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강해 (54) 2/16/200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8-20)

한국과 미국이 가장 다른 것은?
        
미국에서 산지 벌써 13년 째가 되다 보니 미국 사회에 대해 특별히 한국과 비교해서 다른 점들을 어느 정도 터득하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한국서 오신 치과 의사 부부와 저희와 비슷하게 미국 온 후배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국과 미국이 어떤 면에서 다른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는 두 나라가 가장 다른 점은 지도자들이 법을 지키려는 의지의 강도에 차이가 있다라고 했다. 한국은 법이 지도자에게부터 먼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미국의 지도자는 절대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확고하다.

필자의 경우 한국에서 방문 오신 분들이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을 하면 항상 동일한 대답이 준비 되어 있는데 이 날도 같은 얘기를 했다. 매년초면 한국 관세청에서 수출입 기별 공고라는 것을 발표한다. 수출입할 수 있는 품목과 없는 품목에 따라 수입관세율을 정해 발표하는 것이다. 1960년대에 한창 무역입국으로 경제 개발이 진행되던 때에 언젠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기별공고가 파지티브시스템(Positive System)에서 네가티브시스템(Negative System)으로 바뀐 적이 있다. 이것은 단어의 문자적 뜻과는 달리 좋게 바뀐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리스트에 오른 품목만 수입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전부 수입할 수 없는 체제이고, 후자는 수입 불가능한 품목을 빼고는 모두 수입 할 수 있는 체제다. 따라서 후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외환 보유고와 수출입 경쟁력이 좋아졌다는 뜻이다.

이 두 시스템에 비교해서 미국은 네가티브시스템에 해당된다면 한국은 파지티브시스템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법적으로 안 된다는 것만 규정해 놓고 그것은 대통령이라도 어길 수 없지만 나머지는 다 할 수 있는 사회이고, 한국은  최근 많이 개선 되었지만  아직도 법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만 몇 개 규정해 놓고 나머지는 모두 안 되는 사회다. 간단한 예로 교통법규만 보아도  미국의 경우 좌회전이던 유턴이든 안 된다는 표시가 따로 없으면 되지만 한국은 꼭 되는 곳에만 표시를 부쳐 놓고 나머지는 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 없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씀을 신자들은 자꾸 신자의 선행과 구제가 질적, 양적으로 고급하고 커야 된다고만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종교지도자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18절에서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19절에는 하나라도 버리고 가르치면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오히려 613계명으로 세분화 시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린 것이 아니라 더 강화했는데도 왜 예수님은 야단치셨는가? 간단한 예로 안식일 날은 여자가 화장도 하면 안 되고, 밀밭을 지나다가 발로 밟힌 이삭은 먹어도 되지만 손으로 비벼 먹어선 안 된다고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가르쳤다. 율법을 빼고 가르친 적이 전혀 없다.

저들은 한국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만  정해 놓고 나머지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공무원들의 재량권이 늘어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운용하게 되며 자연적 결과로 힘이 생기고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 국민을 섬겨야 할 공무원들이 오히려 섬김을 받는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마태복음 23:2에서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야단 치셨다. 유대인 회당에는 전면에 율법 보관소가 있고 그 앞에 회당장이나 예배인도자가 앉는 “모세의 자리”라는 의자가 놓여 있다. 그들은 율법보관소를 등지고 앉고 회중들은 보관소를 향해 앉았는데 상좌를 차지해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율법을 받은 모세마냥 행세를 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613계명은 문자적으로 한치의 예외 없이 적용해 어기면 벌을 주어 무거운 멍에로 사람들의 어깨에 지웠고, 규정에 없는 것들에 관해선 일일이 자기들을 찾아 와 묻도록 했다.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강화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했다. 섬겨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오히려 섬김을 받은 것이다.

과부의 때 묻은 돈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도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진심으로 양 떼를 섬기다 보면 존경을 받게 되는 데도 존경을 강요하거나 존경을 받기 위해 섬겨선 안 된다. 쉬운 예로 “주의 종을 잘못 대접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식으로 가르치는 자들이 간혹 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종일 뿐 아니라 양 떼에게도 종이다. 삯 군 목자만이 대접을 받으려 하지 선한 목자는 자기 생명을 바쳐 섬긴다.

거기다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일일이 담임 목사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 신자의 생활과 교회 업무에 간섭한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날 화장을 금지시켰는데 이젠 거꾸로 주일날 꼭 최고로 좋은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나와 하나님께 예쁘게 보여야 하고 헌금하는 돈도 이왕이면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꿔서 내라고 가르친다. 교회 오는 것이 패션 쇼 하러 오는 것이 아닌 이상  최고 좋은 옷을 입을 필요까지 없다. 깨끗한 옷만 입으면 된다. 두 렙돈을 낸 과부는 가진 것 전부를 바쳐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가진 돈이라고는 동전 두 푼이 전부였으니 얼마나 손에 오랫동안 움켜 쥐고 있었겠는가? 틀림 없이 손 때가 절은 더러운 돈이었을 것이다. 바쳐지는 돈과 옷이 새것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물론 신자에게 부담을 지우거나 정죄할 판단의 근거로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에게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에게 드려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신자들은 진심으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잘못된 삯군 목자도 문제지만 오늘 날의 평신도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저지른 잘못을 똑 같이 저지르고 있다. 예수님이 너희의 의가 더 나아라고 했을 때의 너희는 분명히 예수님을 따라 온 허다한 무리 즉 평신도였다. 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뜻은 당시에도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는 일반인들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실에 어떤 일이 꼬이고 풀리지 않아 힘들면 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과 반응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게 한 행동이 있는가? 죄를 지었는가? 죄를 짓고도 회개를 안 했는가? 기도와 말씀 공부에 등한히 했는가? 내 욕심이 과했는가? 너무 내 생각과 계획만 고집했는가?”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을 닥달하여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은 것들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몽땅 하나님이 싫어한다는 식으로 몰아간 것과 같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현실 생활과 신앙 생활에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이 혹시 싫어하거나 금지 해 놓은 것은 아닌가 살펴보는 습관이 들어 있다. 잘못하면 벌을 주려고 회초리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강박관념이 신앙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위 하나 하나에 그 은혜가 줄거나 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다면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인간이라곤 단 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다. 누구나 살아갈수록 죄를 더 짓게 마련이다. 갓난 아기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낳을 부모가 벌써 그들이 저지른 죄로 다 사라져 없어졌기에 아기를 낳을 사람조차 없다. 시쳇말로 죄는 밥 그릇 수에 비례하게 마련이다.

신자들이 어렵고 힘들 때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그 말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겪은 극심한 고통에 비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쉽게 생각해 버린다. 물론 십자가 처형만큼 실질적인 고통이 큰 것은 아직 없으며, 또 하나님 당신으로 온갖 수치를 당하면서 죄인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단절되는 아픔을 겪은 그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함에 분명하다. 우리가 겪은 고통과 비교할 수 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도덕적 의무감이나 종교적 책임감으로 몰아가지 않으신다. 관념 속의 비교조차 불가능한 고통에 견주어서 우리 고통을 참으라고 강요하거나 권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시시하거나 편협하시거나 무책임하신 분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고통을 내려 놓기만 하면 예수님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그 자리에서 사사건건 뚝딱하고 해결해 주신다는 의미도 아니다.

신자가 환난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가? 또 그 죽음이 왜 복음이며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가?” 그 의미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보이는 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은 자는 이제는 두 번 다시는 정죄하지 않고 오직 그 평생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긍휼과 자비와 권능의 바다에 완전히 잠기게 된 신분과 소속과 위치로 변화 되었다는 뜻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이다. 신자가 주님의 일을 위해 단 번에 2천만 불을 헌금해도 눈도 꿈적하지 않으신다. 물론 기뻐하시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변경이나 가감이 없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뜻, 계획, 생각, 자신의 속성으로만 영향을 받으실 뿐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겠다는 오직 한 가지 행동원리에 의해서만 움직이실 뿐이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고 주님의 보좌 앞에 언제, 어떤 모습이든 담대하게 나아 갈 수 있고 그래서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요 충분한 은혜가 된다.

하나님의 유일한 금기 사항

하나님은 절대 우리 행동 하나하나에 당신의 행동이 좌우되는 그런 시시하고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다. 째째하고 시시하고 편협한 것은 신자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꼭 한 가지만 금해 놓으셨고 나머지는 몽땅  허용하셨다. 그 하나가 무엇인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다. “너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만 금지해 놓으셨다.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그 분의 전적인 통치를 받기를 기뻐하는 자라면 살인하겠는가? 간음하고,  도적질 하고, 거짓 증거하고, 남의 집을 탐할 리 없으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이 있겠는가? 나머지 9계명, 모세 오경의 세세한 규정 전부가 바로 이 첫째 계명을 풀어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만 두지 않으면 된다.

교회 다니면서 절간에 간 적도 없고, 칠성신에 가서 빈 적도 없고, 점쟁이 찾아 간 적도 없고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자신할 문제가 아니다. 여러 신들이 있는데 자기 판단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종교적 결단과 반응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전심(全心)을 다해 믿으라는 것이며 그럴 때만이  다른 신이 개입할 수가 없다는 뜻인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전심으로 믿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말로는 하나님만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 보면 제대로 믿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줄타기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줄을 걸어 놓고 지나갔다. 두 번째는 사람 몸무게의 몇 배나 나갈 만큼 큰 통나무 통을 지고 줄을 건너고 난 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제가 사람을 한 명 어깨에 지고 이 줄을 건널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까? 모두 예라고 대답했다. 그럼 누구든 나와 함께 건너 갈 자원자 한 사람만  나오시지요 하니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믿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꼭 이 모양이다. 실제 삶에선 전혀 능력이 발휘하지 못한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 신비와 오묘함으로 우리를 대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다. 하나님만을 나의 유일한 신으로 모신다는 뜻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오직 그 분의 은혜와 권능에서 온다는 것에 대해 절대 의심하지 않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모든 삶이 결정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과 단 한시도 빠짐 없이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 분의 통치에 완전히 100% 반응해야 한다. 내 모든 존재와 삶과 인생이 나아가 생명마저 그 분께 완전히 맡기고 내어 던져야 한다.

아무리 입으로 기도할 때는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찬사를 늘어 놓아도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저 안절부절 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입에 발린 찬사, 아부를 떤 것이거나 아니면 주문이나 염불 외우듯 한 것 뿐이다. 또 지금 당장 해결 안 되는 어려운 문제만 생기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인가 불만이 있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의심부터 들면 하나님을 믿은 것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 생각을 믿은 것이다. 자기 생각도 아니라 자기 감정을 믿은 것이고, 나아가 감정이라고 할 것도 없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느낌만을 믿은 것이다. 느낌이 하나님을 대신했다. 하나님 외에 느낌이라는 신을 우리에게 둔 것이다.  

신자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냥 우연으로 대면하는 사건, 사물,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의 필연적인 계획과 선하신 뜻이 반드시 그 속에 있다.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함께 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은혜가 철철 흘러 넘치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 사랑과 은혜의 깊이, 넓이, 높이, 크기를 우리의 어리석고 무능한 지혜로는 도저히 측량조차 못한다.  

넘치는 기회의 땅 미국
        
한국 사회가 법에서 규정한 것 몇 개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부정부패를 목적으로 한 것이 절대 아니다.  한국은 사람은 많고 땅은 좁고 자원은 적고 기회는 한정되어 있는데도 서로 하려고 하는 일들은 많아 무엇이든 박이 터지는 무한 경쟁의 사회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가능한 많은 사람을 경쟁에서 탈락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따라서 규제하여 금지시키는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미국은 사정이 정 반대다. 여유 있고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하고 기회는 많으니까  무엇이든 베풀어 주어 가능한 많은 사람을 경쟁에서 구제해 내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이 혹시라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그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는데 모자라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가? 어디 까지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자 생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들 더러 경쟁을 시키고 탈락시키는 것이 이 땅을 다스리는 원칙이겠는가? 제자 훈련을 다 마친 신자만 축복하시겠는가? 손이 짧아 구원을 못하시겠는가? 귀가 어두워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고 침묵하시겠는가? 우리 눈에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장 유익한 때와 방법으로 주시기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셔서 성도들의 공동체의 덕을 세우며 이 땅 위에 천국을 실현시켜 그분만의 위대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내 당장의 급한 형편만 가지고 기도한 것으로는 그 분의 하시는 작업을 도저히 추적할 수 없어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의 그 보잘 것 없는 투정과 떼 쓰는 것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당신 만의 영광으로 바꾸어 나가느라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10:12)

하나님은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무궁하시며 다함이 없으시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34:10)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더러 경쟁을 시키고 커트 라인을 통과하는 자만 복을 주겠는가? 하늘의 축복의 창고 재고가 바닥이 날 리가 있겠는가?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신자 바로 곁에서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은혜와 사랑과 권능으로 일하고 계신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 주시기 위해 그 분만의 방법과 경륜과 계획을 가지고 단 한 시도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다. 우리를  빛과 생명과 의로 채우셔서 하나님의 신령하고도 거룩한 자녀로 변화시키고 있다.

혹시라도 괴롭고 힘든 이 이민 생활에 아무리 기도해도 별로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없던데 무슨 능력과 은혜가 그렇게 풍성하게 작용한다 말인가? 의심스러운가? 비록 우리 눈에는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것 같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책이 한 두개로 제한되어 보이고 우리의 일당과 주급이 내가 필요한 것에 턱도 없이 모자라 그 속에서 우리가 날고 뛸 수 있는 여지와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제한된 환경 가운데도 반드시 하나님은 아주 신비하고도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과 때에 넘치는 축복으로 채우시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가? 안 믿어지면 말고… 목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방이 막혔을 때에 하나님 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믿음의 실체가 되는가? 그런 믿음이 없이 교회 나와 앉아 있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도대체 어떡하겠다는 뜻인가? 정말 시간 낭비밖에 더 되는가? 아니면 지금 와서 하나님을 배반해선 안 될 것 같으니까 할 수 없이 그냥 주일을 지키려 나오는가? 그것은 종교적 의무에 불과하지 절대 믿음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드려지는 번제와 소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제물의 냄새에 코 마저 막으신다.

세상에서 아무 가망이 없어 보일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히 드러난다. 인간이 절망으로 끝이 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된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곳에는 하나님은 눈을 닦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다. 그 때야 말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침묵하고 계신다.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붙잡을 수 있는 거리를 넘어 손을 뻗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계획을 크게 잡으라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 아니다. 하늘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하늘은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알 수 있고 이해 되고 눈에 보이면 벌써 하나님이 아니고 거기에는 믿음이 필요 없다. 보이지 않지만 그 분만의 능력과 은혜로 반드시 함께 하고 있기에 오히려 보이지 않는 바로 그것이 우리 믿음이 힘을 갖게 되는 진정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의는 무엇이었는가? 선행과 구제와 십일조 생활로는 도저히 우리가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들은 십계명만 지킨 것이 아니라 613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등지고 앉아서 그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의가 그들보다  나으려면 간단하다 그들이 했던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된다. 저들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만 규정 해 놓고 나머지는 몽땅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했다. 단 한 번도 할 수 없는 것 하나만 정해 놓고 다른 모든 것은 허용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기들이 정해 놓은 계명으로 하나님을 대신했다. 십계명의 첫째가는 계명은 전혀 지키지 않고 나머지 계명만 지켰다. 나 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셨는데 자기들의 생각과 계명으로 자기들 하나님으로 삼았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 하나만 금하셨다. 다른 신을 두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 만을 믿으면 된다. 그 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 만을 믿는다는 것이 사실 우리 생각, 기대, 예상, 관념, 심지어 우리의 종교적 실력을 뛰어넘어 엄청나게 심각한 것이다.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한다. “나는 여호와로라. 나는 네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그 말씀에 전 인생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믿어야 한다. 하나님 만의 고유한 신비한 능력과 다함 없는 은총과 변함 없는 사랑에 내 삶의 전부를 걸어야만 한다. 단 한 순간도 그 분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게으르고 무지하고 연약하여 수도 없이 놓치고 있는 것이 실제적인 우리의 믿음이고 설사 그럴지라도 그 분만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들만 계속해서 야단쳤겠는가? 왜 그들만이 유일하게 주님의 비난을 받았는가? 죄를 많이 지었는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종교적 실력과 책임감에서는 단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야단 맞은 유일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 나와 울부짖어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믿은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자기들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목숨을 건 믿음이 아니었다. 입술로만 주여주여 찾았을 뿐이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으로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야 하는 그런 현실적 어려움이 저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없었지만, 설사 있었다 할지라도 주님께 울부짖을 믿음이 아니었다는 바로 그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야단 맞았다. 폭포 위에는 외나무 다리 밖에 걸쳐져 있지 않고 그 밑은 천길 낭떠러지일지라도 하나님의 어깨에 걸터 앉아  함께 건너고자 하는 나를 던짐과 포기가 없었다.

우리의 믿음이 바리새인들과 과연 어느 부분에서 다르다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의가 저들 보다 무엇이 나은가? 주님 앞에 두 손 두발 다 들고 엎드리며 가난한 심령으로  울부짖는 것이다. 겸비하게 되는 것 외는 저들 보다 나을 의가 없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의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의는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의 뿐이다.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울부짖는 것만이 신자의 의다. 그럴 때 만이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진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 사령관이 “목숨을 걸고 기도해보라. 반드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생명을 걸고 믿으라. 그 때만이 우리에게 다른 신들이 들어 올 수 없으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뻐하신다. 자기가 믿는 대상에 생명을 걸 수 있어야만 바른 믿음이다.  
  


이채엽

2010.10.29 06:31:36
*.134.17.92

"느낌이 하나님을 대신했다".......
사실 제게는 항상 하나님이 3순위임을 고백하며 기도합니다...말씀 읽으면서 많은 묵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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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미국과 한국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은?(마 5:18-20) [1] 운영자 2003-06-16 3649
5 음치의 영원한 지정곡(마5:18-20) [2] 운영자 2003-06-16 2417
4 블랙홀이 사라진 까닭(마5:17) [3] 운영자 2003-06-16 2315
3 종신 운전수와 평생 식모 (마 5:16) [5] 운영자 2003-06-16 3060
2 테레사 수녀를 본 받지 말라(마 5:16) [4] 운영자 2003-06-16 2973
1 탄광촌의 신비한 흰 꽃(마5:13-16) [8] 운영자 2003-06-16 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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