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탄광촌의 신비한 흰 꽃(마5:13-16)

조회 수 3024 추천 수 111 2003.06.16 23:43:21
마태복음 강해 (49) 1/5/200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너무 급한 한국인

한국 사람들의 기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너무 급하다는 것임에 어느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급하다는 것은 이성을 동원해 논리적으로 앞 뒤 생각을 하지 않고 감성에 따라 즉흥적으로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신자들의 신앙 생활도 즉흥적이며 그런 버릇은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읽을 때 차분히 묵상하기보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과 직감으로만 판단하여 자기 형편에 적합하고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서 본다.  

그래서 한국 신자들이 가장 좋아 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다 보면 꼭 이런 성구 액자가 걸려 있다. 이들 말씀의 깊은 뜻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특히 욥기의 말씀은 성도들의 사업체마다 발견할 수 있는데 실은 이 말씀이 욥의 친구 발닷이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격에 대해 잘못 해석한데서 나온 말로 성경적 의미로는 틀린 것인 줄도 모르고 걸어 놓고 있고  기도할 때마다 심심찮게 인용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성경 말씀을 뜻은  몰라도 외우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능력이 발생하는 염불이나 주문처럼 생각한다.

성경은 반드시 국어 공부하듯이 보아야 한다. 앞 뒤 문맥을 따지고 시제, 접속사, 단 복수 등 문법과 문장구조 등을 분석하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을 국어 공부 하듯이 읽는다고 해서 그 이면의 영적의미를 무시하거나 찾지 않아도 되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대신에 문장을 분석해야만 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읽기만 해도 성경의 숨어 있는 큰 보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본문이 바로 그런 즉흥적 해석으로 그 내용을 오해하는 것의 대표이며 어쩌면 한국 신자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가장 치명적인 잘못이 바로 본문의 잘못된 해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가만 들어다 보면 인격적 품성의 도야와 도덕적 선행의 실천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음을 본다. 즉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본문을 다시 국어 공부하듯이 자세히 보자. 13절과 14절의 첫 부분에 어떻게 되어 있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과 빛이 되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다고 했다.


탄광촌의 흰 꽃

미국의 석탄 광산촌에 가면 터널 입구에 아주 신기한 화초가 있다고 한다. 광부나 석탄을 실은 괘도차가 들락거리며 아무리 검은 먼지를 풀풀 날려도 순백색의 꽃을 피우고 심지어 바로 그 앞에서 탄 가루를 뿌려도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꽃의 피부조직 자체 속에 더러운 가루를 거부하는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들을 한다. 이 꽃이 먼지가 날아 오는 것을 피할 수 있거나, 개나 고양이처럼 먼지가 묻으면 몸을 부르러 떨어 먼지를 털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사람처럼 세수나 샤워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절대 먼지에 더럽혀지지 않는 신비한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도 이미 빛과 소금이 되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꽃이란 이 탄광촌의 꽃뿐만 아니라 사실은 모든 꽃이 그러하다. 꽃은  아이스크림 콘처럼 윗부분이 넓고 아래 부분이 좁아서 먼지나 이물질이 쌓이기에 가장 쉬운 모양이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이 아무리 비가 억수같이 내려도 비 온 후에 물이 고이지 않고 아무리 흙먼지가 날려도 먼지가 쌓이지 않는다. 꽃 송이 속의 수술, 암술 등이 하나 더러워지지 않고 그대로 깨끗하게 보존된다. 기묘막측한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생명력이 태초부터 모든 꽃 속에 이미 간직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왜 유독 꽃에 이런 신비한 능력을 주셨는가? 꽃이란 얼마 있다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새 생명의 씨앗을 잉태한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치 사람의 아기도 세상의 더러운 불순물에 절대 접촉하지 못하게  엄마의 태중에서 깨끗하게 보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력이 꽃에게 이미 주어졌고 또 하나님이 그 능력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계시기에 더러운 먼지나 세상의 때에 오염되지 않는다.

신자는 어떤 자인가? 성전 한 구석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처럼 자기의 가난한 심령을 애통해 하면서 빈손으로, 맨 몸으로, 완전히 벌거벗은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항복한 자다. 하나님을 몰랐던 지난 모든 세월의 죄악과 질곡과 상처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으며 앞으로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신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이 임재하고 성령의 전이 된다. 비록 겉 사람은 아직 후패하고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쉽지만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신비한 생명력이 자리잡게 된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새 생명을 잉태한 새 꽃, 샤론의 꽃 예수의 씨앗이 뿌려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빛의 자녀가 된 것이다.  

물론 신자가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인격과 품성과 기질이 완전히 거룩해지고 고상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의 찌꺼기가 남아 있고 심령이 눌려 있으며 상처 받은 것들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이 없었거나 알고 있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험과 유혹과 쾌락과 죄악과 어두움과 썩어 없어질 것들과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은 빨랐고 신이 났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더럽고 추한지 알게 되었다. 최소한도 그런 것들 앞에 서면 주저하고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하는 정도는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의와 거룩과 영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에 대한 감각이 생겼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보낼 것인가가 심각한 고민거리로 대두 되었다. 우주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과 그 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열망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이제껏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주위의 이웃과 심지어 원수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혼이 암흑과 사단에 눌려 있고 헛된 것들에 매여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진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 앞가림하기 바빴는데 여전히 내 목구멍이 크게 굶주려 있어도 내 것보다 더 큰 포도청의  목구멍을 가진 사람이 눈에 뛰게 된다.

소금이란 이미 염분이 포함되어 있고, 속에 반드시 발광체가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듯이 신자의 영혼에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이전에는 없던 염분과 불타는 발광체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맹물이었다가 성경공부 하다 보니 차츰 짠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제자 훈련 코스를 마치자 깨우침이 늘어나   만화 그림에 나오듯이 머리 옆에 전구가 뿅하고 생겨 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소금과 빛이 이미 되어 있는 것이다.
        
영적 성숙이 되지 않는 까닭은?

신자가 신앙 생활에 실패하고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예수님이 말하는 여덟 가지 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쉽게 말해 예수를 잘 믿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너무나 간단하다.  말 그대로 잘 믿지 못해 그렇다. 신앙(信仰)이란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믿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구원을 믿고,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본문 식으로 따지자면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한 적이 없으므로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앙이 아니다.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너희는 소금이니, 너희는 빛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온전한 사실, 그것도 완전히 실현된 실재(實在)임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다. 믿지는 않고 하려고만 하니 신앙이 자랄 리가 없다. 온전한 믿음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라겠는가? 시작과 출발이 없이는 진전과 도착이 있을 수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 하고 행동으로 나타낼 것을 요구하는 것은 따로 있다. 13절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이라고 염려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소금은 오늘날과 달리 자연 암반에서 나온 것이라 그대로 두면 소금기가 날라가 자갈이나 돌멩이처럼 변해 길을 포장하는 재료로 밖에 쓰지 못한다. 신자더러 속에 소금기를  채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소금기를 뺏기지 말라고 했다. 또 15절에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고 했듯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말고 잘 보이는 등경 위에 두라고 했다. 빛을 숨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신자들에게 권면하는 초점은 신자더러 소금과 빛이 되는 어떤 행위를 하라는 것에 있지 않고 숨지 말고 피하지 말라는 데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자신 있고 떳떳하며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승리는 너희 것이다. 내가 너희를 승리케 해 준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며 (요일4:4)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후4:7)

따라서 신자가 빛과 소금이 된 것을 알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에서 얼마나 높은 직분을 받았는가, 제자 훈련을 어느 과정까지 수료했는가, 구제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주위에 얼마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가에 있지 않다. 예수를 믿는 것, 신자가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떳떳한가에 달렸다. 뭔가 내키지 않으면서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지옥의 심판이 두려워 마지못해 교회에 출석하는가? 예수쟁이들 말 많고 탈 많아 교회는 다니지만 남들에게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가?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실감과 그래서 신자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에 대한 기쁨이 없다면 아무리 혼자 숨어 은밀한 곳에서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도 아직 빛도 소금도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운 까닭은?

왜 근래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신자들이 자신이 없는가? 교회 분쟁이 많고 예수 믿는 장로들이 사기치고 감옥 가서 그런가? 그런 것들이 원인이 아니다. 또 원인이 될 수도 없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은 사실은 일부에 불과하다. 대다수 신자들은 불신자들보다 훨씬 죄를 덜 짓고 더 착하다. 생각해 보라. 죄를 지을 기회가 적어서라도 죄를 적게 짓게 된다. 한국 교회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을 빼고는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서 붙어 살다시피 하는데 언제 죄를 짓겠는가?

전세계적으로 정부기관을 제외한 민간 자선 단체와 그 활동의 80%이상을 기독교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비율로 봐서 기독교인들이 절대 80%를 차지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힘에 비해 과분하게 선행을 하고 있으며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보다 더 선행을 많이 한다. 아무리 예수쟁이들 위선자라고 욕을 해도 우리는 떳떳할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 한 것은 선행을 해야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선행으로는 천국 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 보다 더 선행을 적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다. 신자가 빛과 소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신자가 예수 믿는 것이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외부에서 생각하듯 신자들이 위선적이고 선행을 적게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선행을 많이 해서 그렇다. 정확하게는 선행을 더 많이 하려고 해서 그렇다. 본문식으로 하자면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그렇다. 신앙 생활의 포커스가 전적으로 빛과 소금이 되는데 맞추어져 있으니 자기가 자신을 되돌아 볼 때 아직 도저히 빛과 소금의 수준에 도달해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거기다 일부 몰지각한 교인들로 인해 받는 세상과 사람들의 비난이 그 수치에 상승작용을 한다.

그러니 기껏 나타나는 반응이 집사 직분을 받으라고 하면 아직 술, 담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천천히 하겠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을 겨우 금연과 금주하는 것과 맞 바꾸려 한다. 물론 그런 반응이 겸손하고 자신의 더러운 습관을 고치겠다는 정성은 갸륵하지만 이런 것도 자꾸 본인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이 빛이 되어 있는 것을 모른다. 자신이 정말 빛이 되어 있다면, 성령의 전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도저히 그런 것들로 오염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진심으로 주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술, 담배가 생리적으로 벌써 싫어지고 더러워지고 역겨워진다. 빛이 되려고 그런 것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어 그런 것들을 멀리 할 수밖에 없다.  

오랜 만에 한국 영화 비데오를 하나 빌려 봤다. 삼류 코메디지만 해학적으로 재미 있게 잘 만든 영화였다. 싸구려 룸싸롱에 밴드 불러 놓고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꼭 이전에 예수 안 믿었을 때의 필자의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참 한심하고 헛되어 보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꼭 윤리적인 죄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가뜩이나 힘든 한국 사회에서 판을 벌리고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것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문제는 그곳에 빛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눈 닦고 봐도 의와 거룩은 없다. 나아가 더럽고 추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라. 자기가  친구랑 신나게 술 먹고 호스테스랑 온갖 짓을 다 하고 노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데오 촬영해서 맨 정신일 때 다시 본다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사람이 있겠는가?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자기가 어둠에 있는 줄 모른다. 빛이 비춰져야 안다. 빛으로 바뀌고 나선 더러움이 생리적으로 싫어진다.

신자가 자신이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확신 한다면 세상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이 땅에서 우리가 완벽해질 수는 절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것이고 바로 그것이 복음이자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다. 인간은 신자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질그릇이고 예수님 만이 우리 속에 보배로 존재하신다.

신자도 암에 걸리고, 부도 나고, 죄에 빠지고, 시험에 넘어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명색이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사기꾼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혹시나 하고 Super Lotto를 샀다가 역시나 하고 찢어 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암 투병 하는 중에도,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더라도, 죄에 쓰려져 남에게 손가락 질을 당하는 처지에  있더라도 내 속에 보배 되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 신자다. 아무리 형편이 다 떨어진 모습일지라도 내 죄와 질곡과 상처를 용서하고 치유하며 사랑을 베풀어 주실 이는 십자가의 주님 뿐이며, 현재의 실패를 미래의 성공으로 바꿔주실 이도 주님 뿐이며, 엎질러진 컵의 물을 되 담을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주님 뿐임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이 어떤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바로 그것만이 빛과 소금이 된 유일한 증거다.

생명(生命)이란?

생명이 있다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새끼를 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생명력의 결과이지 생명의 본질은 아니다.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죽지 않는 것이다. 호홉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한 포기되어질 수도 없다. 아무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가 다 죽은 것처럼 보여도 새봄이 오면 새 싹이 돋아나는 것이 생명이다. 잎과 꽃과 열매는 자동으로 맺는다. 열매를 맺기 이전에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생명이다. 신자가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신비한 생명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한국 신자들이 즉흥적이고 감상적이다 보니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열매를 맺는 데만 신경을 쓴다. 자기가 빛을 내고 열매를 맺으려 애를 쓴다. 스스로 불 태우려 노력한다. 불이 타면 모든 것이 금방 타 없어진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시쳇말로 “짧고 굵게 살련다”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려 한다. 화끈하고 금방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길 원한다.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극소수의 사람뿐이다.

신앙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다. “가늘고 길게” 가야 한다. 우리는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일어서야 하며 또 일어 설 수 있는 것은 언제든 우리 손을 잡아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미 빛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꽃송이는 아무리 비바람, 흙 먼지가 불어도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절대 더러워지지 않고 순결하게 보존된다. 간혹 꽃송이 자체가 완전히 떨어지는 한은 있어도… 신자는 세상에 꽃송이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지 솜씨 좋은 정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정원사는 하나님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1,5)

예수를 믿고 났더니…

신자가 되고 나면 좀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을 멀리하려고 한 적이 없는데 저들이 우리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 원인이 물론 신자가 말 많고 위선적이고 죄를 지어서이긴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일부분이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다른 원인이 있다.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없지만 우리의 영혼 속에 빛이 비춰 나온다. 예수를 믿는 냄새가 난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라 서로 말로는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지만 벌써 저 인간과 나는 별종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죄에 눌려 있고 사단에 묶인 자들 미혹된 영들이 우리를 보면 이상하게 밥 맛이 없게 되어 있다. 우리 속에 있던 죄의 냄새들이 벗겨져 나가고 더럽고 추하고 음산한 기운들이 빠져 나가고 있음을 저들이 먼저 안다. 마치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 근처에만 가면 한국 사람은 치즈와 향수 냄새로 미국 사람은 김치와 마늘 냄새 때문에  서로 코를 싸매는 것과 같다.  치즈 먹는 사람은 치즈 먹는 사람끼리 살아야 하고 마늘 먹는 사람은 마늘 먹는 사람끼리 살아야 한다. 신자가 되어 죄악과 쾌락과 사악한 눌림 속에 함께 뒹굴던 공범자 그룹에서 탈퇴하니까 세상은 신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고 자연적으로 미워지게 된다.

또 이전에 신나고 재미 있었던 쾌락과 유혹의 기회를 신자가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지는 않는데도 줄어든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저절로 선하게 해결되거나 아예 없어져 버리는 경우를 심심찮게 겪게 된다. 나아가 조금만 실수하고 죄를 짓고 넘어지면 이전에는 예사였는데 이제는 쉽게 깨닫게 되고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그 죄의 냄새에 진저리가 쳐진다. 다음에 같은 종류의 죄악과 시험이 닥치면 금방 알아차려서 주의를 하거나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주 드물게는 완전히 실패하고 죄악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어서 몇 주, 아니 몇 년이고 교회를 멀리 했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하나님 앞에 불려 나온다. 신기한 것은 그런 와중에도 무엇인가 신비한 능력이 자기를 놓지 않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시쳇말로 뒷골이 땡기는 것이다. 그런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따로 있으며 또 그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빌1:6) 그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신자가 죄가 싫고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자녀로 택하고 부르신 자가 더럽고 추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당신이 자기 백성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꼴을 절대 그냥 두고 보시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때로는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지만 때로는 슬퍼하며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를 강권하시고 어떤 때는 완전히 우리를 망하게 해서라도 우리를 우리가 반드시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 세우시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게 한다.

빛과 소금이니라.

신자는 이미 빛과 소금이 되어 있음을 믿는 자이지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가 아니다. 신자의 선한 행실 한 두 가지로는 불신자에게 잠시 잠깐의  감동밖에 줄 수 없다. 불신자들이 우리 보다 더 선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저들에게 보여 줄 수 있고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저들이 모르고 저들이 할 줄 모르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세상과 사람과 사단이 우리를 흔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그 기쁨, 즐거움, 평강, 자유함을 드러내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만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고 끝까지 붙드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샤론의 꽃의 신비한 생명력으로 생의 어떠한 시험과 유혹과 시련과 환난이 닥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탄광촌의 하얀 꽃으로 부름 받은 것이 신자다.

신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지라도 거꾸러뜨림은 절대 당하지 않는 자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남은 생애를 바쳤더라도 여전히 그 앞길은 불신자가 당하는 똑 같은 질과 양의 고난과 형극이 기다리고 있다. 믿었다고 만사가 형통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저들과 다른 것이 있다. 사방이 우겨 쌓였을 때 우리는 위를 바라 볼 수 있지만 저들은 위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를 바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세상의 어떤 힘도 막을 수 없다. 하늘에서 내려 오는 빛 가운데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빛의 자녀가 된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빛과 소금이 되었음을 믿고 당당하게 세상과 죄악과 죽음과 사단 앞에 나서라. 아직도 연구실에서 백열등을 만들고 있으면 세상과 사단의 놀림감이 될 수 있지만  이미 빛이 된 신자가 걸어 나갈 때에 어둠은 그 자리에서 당장 물러갈 수 밖에 없다. 한 발자국만 떼어도 그렇다.  


김동식

2009.12.04 12:52:08
*.189.215.33

감사합니다.

이채엽

2010.10.28 06:31:55
*.134.17.92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주문

2010.11.28 13:39:47
*.214.53.221

지금까지 빛과 소금이 되라고 배웠고 되려고 했던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돌이켜 빛으로 소금으로 당당하게 살기를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태광

2011.02.19 16:45:54
*.32.182.220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말아야 겠습니다.

구자용

2011.08.14 06:31:16
*.55.190.132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공부한 이후로 많은 크리스찬들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문구들을 좋아 할때마다 그 말씀들은 그런 뜻이 아닌데???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이 나의 궁금증을 말끔히 씻어 주었네요. 감사합니다.

양요한

2013.11.08 05:49:03
*.98.184.194

아멘...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기 보다...빛과 소금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임화평

2013.11.12 10:46:36
*.92.77.116

내 마음을 시원케해주신 말씀에 감사드림니다
어떤 환경속에서라도 본질을 변질 시키지 않고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모루두개

2024.10.14 00:01:45
*.230.44.2

광복절 특사 영화가 생각납니다. 본문 속 코미디 영화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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