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마6:19-20)

조회 수 1962 추천 수 115 2003.12.09 03:09:53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마태복음 강해 (87) 마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천국 간 장로님의 실망

어떤 장로님이 죽어서 천국을 갔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먼저 가서 처소를 예비 해 놓으시겠다는 약속(요14:2,3)이 생각나 하늘에 있는 자기의 영원한 장막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잔뜩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옆에 있는 성도의 집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형편이 없었다. 그래서 인도하는 천사에게 “아니! 천국에서도 사람을 차별 대우하느냐?”고 물었다. 천사가 “천국의 처소는 우리가 짓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땅에서 올려 보내 주는 재료만으로 짓습니다. 이 집도 전부 장로님이 보내 주신 것으로 지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다. 흔히 목사님들이 성전 건축이나 교회 행사 혹은 선교에 헌금을 많이 하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라고 말한다. 맞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나 비록 조크에 불과하지만 장로니까 틀림 없이 평신도보다 헌금을 많이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헌금 액수를 보고 축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헌금에 실린 성도의 중심을 보신다. 누가복음 21장에 동전 두 잎이지만 생활비 전부를 드린 한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다. 세상에 의지할만한 것을 전부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감사하고 내 인생을 완전히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표시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되돌아 올 보상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자체가 신자만이 누리는 축복이자 특권이라는 확신이 있지 않으면 주일날마다 헌금 봉투를 붙든 손이 떨리게 마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확장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기쁘다면 마지못해 하거나 아깝기는커녕 더 많이 하지 못하는 것에 오히려 가슴이 아프다.  

헌금하는 것이 천국에 보물을 쌓은 것의 하나인 것은 틀림 없지만 본문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할 당시는 아직 교회가 형성되기 전이었고,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은 오병이어 같은 기적으로 오히려 사람들에게 베풀었으며,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돈을 모금한 일도 또 제자들과의 공동체 안에 돈을 쌓아 놓은 적도 없었다.

하늘 대신에 이 땅에 보물을 쌓아라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고 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 층의 비밀 금고에 보관하는 것도 아니고 천국에 온라인 구좌를 만들어 송금할 수도 없다. 결국 공간적으로 따지면 이 땅에다 쌓는 것이다. 또 쌓아라는 말이 비록 비유적 표현이긴 해도 그 뜻은 미래를 대비해 비축하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좀과 동록과 도적이 끓어 이 땅에 쌓아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후6:10)이며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갈6:8)고 했다. 그럼 어떻게 이 땅에 보물을 쌓아야 하늘에 쌓은 효과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최근의 외환시장에선 유로 달러나 일본 엔화가 강세를 보이고 미국 달러의 가치는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한 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백불 짜리 달러를 장롱 밑에 모아두길 좋아 했었다. 꼭 미국이 강대국이기라기보다 달러는 금과 동일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부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액션 영화 다이하드3에 악당들이 미국 연방중앙은행의 지하금고에 굴을 뚫고 들어가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를 탈취해가는 장면이 나온다. 옛날의 미국 달러는 경제학 용어로 태환지폐(兌換紙幣)였는데 백 불을 들고 가면 정확하게 백불 어치 금으로 바꿀 수 있었고 돈을 찍어 낼 때마다 그 가치만큼의 금을 항상 준비해 놓았다. 그 영화에 나오는 금 덩어리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규모가 너무 커져 금이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자 금과 교환이 안 되는 불태환지폐 제도로 바꾸었다. 이전과 달리 미국 달러는 금이 아니라 단지 종이 조각에 불과하므로 이제는 장롱 밑에 구태여 달러를 보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백 불짜리를 장롱에 묻어 둘 필요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물론 돈은 썩지 않고 분명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불태환지폐의 경우는 반드시 돈의 미래가치를 판단해서 저축, 운용, 투자해야 한다. 쉽게 말해 지금 백 불로 LA 갈비 20파운드를 살 수 있는데 2-3년 후에 10파운드 밖에 살 수 없다면 명목가치 백 불은 그대로지만 실제 가치는 50불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미제 냉동고가 성능이 좋아 2-3년은 보관할 수 있으니 지금 갈비를 20파운드 미리 사는 것이 돈으로 보관해두는 것보다 낫다. 돈의 미래가치는 장래 어떤 특정 시점에 얼마나 많은 구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고 해서 죽을 때에 재물을 갖고 갈 수 없다. 대신에 하늘에 가는 시점 즉 먼 장래 죽기 전에 신자라는 존재 그 인생이 갖는 세상에서의 구매력이 얼마가 될 것인가의 문제다. 신자의 미래가치가 평가절하될 것인가 평가절상 될 것인가에 따라 보물이 쌓이는 장소가 땅과 하늘로 나눠지게 된다.

인간이 죽을 때 이 땅에 남기는 육신은 정말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 시장에 내어 팔아야 기껏 몇 백 불도 못 받는다. 그 가치는 소 한 마리나 코끼리의 상아 한 쪽보다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과 달라 이 땅에서 하는 일, 세상에서 감당하고 있는 역할, 주위에 끼친 영향력으로 그 가치가 달라진다.  

세 종류의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얽매여 사는 자, 현재에 충실한 자, 미래를 품고 사는 자다. 돈의 구매력은 평가시점에 따라 달라지듯이 자기 삶, 존재, 인생의 가치를 어느 시점에 두고 평가하느냐는 것이다.

자기 집안이 얼마나 뼈대 있는 가문인가, 부모의 재력이 얼마나 풍부한가, 자기 학력이 얼마나 화려한가, 또 교민들이 과거 한국에 있을 때 얼마나 잘 나갔었는가 하는 것들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더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세상을 의지하지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이지만 나아가 과거에 연연하고 의지하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 가진 것이라곤 일 센트도 안되면서 10년 전에 백 불 갖고 있었다고 자랑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바보인가?

현재에 충실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 주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당장 뾰족한 수가 없어 마지못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별히 이민 1세 중에 언어, 관습, 제도의 장벽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스스로 미리 반쯤 포기하고 정말 빈약한 모습의 현실에 안주하면서 매일 쌓이는 스트레스를 저녁마다 소주와 식구들에게 신경질 내는 것으로 푸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자신의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없이는 아무리 현실을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아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 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단순히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현재의 작은 것들이 하나씩 모이면 반드시 미래에 어떤 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현재의 주위 환경과 여건에 코가 끼여 그저 끌려 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일관된 방향을 갖고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금 당장 1-2년 사이에는 별로 차이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10년이 지나고 20년, 30년이 흐르면 그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진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아무리 현실이 사방으로 막혀 있다 할지라도 하늘을 올려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늘만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가끔 하늘에도 먹장 구름이 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름 위는 항상 맑다. 하늘을 향해 애통하고 갈급한 심령을 갖고 무릎을 꿇기만 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순식간에 직통으로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무작정 기도해선 안 된다. 자기 미래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해서 20년, 30년, 40년 후의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얼마만한 구매력과 가치를 가질는지 분명한 그림을 그려가며 기도해야 한다.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힘든 것이 꼭 주위 환경과 여건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 염려와 불안이 생기는가? 가장 큰 이유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장래 어떻게 될지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자기 미래가치에 대한 평가를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인생의 목표와 소망을 정해 놓지 않고선 절대 현재에 충실할 수 없고 나아가 현재 삶의 의미와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아닌 조금만 일에도 그저 불안 초조해 안절부절할 뿐이다.

그렇다고 미래의 꿈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머리 속에 허황된 큰 그림만 그려 환상처럼 붙들고선 그 쪽 방향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도 않은 채 막연하게 하나님이 해 주시겠지 손을 놓고 있다면 절대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만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악하고 무익한 게으른 종이라는 야단 밖에 맞을 것이 없다.

두 손을 내려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되는 대로 사는 어떤 게으른 자라도 거둘 수 있는 인생의 열매가 두 개는 있다. 무엇인지 아는가? 첫째 죄악이고 둘째는 죽음이다. 이 둘은 누가 안 가르쳐 주고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아무리 아이큐가 낮은 사람도 할 수 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미국의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가 죽기 직전에 자기 묘비에 적을 글을 스스로 이렇게 지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극작가로선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그도 게으름을 부리다 자기가 꼭 쓰고싶었던 희곡을 미처 쓰지 못해 미련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그가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여러분이 만약 지금 자신의 비명을 미리 작성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놓으셔야 한다. 앞날이 창창한데 재수 없게 벌써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가 반발할 문제가 아니다. 자기 묘비명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최소한 자기가 살기를 바랐던 인생의 방향을 향해 걸어 봤다는 것 때문에 미련은 없다.

죽음이 결코 불행과 어두운 것만 아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 고뇌할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죽을 준비를 제대로 하는 자라야 살 준비도 제대로 한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성장기와 먹고 자고 늙어 은퇴하여 쉬는 시간까지 빼면 실제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시간으로 따져 20년도 채 안 된다. 그것마저 조기 은퇴할 수 밖에 없는 최근의 사회구조로 인해 점차 짧아져 간다. 겨우 20년밖에 안 되는 세월마저 어영부영 보내선 어떻게 하겠는가? 살 수 있는 인생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어느덧 거의 대부분이 지나가버린 것을 발견한다. 인생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런데 어차피 누구나 우물쭈물하게 마련이니 시간 짧은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짧은 인생마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이다. 실패를 교정하거나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 한해선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그것을 겨우 깨닫는 순간 죽음은 이미 코 앞에 닥쳐 와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 온다. 그것도 불시에 아무도 알 수 없는 시점에 닥친다.

그렇다면 가장 불행한 인생은 과연 누구인가? 돈이 없어 쩔쩔 매거나, 핸디캡이 되어 방안에서만 누워 살거나, 이민 와서 영어 스트레스에 쌓이거나, 아파트 렌트비에 허덕이며 미친 듯이 사는 자도 아니다. 삶의 겉 모습이 화려한가 궁핍한가로 행불행이 나눠지지 않는다. 자기 인생에 목표, 소망, 비전이 없는 자가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땅에 왜 살고 있는지, 궁극적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자만큼 불행한 자는 없다.

절대로 착각해선 안 된다. 현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의 가치를 높인다고 미래의 가치마저 자동으로 오르리라 기대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생각은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보물을 쌓은들 좀, 동록, 도적이 끓는다는 것은 현재의 가치를 높이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오직 미래의 가치를 높이는 삶을 살아라는 뜻이다. 자기 인생의 미래가치를 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자만이 현재의 가치도 높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돈이란 인플레가 있어서 장롱 속에 뭉쳐 쌓아둔들 별 의미가 없다. 누구나 실감할 수 있는 간단한 예로 캘리포니아의 집 값이 2-3년 사이에 근 두 배가량 폭등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경제학자, 부동산 전문가도 생각 못했다. 백 불짜리를 장롱 속에 모아두지 말고 차라리 다운페이 얼마하고 집을 샀더라면 백번 나았지 않았겠는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죽어 천국 가느냐 못 가느냐, 가서 어떤 대우를 받느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사후 심판이 두려워 천국 보험 들듯이 종교적 행사에 헌금 많이 하고 마지못해 교회 출석한다고 하늘에 보물이 쌓이지 않는다. 또 그렇게 교회에 출석해 봤더니 현실에서 뚜렷하게 나아지는 것이 없어 신앙 생활이 시들해져 버렸지만 그만 두기 뭐해 마지못해 주일 날 출석하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 눈 앞에 불똥 떨어진 일만 붙들고 온갖 죽을 상을 써서 울고 불며 메어 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까?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한 신앙이 아닌가?

우리 속에 보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오직 그 분께 있음을 확신하는 자는 절대로 이 땅에서 세상과 죄악과 사탄에게 더 이상 묶일 수 없다. 세상의 어떤 환난과 핍박도 우리를 제한하거나 실패케 할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셨고 그 권세가 신자가 발을 디디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는 이민 생활이라도 그 가운데 누구에게나 반드시 예수님의 한 줄기 빛이 비취고 하나님의 소망이 살아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당부하셨다. 단순히 믿음을 키우고 환난을 참아내라는 말씀이 아니다. 신자의 기질, 성격, 품성을 담대하게 바꾸라는 말씀도 아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로 바뀌어라는 것이다.

네 인생의 미래가치를 분명하게 붙들고 진정으로 그것을 이뤄지길 소원한다면 주님께 기도하여 한 걸음씩 주님의 인도하심 대로 적은 일에 충성하며 살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신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신자가 언제, 어디, 누구, 무슨 일을 만나든 지켜주시고 승리케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 우리 인생의 미래가치를 붙들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해야 한다.

한국의 YS 전임 대통령은 중학교 때부터 자기 책상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 김 영삼”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고 한다. 40대 초반에 40대 기수론을 제일 먼저 제창하며 당시 60, 70대들이 정치를 주무를 때에 감히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노정객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비웃었다. YS는 요즘식으로 치면 386세대가 설친 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40대인 DJ가 비록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지만 당내 경선에서 이겨 그 해 선거에 나갔고 YS는 그 후 20년이 지난 60대 중반에 평생의 목표였던 대통령이 되었다.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선지 20년, 평생으로 치면 60년 만에 한 우물만 파서 성공했다.

그렇지만 그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끝났다. 비록 그 분도 장로였지만 자기만을 위한 목표였지 그리스도 안에서 세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었고 자기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드러나기 만을 매일 기도했다면 어찌 아들의 대형비리가 생길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운 목표라고 해서 신자 모두 목사, 선교사, 장로가 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든 신자가 소망하는 것,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단 그 일에 실린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 보았을 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야 한다. 죽은 후에 하나님과 맞대면 했을 때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자신이 있으면 된다.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이 천국에 미리 마련해둔 신자의 처소가 아름다우리라는 확신이 선다면 돈 버는 일, 그것도 수천만 불 버는 일도 얼마든지 미래 목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신자가 이 땅에서 감당하는 역할이 세상을 향해 얼마나 큰 구매력을 가지는가를 따져 보면 된다. 신자의 미래가치가 불신자와 맞먹느냐 모자라느냐의 문제다. 신자 한 사람이 있으므로 불신자 한명을 책임질 수 있느냐, 열명을 보살필수 있느냐, 천명을 사랑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아니면 역으로 신자가 불신자 한 명과 비슷한 가치를 보이거나 그 보다 못하다면 하나님은 절대 기뻐하시지 않는다. 신자가 가는 길 앞에 죄악과 사탄이 물러가느냐 더 설치느냐의 차이다. 신자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미래가치가 평가 절상되는 인생을 착실히 살 것인가 아니면 평가 절하되어도 무감각하게 흘려 보낼 것인가의 문제다.

올 한해도 벌써 12월이 되었다. 2003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이 되었다. 여러분들은 과연 신년 초에 품었던 년 말에 대한 미래가치가 이루어졌는가? 올 해의 인생과 삶만 따져서 평가절상 되었다고 확신하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을 자신하는가?

시간은 절대 인간의 형편과 사정을 봐 주는 법이라고는 없다. 사정없이 밀어닥쳤다 순식간에 밀려 나가버린다. 무지무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시간이란 정확하게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속도로 흘러간다. 하나님 뜻 안에서 자신의 미래가치를 붙들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만이 이 시간의 속도를 통제할 수 있다. 그런 자만이 하나님의 열매와 상급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뜻을 정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인도하고 계신데 더 이상 무엇을 염려하고 불안해 할 것인가?  


사라의 웃음

2011.08.02 11:56:48
*.161.89.37

무지무지 빠른 속도의 시간들...
이 시간들 속에서 저의 묘비명을 생각하며 살아야함을 배웁니다.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

날마다순종

2020.08.24 16:47:30
*.14.99.253

중심에 오직 주님만을 소망하여 그 어떤것이던 충성된 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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