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태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는가? (행9:10-22)

조회 수 1761 추천 수 119 2009.09.30 19: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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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는가?
사도행전강해(38)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10-22)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로 눈을 못 보게 한 후에 이제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불러 그에게 보내어 안수케 함으로써 다시 눈을 뜨게 했다. 모든 인생을 그분이 완전히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삼일 간의 죽음을 체험한 사울은 당연히 나음과 동시에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증인들 앞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빛 가운데 능력으로 오셔서 당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완전 무력화시켰다. 스스로는 꼼짝도 못하고 당신 앞에 무조건 항복하며 무릎 꿇게 했다. 거의 죽다시피 된 사울에게 주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랑으로 되살리고 남은 생애를 당신의 종으로 헌신하게끔 구체적으로 인도하셨다.  

아마도 사울에게 가서 안수해 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로선 큰 두려움에 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크게 놀라 두려웠겠지만 사실은 사울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더 그랬을 것이다. 비유컨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쥐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울이 누구인가?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는데 미쳐버린 악명 높은 자 아닌가? 지금도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의 체포 영장을 받아 유대 땅을 넘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바로 자기 같은 자를 찾아내어 핍박하러 오는 자에게 제 발로 찾아가라고 하니까 불을 들고 화약고에 뛰어들라는 것이지 않는가? 아무리 주님의 명령이라고 해도 선뜻 “예”하고 순종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아나니아의 그 심정을 잘 아시는지라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세밀하게 지시하셨다. 앞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특별히 장소와 시간을 명시하며 가르쳐 준다는 것은 정확하게 그대로 이뤄지리라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 단순히 당장 일어나 사울을 수소문해 찾아가 기도해 주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아나니아가 순종하기 참 힘들었을 것이다.  

주님의 지시가 얼마나 세밀했는지 보자. 먼저 직가(直街)라는 거리 이름과 유다 집이라고 찾아가야 할 집도 가르쳐 주었다. 찾아갈 장소의 번지까지 정확히 가르쳐 준 셈이다. 다소 사람 사울이라고 그 집에서 만날 사람의 이름과, 그가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 상황까지 말해 주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울의 기도 가운데도 자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안수해 주면 눈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다 지시해놓았다고까지 했다.

말하자면 아무 염려 말고 사울을 만나 기도만 해주면 매사가 다 잘 되리라는 것이다. 절대로 체포영장을 들이밀면서 덤벼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일어나 그곳으로 찾아 가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주저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를 찾아가 노예의 고역을 치르는 동족을 구원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내가 누구관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망설인 것과 같다. 모세는 주님더러 내가 그런 그릇이 안 되는 줄 잘 아시지 않느냐고 따진 반면에, 아나니아는 반대로 사울이 그 무서운 핍박자인지 주님도 잘 아시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당신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라고 그 두려움을 안돈시켰다. 지금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내 이름을 위해 고난 받을 종으로 당신께서 택한 그릇이라고 안심시켰다. 신자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자를 도울 자로 당신께서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정확하고 세밀한 계시였다. 사울과 만나 당장에 이뤄질 일은 물론이고 장차 사울이 어떤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 지까지 말씀해 주었다.

신자인 아나니아로선 아무리 사울의 악명이 모든 신자를 떨게 해도 거역할 여지라고는 일절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두려움이 남아 있었겠지만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는 지시였다. 또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사태는 진행되었다.  

너무나 심술궂은 하나님의 계획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믿어 천국 가게 되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곳에 이르도록 이 땅에서부터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사랑과 권능으로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 같은 성경기사를 접하는 우리 모두로선 참으로 부럽게 여겨진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아주 세밀하게 지시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럼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 정도가 아니라 다니엘처럼 사자 굴에 던져지는 일을 당해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새벽 기도할 때마다 아나니아에게 주신 지시처럼 시간과 장소와 사건을 적시 받는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예컨대 오후 2시에 H 집사의 사무실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 그가 한 웹사이트의 주소를 가르쳐 줄 텐데 바로 거기에 네가 찾던 모든 정보가 다 있다는 것을 환상 중에 불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얼마나 신나고 넉넉히 승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만약 일일이 그렇게 안 된다 해도 최소한 장래에 닥칠 큰 위험들만이라도 미리 경고를 받으면 어디 덧날까 싶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리 기도해도 구체적 지시는커녕 내 인생에 대한 주님의 포괄적인 뜻조차 도무지 알 수 없다. 현실의 상황은 자꾸 꼬여가고 그저 평균 수준에서 무난하게 사는 것도 힘들다. 성경은 분명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살라고 하는데 대체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신자 체면에 점쟁이는 못 찾아 가고 소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자를 찾아다니는 현상마저 발생한다. 가서 기도 받고 기도 중에 한 말을 자신의 인생지표로 삼거나 어떤 일에 대한 사전 경고로 인식한다.

예수 믿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이미 내주하기에 스스로 기도하여 그분의 인도에 맡겨야 한다는 믿음이 없다. 심지어 그분이 대신 기도까지 해주신다는 사실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모든 삶의 지표가 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도 읽어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주님의 인도를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한다는 신자임에도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은 세상의 어떤 수단을 동원하든 무조건 빨리 끄고 보겠다는 생각뿐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그런 방식으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본문의 사건은 아나니에게나 바울에게나 평생에 한 번 있은 특별한 사건일 뿐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통상 신자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로선 개별 사건 하나하나마다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만 할 필요가 없다. 그분의 신자를 향한 뜻과 계획은 훨씬 다른데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신자 주변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변화시키기보다는 신자 자신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바꾸길 가장 원하신다. 나아가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도 신자의 인생을 어떤 일관된 방향으로 이끄시는데 초점을 맞출 뿐 구체적 사건의 내용과 진행은 오직 당신의 주권 하에 두신다. 따라서 신자에게 그 일관된 방향으로 살아가야만 할 이유부터 깨닫게 해주고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심어주신다. 즉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 그분의 신자를 향한 근본 계획이다. 물론 본문 같이 아주 특별한 경우 아주 세밀하게 지시하기도 하지만 말한 대로 평생에 몇 번을 넘지 못한다.  

신자는 그분을 알고 믿는 자답게 성경 진리대로 거룩하게 살면 되고 인생의 구체적 경로는 하나님이 정해 주실 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에만 신앙의 전부를 동원한다. 또 강단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많은 신자가 이런 분위기에 완전히 젖어버린 것 같다. 외부의 불신자마저 기독교 신앙의 용도(?)가 그것  뿐인 양 오해하게 만들었다.

본문 기사의 경우 평생, 아니 좀 과장해서 말하면 역사상 한 번 있은 사건이므로 아주 세밀한 인도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앙의 관점은 훨씬 다른 데에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원대한 계획 가운데 아나니아를 미리부터 예비해 놓으셨고 또 꼭 그를 통해서 사울에게 안수케 해서 낫도록 할 당신만의 깊은 뜻을 따져봐야 한다.

외면에 나타난 사건의 경위만 추적해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울을 낫게만 해주려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더 기적적이고도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방법도 많지 않겠는가? 사울을 만나려니 두려움부터 생기는 아나니아를 심술궂게(?) 심부름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를 보냈다면 당신만의 특별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절대 건성으로 대충 읽고 치워선 안 된다. 정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서 말씀을 통해 그분과의 직접적 대면이 가능하다. 또 신자의 인생은 성경 말씀에 따라 그분이 자기에게 바라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인도 받을 수 있다. 기도 가운데 환상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예외적인 경우다. 신자는 오직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동족에 의한 최초의 핍박

다메섹이라는 이방 도시 안에 아나니아라는 신실한 신자가 살고 있었다는 것부터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었다. 성령이 최초로 강림한 오순절에 천하각국으로부터 경건한 유대인들이 모였고 각각 자기 방언으로 복음을 전해 들었다. 그도 그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바울은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다메섹)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22:12)라고 묘사했다. 단순히 유대교 신자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에 “제자”라고 했으니 예수를 믿는 경건한 자다.    

성경에서 정작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은 언뜻 보기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없는 것 같은 구절이다. 그저 능력, 치유, 이적 같은 기사에만 시선이 빼앗겨선 안 된다. 또 사도행전의 진짜 주인공은 바울과 베드로가 아니라 아나니아 같이 아무 이름 없는 자다.  

이미 살펴 본대로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나사렛 이단(?)의 특이한 믿음을 접하고는 이미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 사도 외에 다 흩어졌다.(행8:1) 이때에 이름과 빛도 없던 경건한 제자들이 천하각국으로 흩어졌다. 말하자면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핍박이 유대인들에 의해 동족에게 행해졌다. 정확히 말해 유대교에 열심인 바리새파가 스데반 같은 헬라파 신자 즉,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주로 영접한 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바로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다고 한다.(행8:1)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도자 격인 사도들이 먼저 핍박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들은 남아 있고 평신도들만 도망갔는가? 사도들은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큰 믿음으로 핍박을 견뎌내었는가? 아니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잠시 변절했는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스데반 순교 당시까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별도의 단일 조직체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도들이 아직은 중앙 성전이나 헬라파 경건한 자들이 자기 지역 사람들끼리 모이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도 그런 회당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과 복음에 대한 논쟁을 벌였는데(행6;9)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사울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분을 삭이지 못했음은 이미 배운 바다.

성경은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8:2)고 기록하고 있다.  경건한 사람들이란 당연히 헬라파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아 돌에 맞아 죽거나 화형, 참수형, 교수형 등을 당한 자를 위해 공개적으로 통곡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을 위해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여 크게 통곡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가뜩이나 논쟁에 져서 밉던 참인지라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이방에 사는 동안 율법과 여호와를 저버린 우상숭배자 내지는 매국노로 취급당했을 것 아닌가?

그 핍박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강제적으로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만드셨다. 사람을 흩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흩은 것이다. 아나니아가 오순절 현장에 있었는지, 스데반 사건의 첫 핍박으로 흩어졌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주 경건한 자로 소문나 있었고 또 스데반 이후 사울의 회심사건까지 시간의 경과가 그리 길지 않기에 그의 믿음은 스데반 사건보다는 오래 전에 형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초점은 이것이다. 아나니아를 개종시킨 것 이전에, 오순절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와 그 이후의 핍박과 또 사울로 그런 현장에 있게 한 것들 모두가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가운데 있었다. 거대하고도 아주 복잡한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작동 없이 정교하게 맞물려 간 것이다. 한 신실한 신자의 죽음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는 동족에 의한 온 교회에 대해 핍박마저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미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다.

왜 아나니아가 안수했는가?

이제 정작 살펴봐야 할 것은 왜 꼭 아나니아로 사울에게 안수케 한 것인지 여부다. 사울은 삼일 간 암흑 속에서 헤매었다. 시력이 전혀 회복되지 않아 너무나 불안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를 더 사로잡은 두려움이 또 있었을 것이다. 예수를 핍박하려 다녔는데 바로 그 예수에 의해 꼼짝없이 봉사가 되었으니 앞으로 어떤 큰 벌을 더 받을지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점차 영적 절망 가운데로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 지성, 도덕성, 종교성,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헌신 등 지금껏 스스로도 자부하며 사람들 앞에 내세워 왔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오로지 곤고한 심령이 되어서 참 믿음의 실체는 무엇인지, 대체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지, 또 과연 자신이 구원을 확실히 받았는지, 최소한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는지 등등 온갖 갈등과 고뇌에 빠져 그 답을 얻어 보려 했지만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선 완전한 절망 가운데 체념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사실은 하나님의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가 베풀어질 직전이었다. 다른 말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예수에 대해 생각을 달리 갖게 되었고 그분을 향해 마음 문을 조금 열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가운데로 자기가 택함 받았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최소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특이했다. 자기가 여자가 아닌 남자로,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할례를 모르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세 가지 사실을 두고 감사했다. 특별히 바리새인으로 태어난 것은 더더욱 감사했다. 말하자면 감사라는 방식을 취했지만 사실은 종교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기도였다.  

바리새인에 속했던 바울은 눈이 멀자 기도부터 했다.(11절) 생전 처음 자신을 진정으로 낮추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께 기도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예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못살게 굴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지 않겠는가? 자칫 봉사가 될 판국에 자기 가문, 학력, 지위, 신분 등등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오직 예수님께 매어달릴 수밖에 더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하며 하나님 앞에서조차 떳떳하고 의로웠던 그의 이전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도 환상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안수하자 눈이 다시 뜨이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걱정이 지나쳐 머리가 혼란해진 것인지, 기도에 너무 빠져 뭔가 헛것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지정의의 작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상 중에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 얼마 안 가 나타났다. 또 자기에게 안수하면서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자기가 찾아내어 잔멸하려던 예수 믿는 이름 없는 한 신자가 자기 이름뿐 아니라 오는 도중에 일어났던 일도 훤히 알고 있었다. 환상에서 본 모습 그대로 자기에게 안수하며 기도해 주니까 곧바로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처럼 시력이 다시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는가? 대체 세상에 이런 놀랍고 신기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나니아가 자기를 어떻게 호칭했는가? “형제 사울아.” 봉사가 되어 꼼짝달싹 못할 지경에 빠진 천하의 원수 사울을 죽여도 시원찮을 판국에 형제라고 불러주었다. 구약 율법에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신19:21)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 있다. 도에 지나친 개인적 감정적 보복을 금지하려는 목적이다. 반면에 동해로만 갚으면 얼마든지 개인적 분풀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도 되었다. 최소한 원수란 미워하고 벌을 주어도 될 대상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쳤는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무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8,39,43,44)

스데반이 이전에 회당에서 바리새인들과 변론할 때에 분명 이 문제로도 다투었을 것이다. 바울도 논쟁에 직접 참여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아니 원수를 사랑해주라니 미친놈들 아닌가? 율법에는 분명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규정했는데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다니!”라고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같은 바리새인들의, 아니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라고 간주한 예수 믿는 신자가 전혀 보복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를 형제라고 말하면서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가? 나아가 기도해 주었고 또 그러자 바로 눈이 떠졌다. 예수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면서 실제로 원수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고, 스데반도 똑 같이 그랬다. 이제 또 전혀 이름 없는 한 신자가 나타나 동해보복을 정당화하는 율법으로는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자기에게 예수와 동일하게 용서를 베풀었다.

드디어 나사렛 이단의 괴수였던 예수와, 완전히 미친 소리만 한다고 무시했던 그 제자 스데반이 오히려 옳았고 자기가 틀렸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나니아라는 무명 신자에게마저 간단한 안수기도로 자기 눈을 뜨게 해주는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라면 무덤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이 틀림없었다. 이미 오는 길에 그분의 엄위한 권능을 맛보긴 했지만 사실은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 뭐가 뭔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모든 경과가 확실해졌다. 참된 영적 안목이 열린 것이다.  

또 “형제 사울”이라는 한마디는 그에게 헬라파이긴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동족을 핍박한 것이 동일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리석다 못해 얼마나 엄청난 죄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자기를 여전히 형제로 인정하고 사랑으로 용서해 주었다. 나아가 함께 예수 믿는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준다는 의미로도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불경해 보이던 나사렛 이단이야말로 오히려 하나님께 온전한 선택과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예수님은 극악무도한 핍박자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었다. 이제 직가의 유다 집에선 한 연약하고 비참한 죄인의 절망 가운데 무한한 긍휼로 사랑해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은 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저주하시고 그 죄인은 빈 무덤에서 부활하여 참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구세주였다. 이제 그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철저하게 깨닫고 그 은혜 앞에 무릎 꿇게 된 것이다.

만약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드린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낫게 해주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틀림없이 그는 사람과 세상 앞에 의로운 바리새인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자기를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이름 없는 신자가 멀리서부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찾아와 기도해주지 않았다면 온전히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피곤하다보니 헛것을 보고 듣고 잠시 내 눈에 꺼풀이 씌었던 것뿐이야. 예수가 다시 살아났을 리 없어.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의로움과 이단을 처단하려는 열성을 기쁘게 받으시고 치료해 주신 것이야.” 어쩌면 더 기고만장해졌을 것이다.

율법도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바울로선 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도 극적인 체험을 했다. 완전히 죽었다 살아났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예수의 격렬한 핍박자가 이미 이 땅에 없는 그분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그 자리에서 벌 받아 죽어 마땅했던 자가 용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 같은 형제로 받아들여졌다. 그것도 사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숨기 바빴던 한 이름 없는 신자의 도움으로 그 자리까지 이르렀다.

그 심령에 일어났을 급격하고도 복잡한 변화는 스스로도 도무지 종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제 예수는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자신 같은 천하 죄인을 구원해주는 메시아였고 그분을 믿지 않고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무조건 싫다가 이제는 일생을 바쳐도 될 만큼 좋은 분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자신은 천하의 의인에서 천하의 죄인으로 낮아졌다.  

거기다 아나니아가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준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절) 단순히 용서하여 형제로 인정해 준 것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예수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전해야 한다고 한다. 나아가 그럼으로써 해를 받을 것이라고도 한다.

지금껏 그는 세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지우려고 그렇게 수고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더 높이라고 한다.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자랑하고 감사했는데 그들을 찾아가 섬기라고도 한다. 임금들이라면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들의 최고 권력자이며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자도 있는데 그 모두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고 선포하라니 자신에게 핍박이 따를 것은 불을 보듯 빤하다. 나아가 유대의 율법과 성전제도를 따르는 자들만이 구원의 택함을 받았다고 믿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그 모든 것이 틀렸다고 선언하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기의 지난 모든 세월과 공적이 아예 쓰레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완전한 헛것임을 인정하고 뒤집어엎으라는 뜻이다.  

또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비유컨대 자기 아들을 무참히 죽인 원수를 용서만 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가장 귀한 아들로 삼아준 것이다. 과연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사랑인가? 인간이 감히 할 수 있는 사랑인가? 예수님이 죽으면서까지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한 것이 절대로 종교적 겉치레가 아니었던 것이다. 스데반의 동일한 간구도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었고, 무엇보다도 죽으면서 천국보좌의 예수님을 보았다는 선언이 절대 환상이 아니었다. 자기가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도 절대 환상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그런데다 자기를 택한 그릇이라고 한다. 택했다는 것은 이미 사전에 모든 계획이 마련된 뒤라는 뜻이다. 우선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난 행적을 손바닥 뒤집듯이 보고 있었고, 아니 사실은 그 모든 행로를 주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환상대로 낫게 된 것이 충분히 입증해주고도 남지 않는가?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당신의 극렬한 반대자요 핍박자였던 사울을 완전히 뒤집어서 정반대의 자리로 옮겨 놓으셨다. 당신의 가장 열성적인 찬동자요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를 택하신 계획이 지금 직가의 유다 집에서 이뤄졌듯이, 앞으로 그의 남은여생 동안에도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와 권능으로 완벽하게 준행될 것이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님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1:13-16)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수양하고 묵상한 철학적 종교적 깨우침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나니아로부터 분명하게 전해들은 말 즉, 예수님이 자신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시고 준비시킨 예수님 바로 그분이 자신의 사도직무도 당신의 뜻대로 온전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낸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는가? 그는 예수 이름을 없애려 예수 믿는 신자를 잔해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예수 이름을 높이게 됨으로써 자기가 핍박 받게 되었다. 예수라는 동일한 인물의 일로써 동일한 결과를 겪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율법의 동해보복법도 어김없이 적용되었지 않는가? 바울은 사도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만큼 죽을 고비를 포함해 고난도 가장 많이 겪었다.(고후11:23-27)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절대 굽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래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고 또 실제로 당신께서 그렇게 준행하셨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 단순히 그 잘못을 절대 잊지 않고 정확하게 벌 준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게 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음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벌이 벌로서 그친 것이 아니라 상과 복으로까지 승화된 것이다. 나아가 그 받은 고난으로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에게 위로가 넘치게 했다. 바울 개인의 모든 인생행로에도 하나님의 공의는 완벽하게 실행된 위에 사랑 또한 충만하게 넘쳤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진리가 아닌 방식으로는 세상을, 특별히 성도를 절대로 다스리지 않는 법이다.    

신자들의 빤한 허풍

지금 한 위대한 사도와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단골메뉴로 말하는 문구가 무엇인가? “태중에서부터 (혹은 창세전부터) 저를 택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는 것 아닌가? 바울과 동일한 믿음의 고백을 한다. 그럼 과연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하는가? 진정으로 감사해서 그렇게 기도하는가? 아무리 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오래 전에 택했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신자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택했으니까 당연히 그 개별 인생에 대한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자꾸만 당장 눈앞의 문제와 환난에 그렇게 초조, 불안,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의 신자 일생에 대한 뜻이 있다면 그 뜻을 이룰 동안에 어떻게 되든 보호 인도하실 것 아닌가? 환난과 문제가 겹쳐도 그것 또한 그 계획을 이루는 일환이든지, 최소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말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분이 집행하시는 계획이라면 그 구체적인 부분까지 알지 못해도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는가? 또 장래 일에 대해 세밀한 청사진을 사전에 보여 달라거나 기도하면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응답을 달라고 고집할 필요 또한 없다.

자꾸만 지금 당장 가시적이고도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주기를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완벽한 섭리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자기 눈앞의 현실에만 매여 어쩔 줄 모르니까 구체적인 인도나,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응답을 달라고 요구는 법이다. 또 당장의 가시적 조치란 결국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모든 신앙을 동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일에, 알지 못하는 일에, 자기 능력과 이해를 넘어서는 일에도, 그래서 심지어 자기는 당장 죽을 것 같이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에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전혀 가감 없이 신실하고 결국은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 능력이다. 나아가 그분의 영광이 결국은 신자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어떤 고난에도 요동치 않는 자세다.

물론 그 유익은 현실의 형통과 안락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데에 더 유익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의 경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어도 오직 증거되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 뿐이었다. 주님이 극적이고도 세밀하게 인도하셨던 본문 사건의 결말도 어떻게 맺어졌는가?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22절) 이전에는 세상 권력으로 핍박하고 잔멸함으로써 신자들의 육신을 굴복시켰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로 불신자들의 심령을 십자가 복음 앞에 굴복시켰지 않는가?

반면에 우리의 신앙은 솔직히 그저 하나님의 능력만 빌어서 문제 해결하고 고난에서 탈출하는 은혜를 받는 일에만 집중되고 있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신자가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구원해 주길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런 일이 아니고는 우리 신앙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너무나 원대하고 신묘한 계획안에 들어가 그 인생이 거룩하고 신령하며 풍성해지는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그 믿음을 연단하여 정금같이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믿음이 정금같이 변한 자라야 당신의 계획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신자의 끈기나 담력이나 용기를 테스트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고통은 하나님의 동업자로 초대 받았다는 증거다. 꼭 목사 전도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현재 처해 있는 바로 그 장소, 신분, 지위, 여건 등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또 그분의 계획은 영광된 결말이 이미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에 아무 의심, 불만, 주저함 없이 당신께 순종만 하면 된다.

바꿔 말해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신자는 당장 현실의 문제와 환난에 염려 불안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육신적, 정신적, 심지어 영적으로 괴롭고 힘들기는 하다. 심히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그 고통이 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절대적 선하심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 힘이다. 그분의 공의와 사랑이 나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도 완벽하게 이뤄진다는 그 절대적 진리 하나만은 끝까지 붙드는 것이다. 또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하여 환난 가운데도 더 큰 소망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힘이다. 복음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끄는 원리가 믿은 후에 환난에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이런 확신과 그에 따른 실천이 없으면서 어떻게 태중에서부터 나를 택했다고 감히 기도 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가? 반대로 그런 확신이 있다면 어떻게 잠간의 환난의 경한 것에 어쩔 줄 몰라 할 수 있는가? 택함의 확신 없이 단지 종교적 공치사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창세전부터 나를 택했다고 감사한다는 것은 너무나 낯간지러운 위선 내지 가식에 불과하지 않는가?

바울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자. 순전히 자기 지정의의 능력에 힘입어 세상에선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 하나님을 믿고 위하는 열심에서도 최고였다. 그러나 단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이 거짓이자 쓰레기였음을 깨닫고 정반대의 자리로 떨어졌다.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고서 항복했다. 너무나 비참하고 공허한 자신의 영적 실체를 확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의와 사랑이 성령의 간섭으로 그 심령 깊숙이 비춰지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의 것들을 가려버린 후에 그리스도의 광채는 그의 영혼의 최중심부를 밝혔다. 예수님이 그를 사흘간 봉사로 만든 이유다.  또 그 후 아나니아를 통해 눈이 떠지고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된 바울로선 그야말로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는 계획 하에 태중에서부터 택하셨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하나님이 나를 태중에서부터 택하시고 당신의 원대하고도 특별한 계획, 아직까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가운데로 불러주었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바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음에도 단순히 용서만 해준 것이 아니라 충만한 새 생명을 심어주셔서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뀌어진 체험을 거쳐야 나올 수 있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지성으로 이해하고,  감정대로 느껴서, 의지로 믿기로 했다면 믿음과 믿은 이후의 모든 인생도 자기 계획과 뜻 안에서 이뤄져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니 그 남은 신앙 인생도 결국은 자기 믿음의 힘으로 이겨내어야 하고 또 그러니까 기도하여 구체적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불안해질 수밖에 더 있는가?

여러 분에게 다시 물어보겠다. 당신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택함을 받았음을 확신하는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이전과는 정반대의 완전히 뒤집어진 인생이 되어 있는가? 그럼 그분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섭리 가운데 태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것이 너무나도 확실한데 지금 당장의 고난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9/27/2009
(1/5/1996 유타대학촌교회 주일 설교를 보완 정리함)


김순희

2010.04.30 18:16:59
*.68.47.150

아멘! 아멘!!

사라의 웃음

2012.03.05 22:15:21
*.109.85.156

아~~멘!!
바리새인으로 태어나고 바리새인으로 살아감이 감사하였던 사울이
천하의 의인에서 천하의 기가막힌 죄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마치 영화관람하 듯 보여지는 목사님의 글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사울 보다 더더욱 흉악한 죄인을 또 이렇게 말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앞에서 벌거벗겨가시는 성령님께 감사밖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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