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What If?”(만약 그랬다면?)(마1:1&17)

조회 수 1681 추천 수 98 2006.02.25 04:21:28

마태복음 강해(5)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로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마1:1&17)

세 시대 구분의 의미

본서의 저자 마태는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까지의 약 2,100년에 걸친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를 세 시대로 구분했다. 각 시대의 길이를 14대로 똑 같이 구분했지만 사실은 정확한 년대는 아니다. 이천 년을 셋으로 나누면 각 630년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순서대로 약 1100년, 500년, 500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적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족보 상에 생략된 사람이 다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마태는 구태여 열네 대를 강조함으로써 숫자 14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 알파벳에 일련 번호를 부치면 다윗이란 이름의 숫자가 14가 된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는 다윗 가문에 태어난 다윗과 같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윗이 그만큼 유대인들에게는 선하고 위대한 왕으로 기억될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이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마태가 이스라엘 역사를 구태여 셋으로 구분한 것은 각 시대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다. 나아가 메시야인 예수님이 그런 세 시대가 경과 된 후에서야 오셨고 또 그 세가지 의미를 다 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된다. 그럼 그 세 시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고 번창하여 왕국을 건설하는 시기였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 후손을 하늘의 뭇 별처럼 번성케 해주었고 온갖 기적과 이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푼 시기였다.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기까지는 왕국이 분열되고 외적이 침입하여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그 수많은 이적과 은혜를 맛보고도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인내하신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바벨론에서 예수님까지는 이스라엘이 적국에 포로가 되었고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며 전 백성들이 열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시대로 성경의 기록마저 거의 대부분을 침묵하고 있다. 차고도 넘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손을 들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시기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족보는 구약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요약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마저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에 빠져 우상을 숭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비록 징계는 하시지만 끝없는 긍휼과 자비로 인내하시고 그 가운데도 남은 자를 보호하셔서 자기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하게 구원코자 그런 세 시대를 지나 때가 차매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너무나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런 성경 기사를 읽는 현대의 신자들에게는 항상 풀리지 않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는가? 그들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한”(출34:10) 하나님의 은혜를 수 없이 맛본 민족이었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를 받고 홍해가 갈라지며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고 전투 한번 하지 않고도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적을 목도했다. 그런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가? 감히 두려워서도 바알과 앗세라 상에 절을 할 수 없을 텐데 혹시 좀 모자란 국민들인가?        

그렇지 않다.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머리가 가장 우수하며 그 도덕성과 영성에서도 세계 최고인 민족이다. 예수님 당시의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절대 도덕적,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뒤떨어지지 않았다. 과연 그렇다면 그들이 계속해서 실패했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을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1-3)

출애굽한 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러 먹을 것이 모자라자 불평을 털어 놓는 장면이다. 하나님께 큰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고 찬양한지 한달 만에 두 번째(마라의 쓴 물 사건이 첫번째)로 터진 원망이다. 그런데 그들이 범한 죄와 실패는 믿음의 백성이면서도 끼니가 떨어진 것 가지고 불안해 하고 원망한 것 자체가 아니다. 긴급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닥치면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백성도 그 정도가 약하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솔직히 그런 원망이 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평은 사실 모세나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자신들에 대한 것이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 있었더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말은 “너희를 따라 광야를 나온 것이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 선택하고 잘못 결단했다”는 뜻이다. 결국 문제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이 과거의 자기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 때문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영어로 치면 “What if?”다.

만약 내가 대학에서 전공을 무역보다 컴퓨터 공학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큰 회사의 중역은 되어 있을 텐데…  정말 조건 좋은 신랑감 중매가 줄을 섰는데 내가 왜 하필 이 남자랑 연애해서 지금 이 고생을 사서 하지… 아파트를 강북에서 40평 사느니 강남에 20평을 사는 게 훨씬 나았을 텐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만약 그 때 우리가…. 했더라면”이라는 원망과 함께 하나님께 반역했다.

개인적 간증

저는 그리 오래 살지 않은 인생의 전반부에 너무나 많은 실패를 겪었다. 그것도 공부, 건강, 직장, 사업 등 모든 분야에서 그랬다. 현실적 실패뿐만 아니라 인격적, 도덕적인 낭패도 많이 저질렀다. 내 혼자 실패한 것도 있지만 남에게 상처를 받거나 준 적도 많았다. 특별히 가장 가깝고도 오랜 동안 완전히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함께 배반도 당했다. 그럴 때마다 내 속을 항상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What, If?”였다. 물론 그 때는 예수를 믿기 전이었다.

그러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그 모든 실패와 상처와 잘못들이 바로 내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면서 내린 판단과 선택 때문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오히려 내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완전하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했더라면 그런 실패와 상처들이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을 알고 크게 달라진 점 중의 하나가 “What, if?”를 되풀이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할 이유와 근거가 더 이상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오직 원망과 불평의 근원이었던 그 수많은 실패, 잘못, 상처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당신께로 인도하기 위한 간섭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풍성하게 알게 해준 축복이자 너무나 큰 유익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특별히 지금 이 주의 종의 자리에 세우기 위해 너무나도 세밀하고도 완벽한 준비, 연단, 훈련의 과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졌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 심지어 이런 일마저 겪었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던 때인데 불경기라 서울 시내 한복판 빌딩의 5층에 있던 사무실을 외곽으로 이전했어야 했다. 큰길 가로 나있는 창문 턱에 달려 있던 에어컨을 떼어내면서 쇠로 된 밑받침 프레임이 밑으로 떨어져 지나가는 젊은 여자 회사원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혔다. 당장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회사의 대표라 병원으로 찾아 갔더니 그 여자의 아버지 되시는 분의 첫마디 질문이 “자네 결혼했는가?”였다. 혹시라도 자기 딸이 잘못되어 핸디캡이 되면 그 장래마저 책임질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뇌에 손상이 전혀 가지 않았고 또 그 피해자 가족이 인격적이 분들이라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수준에서 보상해주기로 합의했다. 큰 탈 없이 끝이 난 것이다.

그런데도 그만한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예의 “What, If?”가 또 작동했다. 그 사고를 낸 장본인이 회사 운전수인데 사실은 그 얼마 전에 그만 두겠다는 것을 억지로 말려 다시 근무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왜 저 놈이 그만 둔다 했을 때에 짜르지 못했나? 그 때 짤랐다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예수를 믿은 후에 그 사건을 가만히 회상해 보았더니 그 모든 일들이 오히려 은혜였다. 워낙 완악하고 교만했던 저를 당신의 자녀로 바꾸기 위해 그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간섭이었다. 세상에서 내가 최고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다 의지가 약한 자들이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고 지어낸 것이라고 큰 소리 쳤던 저였다. 하늘 끝과는 도저히 닿을 수도 없음을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정신 없이 바벨탑을 쌓고 또 쌓는 중이었다.  

그런 저를, 그것도 아직도 죄악 중에 있다 못해 당신과 원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택하시고 당신을 알게 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로 통과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런 방법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그 여자가 다치기는 하되 뇌에는 한 치의 손상도 가지 않게 하셨다. 너무나 교만이 심해 도저히 그런 비상 수단이 아니고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음을 그분은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두 번의 실패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을 아시고 모든 부분에서 온갖 실패를 겪게 했다. 저는 그저 세상의 향락과 형통을 향해 모든 수단을 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제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찾아 오셔서 죄악과 사망의 길에 완전히 망하는 것을 막으셨다. 그 수많은 실패가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다. 저에게 있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비록 그분을 알기 전이었어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와 징계의 시대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나 같은 죄인도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고백이 절로 새어 나오며 너무나 큰 감사와 기쁨으로 그분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드셨다.

이스라엘의 실패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징계의 시대로 나누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외형적으로 판단한 구분일 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세 시대가 사실은 동일하다. 은혜의 시대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죄를 적게 지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았던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징계의 시대에 그들의 죄가 더 많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세 시대를 다 통틀어서 인간은 죄악으로 실패했던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항상 동일했다.

이스라엘 전백성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당신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 없이 신실하다. 당신 자녀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신다. 무려 5층 높이에서 그 무거운 철 받침대가 떨어질 때에 작동하는 중력을 설계하고 운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다. 그분이 빌딩 바로 밑을 지나가는 젊은 여직원의 머리카락도 세고 계셨고 그 받침대의 무게와 바람의 방향마저 조절해 머리에 아주 알맞고도(?) 비슷하게 떨어지게 했지 않은가? 그 여자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게 한 반면에 당신이 택한 한 교만했던 죄인을 회개 시키기에는 알맞은 정도로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갑자기 죄악이 좋아서 탐닉할 정도로 품성이 변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영적인 자질과 실력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불완전한 죄인들이었다. 하나님 또한 당신의 당신다움에 변화가 있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인간은 항상 그랬던 대로 그저 핑계만 생기면 그분을 배반하려 들었고 그럼에도 그분은 끝까지 자기가 택한 자녀를 묶고 있는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반면에 정작 이스라엘이 저지른 큰 죄가 하나 있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안에 떤 것을 넘어서  불신자 시절에 항상 하던 원망 “What, If” 타령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애굽에 남아 있었더라면”이라는 후회는 “앞으로는 누가 뭐래도 내가 잘 판단해서 이런 잘못된 선택은 하지 않아야지”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약해졌는가 의심이라도 했으면 다행이다. 대신에 그들은 내가 잘못 선택했는가 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심지어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마저 부인하거나 잊어버렸다는 뜻이 된다. “그 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은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말이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으로 모든 일의 성공과 실패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은 신자를 완전한 벼랑 끝에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을 것 마실 것 하나 없는 신 광야로 이끌어 가듯이 사방 팔방으로 완전히 도움이 끊기게 한다. 그 뜻이 무엇인가? 오히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이 반석에서도 물을 낼 수 있는 권능으로 함께 하시고 있음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없는가 보다라는 의심부터 먼저 들지 않는가? 그래서 차라리 애굽 고기 가마 곁에 있었을 것을 왜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지라는 원망으로 발전하지 않는가?  

믿음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때 내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도…”라는 원망을 “그 때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하지 말고 완전히 기도하여 하나님께 맡겼더라면…”이라는 후회로 대체 할 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이스라엘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실패했다. 우리도 종종 그렇듯이 말이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꼭 하나 있다. 하나님은 신자의 형편과는 아무 상관 없이 언제나 신실하기에 당신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반드시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자의 의심, 불만, 불평, 원망, 불신앙과도 별개로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일 뿐이다. 따라서 신자란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책임져야 할 필요와 이유가 완전히 없어진 존재다. 언제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자에게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으며, 후회는 있을 수 있어도 절망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츰 매사에 불평은 줄어가는 대신에 감사가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마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셋으로 구분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이스라엘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죄악과 실패만 저질렀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으셨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으로 확증해 보이셨다. 바로 그 주님의 족보가 오늘 날의 모든 신자의 족보가 되어야 한다. 신자가 생각할 때에는 자기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은혜, 인내, 징계의 시대들로 구분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신자를 향한 당신의 사랑에는 어떤 구분도 있을 수 없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나무십자가 교회 1/6/2002 설교함, 2/24/2006 정리)


날마다순종

2020.11.06 16:51:46
*.14.99.253

'하나님은 신자의 형편과는 아무 상관 없이 언제나 신실하기에 당신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반드시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자의 의심, 불만, 불평, 원망, 불신앙과도 별개로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일 뿐이다. 따라서 신자란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책임져야 할 필요와 이유가 완전히 없어진 존재다. 언제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자에게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으며, 후회는 있을 수 있어도 절망은 없다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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