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어느 신학생의 솔직한 고백(마6:5-6)

조회 수 5118 추천 수 134 2003.07.08 23:03:22
마태복음 강해 (67)  6/22/2003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5-6)


성도를 시험 들게 한 목사님의 기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새벽 기도 때마다 온 예배당이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기도하시는 어떤  목사님이 계셨다. 목사님들의 기도란 모든 성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남자 집사님이 술을 덜 먹게 해 주시고, 어떤 성도는 도박장 출입을 막아 주시고, 또 어떤 여자 성도는 입술에 재갈을 물려 주시고…” 하는 식의 기도를 하곤 했다. 사람들 사이에 목사님의 별난 기도 습관에 대한 이야기가 돌게 되었고 정작 그 기도 내용에 등장하는 성도가 궁금해 새벽기도에 나와 목사님의 기도를 직접 들었다. 자기만 들은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들었다. 그 교인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에서 기도하지 말고 대신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배 시의 대표기도나 합심해서 하는 통성 기도 같은 공적 기도는 사람에게 들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모든 기도를 골방에 가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의 경우에 한해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인 것 같다. 대표기도는 서로 안 하려고 미루고 개인이 하는 기도도 누가 들을까 부끄러운 내용이 많은데 어떻게 사람이 보고 듣는 곳에서 하려고 하겠는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게 된 경위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하루 세 번 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 드렸다. 만약 다른 볼 일로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정을 보였다. 오늘날의 우리와는 다르게 정말 열심이었고 순수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들의 경건성을 칭찬했다.  

그러나 순수하게 시작된 이 기도 관습이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흘렀다. 특별히 나갈 일도 없는데 기도 시간에 맞추어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듣고 보란 듯이 큰 소리로 기도한 것이다. 기도의 목적 자체가 사람의 칭찬 듣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5절에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 신학생의 솔직한 본심

그런데 바로 이런 성경 기사 때문에 우리는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우리보다 아주 형식적이며 외식적이었을 것이라고 매도하는데 이는 큰 착각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1-18에서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고 모든 열심을 다해 엄격하게 지켰던 세 가지 종교적 의무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무엇인가? 1-4 절까지의 구제와 선행, 5-15절까지의 기도, 16-18절까지의 금식이다. 저들은 정말 열심히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었고, 외출해도 기도 시간만 되면 길거리에 서서라도 기도했고, 밥 먹듯이 금식했다. 그 말은 이 세 가지 점에서 만은 정말 일반적인 유대인들과 완전히 달랐다. 말하자면 경건한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잣대였다.

오늘날의 신자와 불신자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무엇을 들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세상 사람과 확실히 다르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기껏 식사기도 하는 것 밖에 더 있는가? 그것도 교인들 끼리 모였을 때만 서로 눈치 보느라 할 수 없이 하는 것은 혹시 아닌가?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경건해 최소한 대표기도를 누구를 시켜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예를 든 그 목사님의 기도 습관을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분은 정말 성도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열정이 뜨거웠던 분이었다. 교인들을 위해 항상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분이다 보니 새벽 기도 시간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자연스레 큰 소리로 하게 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서만큼은 열심이었다. 단지 처음에 의도했던 순수한 동기가 중간에 변질 된 것만이 문제였다. 우리는 지금 변질될 여지조차 없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시작을 했어야 중간에 변질될 소지가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세 가지 의무를 그렇게 열심히 실천했던 이유가 셋 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잘못된 동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신다. 구제와 선행에 대해  4절에서, 기도에 대해 6절에서, 금식에 대해 18절에서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우리 자신에 한 번 더 솔직히 물어보자. 바리새인들처럼 경건을 실천하는 열심과 성실성은 뒤질지 몰라도 동기만은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한 신학교 학생이 “내게 큰 돈이 생기면 정말 은밀하게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 주는 것이 내 소원이야.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무명으로 남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자가 알아서 인터뷰한 기사가 신문에 나고 유명해져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받고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야. 어쩌면 이것이 더 본심일지 몰라” 라고 말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자매님이 어느 날 찬양 예배에 합심기도 할 때 열심히 기도하던 중 혹시 주위 다른 성도들이 다 기도하고 있고 또 듣고 있으니 내 기도도 남이 들을까 봐 이렇게 열심히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그날만은 기도를 그만 두었다고 고백했다. .

대표기도를 준비하면서 남들에게 신령하게 보이고 다들 ‘아멘’이 절로 나오도록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신자가 대표 기도할 때 거의 자동적으로 등장하는 문구 중의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가? 영육간에 강건함을 달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신앙적으로 신실하고 현실적으로도 형통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물론 좋은 말이고 그렇게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도를 하는 우리 속 마음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현실의 고통과 시련을 없애달라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남들에게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대접과 인정만은 받게 해달라는 뜻이다. 사람의 칭찬, 인정, 사랑을 받는 문제에서 만큼은 완전히 자유로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바리새인들을 외식한다고 정죄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 바리새인이다.

철저히 외로운 인간  
  
저술가이자 복음주의 신학자인 달라스 윌라드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자기의 첫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그 작은 생명체가 자신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느꼈다고 했다. 좀 이상한 고백이지 않는가? 부부간의 사랑의 결실로 나온 첫 아이인데  생김새나 핏줄의 연으로라도 자기의 분신이나 다름 없어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고백해야 정상이지 않는가?  

그는 그런 느낌이 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 아이가 점차 커 갈수록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가 얼마나 생길 것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또 자신의 잘못되고 미숙한 선택과 결정에 따른 실패로 인한 고통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럴 때마다 그 아이를 위해 그 모든 고통에서  막아주고 보호해 줄 방법과 능력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으며, 나아가 육신이 노쇠하고 결국은 죽어갈 때에 그 자신이 느껴야 할 외로움을 전혀 보상해 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식을 볼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이가 커 가며 점차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물론 기쁘고 대견스럽긴 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아이가 정말 자기 적성에 맞는 대학에 들어가고 올바른 직장을 가지며 어울리는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다. 그런 현실적 걱정 외에도 부모의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아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아이의 자기 주장이 분명해지면 섭섭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가끔 전혀 엉뚱하고 틀린 길을 끝까지 고집할 때는 밉다 못해 이 아이가 정말 내 배 속에서 난 아이인가 싶기도 하다. 첫째나 둘째 아이 키우면서 실망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막내에게는 너는 제발 여기서 더 크지 말아라 혹은 결혼하지 말고 평생 나하고 살자는 부질 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근래 한국의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안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고생할 것이 뻔한데 내 아이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주기 싫다는 것이다.  

자식뿐 아니라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사이도 그렇고 심지어 자기 자신 마저 자기와 전혀 관계 없는 듯 느껴질 때가 많다. 우연히 잠이 깨어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을 때 옆에 누운 아내나 남편을 바라 보면 정말 사랑스러워 못 견디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간혹 전혀 생소한 사람이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 든 적은 없는가? 과연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아 곤혹스러운 적은 없었는가? 나아가 이 사람의 마음이 혹시 나를 완전히 떠나지나 않았을까 싶었던 적은 없었는가?

그러다 또 자신에게 생각이 미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왜 지금 이러고 사나, 과연 무슨 목적과 재미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진 적이 없는가?  어제까지 열심히 일하던 내 자신과 지금 깨어서 잠 못 이루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나는 또 누구인지 완전히 달라 보이며 자신의 허깨비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적은 없는가?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영원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  욥이 말한 대로 적신으로 나와 적신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이 문제에서 만큼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돈이 많든 적든, 권세 명예 지성 건강과도 상관 없다. 성격이 온순하든 포악하든, 백 만불 짜리 고급 주택에서 호사스럽게 살든 원베드 아파트에서 옹기종기 살든, 도시에서 미친 듯 바쁘게 살든 시골에서 유유자적 하게 살든 모든 인간은 외롭다. 뿌리 깊은 외로움이 모든 인간의 인생 여정 길을 출생에서 사망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가끔 우리가 그 그림자를 못 보거나 잊고 있을 수는 있어도…

은밀한 하나님의 위로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태생적이고도 근본적인 외로움을 메우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 다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못 잊어 하는 것은 뺨을 맞고는 때린 자에게 찾아가 다시 때려 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자식과 배우자와도 분리되어 있고 자기 자신마저 스스로 싫고 미워질 때가 많은데 생판 남에게 가서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인간끼리는 상대를 아무리 진심으로 사랑한다 해도 그의 삶의 모든 구석까지, 그 존재의 심령의 근원에 있는 외로움은 완전히 채워 주지 못한다.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가식과 위선이 없고 정말 순수하다 해도 상대의 태어날 때부터 텅 비워져 왔던 그 공간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 일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다. 거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선 마지막까지 상대를 책임져 줄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갖고 있는 이 땅에서의 실패와 상처, 채워도 채워도 완전과는 거리가 먼 갈급함과 부족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는 데서 오는 시기와  질투, 까닭 모를 불안 초조와 정해진 대상도 없는 분노와 저주로부터 우리를 치유해주고 채워 주시며 끝까지 책임져 주실 분은 따로 있다. 우리를 지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당신이다. 인간의 영원한 고독은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메워 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큰 길 어귀에서 큰 소리로 기도한 것은 어쩌면 저들이 가장 외롭다는 증거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자라고 절규한 것이다. 예수님이 신자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이 기도의 형식이나 장소를 규정하는 말씀이 아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야단치시는 말씀도 절대 아니다. 너희의 그 모든 외로움은 절대 세상에서 메울 수 없으니 나에게로  나아 오라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애타는 초대의 말씀이다.

“내가 너의 외로움, 슬픔, 상처를 안다. 너희의 눈물을 보았고 너희의 한숨을 들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또 다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찾아가는 그 외로움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내가 너희 곁에 있음을 왜 모르는가? 세상의 것 모두 내려 놓고 빈손 들고 나에게로 나오라. 내가 너의 눈물을 닦아 주고 너의 한숨을 가볍게 해 주겠다. 그 순간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은밀한 곳으로 나오라. 바로 그 은밀한 곳에서 내가 너를 만나주겠다. 더 이상 너는 외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내 강하고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고 두 번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니까.”

캄캄한 밤 하늘의 절규

존 윔버라는 미국 사람이 1961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가정 불화로 아내와 이혼하기로 했다. 아내와 세 아이는 Los Angeles에 남겨둔 채 밤 중에 차를 몰고 악사로 취직된 Las Vegas의 한 카지노 호텔로 떠났다. 너무나 괴롭고 절망한 나머지 고속도로 곁 한적한 사막에 차를 세우고는 캄캄한 밤 하늘을 향해 “거기 정말 누가 있다면 제발 나를 좀 도와주시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지금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가? 캄캄한 하늘에 있기는 누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껏 나를 이정도가 될 때까지 버려 두었다면 하나님은 없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자신이 이러다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겁도 들었다. 정신 차려 다시 차를 몰았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 모두 내가 잘못했으니 정말 서로 용서하고 다시 시작해보기로 해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 것 같은가? 무소부재 하니 어디든 다 있는 것인가? 좀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이렇게 다시 질문 해보자. “정말 하나님이 100% 계시는 것이 확실한 곳은 어디인가?” 교회인가? 목사님 사택인가? 부끄럽지만 이외로 아닐 수도 많다. 정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며 단 한 번도 떠나시지 않는 곳은 한국으로 치면 버스종점 달 동네나 지하도에서 누워 자는 고아나 집 없는 노숙자들의 곁이다. 그 곳에선 주님이 정말 한숨 쉬며 눈물 흘리면서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를 안타까이 지켜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절망 가운데 서 있다. 세상의 벼랑 끝에서 외롭게 서 있는 모든 인간의 곁에 주님이 함께 서 있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순간 주님이 먼저 들어가서 우리가 가는 앞 길의 낭떠러지를 막고 서있다. 그 순간 우리의 시선을 단 일초라도 세상으로부터 돌리면 전능하시고 긍휼에 넘친 주님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특별한 절차가 필요 없다. 예를 든 그 사람처럼 컴컴한 허공에라도  대고 “저는 괴롭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누구라도 저를 제발 도와주세요”라고만 하면 된다. 우리의 절망 끝에 계신 주님을 은밀히 찾기만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은 바로 그 때 어디로 눈을 돌리는가? 두 홉 들이  소주 병이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새벽기도에 주위에 들리는 것 아랑곳 하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다. 술 마시는 것이 큰 죄이거나 교인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세상에선 어떤 방법을 써도 너희의 외로움을 메워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설사 고매한 인격자나, 경건한 종교인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해도 그 칭찬을 받는 그 순간뿐이지 않느냐? 사람들로부터  돌아 서는 순간 또 밤마다 잠이 안 와 뒤척이는  시간에 어김 없이 찾아 오는 그 뿌리 깊고 채워지지 않는 고독을 과연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총뿐이지 않는가?” 한 번만 은밀히 주님 앞에 엎드리면 누릴 수 있는 충만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아내와 세 아이로부터 버림 받은 악사가 외로워 절규했던 네바다의 캄캄한 사막 한 복판에 주님은 함께 해 주셨다. 모세가 세상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미디안 광야에 양치기로 40년간 헤맬 때에도 주님은 거기 계셨다.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간 엘리야를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미세한 음성으로 함께 하시며 동역자 7천명을 남겨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끝 없이 배반을 당한 다윗은 어떠했는가? 장인과 아내와 부하와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조차 버림 받았던 그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 마다  세상에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육신과 영혼을 질질 끌고 나와 하나님 앞에 혼자  엎드렸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 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56:8)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 보았나이다.”(시63:1,2)  완전히 벌거벗은 적신으로, 세상에서 오직 혼자 된 모습으로 울부짖었다. 그런 그가 얻은 결론이 무엇인가?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63:3)  

골방으로 파고드는 신자

바리새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위선적이거나 형식적이었던 자들은 아니었다. 우리도 가식이 많기는 매 한 가지다. 오히려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는 그들이 훨씬 더 경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우리보다 더 불쌍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사랑은 파면 팔수록 샘솟듯 더 솟아난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과 체험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그 능력과 위로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된다. 영원하시고 신실하신 분이 절대 자기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자기는 더 이상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의 재미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자는 밭에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가 전 재산을 팔아 사듯이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 은혜와 사랑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더 이상 세상을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자꾸만 세상과 등지는 방향으로 돌아 선다. 기도 시간에 맞추어 큰 거리와 회당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 없이 골방으로 파고 든다. 문을 걸어 닫게 되어 있다. 주님과 일대일의 은밀한 대화와 교제를 통해 들려 오는 미세한  음성일지라도 그 만큼 큰 권능과 넘치는 은혜는 세상에서는 평생을 두고도 못 찾는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갈채와 사랑을 받아도 이 재미,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 감격을 맛보지 못한다면 가장 크게 실패한 자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으로 충분이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세상으로 가라고 하신다. 말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사람들의 보상은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도저히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라면 언제든지 돌아서서 은밀한 곳으로 나와 엎드리라는 것이다.

신자가 불신자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내 세울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믿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재미다. 은밀하게 나아가면 은밀하게 만나 주시는 그 은혜다. 저들은 재미를 찾아 세상으로 나가지만 우리는 재미를 찾아 세상과 문을 닫아 걸고 골방으로 들어간다. 은밀하게 기도해야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참 사랑을 은밀하게 맛 본자, 하나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을 확신하는 자는 그 분 앞으로 은밀하게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결론도 다윗의 것과 같다. “비록 겉 모습은 날로 후패해져 가고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지라도 주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에 감사할 뿐입니다.”  

날마다순종

2020.08.03 20:02:33
*.14.99.253

아멘!

모루두개

2024.10.15 22:50:52
*.230.44.2

아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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