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 (마5:18-20)

조회 수 2208 추천 수 120 2003.06.16 23:59:37
마태복음 강해 (55)  2/23/200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8-20)

목사보다 의로워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복음이다. 그 내용은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그 죄를 스스로 씻을 수 없고 자기의 선행과 공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의 긍휼만 구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20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고 따라 온 허다한 무리와 이제 갓 예수님의 제자가 된 무식한 어부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선행과 구제에 열심이며 율법을 잘 준수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다. 요즘 식으로 고쳐 말하면 평신도가 목사나 전도사보다 의롭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과는 완전히 상치되는 말씀이다. 단순하게 착하게 살아라고 권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직 사역의 초기라서 십자가에 죽으실 결심을 하지 않은 것일까? 성부 하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인류 구원 계획을 미처 몰랐던 것일까?  

성경에는 부정적 표현이 역설적으로 긍정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진 예가 많다. 부모가 고 3 아들에게 “너 하루 4시간 이상 공부 안 하면 결단코 대학에 못 들어가”라고 말했다 치자. 부모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매일 몇 시간씩 공부하는지 확인해서 4시간보다 모자라면 벌을 주겠다는 뜻인가? 둘 다 아니다. 오직 대학에만 들어가 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 온 허다한 무리가 단 한 명이라도 실족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 하셨다.  너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 (렘29:11)이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죄인을 골라 내어 탈락시키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왜 평신도더러 지도자보다 더 의로워야만 한다고 하셨는가 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심방하여 도와주고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일 자체가 직업인 목사보다 어떻게 더 의로울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단순하게 구원을 받고 못 받고의 차원을 넘어 “결단코”라는 말로 강조한 이유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아주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짓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제발 그 죄만 짓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단순하게 착하게 살기를 강조하거나 죄 짓지 말라고 겁주는 말씀이 아니다.

무슨 죄든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 복음인데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것도 두 가지씩이나 있다. 하나는 전 주에 살펴 본 대로 율법을 빼고 가르치는 것이다. 율법에서 무엇이라도 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뜻이다. 천국 가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그럼 바리새인들이 지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두 번째의 죄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 말

어떤 목사가 길을 가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개 한 마리를 가운데 두고 모여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너희들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하고 물었다. 사연인 즉 길 가다 주인 없는 개 한 마리를 주었는데 서로 차지하려고 해서 누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지 내기를 해 일등 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목사가 “애들아 거짓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나쁜 죄야. 내가 너희들만큼 어렸을 때는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이 없어. 장난이나 재미로도 거짓말 하면 안 돼”라고 야단을 쳤다. 그러자 아이들이 쑥덕쑥덕 자기들 끼리 의논하더니 “이 개는 아저씨 것이 되었으니 갖고 가세요”라고 대꾸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목사가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를 범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더러 자기들은 행하지도 않고 가르친다고 지적했다. 그 목사는 자기는 어렸을 때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이 없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아이들에게는 거짓말 하면 안 된다고 야단쳤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 갈 수 없는 죄는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남을 가르칠 입장에 있는 자는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평신도이니까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라도 어떤 형태가 되었던 한 두개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게 된다. 어느 누구라도 아무리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도 최소한도 부모는 될 수 있다. 나아가  예수님이 이 말씀을 신자더러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위치에 있다고 하신 직후에 하셨다는 것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었으니까 더 착하게 살아라는 너무나 당연한 수준의 말씀이 아니다. 신자란 세상과 죄악과 사단에 맞서 당당하게 싸워 이기는 자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흑암 속에서 헤맬 때에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먼저 이 땅을 찾아 오셔서 구원해 주신 것이 단순하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해서 교세를 불리려 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예수를 믿어 복을 받고 죽으면 지옥을 가지 않게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썩어져 가고 사람들은 미혹되어 죄악 속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모든 자가 당신의 은혜 안으로 들어 오기 원하셨고,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를 통해 그들의 멍에를 벗기고 시련과 고통에서 구원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신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신령한 영향력을 끼치는 방법을 통해 그 일을 수행하시기로 했다. 신자란 실제 삶을 통해 불신자를 감화시켜야 한다.   불신자들을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신자는 교회 안에 직분 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사람 앞에선 모두 제사장의 위치에 서야 한다. 신자를 영적인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이 그 지도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시는가?  간단하다. 말과 행동을 일치하라고 했다. 위선을 뜰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쟁이들 죽으면 입만 동동 뜰 것이라는 평가만은 제발 받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런 평가를 받을 때에 주님은 하늘에서 안타깝게 절규하고 계신다. “너 하나가 위선자로 욕을 들어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너 때문에 지연되지 않느냐? 저 불쌍한 영혼들을 내 대신 도대체 누가 가서 구원한단 말인가!”  말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 행동으로 가르쳐야 한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아이들의 행동이 신체 감각기관 중에 어떤 경로를 통해 인식하고 반응해 나가는가에 대해 조사했다. 귀로 듣고 변화되는 것은 10%도 채 안 되고 80% 이상이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 하는 것으로 판명 되었다. 인간의 귀는 아무리 좋은 이야기에도 닫지만 눈은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항상 열려 있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결단코 진학시키고 싶은가? 하루 4시간 이상 공부하지 않으면 결단코 대학 못 간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 없다. 부모가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만 보이면 된다.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고 하기 싫으면 최소한도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시늉이라도 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야인시대나 올인 비데오를 20개씩 빌려다 쌓아 놓고 하루 종일 빈둥빈둥 누워서 보고 있으면서 공부하라고 한들 그 말이 씨가 먹히겠는가? 자식을 탤런트, 조직 폭력배, 프로 도박꾼으로 만들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이왕이면 어려서부터 부모랑 같이 그 비데오를 보는 것이 더 낫다. 부모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녀는 절대 기도하지 않는다. 부모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자녀더러 성경 읽어라고는 말 하지 말아야 한다.

간혹 부모는 믿지 않으면서 아이들만 교회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이 나쁜 죄에 빠지지 않고 심성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데 이는 착각 중의 착각이다. 그런 아이는 이중 인격자로 자라게 된다. 교회와 세상의 양쪽 눈치를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만 교회 가고 아이들이 교회 안 가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이  많은 자는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가르쳐라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타고난 천성이 수다쟁이인가 과묵한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수치적으로 따져 행동을 하는 회수와 말을 하는 회수를 상호 비교해서 당연히 전자가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행동이 앞서면 말이 적을 수밖에 없고 말이 먼저 나가면 행동이 뒤 따르지 못할 확률이 높다. 자신의 말에 책임질 행동이 따르는가의 문제다. 결과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결론이 나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말이 행동보다 많아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동정과 위로를 구하고 칭찬과 아부 받기를 좋아하며 자기 의견에 동의하게 해 자기 편으로 만들어 동조자를 구하고 자기 영향력으로 조종하고 심지어 자기 잘못을 인정 받으며 나아가 공범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말이 많아진다. 오직 사람의 관심만 끌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별 신경도 쓴 적이 없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과 말이 많아지면 하나님과는 대화해 본 적이 많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많이 하면 사람 사이에 말이 적어지게 마련이다. 말이 적어지면 행동과 말이 불일치할 확률은 그만큼 낮아진다. 시쳇말로 말을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2등은 한다.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많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하나님과 대화한 것이 아니다. 시장 어귀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했고 금식한 것을 과시하려 일부러 초췌해진 얼굴로 돌아 다녔다. 오늘 날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원에 한 3일만 다녀 오든지 새벽기도 작정 40일을 마치면 갑자기 눈에 불을 켠다. 세상과 교회와 성도를 자기가 몽땅 책임질 것처럼 덤빈다. 이것은 이렇게 고쳐야 하고 저것은 이래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기 바쁘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인데 왜 목사를 무조건 따르지 않느냐고 야단친다. 말로는 당장 천국을 혼자 몽땅 건축할 것 같다.

예수쟁이들이 왜 위선자라고 욕을 들어 먹는가? 전도한답시고 사람들을 만나선  자꾸 그런 짓을 하면 큰 일 나고 벌 받는다, 지옥 간다 잔소리 해 된다. 예를 든 목사마냥 자기는 평생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는 양 시침을 떼니까, 상대는 속으로 “자식, 자기는 어때서?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내가 볼 때 네가 더 한데?” 반발할 수밖에 없고  위선자라는 욕을 들어먹게 된다.  

사람들의 동정과 환심을 끌기 위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죄 이전에 참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참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자기라는 인간에 대한 인정과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 남들더러 자기를 알아 달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한다. 사람과 말을 할 기회가 적으면 허전하고 심심하고 불안하다 못해 안절부절이다.

신자란 다른 자다. 세상과 사람에게선 참 사랑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자다.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깨달은 자다. 신자란 참 사랑을 찾았고 진실 된 벗을 만난 자다. 주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쉼을 얻었고 평강과 자유를 누리게 된 자다. 그래서 구태여 사람에게서 칭찬과 동정을 받으려고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게 된 자다. 점점  하나님과 교제하면 할수록 혼자 기도와 묵상과 성경 읽기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연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된다. 기도했더니 말과 행동이 달라 위선을 떠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어서 그렇게 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자기가 한 말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기도 안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면 엎드릴수록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난하며 안타깝고 갈급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요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주님의 긍휼과 사랑뿐임을 절감한다. 날이 갈수록 자신이 낮아지고 깨어져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이며 사망의 몸이요, 진토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다.

또 자신의 영혼의 부패함과 가난함을 절감할수록  다른 사람의 영혼도 똑 같이 불쌍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으로는 절대 평강과 위로가 되지 않는데 저 사람이 왜 아직 저러고 있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모든 것이 실패할 수 밖에 없고 허무로 끝나는데…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내가 겪었던 실패와 어리석음을 앞으로도 얼마나 계속해서 겪으려고 저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그 사람의 영혼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겨질 뿐이다. 저나 내나 불쌍하긴 마찬가지인데 내가 잘난 것이 무엇 있다고 말로만 이것 저것 간섭하고 고치라고 야단칠 수 없다.  

벼랑 끝에 선 인간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면 사실 말이 필요 없다. 행동으로 나서게 된다. 지금 상대가 다 죽어가는 상태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천길 낭떠러지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허우적 거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다 대놓고 “야 정신 차려서 빨리 그 곳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무엇하고 있어?”라고 야단 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 상대가 자기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물에 뛰어 들어 자기가 죽더라도 자식을 살려내지 않겠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인간 모두가 죄악과 흑암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직접 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본인은 죽으신 사건이 십자가이다.

이웃 집 사람이 부도가 나고 당장 쌀도 떨어져 끼니마저 못 때우고 아파 누워있다면 그 집에 가서 “야 이 놈아 왜 일도 안 나가고 이렇게 누워 자빠져 있냐”고 호통치는 것이 맞는가? 아무 말 없이 죽이라도 한 그릇 끓여 먹여주고 오는 것이 맞는가?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이 내가 사랑하고 위로해 주지 않으면 힘이 빠지고 실망하고 넘어진다는 것을 진정으로 염려한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무작정 자기 고집대로  잔소리하고 야단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게 해선 안 되다는 것 알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어쩌다 그렇게 하면 왜 그랬나 후회하고 반성도 하고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고 결심도 한다. 그런데도 그 것도 잠시 잠깐 뿐 순전히 내 기분과 자존심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또 다시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 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 뱉는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행패도 부린다. 더 안타깝고 죄가 많은 인간이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나쁜 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못나고 불쌍한가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이 행동보다 앞선 것은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였다.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려니 남의 잘못을 말로서 깍아  내릴 수 밖에 없다. 남이 내려 가야 자기가 올라 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 생각의 배경은 자기는 의롭고, 자기는 알아서 몇 가지 고쳤고, 율법대로 잘 따라 했기 때문에 너희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고칠 것이 많은 데 왜 안 고치고 있는가가 항상 저들이 갖고 있는 일반인에 대한 불만이었다. 오늘 날의  교회에도 바로 이것이 문제다. 왜 이렇게 저렇게 제대로 바로 고치지 못하는가 따지는 장로와 목사가 서로 고쳐야 한 다고 싸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인간이 말로서 알아 들어먹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없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 또한 없었다. 자기 스스로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남들 또한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고치면 되는 데 왜 안 고치고 있는가 만이 불만이었다. 단 한 번도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소원해 본 적이 없었다. 자기들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저들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박수 갈채 뿐이었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는 유일한 죄가 있다. 내가 내 잘못을 고치고 선해질 수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는 왜 죽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국을 소원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아쉽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죄 외는 무슨 죄를 지어도 천국 가는 데는 상관 없다. 심지어 간음하고 사람을 찔러 죽여도 간다. 살인도 고의적이고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 사고였다면 얼마든지 용서 받을 수 있다. 말과 행동이 달라 위선자라는 욕을 매일 쳐 먹어도 갈 수 있다.단 자기는 그런 존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그런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 삶, 인생은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만 구원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십자가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죄를 지을수록 그리스도의 용서와 긍휼을 소원하면 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긍휼을 맛 볼수록 죄와는 더 멀어진다.      

예수님이 왜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셨으며 또 생명을 잃는 자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는가? 도덕적 선행을 훈련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고, 교회 일에 전 인생을 다 걸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여전히 죄에 빠져 있고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못나고 불쌍한 우리 존재는 죽기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내가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지 않고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한다. 신자는 매일 죽는 존재다. 하나님의 눈에는 언제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안쓰럽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이다.

관심을 갖고 조금만 우리 주위를 둘러 보라.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그 고유의 사정을 자세히 들여 보라. 과연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 없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런데 더 이상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신자가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몸으로 때우든지 아니면 내 형편이나 그 사람 형편이나 서로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면 기도해 주는 수 밖에 없다.    


이채엽

2010.10.29 06:55:46
*.134.17.92

아멘!!!

블루

2019.11.25 08:53:48
*.137.28.240

아멘..목사님, 이글을 지금에서야 읽었습니다. 저의 게으름에 그리고 급한 성격을 이해해주시고, 저도 오늘 많이 회개했습니다. 말이참 많고, 옳은 길을 갈려고 하는 저 그런 저의 모습에 바리새인 모습이 비춰졌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갔습니다. 매일 일저지르고 회개하고가 참 반복되는것 같네요. 언젠가 저도 사도바울같은 그런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진정 사랑해서 행동으로 나올때가 있겠지요? 그런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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