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예배를 받지 않는 예수님(마1:2-6)

조회 수 1990 추천 수 117 2006.02.11 19: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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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3)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2-6)



죄 많은 예수님의 할머니들

고집 센 불신자 남편을 둔 여자 집사가 있었다. 남편을 겨우 설득하여 생전 처음 교회로 데리고 갔는데 마침 설교 본문이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몇 살에 죽었다”만 반복되는 창세기 5장 아담의 족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이 이런 지루한 설교를 듣고 두 번 다시는 교회에 안 나오려 할 텐데.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남편의 눈치만 보았다.

예배가 끝난 후에 “설교가 어땠어요? 지루했죠? 마침 본문이 족보라서 그렇지 다음 주에는 은혜 받을 수 있을 거에요”라고 남편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런데 남편으로부터 “응! 은혜 받았어. 사람이 아무리 몇 백년을 살아도 결국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죽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어”라는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 왔다.하나님의 말씀은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잠 오기 딱 좋은 장황한 족보라도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글이든 특이하게 표현된 부분이나 문맥상 자연적인 흐름이 아닌 것이 갑자기 등장하면 반드시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2-17절까지인데 본문(2-6절)이 바로 그런 부분에 해당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족보에는 여자를 올리지 않는데 특이하게 4명의 여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들의 특성이나 공통점을 추적해 보면 저자의 메시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다말(3절)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며느리이면서도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은 여자다. 라합(5절)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보호해줌으로써 여리고성 함락을 도와준 자기 민족을 배반한 창녀다. 룻(5절)은 암몬의 이방 여인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자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교로 개종한 과부다.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6절)는 다윗 왕의 충신의 아내로 남편이 전쟁에 출타한 사이에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은 유부녀다.

이들 네 명의 공통점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각기 근친상간, 매음, 간음의 죄를 범했다. 유독 룻은 그런 죄에선 자유하고 또 개종했지만 그 전에는 이방인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했던 죄를 범했다. 말하자면 현숙하고 성결한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아니 아예 반대편에 선 여인들이 예수님의 선조 할머니들인 셈이다. 예수님의 족보에 죄인과 이방인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고 하신 당신의 말씀을 이루려 탄생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 예수님의 선조 가운데는 이 네 여인보다 더 죄가 극심한 자도 많았다. 만약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온 메시야임을 강조하려 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앞세워 강조하는 것이 더 이치가 맞지 않을까? 단적인 예로 므낫세왕(10절)을 들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폭군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를 산 채로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에 비록 이방인이긴 하지만 룻의 경우는 심지가 굳고 아주 착한 마음씨를 지녔던 의로운 여인이었다. 종교 문제만 빼고는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모 형제와 주위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땅에서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그 종교를 따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녀 자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암울했던 사사 시대에 이방 여인으로서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했다는 것은 오히려 칭송해 주어도 모자란다.

그렇다면 저자 마태가 이 네 여인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혹시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탄생한 목적도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분명이 예수님은 의인  대신에 죄인을 부르러 왔고 마태 또한 메시야 탄생의 의미를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죄인과 의인의 구분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사보다 긍휼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1-13)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죄인과 의인 오직 두 부류로만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의인을 건강한 자라고 표현했는데 바리새인들이 해당되었다. 반면에 죄인은 병든 자로서 그 예는 세리와 죄인이었다. 그 구분의 기준이 단순하게 세상의 직업, 육신적 질병, 윤리적 범죄 여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 즉 유신론자 혹은 무신론자로 나뉘는 것도 아니다. 요즘 식으로 따져서 교인은 의인이고 비교인(非敎人)은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죄인 모두 유대인이라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었다. 나아가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정성에선 당대의 최고였다. 선행과 금식과 기도에 열심이었고 십일조도 꼬박꼬박했던 자들이다.  
    
예수님이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13절에 나와 있다. 당신이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으니 의인은 제사를 드리는 자이고 죄인은 긍휼을 소원하는 자가 된다. 그렇다면 의인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 제사를 드리는 자를 보지 않겠다는 뜻까지 연결되는 놀라운 결과가 되었다. 다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배 드리는 자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가?

이 구분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설명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온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내려갔느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세리와 바리새인이 똑 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 말하자면 둘 다 제사를 드렸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이 형식적으로 예배 드리고 세리는 진지하게 예배 드렸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리새인이라면 무조건 형식적, 가식적, 율법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그들만큼 예배를 진지하고도 경건하게 드린 자도 없었다.

사람이 일단 신전에 나오면 절대자에 대한 근본적인 외경심 때문에라도 진지해진다. 예를 들어 비록 마누라 강요에 못 이겨 교회에 나와도 자의든 무의식적이든 예배를 엄숙하게 드린다. 때로는 예의 창세기 족보를 들은 남편처럼 은혜도 받는다. 하물며 율법에 규정된 제사 제도를 잘 준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배를 제멋대로 드릴 수 있겠는가?

이상한 환자

세리와 바리새인의 차이는 누가 더 착한 일을 많이 했고 죄를 적게 지었는가가 아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가 높이는가의 문제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그것이며 결론도 그렇게 맺었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적인 예의 범절이나 윤리적 측면에서 겸손과 교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높이는가 낮추는가를 따진 것이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높이 보았기 때문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가 된 것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는데 앞장 섰다고 한다. 그들이 하지 않은 일을 허위로 지어냈거나 하긴 했지만 부풀려서 말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토색, 불의, 간음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초점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데 있다. 남과 다르니 자신을 남과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저는 성가대로 봉사하고 십일조 성실하게 내며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에 한번도 빠진 적이 없고 이웃도 잘 도와 주니까 하나님이 뭔가 특별 보상을 해주셔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자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 특별 대우는커녕 신자 대접도 못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무나 풍자적이고도 신랄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나는 남보다 뛰어납니다라고, 실제로 그러한 대로, 하나님 앞에 말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한 셈이다. “그래 네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 나도 인정해. 그래서 뛰어나게 대우 해줄게. 그런데 네가 뛰어나니까, 네가 잘났으니까, 네 혼자서라도 모든 것을 잘 해결하겠네. 내가 구태여 필요 없겠네? 그렇다면 구태여 특별 대우해줄 필요가 있을까? 건강한데 따로 의사가 무슨 필요 있어?”

바리새인은 스스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전부 진단하고 처방까지 했다. 의사가 전혀 필요 없다. 그래서 의사에게 나와서는 자기 진단과 처방이 정확하고 또 의사가 할 일을 대신 다 했으니 그 수고료를 내 놓으라는 셈이다. 주님이 보실 때에 바리새인은 전혀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 하는 이상한 환자였다.

반면에 세리는 어떠했는가?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했다. 하나님 앞에 자랑은커녕 꺼내 놓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말하자면 십일조, 금식, 기도, 선행은커녕 오히려 토색, 불의, 간음을 일삼은 자일 수 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라고 가슴을 쥐어뜯는 애통함 뿐이었다.

“저는 세금을 거두면서 항상 세율보다 더 받아 조금씩 뒤로 챙깁니다. 그것도 다 같이 불쌍한 동족의 돈을 말입니다. 저는 돈독이 오른 천하의 죄인입니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일단 돈만 봤다 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저는 도대체 의로워질 가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입니다. 하나님 처분만 기다립니다. 저를 죽이든 살리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이런 추하고 더러운 꼴이라도 혹시라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면 저를 외면하지 마시고 받아 주시옵소서. 저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제 평생의 간절하고도 유일한 소원입니다.”

세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파서 끙끙거리는 신음밖에 내지 못했다. 한 시라도 의사가 없으면 그 병이 더 도지는 중환자였다.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하고 추한 천하의 죄인이 주님 앞에 나와선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당신의 긍휼뿐입니다”라는 말 밖에 더 하겠는가? 세리야말로 의사인 예수님을 바로 찾아 온 진짜 환자였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네 여인도 이 세리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말은 비록 시아버지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근친상간을 했지만, 그 배경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가문에서 자기 자식으로 하여금 그 기업을 이어받게 하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라합은 온갖 더럽고 추한 죄악이 관영한 여리고 성에서 창녀로 그 더러움에 함께 몸을 담고 있었지만, 민족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생명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참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갈망했다.

룻은 우상을 숭배하는 고향 땅에서 재혼을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갈 바 모르지만 같이 과부 된 불쌍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부양하고 여호와를 믿는 백성에 속하는 일에 자기 일생을 걸었다.

밧세바는 남편이 전쟁을 나간 사이에 간음을 저질렀고 간부(姦夫)가 그 남편마저 살인하는 죄에 알게 모르게 연루되었고 또 그 불륜의 씨앗이 죽는 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틀림 없이 남편 다윗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했을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라는 고백은 사실상 다윗과 밧세바 부부 공통의 것일 수 있다.    

네 여인의 공통점이 죄인이라고 하는 뜻은 너무 단순하다. 성경적으로 죄인이 아닌 자는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그들은 세상에선 자신의 고난을 해결하고 죄를 사할 방도가 전혀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 본 가장 극심한 죄인들이었다. 세상에서도 죄인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아니고는 치유가 전혀 불가능한 치명적 환자들이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 뿐이다. 건강, 지성, 인격, 돈, 명예, 권력, 가문(족보), 종교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정성으로도 구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찾는 목적으로 의인과 죄인 두 가지로 나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중에 의인을 찾고 좋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죄인을 찾고 좋아한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남을 낮게 보고 자신을 높여서 하나님에게 자신에 대한 특별 대우를 요구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게 들고 나온 것도 자신이 한 일이요 하나님에게 받아가려고 요구하는 것도 어떤 보상 즉 겉으로 드러날 어떤 일이다.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자기를 치장하고 풍요롭게 하려는 것뿐이다.

하나님에게 보상을 받으려면 그분 앞에 꺼내 놓을 것이 있어야 하니 세상에선 구제와 선행에, 교회에선 기도와 봉사에 열심을 낼 수 밖에 없다. 율법을 준수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자로선 율법을 지켰다는 자랑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또 그에 따른 보상도 당연히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요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첫째 부류다. 세상에선 칭송 받는 의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죄인이다.

반대로 세리는 남보다 자기를 낮게 보아 하나님에게 자신만의 특별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윤리적 종교적 겸손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실제로 선행을 한 적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자랑은커녕 꺼내 놓을 것조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감추고 숨기고만 싶은 허물과 죄 투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넘어지고 지친 몸둥아리와 갈급하고 곤비한 영혼 밖에 끌고 나오지 못했다.  말하자면 자기가 이룬 업적 대신에 자기의 전 존재를 들고 나와서 오직 죄사함만을 받기를 원했다. 그가 하나님에게 바란 것은 그분의 긍휼뿐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주실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니라 그분 당신을 소망했다. 자신의 삶과 인생과 존재가 완전히 하나님에게 바쳐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선 손가락질 받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선 의롭다하심을 받은 의인이었다.    

불신자도 이런 구분이 적용되기는 마찬가지다. 솔직히 세상에 완전한 무신론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신의 존재 자체마저 100% 철저하게 부인하고 완전히 제 멋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는 사실 없다. 평생을 두고 절대자를 잊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외면하고 사는 것 같지만 신에 대한 경외 의식은 알게 모르게 잠재의식에서라도 작용하여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단지 교회 나와서 일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을 뿐 그들도 간혹 나름대로는 절대자를 찾는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 다니는 신자를 어떻게 비방하는가? 의지력이 약해서 자기가 노력하려고는 하지 않고 괜히 하나님에게 빌붙어 복만 받으려는 자라고 한다. 자기 힘으로 최선을 다해 하다가 잘 안 되면 그 때는 하늘의 뜻인 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의롭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은 교회 가서 방정맞게 박수치고 눈물 흘리면서까지 복을 비는 그런 치사한 행동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들이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아서 불신자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자와 자기와 연관되어질 수 있는 근거나 목적이 오직 현실의 축복 뿐이다. 그런데 그 축복이 절대자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예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는 남들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믿는 자다. 하나님의 치유가 필요 없다고 자부하는 의인이니까 심지어 자기를 위한 제사마저 안 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교인들을 비난하는 내용 가운데 있다. 하나님에게 빌붙어 복만 받으려 하는 자들이라고 평가 한다. 복음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는 그들의 눈에도 오늘 날의 교회 안에 바리새인들이 많이 보인다는 뜻이다. 금식과 봉사와 구제와 기도에는 열심이지만 그것을 앞세워서 하나님께 특별 대우만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 전부를 걸어서 새롭게 변화되려는 갈망이 없는 교인이다. 자기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의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자들도 불신자와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했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오직 두 부류의 사람으로만 취급한다. 당신에게 나오는 목적이 당신으로부터 복만 받으려는가? 아니면 자기의 전존재를 들고 나와 당신의 치유를 바라는가? 전자의 예배는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하며 헌물과 헌금이 많아도 받지 않으시지만 후자의 예배는 가슴만 치고 돌아가도 두 렙돈만 바쳐도 기쁘게 열납하신다.  

지금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 교인인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예배와 기도를 하나님이 틀림없이 기쁘게 열납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오직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치유만이 절실한 환자인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의인이라 혹시라도 남들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드는가 말이다.  

(나무 십자가 교회에서 12/23/2001 주일 설교한 것임)


정순태

2006.02.12 09:24:54
*.152.78.29

아멘!
수년 전 바리새인과 세리의 자세를 통한 깨달음으로 인하여 제 신앙의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든 세리이든, 그들은 성경에 나온 그대로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그들의 실제 삶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정말 훌륭한 삶을 살았고, 세리는 정말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최종 평가는 달랐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고민 많이 하다가, 결국은 목사님의 결론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던 기억이 납니다.
옛 기억을 되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사라의 웃음

2011.11.10 23:46:46
*.172.59.236

"지금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 교인인가?" 이 질문에 사실 "저는 세리에 속한 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고 싶고 또 "그렇지 나는 세리에 속해" 라고 당연시 했었습니다. ㅠㅠ
그러나... 자신에게 속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무서워요.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아도 속아넘어가기 너무도 쉬운 죄성을 발견토록
도우시는 말씀을 잠시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ㅠㅠ

날마다순종

2020.11.04 14:03:26
*.14.99.253

하나님앞에 나아갈때에 주님덕분에 승전보고서를 감사히 올리게 되든 순종치 못해 낙심한 마음으로 그저 긍휼만을 바라며 패전보고서를 올리든 오직 그분과의 만남, 교제 그자체를 진정 기뻐 즐거워하는 중심으로 늘 열납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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