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7:1-7) 기독교의 하나님은 왜 아버지인가? 

구약성경강해 (53) / 민수기강해 (43)

 

“요셉의 아들 므낫세 종족들에게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왔으니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이르되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민27:1-7)

 

해가 서쪽에서 뜰 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할 목적으로 이십 세 이상의 남자들을 대상으로 이차 인구조사를 하도록 명했습니다. 남자 이십 세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할 수 있고 결혼하여 가장으로서 가계를 꾸려나갈 책임도 질 수 있는 나이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되며 특별히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여 요즘으로 치면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각 지파별로 숫자를 조사했고 특별히 인구의 큰 감소가 있었던 세 번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엄숙한 뜻을 신세대들이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이십 세 이상의 명수대로 땅을 분배하라는 지시가 알려지자 슬로보핫의 딸들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자기 집안에 아들이 한 명도 없으므로 아버지의 이름이 그 지파에서 삭제될 형편이니까 자기들도 기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4절)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했더니 그들에게도 동등하게 분배하라는 허락을 받았고 아들이 없으면 딸이 대신 상속 받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 되었습니다.(7절)

 

이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입니다. 한국은 1991년에야 비로소 아들과 출가한 딸이 차별 없이 똑같이 상속받도록 법이 개정되었습니다. 한국이 유달리 완고한 탓이 아닙니다. 남자우대 사상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보장한 것이 민주주의가 발원한 영국이 1918년 미국이 1920년 한국은 1948년 해방 이후부터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야 실현되었고 아직도 여성을 천대하고 동동한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나라 문화 종교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슬로보핫의 사건은 놀랍게도 무려 35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여자는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의 소유물 재산이자 성적욕구해소의 도구로만 취급되어졌습니다. 남성과 동등한 자격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입니다. 정말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입니다. 당시의 이방 족속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죄송하지만 정신이상자라고 표현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알다시피 문예부흥 이후에 비로소 제대로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작동되어서 그 동안의 온간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제도와 관습들을 뜯어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기득권층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엄청난 피를 뿌리는 오랜 항쟁 끝에 겨우 쟁취한 것입니다. 모든 개인의 인권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남녀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제도와 법규는 극히 최근에야 확립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미투(Me Too) 운동에서 보듯이 아직도 남녀 불평등의 과제는 선진국에서조차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주목하라.

 

주목할 것은 슬로보핫 딸들의 그런 요청에 모세가 대응하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상식과 관습에 따라 곧바로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그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무슨 문제든 항상 기도해서 결정했다고 단순히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두고 반드시 기도했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녀들의 요구가 일차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취급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집안이라 기업을 받지 못하면 자기들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따졌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보존하겠다는 것은 역으로 따지면 그녀들도 실은 남성우위 사상이 몸에 베여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당시로는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그것도 당사자인 여성들조차도 자기들의 인권을 신장하겠다는 시도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요구를 듣고서 여성을 존중해야겠다는 생각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이미 지시한 기업 분배의 방식에 당장 불합리한 문제가 생길 것이므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님께 여쭌 것뿐입니다. 그녀들은 물론 모세도 여호와의 계명을 순전하게 지키려는 뜻이 앞섰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며 교제했던 믿음의 종 모세도 남녀평등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그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사람들의 생각처럼 같은 지파의 다른 남자들에게 분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아무 주저함 없이 곧바로 딸들에게 상속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딸이 없을 때만 지파 내의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척 순서에 따라 남성들에게 분배하라고 지시했습니다.(9-11절)

 

요컨대 하나님의 뜻 안에선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지파 별로 공평하게 땅을 나누고 사이좋게 관리 유지하는 일에도 여자를 같은 자격으로 참여시키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물론이고 윤리적으로 너무나 미개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의 위치에까지 하나님은 내려오시어 그들의 관습 사고 문화는 그대로 두시고도 당신만의 분명한 뜻을 온전하게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모세의 일생은 참으로 되새겨볼 측면이 많은데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였던 그는 무려 팔십 년 동안이나 히브리인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애굽 왕자로 사십년 미디안의 양치기로 사십년을 보냈고 아내도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했고, 상처하자 아프리카의 구스 여자를 후처로 들였습니다. 누이 미리암이 그 일로 모세의 지도권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처음 도피 생활 중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재혼마저 동족과 하지 않았다는 불만도 내심 컸을 것입니다.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비교적 약한 모세를 하나님은 도리어 그들의 구원자로 세웠습니다. 열두 지파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지파 소속감도 가장 적었을 그로 땅을 지파 별로 공평하게 나눠서 엄격하게 관리하라는 계명을 실천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라 종종 가장 어울리지 않은 자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수행케 합니다.

 

고대의 왕궁에는 여러 나라의 미인들로 채운 후궁의 처소 할렘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모세는 한창 왕성할 나이에는 애굽 여자들을 포함한 여러 나라 여인들을 만나봤을 것입니다. 아내 둘 다 이방족속이었기에 모세는 당대의 다른 남성들보다는 여성에 대해 호의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슬로보핫 딸의 상속 문제를 처리하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가장 적격인 자로서 쓰임 받은 셈입니다.

 

말하자면 출애굽, 가나안 땅의 분배, 여성인권의 동등한 대우 등등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들이 인간이 계획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이룬 일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당신께서 행하셨을 뿐입니다.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한 사회와 역사에 직접 개입하여서 당신의 뜻에 맞추어 하나씩 점진적으로 당신께서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방향으로 고쳐나간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유일한 책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반드시 그 진리의 말씀 앞에 항복하고 헌신 순종해야만 합니다. 성경이 없으면 기독교인들의 믿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아무런 구원의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불합리한 규정

 

하나님은 태초부터 요즘 화두인 완전한 페미니스트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남자와 여자 모두를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었기에 그분의 자녀라는 신분 위치 특권에서 단 한 치의 차별이 없습니다. 당연히 인간 남녀끼리도 한 사람의 고귀한 인격체로서 서로 존중 사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언뜻 여성을 차별하는 것 같은 불합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까닭은 간단합니다. 종교 경전이라 의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그런 잘못된 관습들을 이미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행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아주 정당한 일이라고 자부하면서 행했습니다.

 

그만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인간들의 도덕적 영적 수준은 아주 낮았습니다. 바울이 그런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32)

 

유대인들도 애굽에서 사백년간 노예로 살면서 그런 풍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지금은 출애굽한지 겨우 일 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일일이 그 모든 관습들이 사악하니 당장에 금지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연한 일들도 무조건 나쁘다고 하니 너무 독선적이라고 여기고 아예 외면할 것입니다. 최대한 잘 봐주어야 조금만 잘못해도 그저 뜯어 고치려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만 주는 무서운 분이라고 오해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순전한 헌신은 없고 겉으로만 따르는 시늉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잘못된 문화와 관습은 그대로 두면서 그 잘못을 스스로 서서히 깨닫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 모든 잘못의 첫째 원인이 인간의 심령이 하나님을 순전히 따르지 않아서 생긴 것이기에 당장 한두 가지 잘못을 고친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무엇이 잘못인지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규정에 따라 인간이 자기 잘못을 온전히 고치고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말로서 알아먹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 자체를 성령의 간섭으로 새롭게 해서 새롭게 된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이전의 잘못한 관습 문화를 고쳐나가게 한 것입니다. 영적인 시체였던 인간을 먼저 영적으로 소생시키는 것이 급했던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조금 뜯어 고친다고 해서 영적시체가 되살아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현대인의 눈에 불합리 불공평 심지어 도덕적으로 악해 보이는 규정을 둔 것도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당신 되심을 희생하고 양보하려는 뜻입니다. 대표적 예로 당시 관습에 바탕을 두었지만 함부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게 해서 여성 권익을 보호해주려고 이혼증서 규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천오백년이나 흐른 예수님 당대에도 아내를 제 멋대로 버리는데 악용한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향해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롬2:23) 했다고 한탄한 까닭입니다.

 

결국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온갖 죄악들을 양심의 거리낌 하나도 없이 자행했습니다.(롬3:9-18) 하나님이 인간의 형편에 맞춰서 백보 양보해준 규정조차 제대로 못 지키는 인간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탓하는 것은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누워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성(性)적인 정체성은 무엇인가?

 

오늘의 주제와 연결해서 따져볼 논란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기에 기독교는 여성을 차별하고 남성만 우대하는 종교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공의와 사랑의 두 속성이 있는데 아버지라는 호칭은 공의만 강조하기에 어머니의 사랑을 베푸는 측면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영어성경에 하나님을 중성대명사로 표기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어머니로 표기하는 페미니즘적인 성경마저 등장했습니다.

 

그렇게 비평하는 동기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인류 역사와 신자 개인의 삶에 개입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권능을 너무 모르는 소치입니다. 마치 성경을 가장 잘 아는 것 같이 떠드나 사실은 최고로 어리석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셈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을 즉, 성(性) 자체를 만드신 분으로 성적 정체성과는 초월하신 분입니다. 성적 정체성을 그분에게 적용하겠다고 덤비는 것부터 큰 잘못이자 아주 불경한 죄입니다.

 

물론 그런 점을 잘 알기에 중성대명사로 호칭하지만 여전히 큰 잘못입니다. 중성은 생명이 없는 물건을 지칭합니다. 하나님도 분명히 지정의 인격을 갖고 살아 역사하는 존재입니다. 성적 정체성을 바로 표기하려다 하나님을 한갓 무생물로 비하시켜버렸습니다. 비유컨대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를 태워버리는 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여성으로만 지칭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남성명칭만의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해놓고 여성명칭의 하나님만 강조하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면 필연적으로 죄에서 구원하고 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은 경시됩니다.

 

남녀 중에 한 쪽의 성만 갖지 않는데 성경이 굳이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뜻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끼리 이런 논쟁이 일어날 것을 모를 리 없지만 일부러 그런 혼란을 계획 방치하실 분도 아닙니다. 바꿔 말해 사람들이 문제 삼고 있는 성적인 정체성을 밝히려는 뜻도 아니요, 당신의 속성 중에서 공의의 측면만 강조하려는 뜻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당신을 중성으로 지칭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 존재이므로 남성과 여성 중에 한 쪽을 택해 즉, 인간의 언어로 계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러면 인간의 언어가 갖는 한계성에 당신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아버지라는 표현에도 하나님은 비천한 인간의 자리에까지 스스로 낮추시는 성육신의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성육신의 원리가 뜻하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먼저 인간 세상에 직접 내려오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며 인간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구원으로 택하신 백성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의미도 당신의 성적 정체성이나 공의의 속성과 무관하게 당신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들의 이해 수준에 맞게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첫째가는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평생토록 보호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대에서 이 일은, 사실은 오늘날도 거의 마찬가지이지만 아버지가 담당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아버지의 성을 따라 이름을 짓고 법원에 등록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슬로보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이름이 제거되는 것을 염려한 까닭도 아버지 이름으로 대변되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지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의 법정에 있는 그분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그 후로 그분이 자녀 된 신자의 전 존재와 삶과 일생을 아버지 되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보호 인도하시게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첫째 이유입니다.

 

나아가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에 가입한다는 뜻도 됩니다. 같은 부모를 가지기에 같은 이름을 지닌 형제자매들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와 자매로써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세상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옮겨 심는 그런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인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종 일관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단순히 성자와 성부라는 공적인 관계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성부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아빠와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빠는 알다시피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에 사랑의 속성을, 아버지는 공적인 관계를 나타내기에 공의의 속성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남성 정체성으로도 얼마든지 사랑과 공의를 함께 드러낼 수 있는 호칭의 본을 보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엄마 어머니"라고 부르면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따뜻한 느낌을 주는 단어로 Mother가 매년 압도적인 일등으로 뽑힙니다. 엄마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호칭에서 공의의 하나님을 떠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하나님으로밖에 인식되지 못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언어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고 인간의 관습 사고는 물론 감정까지도 감안하여 당신을 스스로 낮추신 은혜인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호칭을 남성과 여성 중에 어떻게 부르느냐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온전히 누리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미국 부부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니(Honey)라고 불러도 진정으로 사랑하느냐는 별개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하나님을 아버지 나아가 아빠라고 호칭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 하늘과 땅이 뒤집어질 정도의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신성모독 죄를 사형 조건에 하나 더 추가하는 셈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실제로 성자 하나님이었을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완벽하게 사랑과 공의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다르게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 진리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할 때까지는 제자들조차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인간들은 영적으로 미개했던 것이며 그래서 자기들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의 호칭에 대한 성적 정체성을 갖고 아무 의미 없는 토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인해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예수님을 본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두 번이나 명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두 번 다 아들의 영,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탄에 미혹되었던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 즉 그분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신자의 옛사람 불신자시절에 심어준 무서워하는 영이 무엇입니까? 선행을 못해 정죄당하고 심판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로 바쳐져서 인간의 죄의 형벌을 정확하게 갚았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습니다. 또 그 은혜를 믿는 자를 살려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기에 하나님의 사랑도 함께 실현되었습니다.

 

요컨대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실제적인 자녀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처럼 하늘의 영광을 입고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얼마든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또 그렇게 불러야만 한다고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칭보다 실천이 우선이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호칭이나 그분의 속성을 신학적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더 이상 정죄함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서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갖는 것이 믿음으로 행할 바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듯이 신자들도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평소에 유지하고 세상 사람들 앞에 온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본문의 슬로보핫의 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당시의 유대사회가 철저히 남성우위 사상에 주도되고 있는데 여성이 그것도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스로 여성인권운동이라고 자각한 것은 아닙니다. 지파별로 공평하게 나눠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정이 생겼음을 용감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업 분배에 여성들도 동참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여성을 절대로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신의 진리를 그녀들을 통해서 드러낸 것입니다. 그녀들도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사람들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이 구체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어도 담대히 그분의 뜻을 밝혔던 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그녀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였음에도 공평한 분배를 통한 하나님의 공의는 물론 여성도 차별하지 않는 그분의 사랑까지 실현하는 일에 쓰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칭을 중성 내지 여성으로 부르겠다고 덤비는 것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마저 겉으로 드러난 외모로만 판단하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잔인한 심판을 일삼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야말로 당신 백성들의 완악하고도 반복되는 타락을 참고 또 참아주신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당신과 원수 되는 자리에까지 치달아도 그들을 향한 사랑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신 분입니다.

 

본문만 봐도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 분임을 명백하고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그들은 너무나 단편적이고도 알량한 성경지식으로 하나님을 도리어 비하시켜 버렸습니다. 자기들의 종교 지식적 만족과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대가로 삼아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야단친 바리새인들의 행태와 똑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뜻을 부인하는 짓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구원해주시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의 은혜도 제대로 모른다는 반증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절대로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선포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11:11)

 

이 땅에서의 공사역 중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을 절대로 외모로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여성이라고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수가성의 그 한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찾아갔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었습니다. 창녀들을 아무 주저함 없이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나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당신의 족보에 죄인과 이방인인 여성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나아가 부활의 첫 목격자로 증인으로 자격이 없는 여인들로 세웠습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슬로보핫의 딸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말슴인 성경에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스스로에게 정말로 심각하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저 없이 담대하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있고 또 그 관계가 실제 삶에 실현되어서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알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해 우리를 보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먼저 인정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주님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한 자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베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뜻은 이웃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자신에겐 하나님의 공의를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떤 극심한 고난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똑같이 온전하고도 넘치도록 실현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은혜를 제대로 발견하여 누리고 또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슬로보핫의 딸들이 당시로선 어떤 남성도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믿음의 고백을 담대하게 온 이스라엘 회중들 앞에서 선포했듯이 말입니다. .

 

12/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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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master 2020-12-15 77
143 (욘3:6-10) 하나님은 불신자의 기도에도 계획을 바꾸는가? master 2020-11-24 71
142 (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master 2020-11-24 17
141 (욘1:4-10) 이상하게 일이 자꾸 꼬이면? master 2020-10-23 42
140 (욘1:1-3) 그래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master 2020-10-23 39
139 (창:25:19-23) 불신자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는가? master 2020-10-23 188
138 (왕상1:5-6) 솔로몬이 이스라엘 타락의 원흉이다. master 2020-10-10 41
137 (창32:24-31)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겨보았는가? master 2020-09-04 420
136 (창31:6-13)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master 2020-09-04 73
135 (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7-26 110
134 (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master 2020-07-25 162
133 (창27:18-29) 이삭은 야곱인줄 알고 있었다(?) master 2020-05-27 364
132 (수6:15-21) 하나님의 뜨개질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master 2020-04-21 30
131 (수2:8-11 & 23,24) 여리고 주민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master 2020-03-01 87
» (민27:1-7) 기독교의 하나님은 왜 아버지인가? master 2019-12-25 763
129 (민25:6-13)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세상을 질투하라. master 2019-12-25 220
128 (민22:17-30) 너무나 번거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master 2019-11-14 145
127 (민22:1-6) 신자 대신에 복수해주시는 하나님 master 2019-10-12 179
126 (민21:4-9) 미신 같은 놋 뱀 치유 사건 master 2019-10-12 97
125 (민17:8-13) 구원 받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master 2019-08-12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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