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잘 믿는데도 왜 삶은 자꾸 꼬여 가는가? (마11:1-6)

조회 수 2759 추천 수 122 2004.11.10 02:11:51
마태복음 강해 (126) 11/7/04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상한 베스트셀러

흔히 성경은 영원한 베스트 셀러라고 칭한다. 그런데 좀 이상한 베스트 셀러다. 가장 많이 팔리면서도 가장 안 읽히는 베스트 셀러다. 일주일 내내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설교 본문을 봉독할 때 몇 절 따라 읽고 치운다. 평생을 볼 책이라 그런지 행여 찢어질까 구겨질까 아예 가죽 케이스에 넣어 지퍼까지 채워 보관한다. 신자가 나중에 천국가면 하나님은 틀림 없이 평소 읽던 성경에 얼마나 손 때가 많이 묻었는지를 가지고 상급을 정해 줄 것이다.

신자가 성경을 잘 안 읽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핑계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성경에는 어려운 한자 말이 많은 고어체(古語體) 표현에다 또 간간히 앞뒤 연결이 이상해 이해가 안 되는 내용들이 많다.  그래서 성경은 반드시 먼저 기도한 후에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에 사사로이 풀면 안 된다.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과 영혼을 주장하셔서 그 뜻을 가르쳐 주셔야 한다.

여러분이 평소 때 본문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가? 방금 함께 봉독할 때에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추측컨대 틀림 없이 “예수님은 분명히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주시는 분인데 왜 나는 감기 몸살조차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한 일 중에 제대로 응답되는 것이 하나 없는가?”일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잡생각이다. 하나님께 투정하고 불평한 것이지 묵상이라고 할 수 없다.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기도는 그런대로 잘 한다. “하나님 저는 힘듭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위로와 힘이 되게 하여 주시고 또 현재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는다.

그러나 묵상을 하지 않고 그런 식의 기도만 하면 결과는 도덕적 죄를 한 두개 회개한 후에 초월적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을 학수 고대하는 것으로 그친다. 진짜 속마음은 고통에서 탈출이지 거룩해지는 것에 있지 않으면서 혹시라도 하나님에게 잘못 보이면 어쩌나 싶어 마지못해 성경을 읽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위로나 능력이 되지 못하니까 말씀은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신자 바로 곁에서 살아 역사함으로 동행하신다. 그런데 신자가 착각하는 것은 기도했더니 문제가 뚝딱하고 해결되어야만 하나님이 역사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히려 성경 말씀을 통해 주시는 위로가 거의 대부분이다. 고난 자체를 해결해 주시기 보다는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신다. 신자더러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하게 하고 소망 가운데 믿음을 더 키워나가게 해 주신다. 말씀을 모르면 신앙 생활에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또 그 은혜는 성경을 묵상하며 읽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묵상을 너무 어렵고 고차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학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묵상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거룩하고 엄숙한 계시의 음성이 들리거나 우리 속에 신령하고 고상한 생각이 가득 차 갑자기 눈 앞이 훤히 밝아지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묵상이란 뜻을 생각하며 읽는 것이다. 따라서 어렵거나 의심이 생기거나 앞뒤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묵상이다.  

본문의 경우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또 예수님이 그에 대해 이런저런 대답을 했다는 내용을 모르는 자는 없다. 글만 읽을 줄 알면 겉으로 드러난 문자적인 뜻은 쉽게 알 수 있다. 그 보다는 어떤 이유와 근거에서 그런 질문과 대답을 했는가? 또 그런 문답이 지금 나의 신앙과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만 할 것인가를 따져 보는 것이 묵상이다.  

생각이 바뀐 요한?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설교라기보다 묵상하는 요량으로 본문을 한 번 분석해 보자.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했다.(마3:11) 요한복음 1:29.30에선 더 구체적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내가 전에 말했던 내 뒤에 오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포했다. 본문 식으로 하자면 예수님이 오실 이 즉 메시야라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지금 오실 이가 당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되는지 물어 보았다. 그 때는 그럼 무슨 생각과 근거로 메시야라고 선언해 놓고 이제는 그 생각과 근거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묵상이란 의심되는 부분을 하나 붙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의심을 당시 상황과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주제와 연결해 차근차근 따져 보아야 한다.

그럼 과연 요한이 어떤 생각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선포했을까? 별다른 생각 없이 자기도 모르게 선포했다는 것이 그 답이다. 요한이 언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선언했는지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이다. 그는 아직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산상수훈과 천국 복음을 듣지 못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분석하여 이 분이 메시야임에 틀림 없다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척 관계라 잘 봐 준 것도 아니며 신통력을 가지고 알아 맞힌 것도 아니다. 예수님과 항상 100% 충만하게 동행하시는 성령님이 역사한 것이다.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주님더러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자 주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고 하셨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당신이 메시야임을 선포하라고 시킨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요한이 얼떨결에 로보토가 되어 꼼짝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혼과 생각 안에 들어오면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세상적인 지식, 선입관, 편견, 고집 등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반면에 신령하고 거룩한 당신의 일에 스스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동참하게 된다. 요한은 예수님 앞에 단 한 치의 의심 없이 진심으로 항복하였고 그 분이 메시야임을 세상 앞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렇다면 요한이 감옥에 갇히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몰라서 그 동안 그 믿음이 바뀐 것일까? 요한은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비난하여 미움을 사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하여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듣곤 했으므로(6:20) 틀림 없이 요한에게 제자들이 면회 오는 것도 허락했을 것이다. 요한은 헤롯 왕이든, 간수든, 제자든 누구에게서든 밖에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본문 2절에서도 분명히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더 아리송하다. 소경이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스승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왔는데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 그대로 전하라고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는데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완전히 동문서답이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대답을 하신 까닭은 따로 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35:5,6) 그 때는 당연히 메시야가 올 때로서 그 분이 오시면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구약에 수 없이 예언된 그대로의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있지 않느냐? 너희 스승도 틀림 없이 구약의 예언을 잘 알고 있을 테니 가서 그 예언에 비춰서 판단해 보라고 전해라”는 의미였다.  

이 정도에서 지금까지 분석한 것을 중간 정리해보자. 요한은 이미 스스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인정하고 선포했고, 메시야가 오시면 일어날 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에도 정통했으며, 예수님이 실제로 그 예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보내면서까지 물어 본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 재확인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어느 정도 의심했다는 뜻이다.

만약에 의심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듣기만 해도 그는 틀림 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역시 그 분이 메시야임에 틀림 없구나. 그때는 성령님이 시켜서 얼떨결에 선포했지만 예언하신 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역시 하나님 하시는 일에 빈틈이 없구나. 오래 전부터 수 많은 선지자를 통해 그분의 오심을 예언했고, 나 같은 자에게도 그 분을 갈망하게 했고, 또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회개하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메시야 오심이 가까웠다’라고 선포할 수 있게 했구나. 내가 그런 큰 일에 쓰임 받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의심한 이유로는 한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이 하시는 행적을 서로 연관짓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 자기로선 풀 수 없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 요한이 판단하건대 지금 예수님이 하고 있는 일들은 메시야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유대인이 실패한 대로 처음부터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 구원과 개인 구원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유대인들은 왕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열광했다. 그러나 그 후 1-2년도 채 안되어 십자가에 처형 시킬 만큼 돌변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로마제국을 물리쳐 주지 않은 것 그래서 유대 왕국을 세상의 으뜸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한이 감옥에서 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에 따르면 군대를 양성하고 로마총독부를 상대하려는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매일 죄인, 세리, 창녀, 과부, 고아, 거지 같은 자들과 식사하고 교제하며 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들의 병을 고쳐 주고 있었다. 요한의 눈에는 예수님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로마를 대적할만한 돈 있고 똑똑한 자와는 전혀 상대도 않고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만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질문 한 뜻은 이것이다. “당신이 메시야라면 어서 빨리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구원하든지 그것을 위한 준비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 아니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나는 이 땅에 죄인과 병자를 구하러 왔다. 아흔 아홉 마리의 성한 양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였다.

지금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왕국이 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에는 차이가 없다. 예수님이 그럴 의사가 없는 것도 아니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일을 이루는 방법과 순서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요한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해 주면 백성들이 알아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잘 가꾸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현실적 여건과 환경을 풍요롭게 바꾸어 주면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가 되겠다는 것이다. 요한은 유대인들 전부의 요구 아니 모든 인간들의 생각을 대변한 셈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인간은 외부 여건을 호전 시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해준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풍요롭고 아무 문제가 없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악으로 달려가기 바쁘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먼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전의 삶과 인생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중생한 당신의 자녀들이 모이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실족’이란 흔히 잘못 알듯이 시험과 유혹에 빠져 죄와 방탕 속에 헤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아예 죄악에 빠트려 실족 시키실 리 없다. 헬라 원어적인 뜻은 길을 가다 돌에 부딪히거나 계단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혀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다가 중간에 방해물이 나타나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고 메시야를 대망했으며 세상과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고 따랐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런 요한의 의심을 두고 실족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 기대 대로 제대로 안 채워주니 다른 곳에서 그 부족분을 채워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여러분이 맨 처음 본문을 읽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가?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님이신데 왜 나를 요 모양 요 꼴로 그냥 두시는가?”였다. 바로 그런 의심과 불평을 갖는 것이 실족이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가다가 넘어졌을 뿐이다. 이천년 전에 요한이 가졌던 의심을 신자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한다. 성경을 천천히 묵상하며 읽지 않고 그저 눈으로 대충 훑어 지나갔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물어보자.

그럼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다. 지금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신다고 가정해서 요한 같은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고 해 보자. “예수님 왜 내 생각, 기대, 소원, 기도 심지어 믿은 대로 주님은 움직여 주지 않나요? 당신 대신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나요?” 예수님이 어떤 답변을 주실 것 같은가?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라고 하실까? 아니다. 우리가 그 답을 듣고 “맞아! 내가 잘못 했어 믿음이 약해, 이제는 두 번 다시 의심 안 해야지” 한다고 제대로 지켜질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그런 결심을 지금껏 수도 없이 하고 지키려 노력해 보았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지 않았는가?  

물론 예수님이 그 말씀도 덧붙이시겠지만 그 전에 먼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답변을 똑 같이 하실 것이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느냐?” 무슨 뜻인가? 그런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믿으라는 뜻인가? 아니다. 내가 세상과 너에게 베풀었던 일들을 곰곰이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할 것 없고 소경, 귀머거리, 문둥병, 앉은뱅이 같은 병은 현대의 첨단 의술로도 못 고친다.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는 원상회복 시킬 능력이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도대체 이런 일이 이전에 일어난 적이 있더냐? 어느 누구도 겪고 보지도 못한 생전 처음 일어나는 일이 아니냐? 이 일을 메시야가 아닌 자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일을 보아라. 그리고 생각해 보라.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이라고 대답하셨듯이 오늘 날의 신자에게도 똑 같은 대답을 하신다.

“네가 맨 처음 나를 믿었을 그 때를 회상해 보라. 그 일은 생전 처음 너에게 일어난 일이지 않느냐? 세상에선 도저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을 생전 처음으로 겪었지 않느냐? 네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고 그 분 앞에 항복한 것이 다른 누가 시키거나 도와서 한 것이더냐? 네 스스로 노력하고 결단해서 믿은 것이더냐? 너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세계가 진정한 인생의 실체이며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느냐?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궁극적 절대자와 일대일로 대면했지 않느냐? ”

“오직 그 분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으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의 눌림과 매임에서 풀려났지 않느냐? 네가 능력 있고 선하며 의로운 구석이 있었다면 하나라도 꺼내 놓아 보아라. 이전에는 네가 최고로 똑똑하고 네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했지만 제대로 이뤄 놓은 일이 있었더냐? 이땅에서 네가 기껏 자랑했던 모든 것들이 헛되고 썩어 없어질 것 밖에 더 있었느냐?”

“사망의 길로 가고 있던 너를 누가 빛과 의와 거룩으로 덧입혀서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었더냐? 이전의 네가 바로 소경이요 앉은뱅이요 문둥병자요 귀머거리였지 않느냐? 그러나 이제는 네가 그 죽음에서 되살아 났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것을 확신하지 않느냐?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네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신하고 또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보았고 만났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분이 하시는 일이 이상하게 잘못되어 간다고 의심하는 네가 더 이상한 것 아니냐?”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환경과 여건을 바꿔주기만 하면 굳건한 믿음 위에 서고 인격을 올바르게 잡을 자신이 있다고 고집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신자 자신을 먼저 바꾸시겠다고 한다. 그런 후 신자더러 환경을 바꾸라고 하신다.
그것도 세상 사람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능력과 실적과 외모와 형통과는 전혀 관계 없는 방식이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 자신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며 차츰 가족과 이웃과 직장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으로 누룩이 번져 나가듯이 확장 시키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한 마디로 “그래 너희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그 분의 뜻대로 순종한 후에도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의심이 가는지 그 때 가서 따져보고 말해 보라”는 것이다. 빛 가운데서 의와 거룩과 생명의 길로 가는 자는 절대 예수님의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거나 그 길 위에서 자꾸 다른 길을 처다 보는 자만이 그분의 그분 됨에 확신을 못 가진다.

신자의 삶이 왜 자꾸 꼬이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셨다. 당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고… 역으로 말하면 실족하는 자는 복이 없다는 뜻이다. 신자로서 죄를 짓고 방탕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잘 믿고 크게 죄 지은 것 없는데 왜 일이 이렇게 자꾸 꼬여만 가는가라고 의심하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자꾸 삶이 꼬여 가겠는가? 역설적이지만 자꾸 그런 생각을 하니까 꼬인다. 또 언제 풀리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될 때다. 말과 생각이 씨가 되거나 재수를 나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자꾸 하면 하나님이 더 꼬이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부러 힘들게 만들어 골탕 먹이시려는 것이 아니다. 또 강제적인 물리력으로 겁을 먹게 해 항복 시키려는 의도도 없다. 신자를 당신과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기 원해서다. 고상하고 신령해져 죄를 안 짓게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다. 오직 신자의 모든 존재, 삶, 일생을 완전히 당신에게 맡기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라도 누락되는 부분이 있어선 안 된다. 어떠한 이유가 되었던 신자 스스로 챙기려고 따로 제쳐 두어선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쳤으니 기특하다고 형통을 상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다.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그 분의 지도에 맡기어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정말로 그 분에겐 단 한치의 잘못, 모순, 왜곡, 사기, 거짓, 강제, 억압, 조종, 궤휼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잘 믿어 봐야지 노력하는 것만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그 분의 은혜와 사랑에 넘친 인도와 보호를 진심으로 갈망하여 실제로 체험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죽은 자를 살리신 바로 그 분이 오히려 연약하고 무능하며 어리석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더욱 원하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진심으로 자신을 향하는 자의 눈과 귀를 열어 당신만의 영광을 반드시 보여 주신다.

그런 체험이 쌓일수록 신자는 어떤 현실적인 고난이 따를지라도 그 분 안에 있는 것만이 기쁨과 평강과 자유가 넘치는 온전한 삶인 줄 확신하게 된다.현실 여건과 관계 없이 하나님 당신과의 교제만이 신자의 일생에 가장 우선적인 목적이 된다. 그래서 ‘잘 믿었는데 왜 이렇게 꼬이는가”라는 의심은 어느덧 신자의 생각에서 사라지고 없다. 신자의 믿음이 현실의 꼬임과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는 다른 차원으로 이미 넘어 갔기 때문에 그런 의심이 안 들게 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하든 많이 이끌어내는 실력을 배양해 현실의 고난을 해결해 나가는 신자의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갈고 닦고 깎고 다듬어서 당신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항복시키며 당신을 찬양하게 만드는 그 분의 싸움이다. 아브라함을 전 평생에 걸쳐 온갖 어려움을 겪게 하셨지만 결국은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외아들 이삭을 당신께 바치게 만들었듯이…    

성경이 왜 어렵고 지루한 줄 아는가? 성경의 의심 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묵상하지 않아서 그렇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한 아예 잘 읽으려 들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신자의 생각과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절대로 성경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될 수 없다.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말씀이 힘을 발휘하겠는가?

믿음도 마찬가지다. 신자의 속에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바로 갈 수 있다.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고 은혜와 능력이 따라 오지 않는다. 능력 있는 믿음은 오직 완전한 믿음만이 이끌어 낼 수 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메시야이며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선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도 특정한 종교 행위를 한 것 뿐이지 그 속에 생명이 없다.

예수님을 진정 주인으로 모신 자는 어떤 환난 가운데도 소망을 키워 갈 수 있으며 소망이 있어야 인내가 생기며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체질이 연약하기에 감정과 의지와 지성의 측면에선 신앙의 기복(Up and Down)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성경을 펴 들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이성은 넘어져 있어도 우리 영혼은 여전히 그 분을 따르는 길 위에서 바른 방향으로 서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말씀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확인하는 영원한 진리가 하나 있다. 그분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신 자의 운명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미 영원까지 보장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다른 메시야는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메시야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바로 그 환경과 여건 속에 있지 않고 혹시 다른 곳에 있는지 찾는 이에게는 복이 있을 수 없다. 오실 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다. 다른 이를 기다리지 않는 자에게만 복이 있다.











사라의 웃음

2011.09.29 09:55:34
*.161.100.136

딴엔 잘 믿는 것 같았는데 자꾸만 꼬여가는 상황들 앞에서 절절매던 순간들,
분명 구원의 감격은 넘쳐 흘러 예수님 품 속에 있음은 완연히 알겠는데 상황은
왜 그리 꼬여만 가는지?? 하며 골몰했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정말 너무도 꼭 맞춤형 훈련을 해 가시는 우리 하나님 앞에 무어라 감사를
드려얄지... 앉으나 서나 나의 거룩을 위해 너무도 수고하시는 예수님을
뵐 수 있도록 늘 말씀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섬세하신 배려 앞에
오늘도 또 울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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