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8:17-22)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

야곱 바로 알기 (9)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28:17-22)

 

하나님과의 불경한 흥정(?)

 

꿈에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야곱이 보인 반응 세 가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직접 보니까 너무 두렵고 바로 그곳이 여호와의 집이자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베고 잤던 돌에 기름을 부어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며 그 고백이 진실 됨을 확증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가 보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반응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야곱은 자기를 고향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시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20-22절) 그럼 만약 타향에서 죽거나 고향에 못 돌아오게 되면 여호와가 자기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거기다 형 에서에게 팥죽 대신 장자권을 팔라고 요구했듯이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바칠 테니 무사귀환을 보장하라고 조건부로 흥정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밤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생생해서 예배를 드리는 자가 결코 보여서는 안 되는 반응이지 않습니까?

 

부모랑 생전 처음 놀이공원에 갔다 온 아이에게 그 재미있었던 체험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또 데려가주면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조건 형식으로, 또는 내가 알아서 공부 열심히 할 테니 다시 데려가 달라고 흥정 방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이 어떠하든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며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말은 분명 진심이고 또 틀림없이 그렇게 실천할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사방이 캄캄하게 막힌 와중에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여 그 믿음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순간입니다. 물론 살아있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한 것은 처음이라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의심은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놀이동산에 또 가고 싶다는 아이처럼 하나님과의 이런 교통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너무 커서 그런 의심은 덮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거기다 히브리 원문의 뜻에는 조건 외에 이유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실 것이 확실하므로 더욱 하나님을 잘 따르고 그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그의 말의 표현 방식 때문에 야곱의 여호와를 향한 진심에 시비를 걸 필요나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사이에 아이를 못 가져 첩인 브닌나의 멸시를 받고 있던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사무엘을 얻었고 젖을 떼자마자 한나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삼상1장) 그녀도 마치 흥정하는 것처럼 서원했으나 그 믿음은 순전했고 또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조건부 흥정이 아닌 순전한 서원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받는 은혜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어떤 방식이 되었던 그에 대해 진심으로 보답하며 헌신하겠다고 약속 내지 맹세하면 됩니다. 야곱도 지난밤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런 서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폐지되었는가?

 

그보다 본문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이슈는 따로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는 방식을 십일조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전은커녕 성막 제사도 설립되지 않았고 제사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야곱은 십일조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바쳤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한 것입니까?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그에 관해 일절 침목하고 있습니다.

 

성경기록이 없는 행간의 의미를 해석할 때는 우선 등장인물들이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인간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흠이 많고 죄를 지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수준의 상식과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입장이 되어서 서원하게 된 당시 상황과 그의 심정을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개연성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얻은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까닭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단순히 감사의 마음과 그에 따른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너무 부족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뭔가 확실한 보답을 하고 싶은데 바칠만한 가시적인 것은 재물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일에 예컨대 여호와께 제사 지낼 때 그 비용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가나안으로 귀향하여 형 에서와 화해하고 세겜에 정착한 후에 본문의 베델로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다시 단을 쌓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창35:1-15) 본문에서 서원한 그대로 어김없이 실천한 것입니다.

 

그 때 며느리들이 갖고 있던 우상 신상과 그 신상이 새겨진 귀고리들도 전부 땅에 파묻음으로써 가문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구별하여 바쳤습니다. 성경기록에는 없어도 야곱은 그 때에 틀림없이 가족들에게 본문 사건을 간증하며 여호와에 대한 신앙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자기 가문의 신앙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비용으로 십일조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서 당시로선 자기 가문뿐인 여호와 신앙 공동체의 제사장 역할을 자신이 직접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야곱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믿음의 세 번째 본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라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흔히들 십일조는 구약의 제사장 지파 레위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는데 성전과 제사장 제도가 폐지된 신약시대에는 바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매 삼 년마다 객과 과부와 고아 같은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해 드리는 셋째 십일조도 있었습니다.(신26:12-15)

 

십일조라는 율법의 규정은 폐지되었다 쳐도 그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교인들은 다른 직업 없이 사역에만 전임하는 목회자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도록 힘써야 하며, 교회 안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자가 없는지 둘러보고 물질과 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 보니 교회 헌금이 크게 줄었습니다. 소형교회 목회자들은 생활이 안 될 지경이고, 은행 대출을 받아 교회시설에 크게 투자한 대형교회들은 부채상환을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거기다 미국교회들에 대한 조사이긴 해도 교인들의 반 정도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그나마 본 교회 예배가 아닌 설교를 잘하시는 목사님의 사이트에 접속하는 신자도 많다고 합니다.

 

세균에 불과한 코로나가 모든 교회들로 그 동안에 행한 모든 사역 프로그램을 재조명하게 했습니다. 교인들의 출석 교회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도 자연스레 드러나 누가 옥이고 누가 돌인지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 사태를 인간의 죄악과 사탄의 훼방으로만 볼 것이 아니며 그마저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광대하신 주권과 섭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의 너무나 선하신 손길 앞에 겸허하게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며 진정한 개혁과 부흥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본교회가 아니라 다른 목사님 설교를 찾아 듣는다고 해서 꼭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에는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아니면 이미 몸을 담았던 교회라 의무적으로 출석했으나 이참에 성경을 더 깊이 알고 싶었던 그 동안의 갈증을 해소하려는 뜻입니다.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순전한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순전하게 선포되는 설교가 아쉬웠던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라.

 

교회에 환난이나 핍박이 닥칠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성경에 계시된 신앙의 근본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일조도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목회자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해주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십일조의 본질은 율법의 제사장 제도 즉, 기독교적 제도나 관습과는 사실상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때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받기 최하 사백 년 전입니다. 지난주에 야곱은 율법을 전혀 모르고도 성령의 간섭과 부모의 신앙의 본을 따라서 율법대로 돌을 조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쌓아서 예배드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곱 이전에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의 대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성경 최초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창14:20) 아브라함은 분명히 이삭에게 그 사건을 간증하며 십일조를 바친 뜻도 가르쳤을 것이며 이삭 또한 두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해주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돌 제단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간섭과 부모의 본을 따라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십일조를 교회가 정한 규정에 따라 의무적으로 드릴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누구의 지시나 권면 없이 스스로 십일조를 바쳤다면 십일조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십일조를 바친 뜻이야말로 그 본질이기에 신자는 반드시 바로 그런 믿음에 먼저 동참해야 합니다. 작금 십일조를 두고 시시비비가 너무 많습니다. 십일조를 지속해야 하느냐 중지해야 하느냐를 두고 성도들끼리 상대방을 이단으로까지 몰아가며 정죄하는데 너무나 부끄러운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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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분쟁과 송사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7)라고 꾸짖었습니다. 십일조 논쟁도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바울이 살아있다면, 아니 하나님이 틀림없이 크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고 선포했습니다. 율법의 더 중한 바는 문자적 규정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정신인데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더 중한바라고 비교급 표현을 사용했고 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일조 헌금은 그만 두고 그 정신만 실천하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계속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형식적 의무적으로 하는 십일조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당신의 일을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십일조 논쟁에 열을 올리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죄송하지만 정작 원수를 사랑하라, 형제의 잘못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 이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 여부는 십일조만큼 엄중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유독 십일조에 예민해지는 것은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고 믿음이 좋아도 돈 문제가 걸리면 곧바로 치사해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돈을 주인으로 모셨던 옛 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이것도 저것도 하라고 명한 까닭도 당시도 지금처럼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도 되느냐로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믿음

 

예수님이 말한 십일조의 정신 중에 정의와 긍휼은 율법대로 목회자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번 율법을 풀어서 정확하게 가르치셨던 주님이 믿음도 실현해야 한다고 덧붙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숫자 십은 완전히 찬 것이며 퍼센트로 따져도 백 퍼센트는 전부가 다 찬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의 일, 말하자면 열 개의 숫자 중에 첫 번째 숫자는 첫 열매로 열 개 전부를 대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당신의 것이기에 모든 것의 첫 소산을 당신께 바치길 원하십니다. 여호와 언약의 장자권도 그 가문의 첫 열매로써 가문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십일조란 주님께 받은 주님의 것 모두를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듯이 서원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얻고 젖을 떼자마자 바로 성막에서 봉사할 시종으로 바쳤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수고만 하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었습니다. 자신의 첫 열매를 넘어서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외아들을 즉, 자기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제 밤까지 야곱은 사방이 막힌 절망 가운데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먹은 천하의 죄인이었습니다. 여호와 언약에 장자로 참여할 공로 자격 조건 능력이 전혀 없고 따지고 보면 형보다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만 소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꿈에서 그의 앞날에 항상 함께 해서 지켜주시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후손들로 기어이 기업을 차지하게 해줄 것이라고 보장해주었습니다. 그의 죄는 씻기었고 나아가 하나님만이 보장해주실 수 있는 당신의 언약에 장자로 참여토록 해주었습니다.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자기가 노력하여 취득한 삯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그가 가진 것이라고 문자 그대로 몸뚱이 하나뿐입니다. 돌아올 때에 그 몸 외에 생긴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함께 해주셨다는 증거입니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충분조건이 되는데 그 동안에 생긴 자식들과 재물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공짜 선물입니다.

 

야곱이 귀향하면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뜻은 받은 것 전부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나에겐 그것을 받기에 합당한 공로 자격 조건 능력이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없었으면 지금 이런 모습의 나는 전혀 없었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시적인 예배로 바치려는 뜻입니다.

 

신자란 어떤 자입니까? “내가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내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하나님의 것입니다. 현재 나라는 존재는 물론 그 삶과 일생 전체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믿음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 믿음이 진실한지 겉으로 확증할 수 있는 첫째이자 가장 확실한 방식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자신의 이전 주인이었던 돈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았기에 힘에 부쳐보이는 10%를 주저 없이 기꺼이 바침으로써 가장 치사해지기 쉬운 돈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생명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수입의 십 퍼센트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주인이었던 옛 본성이 자꾸 되살아나는 연약하고 치사한 인간이기에 더더욱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그 습성을 죽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하는 인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폴 샤르트르는 인생은 BCD라고 즉, B(birth 출생)과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라고 말했습니다. 출생과 죽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사이는 자기 의지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행할 바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정확히 분석한 말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인생의 시작과 끝인 B와 D를 인간이 전혀 고를 수 없는데 그 중간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실제로 삶에서 전혀 의도치 않았던 일들이 자기가 하고 싶어 계획한 일 못지않게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거기다 당장 내일 아니 십분 뒤에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데 십분 전에 선택한 것이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인간이 자의로 선택해봐야 그대로 안 될 확률이 훨씬 높다면 선택 대신에 다른 대안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실존주의자에겐 현재 내가 이 땅에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진리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지금을 풍요롭고 신나며 최소한 편안하게 보내느냐 만이 인간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됩니다. 인간이 왜 이 땅에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바탕에는 인간은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되었기에 아무 목적 없이 이 땅에 버려진 존재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인간과 이 땅에 영원하고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가 없다면 샤르트르의 말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가 될 것입니다. 우연히 시작된 인생에게 이 땅이 전부이므로 내 멋대로 최대한 신나게 살다가 이 땅에서 끝내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것이 결코 진리가 아님을 잘 압니다. 당장에 출생과 죽음을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으며 호흡하는 것마저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 아님도 압니다. 자연의 위대함과 정교함을 보면 절대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작품인 줄 깨달을 수 있으며 그분이 지금도 질서정연하게 통치하고 계심도 체험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만나 주시고 오직 당신만의 긍휼로 당신의 언약의 장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신 천하보다 크신 십자가 사랑으로 먼저 찾아와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당신의 거룩하신 권능과 은총 안에 붙들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단지 나그네로 지나가는 과정이요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리고 있음도 확신하고서 기꺼이 그분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샤르트르 식의 표현을 빌면 신자의 인생도 B와 D 사이의 C입니다. 그러나 선택(choice)의 C가 예수 그리스도의 C(Christ)로 바뀐 것입니다. 태초 전부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시고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하시어 이 땅에서 동행 보호하여서 거룩하게 주관하시고 육신의 죽음 이후로도 부활의 영광으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처음 B의 앞과 마지막 D의 뒤에도 C가 붙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C라는 광대한 원 안에 신자 개인의 BD는 아주 작은 점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골로새서는 “만물이 그(예수)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6)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라는 대명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섯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고 고백했는데 신자 인생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주님께서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들어 쓰시라고 자기 인생 전부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런 헌신의 가시적 증거로 헌금으로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청지기만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

 

신자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서 대신 관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면서 “그(인간)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8:5,6)라고 선언했습니다.

 

원죄의 타락 가운데 있는 불신자는 청지기 역할을 못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로 회복된 신자는 반드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려고 세상에서 불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이자 소명자로 부름 받았다는 자기 구원의 뜻을 제대로 아는 자는 자기 인생 전부를 주님께 진정한 기쁨으로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야곱도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행할 일을 실천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집안의 모든 예배와 자식들의 신앙교육과 가문을 거룩하게 지키는데 사용했습니다. 나아가 가나안의 사람들의 우상숭배 풍습을 전혀 따르지 않고 거룩하게 살려면 알게 모르게 현실적 손해들이 분명히 생겼을 것입니다. 그 동안 모아둔 십일조로 그런 손해를 충당했다면 그것 또한 분명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몰랐어도 결국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주님의 큰일에 내어주게 됩니다.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큰 고난과 연단을 거친 후에 요셉은 기근에서 가문을 건져내고 후손을 애굽에서 창성케 하는 초석을 닦았습니다. 또 다른 아들 유다는 자기 가문을 통해 세상의 구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씨가 이어지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물엘을 바친 한나처럼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처럼 야곱도 아들마저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린 셈입니다.

 

야곱으로선 하나님의 골고다 십자가 구속 계획은 알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여호와의 언약에 장자로서 꼭 참여하고 싶다는 열망만 있었고 본문에서 주님을 직접 대면한 후로는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맡겼을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였다는 뜻으로 십일조를 바쳤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오늘날 신자도 내 전부를 주님께 바치오니 주님 뜻대로 사용하여 주십시오라는 믿음이 있다면 십일조로 확증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아니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자발적으로 큰 기쁨 가운데 십일조 즉, 자기 소유는 물론 생명까지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야곱에게 본받을 신앙은 첫째로 주님을 직접 대면하여 진정으로 거듭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며, 둘째로 그 은혜가 너무 귀해 주님의 이름만 높이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고, 마지막 셋째로 그분의 일에 평생을 충성 실천하는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매일의 삶에서 세상 앞에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야곱처럼 그분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반드시 당신께서 신자를 들어서 당신의 큰일을 이루십니다.

 

그분의 계획과 권능은 광대하십니다. 현재 신자가 행하는 일이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야곱처럼 몇 백 년 후에 엄청난 결과로 나타납니다.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광대한 드라마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주인공입니다. 그 맡은 역할에 충성하지 못하면 그 드라마의 아름다운 결말은 자꾸 지체될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그 후손에게 자신들의 죄가 전가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의 게으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난과 연단을 후손들이 겪어야만 합니다.

 

신자가 십일조를 안 드려도 당장 벌을 받지 않으며 신자가 아닌 것도 아니며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계명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절대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어도 형제를 용서하지 못했어도 이웃에 무관심했어도 일일이 당장 벌을 안 주듯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당장에 벌을 주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안 하고는 예수님 말씀대로 순전히 신자 개인의 믿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듯이(갈5:22,23) 주님의 거룩한 말씀은 그대로 실천하면 말씀에 따른 거룩한 열매가 자연히 맺힙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은혜는 물론 현실적 유익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풍성하고 오묘한지 모르고 일생을 보내고 그 상태로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율법이 오기 전인데도 아브라함과 야곱이 십일조를 드린 뜻에 비추어서 우리 신앙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소득의 몇 퍼센트를 헌금으로 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소득 전부가 그분의 것으로 그분께 되돌려 드린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헌금 헌물만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그분께 평생을 드려서 그분의 일에 충성하겠다는 믿음을 소지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실상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요컨대 여러분의 인생에서 BCD의 중간 C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는 Choice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에만 맡긴다는 Christ로 바뀌어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6/2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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