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너의 왕은 어디 있느냐?(마2:1-3)

조회 수 2837 추천 수 98 2006.04.26 03: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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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9)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마2:1-3)

예수 탄생의 신격화

동방박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눕혀 있고 그 앞에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귀한 예물을 바치며 경배하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아름답고 따뜻한 분위기의 크리스마스카드 그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주일 학교의 어린 학생들도 할 수 있다.

동방박사 사건은 아주 깊이 따져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쉽게 믿어지지 않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동방에서 박사가 와서 경배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이방인이 그것도 성경에 금지된 점성술사의 경배를 구세주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림 카드처럼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게 넘친 사건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의 또 다른 측면에는 너무나 음흉하고 포악스러운 탐욕과 시기가 가득 찼고 급기야는 수많은 영아들이 무참하게 죽는 피비린내 나는 참극으로 결말지어졌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자기 왕권을 위협할 대적으로 보고 베들레헴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미만의 모든 아기를 죽이도록 했다. 아주 간교했던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기를 자세히 물어(7절) 그곳에서 유대 땅까지 여행하는데 걸리는 기간을 감안하여 아기의 나이를 넉넉잡고 2살이라고 계산했었다.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가 이천 명 정도였으므로 이 때 죽은 아기는 약 2-30명 정도일 것이라고 추산한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다. 아기 살해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계획하여 주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박사들이 헤롯 왕궁에 가지 않았더라면, 혹시 갔더라도 거기서 베들레헴의 지리만 알아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방 박사의 출현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면 아기 살해도 하나님의 묵시적 허용 가운데 있었다는 뜻이 된다. 오히려 동방박사가 없는 것이 아기 예수 탄생 카드의 그림이 훨씬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려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 군부 독재시절의 J 대통령은 그 중요 업적으로 한강변을 개발하여 고수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강변 고속도로를 완비한 것을 꼽는다. 정확히 기억은 없지만 “한강의 기적”(?)이란 자서전에 좀 웃기는 내용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강 개발의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차라리 장군이나 대통령이 되어 남북통일을 시켜야겠다는 꿈은 어린아이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강을 보면서 강변에 순환 고속도로를 놓는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어린이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법이다. 아마도 자서전을 대필한 작가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속담처럼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려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바친 것은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를 신격화(神格化)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정작 메시야를 대망했던 유대인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동방의 이방인을 억지로 끌어들여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것이다.

레이저 광선을 비춘 별

이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아예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한 마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인간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의 탄생과 동시에 죄 없는 어린이의 살해 사건을 함께 등장 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성경 기자들이 예수의 이미지를 고의로 고양하려 했다면 그런 끔찍한 사건을 구태여 조작하여 첨가했을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장래에 비난 받을 것이 뻔히 예측되어도 실제로 일어났던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사들은 이방인이었지만 그곳에 흩어진 유대인을 통해 여호와 신앙을 갖게 되었고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특별한 별이 이스라엘 쪽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메시야 탄생의 징조임을 알아챘다. 그 별이 혜성이었는지 초신성의 강력한 빛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별을 따라 유대 땅으로 들어 왔다.

‘벤허’라는 영화에는 이 기사를 마치 무대 조명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비추듯이 하늘에서 별빛이 직선으로 베들레헴 위에 내려 비치는 모습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박사들이 오기 전부터 이미 유대 전체가 난리가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박사들도 헤롯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영화라서 메시지를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뿐이다.

유대인들은 미가서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5:2)라는 말씀을 익히 숙지하고 있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날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별빛이 그곳을 정확하게 비췬다면 유대인들이 먼저 경배했거나 헤롯이 바로 찾아와 말구유의 아기 예수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반면에 박사들은  정확하게 어디서 메시야가 나는지는 몰랐다. 그 별도 예루살렘 아니 유대 땅 전체를 비치고 있었지 특정 위치에 레이저 광선을 비추고 있지는 않았다. 또 그 별빛의 밝기가 잠시 약해졌는지 날씨가 흐려져 한 동안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로선 성경, 천문, 지리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유대의 수도(首都) 그것도 왕궁으로 찾아가 물어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9절)는 표현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동방에서 올 때 별은 분명 서쪽 하늘 유대 땅 위에 있었다. 점차 예루살렘에 가까워지면 그 별은 하늘 중앙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방 5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정중앙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다 궁중에서 안내 받은 대로 그 별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베들레헴에 이르니 딱 머리 위 수직 방향에 위치했더라는 뜻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

그런데 그런 특별한 별빛으로 예수님 탄생의 징조를 보이고 또 그 사실을 동방박사로 깨닫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바로 보내지 구태여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아이들을 죽게 만들었을까? 괜히 벌집을 쑤신 꼴이지 않는가? 차라리 그들을 성경에 더 능통케 하여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아니면 별의 움직임에 능통한 점성술사들이 베들레헴으로 바로 찾아갈 수 있었는데 별 관측에 실수가 있었던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린 무죄한 핏 값으로 죄인을 구원하셨으므로 그 탄생에도 무죄한 어린이의 피를 제물로 바쳐졌어야만 했는가? 그렇다면 그 구원은 잘못된 것이며 또 그런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난해한 문제들을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 불가사해하다면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가정해서 추리한 결과와 기왕에 발생한 결과를 비교해 보면 된다. 그러면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라도 그 결과에는 하나님만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만약 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바로 가서 조용히 아기 예수에게 경배만 하고 돌아갔다면 그 지경의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까? 결코 아니다. 그 작은 시골 마을에 특이한 형색을 한 이방의 박사들이 나타나 말구유에 누인 아기에게 당시로선 가장 귀한 물건들을 바치며 “유대의 왕으로 나신 이”라고 하면서 경배했다면 그 소문은 당장에 퍼져 나갔을 것이다. 가뜩이나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헤롯은 똑 같이 아이들을 몽땅 잡아 죽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메시야 탄생지를 물으러 갔건 안 갔건 그 후 사태는 동일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 아기들의 죽음은 박사들의 실수도 하나님의 잘못도 아니라 오직 헤롯의 죄악 때문이었다는 뜻이다. 나아가 박사들이 단순히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바치며 예배를 드리러만 온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태여 그들을 예루살렘을 거쳐서 가게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역으로 따져 보니까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직간접으로 다 주관하신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더더욱 그렇다. 특별한 뜻이 없는 사건이 성경의 기록에 오를 리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일수록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이 깊으니까 우리의 얕은 지혜로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 아닌가?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일수록 의심과 불만을 앞세우기 보다는 더욱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일단 이해가 되면 반드시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반드시 헤롯왕과 만나기 원했던 것이다. 그 만남의 목적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박사들이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유대인의 왕은 당연히 메시야의 별칭이다. 그러나 유대 왕국의 현실적 왕은 당연히 헤롯이다. 그런데 지금 감히 그 면전에 가서 “너 말고 진짜 유대의 왕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은 꼴이다. 가시적 정치적 국가로서 유대 왕국의 왕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실질적인 왕이 될 구세주가 지금 어디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방인 박사들이 물었기에 모든 열방을 함께 구원하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의미했다.

그런데 “나신 이”라고 과거완료 시제로 표현했다. 이미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 먼 동방에서 낙타를 타고 2년여에 걸쳐 오게 한 것은 단순히 아기 예수께 경배하게  하는 것이 일차 목적이 아니었다. 유대 왕궁 그것도 헤롯의 면전에서 메시야가 이미 탄생했다는 사실을 공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왕국이 이 땅에 도래했으니까 이 땅을 다스리는 낡은 왕국에 대고 가장 먼저 선포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사9:6,7) 유대인들로 이사야 선지자의 바로 이 말씀을 회상하도록 하나님의 열심이 그들을 헤롯 왕궁으로 보낸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모든 죄인들의 목에서 그 사슬을 벗어 줄 왕이 태어난 것이다. 부패한 죄악의 땅에서 모순과 왜곡과 갈등과 다툼을 겪으며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는 인간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치를 하실 왕이다. 그 왕의 치하에선 공평과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어 참 사랑의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42:1-3,35:5-6)

박사들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현실로 응했다고 알려 주기 위해 바로 왕궁으로 간 것이다. “이제 그 왕이 태어났고 그때는 지금 막 시작되었다. 너희들은 왜 이렇게 있느냐? 다 같이 그분께 경배하러 가야할 것이 아니냐?” 말하자면 박사들은 세례 요한에 앞서서 메시야 탄생을 알리는 하나님의 사자였던 셈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예루살렘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전할 자로 과연 누가 적합하겠는가?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는 말은 사실 그더러 당신의 통치는 실패했으니 물러날 준비나 하시오라는 말과 다름없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과 세속 왕의 통치는 그 본질이 다르다. 그러나 헤롯은 아기 예수 탄생을 자신의 왕위 찬탈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만약 그 소식을 유대인이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자리에서 두 말도 못하고 사형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먼 동방의 박사들이 격식을 갖추고 전한 메시지라 헤롯으로서도 속은 뒤틀리지만 참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을 상징하는 세 선물을 증정하며 무사하게 경배함으로 베들레헴 시골까지 그 아름다운 소식이 널리 퍼지게 했다. 물론 당시의 그들로선 자신들이 그런 역할까지 맡으리라고는 알지는 못했고 오직 하나님의 열심이 그 배경에 작용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오늘 날에도 찾아오는 동방 박사  

신자들마저 동방 박사가 단순히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것으로만 한정시킨다. 물론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에 하늘에선 엄청난 감격과 찬양이 따랐다. 온 우주가 숨을 죽였고 모든 천사들이 어린 양께 경배했다. 그러나 땅에선 정말 이름 없는 목동들과 멀리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만이 그 탄생을 축하했다.

기독교가 기껏 자랑하는 것이 “보라 동방에서도 박사들이 가장 귀한 예물을 들고 경배하러 왔지 않느냐?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정도다.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 탄생을 신비화 시키려고만 든다. 자칫 불신자들의 억지를 합리화시킬 소지마저 야기한다.

나아가 강대상에선 동방 박사들도 당시 가장 귀한 물건을 바쳤으니 우리도 주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서 섬겨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강조한다. 물론 맞다. 그러나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만약 섬김을 받으려면 바로 헤롯, 아니 로마의 왕궁에 태어났으면 되었다. 그 대신 척박한 유대 땅 그중에서도 가장 적은 베들레헴의 가장 낮은 말구유에 오셨지 않는가?

신자는 주님에게 마치 J 대통령에 아부한 전기 작가처럼 굴 필요는 없다. 그분은 우리의 제사보다는 인애를 원하시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러 오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슴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 성전 마당만 밝고 가며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보시고 당신께서 직접 영원한 산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죽는 척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만을 받으신다. 바로 그것이 참 경배이지 세상의 좋은 것으로 바쳤다고 다 경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방박사가 오래된 크리스마스카드 안에 금박을 두르고 박혀 있을 수만은 없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동화로 취급되어선 더더욱 안 된다. 그들이 찾아 간 곳은 이천년 전의 헤롯 왕궁만이 아니다. 성경은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 날의 우리에게도 박사들의 그 선포는 동일하게 울려 퍼져야 한다.

그들의 선포는 모든 믿는 자들의 심령의 왕궁을 찾아온다. 신자가 가정, 학교, 직장, 사회, 교회 등 어디에 있든 매일 매순간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는다. 특별히 주일날 아침에 찾아온다. 주님께 선물 들고 경배하러 가자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네 심령의 좌소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그분이 정말 너의 왕으로 네 안에 좌정하고 계시느냐?”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너의 왕은 누구인지 확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너는 지금 화려한 세상의 왕국에서 시기와 질투와 탐욕과 죄악의 냄새를 진동하고 있느냐? 아니면 아무리 겉모습이 후패하더라도 진리와 공의와 평강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살고 있느냐? 헤롯 왕궁의 고관대작이 되는 것과 말구유의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을 목표로 인생을 사느냐는 것이다.

동방 박사는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아니 전무후무한 전환점에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의 왕은 어디 있는가?” 예수가 자신의 진정한 왕이 아닌 자는 어떤 선하고 의롭고 풍요로운 모습으로 세상에서 사람의 칭송을 받더라도 여전히 사단의 부하일 뿐이다. 지금 현재 당신의 왕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인가? 세상의 권력자인가? 아기 예수인가?

(2/3/2002 나무십자가 교회에서 설교, 4/25/2006 정리)


김 계환

2006.04.26 10:18:12
*.131.10.2

What a brilliant insight this is! I thank God for this website. I am so happy to learn the true meaning of the wise men's story. This enlightment makes me thrill with joy. Thank you my pastor. One thing I want to mention is this: Apostle Paul defines Jew as a person who has been inwardly circumcised in the spirit, that is, a born again christian. I take this as the biblical meaning of Jews. So, Jesus came as the king of the born again believers. I know my pastor meant this, but I wanted to make it clearer. Thanks again.

정순태

2006.04.27 00:28:45
*.95.73.2

오늘도 깊은 말씀, 감사합니다.
주님 탄생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인간적인 회화화 및 동화화에 반대해 온 제 생각과 많이 일치합니다.
흔히들 동방박사의 사례를 곡해하듯, 구유에 누우신 주님의 모습도 왜곡되었고, 목동들이 들었던 천군천사의 찬송소리도 과장되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목동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합창은 베들레헴 지경의 모든 인간들이 들을 수 있었던 천둥소리와 같은 큰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오직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들려졌던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였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 보여진 별빛도, 목사님 말씀처럼 레이저 빛도 아니었고, 성화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깨어있는 박사들의 눈에만 비치었던 아주 희미한(그러나 그들에게는 분명한) 그런 빛이었던 것이지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하나 하나마다 정말로 깊은 하나님의 경륜이 숨겨져 있음을 알기에, 목사님처럼 그 깊은 보화의 일부를 캐내어 은혜 나눠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경 연구에 한계를 지닌 평신도로서는 더더욱 고맙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도 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시원케 해 주신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샬롬.

사라의 웃음

2011.11.21 04:11:45
*.120.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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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가 헤롯을 찾도록 인도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와 너의 왕이 누구이냐고 묻는 동방박사를 생각하며
말구유에 오신 우리 예수님만이 나의 왕이시기에 그 분께 무릎을 꿇고 오직
은혜와 진리만을 더더욱 간구하는 신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김승겸

2011.11.21 14:48:51
*.227.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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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단하십니다. 정말 이 사이트를 알게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감사합니다. 목사님 ^^ 항상 많은 도움 받고 있습니다.

날마다순종

2020.11.11 15:50:49
*.14.99.253

동방박사의 "메시야로 나신이가 지금 어디 계시뇨?" 라는 물음에 헤롯 왕궁의 고관대작이 되기 위해 세상의 왕궁에 있는지 아니면 말구유의 주님 앞에 엎드려 있는지, 나는 지금 둘 중에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를 매일 점검하여 항상 깨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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