만 소망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은 그 부모에게 기도하겠다는 말은 쉽사리 하지 말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해야 합니다.
고난과 하나님을 연결시키지 말라.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듯이 인생은 고난의 연속으로 신자라고 절대 피해가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난을 회피하는 용도가 아니라 고난 중에 제대로 반응하는 실력입니다. 제 삼자도 언제라도 비슷한 경우를 겪게 됩니다. 어린 자녀가 일찍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가깝게 지내던 친척 친구 친지 성도는 물론 형제자매 중에 요절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럼 일찍 자녀를 잃은 부모의 슬픔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아주 큰 슬픔에 빠지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곤혹스러워집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신자라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말하자면 어떻게 믿음으로 대처할지 미리 정리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막상 그 때가 되면 그마저 소용이 없지만 미리 정리해둔 신자는 아무래도 회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어서 조속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의 고통도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 가장 중요하면서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은 아무리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 죄 때문에 벌 받은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b-18a)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현실 세상은 사탄의 미혹 아래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해 모든 고난과 죄악이 파생됩니다.
저의 다른 글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새벽기도 가는 노권사님이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을 수 있으나 하나님이 막아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운전자를 즉결심판하거나, 차를 공중에 붕 띄워서 곡예 운전을 시켜야 합니다. 아니면 아예 그런 경우를 즉, 이해 안 되는 고난 전부를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럼 선만 있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따져 가면 선악과 금령도, 나아가 인간의 창조도 없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연단은, 욥의 경우처럼, 지극히 드뭅니다. 모세는 80년을 방황하게 만들고, 요셉은 타국에서 노예와 옥살이로 고생시켰으나 당신의 큰일을 맡기기 위한 준비와 훈련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신자에게 하나님이 연단 목적으로 직접 능동적으로 고난을 주신다면 연단으로 믿음이 성숙된 후에는 그 뜻을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짓고 계속 회개치 않으면 징계의 뜻으로 가끔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 또한 그리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 결국 신자라면 고난으로 인해서 그분께 의심 불평 원망을 돌릴 이유와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고난이 닥칠 때마다 그러는데 성경적으로 무지한 탓입니다.
요컨대 세상 고난의 99.9%는 인간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세월호 비극도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지 않습니까? 불구나 불치병으로 태어나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에 인간 육체의 생리와 유전자가 인간의 죄악과 환경을 오염시킨 폐해들로 나쁜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살인이나 전쟁을 치르면서 시체가 썩어서 온갖 바이러스가 생겼으며, 난잡한 성생활로 불구자가 태어났으며, 서로 많이 차지하겠다는 탐욕에 기인한 무분별한 자연훼손으로 생태계가 파괴된 것 등이 주원인입니다.
지금껏 교회가 너무 도덕적 율법적 종교적 특별히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바람에 신자가 행하는 것에 따라서, 특별히 잘 믿으면 그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신자들의 머리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세뇌된 인간의 종교의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하나님의 간섭이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일단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보다는 자신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은 죄만 되돌아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주의 실수 잘못된 선택 판단 이기적 욕심 등이 있었는지도 잘 점검해봐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반드시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은 선뿐이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악뿐입니다.
천국에서 못 만나면?
문제는 자식이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을 경우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본 성경문답의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은 어린이의 구원은?”이라는 글에서 이미 한 차례 다뤘습니다. 그 글을 참조하시기 바라며 지금은 간략히 줄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누가 언제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죽은 자녀가 구원으로 예정된 자였다면 반드시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그분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라 구원 밖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 이상 저로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럼 신자 부모가 천국에 가서 요행히(?) 자녀를 만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곳에서도 영원토록 슬픔과 회한으로 괴로워하며 지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나 성경의 기록으로 개연성 있는 추정은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율법에 따라 후손 없이 죽은 남편 때문에 형수가 여러 시동생과 결혼하면 나중에 부활 때에 이상한 관계가 될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주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고 대답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기에 결혼하고 후손을 낳아서 대대로 이어가는 이 땅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결혼 전력이 천국에서 대면한 그들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일단 죄 자체가 없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처럼 죄에 찌든 인간끼리 서로 좋은 것을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지도 않으며 자존심을 긁어가며 서로 상처주고 받는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양 경배가 넘치며 그곳 성도들 사이에는 기쁨 평강 사랑만으로 교통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사랑하는 자녀의 생명을 왜 그렇게 일찍 앗아가 슬픔으로 지새게 했는지 그 이유도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성령의 은사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행하던 것이 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온전한 것은 개인적으로 천국입성이며 공동체적으로는 마지막 부활을, 신구약 성경의 정경화의 완성이라고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뜻합니다. 이처럼 천국에선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알았던 것들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됩니다.
한마디로 천국에선 온전한 진리 가운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찌어다”(계5:13)라는 찬양을 종일 올릴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물론 천국의 상황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입신하여 삼층천을 다녀온 바울마저 누가 나에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또 본인도 받은 계시가 지극히 커서 자고할까봐 보고 들은 내용을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신자 자식을 끝내 만나지 못한 슬픔으로 괴로워할 일이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성경의 모든 기록을 유추해볼 때 충분히 타당합니다.
정말로 자식의 구원이 걱정된다면?
아무리 부모의 슬픔이 커도 불신자 자식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나님께 원망해선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이 설명으로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제 삼자이자 신자 입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성경적으로 제대로 정리해놓고 넘어가자는 뜻일 뿐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있기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점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됩니다. 어떤 이가 구원 받고 안 받고는 오직 그분의 주권에 달렸으니 인간은 아무 말도 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심도 갖고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파고들며 따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으니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재심을 청구할 자격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놓아두고 왜 나만 구원해주었는지 그것도 불공평하다고 따지고 나를 구원에서 빼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두가 죽어 마땅한 가운데 당신께서 택한 개인에게 구원 준다는 것은 부모는 구원 받지만 조부모나 자식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어떤 관계 신분 능력 공로 등이 그분만이 주관하시는 구원에 단 한 치의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잘 믿는 마누라 치마 붙잡았다고 천국에 부부동반 입장 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유독 자식의 구원 받지 못함에만 애통해 합니까? 따지고 보면 나를 낳아준 부모나 평생을 한 이불 아래에서 동고동락한 배우자의 구원 탈락을 최소한 같은 세기로 안타까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 몸에서 낳은 자식인데다 미처 사랑을 베풀지 못했고, 인생의 여러 꽃을 피어보기도 전에 죽어서 가장 크게 안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심경의 배경을 잘 따져보십시오. 천국에서라도 부모로서 못다 한 사랑을 베풀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천국에서도 이 땅의 삶의 연장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녀의 천국 구원을 소망하기보다는 이 땅에서 즐겁게 지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 큰 것입니다. 천국에서 장가를 가지 아니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촉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천국을 소망하고 자식의 구원을 소원했다면 아주 어려서부터 신앙의 본을 보이고 말씀과 기도로 구원 안에 들어오도록 도와주었어야 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했지만 안 먹혔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택하심 안에 들었다면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구원을 베풀 것입니다. 아니면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어차피 가족 중에 어떤 이는 구원을, 어떤 이는 구원 밖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제일 먼저 혼자 믿었습니다. 목사까지 되었으나 불신자로 돌아가신 아버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그럼에도 어떤 불신자 집안이든 처음 믿는 자녀는 동일한 일을 겪습니다. 말하자면 신자 된 자녀는 불신자 부모에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셈입니다. 이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이자 엄연한 실존입니다.
그만큼 예수 믿은 은혜가 너무 고귀하기에 세상의 어떤 고통도, 심지어 자녀를 읽찍 잃은 슬픔도 그 은혜를 넘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광대하신 주권과 섭리는 우리가 천국에 가봐야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복음을 주위에, 가족에서부터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22:31,32)
예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주 쉽게 바꾸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염려할 시간이 있으면 살아 있는 동안에 잘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본 주제에 대입하면 믿음을 대대로 잘 계승하면 가족 중에 혹시 천국에서 못 만날 자가 안 생기므로 그런 염려는 전혀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 전에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을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 소명을 달성하려 애굽에 돌아가면 동족이 누구의 명을 받고 왔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되느냐고 여호와께 물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대답입니다.(출3:15)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그 약속대로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역으로 말해 그 언약신앙을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잘 가르치고 계승시켰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이 지금도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쉐마(신6:5-7)에 정확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부모부터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여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본을 보이면 자식도 동일한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죽으면 끝이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그 체질이 진토 같습니다. 이상에 말씀드린 내용을 신자들은 다 배워서 혹은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대로 사랑을 베풀지 못한 자식이나 효도 한번 못한 부모님이 예수님 십자가 은혜를 모르고 돌아가시면 가슴은 찢어집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구원 얻는다는 일부 종파의 가르침이 가슴에 더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성경은 분명히 죽고 난 후 제 이의 구원 찬스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구태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수모 멸시 핍박 고통을 겪고서 십자가에 대속 죽음을 당하실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헛된 죽음이 되고 성경 전체의 진술은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됩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고전15:29) 간혹 이 구절로 죽은 자를 위해 기도나 세례를 하면 된다고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고린도의 이방인들이나 일부 교인들이 죽은 사람에게 제2의 기회를 주기 위해 세례 받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말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행하면서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뜻일 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죽은 자에게 제2의 기회가 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죽어서 제2의 기회가 없다는 뜻은 살아서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분과 이 땅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죽은 후의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한 번 죽으면 끝이라는 것은 유족들, 특별히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대놓고 해선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럴수록 당신들이라도 이 땅의 남은 생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먼저 데려갔는지는 천국에서 주님에게 직접 물어보아야 하고 그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순금(純金) 같은 믿음이란?
욥은 자식 한두 명도 아니고 모두를 아무 이유 없이, 성경의 명시적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과 사탄의 천상에서의 내기 때문에, 너무나 억울하게 졸지에 다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또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에게 멀쩡하게 잘 자라는 외아들 이삭을 그것도 당신께서 큰 이적으로 주셨음에도 갑자기 죽여서 바치라고 명합니다. 그랬던 하나님이 욥에겐 다시 자녀들을 주었고, 아브라함에겐 미리 예비한 양을 제물로 대신 받고 이삭은 살려주었습니다. 그럼 병 주고 약 준 것입니까?
성경은 욥의 입술을 통해 그렇게 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그럼 그가 정금같이 된 신앙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이 또한 욥의 아래 고백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2-6)
쉽게 말해 그 동안 아이들을 다 죽이고 나에게도 이런 중병을 주어서 도무지 견디기 힘든 고통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라도 알고자 하나님께 따진 것 자체가 죄였다고 욥은 겸허하게 시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행하시는 일이 따로 있고 땅의 인간이 감히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너무나 큰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그래서 심지어 크게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욥만큼 극심한 고통을, 그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억울하기만 한 고난을 겪은 자는 없습니다. 그는 믿음이 순전했고 그런 고난을 당하고도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은 의인이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했으며, 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라고 순순히 수긍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주도 내지 허락하신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어서 고뇌 갈등했으나 살펴본 대로 그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정답을 서두에 먼저 밝혀놓고 모든 진술을 이어갔다는 데에 욥기의 신비가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욥의 이 땅의 모든 비극은 영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이해 못할 고난에 대한 이유도 천국에 가면 깨닫게 되고 나아가 잃은 아들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아주 정미하지만 은혜로운 경계선입니다. 어떤 이는 도무지 이해되지 못하는 환난과 재앙을 허용 내지 방관하는 하나님이라면 결코 믿지 않겠다고 반발합니다. 또 다른 이는 그럼에도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그분만의 선하신 뜻이 있으며 그분의 하나님 되심에는 전혀 하자가 없다고 겸손히 고백하며 믿습니다.
천국이 분명히 있으며 그곳에서 일찍 죽은 자녀를 다시 만날 소망을 키우고 마지막 날에는 육체로도 다 함께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을 꿈꾸는 자가 신자입니다. 동일한 고난을 당하지만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믿는 자와 아예 거역 부인하는 자와의 차이입니다. 신자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이 땅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최소한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 근거가 됩니까?
장애자와 정신질환자의 부모들
그런데 참 신자라면 천국 소망과 부활 승리를 이 땅의 고난에 접목시키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어떤 부모로부터 절대적인 소원이 하나 있다는 말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 자식이 자기들보다 먼저 죽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아이 뒷바라지하기 힘들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먼저 죽으면 이 땅에 남은 장애 자녀를 누가 돌봐주겠느냐는 뜻입니다. 형제도 그럴 수 없습니다. 정부기관이 맡을 수밖에 없는데 그 처우가 어떨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먼저 죽기를 원히겠습니까? 말로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실은 똥오줌을 대신 받아주는 한이 있어도 오래 살고 최소한 당신들이 돌봐줄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간혹 두뇌발달장애아의 경우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과연 하나님께 구원 받았는지, 그래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혀도 본인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너무 안쓰러워 당신들보다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로 죄의 노예가 된 인간들이 만들어낸 너무나 비참하고 가난하며 안타까운 인간 사회의 실상입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지속되며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경우는 달라도 이런저런 비극을 겪으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고로 자녀를 일찍 잃은 부모에게 이런 말씀으로 위로하라거나 위로가 된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겪은 고난이나 비극이 가장 클 것 같이 여겨져도 막상 주위를 살피면 그보다 더 비참하거나 최소한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만은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는 이 중에 젊은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갑자기 조현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머리도 똑똑하고 미국에서 일류대학을 나왔고 신앙도 좋았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와 경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껏 정신의학적 심리학적 연구로 밝혀진 여러 이론에 따라 추측만 해볼 뿐입니다.
그 부모의 말씀은 더 기가 막힙니다. 차라리 육체적인 불구자였다면 아예 제 팔자(?)려니 하고 살 수 있고, 일찍 사고로 죽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멀쩡하고 외적 조건으로도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 정신이 완전히 빠져 있는데다 수시로 미친 행동을 일삼습니다. 남들은 안정된 직장을 얻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나이인데도 정상 사회활동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전부 혀를 차며 이상하게 쳐다보고 때로는 남에게 폭력을 행하는 모습을 매일 옆에서 지켜보려니 정말 생지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 손으로 저 놈을 죽이고 나도 자살하고 말까라는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문에 비슷한 사건 기사가 간혹 뜹니다. 그 부모가 차마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일 뿐 아니라 제 몸으로 낳은 자식이라 그럴수록 더 안타깝고 사랑이 깊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치료 간호 하느라 그 부모는 직장과 모아놓은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부모마저 자칫 정신적으로 이상해질 참이고 현실적으로 궁핍하기 짝이 없어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치료해주시리라는 실 날 같은 소망을 붙들고 하루하루 죽지 못해 버틴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중에 주변에 같거나 더 심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모들이 함께 모여 위로 기도해주고 치료에 대한 새로운 지식 정보 경험담을 나누는 사역기관에 참여하여 열심히 섬기기로 했습니다. 자기 자식은 언제 나을 지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현실적으로는 지옥 같은 일상임에도 말입니다. 같은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이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마음의 평강을 되찾고 그 이해되지 않았던 비극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2-7)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소명을 받은 이후로 죽기까지 정말로 주님을 위해 헌신 충성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 일을 잘하게끔 모든 장애를 미리 예방해주어야 순리일 것 같으나 도리어 보통사람은 도무지 견디지도 못할 엄청난 고난들을 겪었습니다.(고후11:23-27) 아시아에서 겪었던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 받은 것” 같던 그 고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중으로 부정한 것은 아주 강한 긍정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사도라도 큰 고난을 수시로 겪기 마련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대로 바울은 같은 서신의 서두에서 그런 엄청난 고난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부터 먼저 진술했습니다. 한마디로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현실적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이 “약한 교회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염려-empathy”(고후11:28,29)라고 고백했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상기에 예를 든 장애자와 정신질환자 자녀를 둔 신자 부모들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같은 처지의 다른 부모들을 섬길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나면 죽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출생은 순서가 정해져 있으나 죽음에는 차례가 없습니다. 일단 죽고 나면 그 죽은 자를 위해서 살아 있는 자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습니다. 그쪽 영역의 모든 일은 오직 절대자 하나님의 몫입니다. 신자로선 그런 비극 이후에 더더욱 그분을 순전히 믿고 완전히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사57:1,2) 이사야 선지자가 요절한 의인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밝혀 놓았습니다. 이 땅에서 더 크고도 많이 겪어야만 할 화액을 당하기 전에 평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신자 부모는 신자 자식의 요절에 대해선 당연히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어 큰 위로가 됩니다. 불신자 자녀를 둔 신자 부모는 그 아이의 구원여부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최소한 이 땅에서 수없이 닥치게 될 엄청난 고난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위로라도 얻어야 합니다. 불신자 부모는 불신자 자녀의 요절에 대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불평 저주만 늘어날 것입니다. 신자 부모와 자녀는 살아있는 불신자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려 들 것입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바울은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전제했습니다. 정죄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그분의 광대하신 긍휼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 위로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받은 위로로 고난 중에 있는 자를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 같은 참 공감(empathy)을 갖기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직접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함께 울고 한숨 지었습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감정을 부여하였고 고통까지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의 모든 고난을 그분만이 온전히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즐겁게 살아가는 데에 장애되는 모든 것들은 죄를 필두로 당신께서 다 안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장애물도 함께 죽었습니다.
신자는 고난 중에 있는 신자에게 말씀이나 환경 가운데 주님께서 직접 위로와 힘을 주시라고 주님께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신자 자신은 싸구려 동정(pity)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인간적 의와 자랑, 종교적 의무와 형식, 이기적 욕심 등이 절대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공감(sympathy)을 해주어야 합니다.
상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마디로 줄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 남은 신자들의 믿음이 순금 같이 정련되어서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끼리 주님의 위로로만 서로 가득 채우는 사랑의 공동체(바로 교회임)를 이 땅에 세우라고 어린 자녀가 요절하는 것 같은 엄청난 고난을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7/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