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너무 간단하고 쉬운 예정론 (마13:10-17)

조회 수 1394 추천 수 30 2012.08.31 23: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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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간단하고 쉬운 예정론
마태복음 강해 (144)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13:10-17)


우문현답(愚問賢答)

제 조카 중에 만물박사가 한 명 있다. 무엇을 물어도 척척 답변을 해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잘 묻지 않는다. 워낙 아는 것이 많아서 A에서 Z까지 한두 시간씩 장황하게 대답하니까 다들 질려버린 것이다.

오늘의 본문이 그런 경우와 방불하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가르치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문학적 수사법인 비유에다 신학적 의미를 연결시켰다. 그것도 기독교에서 가장 난해한 세 가지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 66 권을 소지하고 체계적인 교리공부를 하는 현대의 신자에게도 어려운 설명인데, 당시의 제자들은 틀림없이 크게 당혹되었을 것이다.

본문의 설명이 아주 어려운데다, 예수님마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까 흔히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또 다른 오해를 한다. 씨 뿌리는 비유를 비롯해 비유라면 무조건 그 내용이 아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13장의 일곱 천국 비유를 포함해 잘 아는 잃어버린 양이나 신랑을 맞으러 가는 신부 친구 같은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일상적 사물이나 일에 대조했다. 비유를 듣자마자 비유가 뜻하는 상황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씨앗이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 위에 뿌려졌을 때에 그 결실이 어떻게 되는지, 또 왜 그렇게 되는지 예수님의 설명 없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익히 겪던 일이었다. 현대의 신자들은 이스라엘의 관습과 문화에 대해 조금만 공부하면 되는데 친절하게도 예수님은 이미 그 경위를 다 설명해주었다.

거기다 지금 제자들이 직설적 화법으로 말씀하시지 왜 어려운 비유로 가르치느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다시 10절의 질문을 자세히 보라. 쉽게 말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은 물론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를 묻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했다. 저희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러 모인 유대인 일반 대중이다.(2절)

그럼 무슨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가? 마치 비유는 제자들의 전용인 것 같이 말했다. 자기들에게 비유로 가르치는 것은 괜찮지만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합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유대 대중이 무식해서 못 알아듣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비유는 쉽다. 또 제자들 대부분이 똑 같이 무식한 어부 출신이었지 않는가?

당시 유대인 랍비의 교육방식은 조금 특이했다. 제자들이 질문하면 곧 바로 직접적인 설명은 해주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이나 비유로 대답했다. 제자들더러 스스로 생각해서 깨우치라는 뜻이었다. 예수님도 유대인 랍비로서 그런 관습을 따른 것이다. 그럼 지금 제자들의 뜻은 유대 대중인 저희에게까지 비유로 가르치면 제자인 자기들 입장이 무엇이 되느냐는 일종의 불만 표출이었다.

예수님의 대답(11절)도 다시 자세히 보면 ‘너희’와 ‘저희’를 정확하게 구분하면서 즉, 제자들의 불평에 맞추어서 대답하셨다. 그 대답을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비록 저희나 너희에게 동일하게 비유로 가르치긴 했지만 절대로 똑 같이 대우한 것은 아니다. 너희에게는 천국비밀을 알도록 허락해주었지만, 저희에게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목적과 이유를 지금부터 기독교의 핵심 진리 셋을 들어서 설명(12-17절)해줄 테니 잘 새겨서 들어야 한다.”

제자들의 질문은 신앙의 격에 맞추어서 초급반인 평신도에게는 직설법으로, 고급반인 제자들에게는 비유로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었다. 가르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면서 자신들이 우월함을 내비친 것이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너희인 제자와 저희인 비(非)제자를 구원과 심판으로 구분하겠다고 한다. 또 그것을 구분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자기들을 높이고 이기심만 앞세우는 치사하고도 수준 낮은 질문을 했음에도 예수님은 구원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선물로 주셨다.

기독교의 세 가지 핵심 진리

예수님이 저희와 너희를 구분하면서 설명한 기독교 핵심 진리 셋은 무엇인가? 먼저 11-13절에서 천국의 비밀이 모두에게 오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비밀이 되지 않는다. 그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된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구원을 얻는 것이다.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어려운 용어지만 구원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만인구원론을 부인하고 일부 사람에게만 허용된다는 제한속죄론을 말씀하신 것이다. 신학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은 태어나기 전부터 구원이 결정된다는 이중(二重) 예정론을 말한 것이다.

둘째는, 비록 하나님이 구원을 예정하셨지만 인간의 책임이 모면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14,15절) 심판의 궁극적 근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이 허락 여부에 달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간이 천국의 비밀을 알면 그간의 악한 행실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맞추어 고쳐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서 스스로 완악하게 되어 눈과 귀를 닫았다고 한다.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데 그 둘이 절대 상호 모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천국의 비밀을 보고 듣고 싶었어도 아예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이 있다고 했다. 그런 구약 성도에 대비해서 신약 성도의 특권과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럼  구약의 선지자와 의인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한 추가 질문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이 셋은 교회사적으로 토론이 끊일 새가 없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러는 것 자체가 엄격히 말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어리석기조차 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씨 뿌리는 비유를 제대로 해석만 해도 알 수 있다.

서두에 말한 대로 흔히들 비유니까 씨 뿌리는 비유도 지레 어렵다고 여긴다. 지금껏 강단에서 행한 설교도 비유 자체를 해석하는 데만 초점이 모아졌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재탕, 삼탕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어려운 것은 결실을 못하는 이유가 아니라, 뿌려진 씨앗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그 씨앗은 물론 천국의 비밀이다. 따라서 비유의 핵심인 씨앗이 무엇인지 모르면 예수님이 보충하여 설명한 이 세 교리의 의미도 어려운 것이 된다, 제대로 알면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쉽고도 분명하게 그 씨앗의 정체를 밝혀 놓았다. 제자들은 비유를 듣고 보는 자를 유대 대중과 자기들, 둘로 구분했다. 비유에 드러나는 천국 비밀을 자기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양, 은연중에 자기들 종교성과 영성을 자랑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세 부류로 확대했다. 먼저 비밀을 보고 듣고 깨달은 자가 아니라 깨닫도록 허락받은 자와 듣고 보고도 깨닫도록 허락 받지 못한 자다. 셋째는 듣고 보고 싶었지만 아예 그럴 수 없었던 구약 성도다.

그럼 그 씨앗, 천국비밀은 무엇인가? 지금껏 배워온 대로 성경 말씀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반적 뜻이나 계명인가? 아니다. 구약 성도도 성경을 소지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들이 보고도 듣지 못한 것은 바로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다. 지금 저희와 너희의 눈앞에 서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이 바로 그 씨앗이다. 결국 지금까지 설왕설래가 많고 난해하게만 여겨지는 그 세 진리도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만 해석하면 이해된다는 뜻이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구분 없이 모두에게 천국 비밀을 알 수 있는 씨앗은 뿌려졌다. 예수님 당시에 돈과 권력과 지성과 신분의 구분 없이 누구라도 예수님과 그 사역을 보았다. 혹여 보지 못해도 최소한 그 소문은 들을 수 있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은 창녀, 세리, 죄인과 제자만 본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 무리와 헤롯왕과 이방인 빌라도 총독까지 보고 들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다.(마11:3)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절)

무슨 뜻인가? 너희들이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판단해보라는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왜 구태여 그런 질문을 하는가?” 주님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판단해 봐도 당신께서 메시아임을 알 수 있는 근거를 이미 다 제공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결정적인 말씀을 하나 더 보탰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 당신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그러지 않으면 심판을 당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오직 그 둘로만 결정되지 그 중간이나 혼합은 없다는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는 지난주에 지적한 대로 영적 성숙도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을 보고 들은 유대인들이 나타냈던, 그래서 오늘날도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네 가지 반응을 뜻한다. 예수를 아예 미워하고 배척했던 유대지도층들은 길가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는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이 거절하자 실망하고 물러간 유대 대중은 돌밭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쫓아 왔지만, 예컨대 젊은 부자 관원처럼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좁은 길을 걷다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물러간 자가 가시덤불이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결코 그 격이 다른 것은 아니다. 사실은 한 종류의 사람이다. 결국 셋 다 열매 즉, 구원을 얻지 못했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자다.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롭다는 평판을 받아도 현실의 형통과 안락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거역할 자들이다. 하나님 그분에 대한 관심과 소망은 없다. 모두가 가룟 유다처럼 여차하면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치울 자들이다.

그럼 좋은 땅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스승을 메시아라고 확신하고 순종했는가? 그렇지 않다.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직접 화법이든 비유로든 열심히 배웠음에도 막상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기 바빴다. 수제자 베드로만 숨어서 따라갔지만 마찬가지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제자들마저 형편에 따라 언제든 유다가 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주일 예배로 모였지만 우리 자의로 온 것도 아니요 누가 권면해서 따라 나온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이 은혜로 이끄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 믿지 않았다면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온 우주와 맞바꿀 수 있는 보배를 소지한 것이다. 천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한 세 교리를 하나로 줄이면 예정론이 된다. 대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예정론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바가 굉장히 어려운 것 같지만, 결국 씨 뿌리는 비유도 예정론에 입각해 해석하라고 예수님이 그 기준을 미리 가르쳐 준 셈이다.

일단 두드러기부터 돋는 예정론(?)

그런데 문제는 예정론이라면 무조건 두드러기 돋는 반응을 보이는 자가 많다. 하나님의 성품과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출생도 하기 전에 그 영원한 운명을 일방적으로 정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려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구원의 기회는 원천 봉쇄되고, 그것도 본문 12절에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는다고 한다.

그러니 예정론의 하나님은 냉혹하고 독선적이며 무자비하고 무엇보다 불공평한 하나님이 되어버린다. 사랑의 하나님으로써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는데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정론은 신학자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신학 이론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 비난이 기독교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안에서 그러하며, 작금은 거의 대세(大勢)가 되어 있다. 참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엄정하고도 정확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러니 말이다. 비밀을 알도록 허락했다는 11절의 말씀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는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가능하다고 선언했지 않는가? 그 말씀을 부정하면 말씀하신 예수님과 배후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지 않는가?

물론 예정론을 반대하는 분들이 그럴 마음과 의도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인간 의지와 상관없이 구원을 예정했다는 것이 도무지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 이성적으로 납득이 될 만한 일이라면 구태여 하나님이 주권적 작정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예정론이 신학이론에 불과하다고 반발하는 쪽이야말로 자기들 이론에 집착한 셈이며, 또 인간 이성을 하나님의 신령한 권세보다 우위에 놓은 것이다.

예정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워서 스스로 듣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신 믿음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는 거의 모든 신자가 인정하는 진리 아닌가?

이를테면 아무 이유 없이 싫었던 예수가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지고 십자가 복음이 이해되어졌다는 고백이 바로 예정론이다. 예수를 믿을 생각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먼저 찾아와서 나를 만나 주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 경과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 모든 죄가 하나님께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서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절대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거룩하게 바꾸고, 내 삶과 인생을 아름답고 진실하며 선하게 가꾸어서 천국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이도 오직 예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껏 예수를 몰랐던 삶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실패였는지 절감하기에 이젠 옛날의 삶으로, 이전의 나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과 결단이다. 아니 확신과 결단을 넘어서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요컨대 예정론이란 신학이론이 아니라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자신의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 신앙고백인 것이다.

바울이 이성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일

일부 신학자들 가운데는 기독교의 예정론, 이신칭의, 제한속죄 같은 교리를 예수님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창안한 개인적인 종교 사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자들이 있다. 본문은 그런 주장을 뒤집는 확실한 반증이다. 예수님이 이미 확정적으로 가르치고 선언하신 말씀을 바울은 체계적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뿐이다.

바울은 누구인가? 잘 알다시피 율법을 준행하지 않고 성전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이름 없는 한 젊은 랍비만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이 도무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던 자다. 이런 이단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처단해야만 한다는 열정으로 신자들을 핍박했다. 외국에까지 가서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함으로써 사흘 간 봉사가 되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단을 심판하려던 그에게 진짜로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평생 그렇게 힘들게 쌓아온 자신의 교양, 사상, 도덕, 종교 등이 순식간에 한조각 휴지만도 못하게 되었다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신학 공부를 많이 하여서 가장 촉망 받는 랍비, 요즘 식으로 목사라고 칭송 받고 의인으로 존경 받았지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천국 비밀을 알게 하는 씨앗인 예수 그분이 자신의 심령 안에 심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딱 하나 부족했던 씨앗이 실은 전부였다. 모든 인간이 자신이 이 땅에서 가진 것 전부와도 지금 당장 맞바꾸지 않으면 안 될 시급하고 고귀한 보배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지 못했다. 소문만 들었다. 그야말로 천국비밀을 알도록 하나님이 허락 했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여전히 신자들을 핍박하고 있던 어느 날, 나사렛 이단인 스데반이 말도 안 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어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유대 대중에게 명령하고 감독했다. 그 때도 자기 이성으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고통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스데반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다.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기뻐했다.

거기다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죽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잘 모르는 헬라인에다, 예수의 제자나 사도가 아닌 평신도가 그랬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도 대단한 믿음인데, 당당하다 못해 평강과 자유와 기쁨마저 넘쳤다.

바울의 심령에 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체 예수 믿는 신자의 속에는 있고 내 속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열성에선 세계 최고인 내가 왜 저런 평신도만도 믿음이 못하다고 여겨지는가?” 이젠 신자가 믿고 저주스럽기만 했다. 은연중에 저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인 반면에 자기는 그러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나사렛 이단을 없애면 없앨수록 심령의 한구석에 뻥 뚫린 곳이 매워지기는커녕 더 커져만 가던 차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인생이 뒤집혀진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더니...

처음 봉사가 되었을 때는 분명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이러다 영영 봉사가 되는 것은 아닌지, 혹시 예수님께 그 동안의 잘못에 대해 벌 받아 죽는 것은 아닌지 굉장히 초조했을 것이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그가 눈을 못 뜨고 있는 중이거나, 평신도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 기도를 하여 눈을 다시 떠지고 난 이후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성령의 역사는 분명히 있었다.

처음의 불안 염려는 점점 사라지고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유대교에선 누리기는커녕 어렴풋이나마도 느껴보지 못한 평강과 자유가 가슴 가득 차올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와서 따뜻한 사랑의 품 안으로 이끌어 주시고 있음을 체험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의 간섭으로 그의 영혼에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해 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자기 이성에 합당하다고 나사렛 이단을 처단하려고 설쳐댄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베냐민 지파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힐렐 학파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유대교의 최고 전문가가 된 사실이 자신이 출세하려던 계획과 의지와 능력으로만 행한 일로 여겼지만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율법과 대비하여 은혜의 구원 교리를 설명하는 성경을 기록케 하고 또 그 십자가 복음을 이방의 왕들에게 전파시키려는 예수님의 계획과 훈련과 예정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세상에 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천국비밀을 가장 깊이 깨닫도록 허락받았던 것이다.

예정론은 신학이론으로 따질 계제가 아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이에게 구태여 반론 내지 변증할 이유도 없다. 만약 예수님이 나를 먼저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영원한 지옥 불 못에 던져졌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노예처럼 묶여서 비참한 실패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라는 진심어린 고백이다.

다른 말로 세상 속에선 아무리 해도 천국을 발견할 수 없더라는 실토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와,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확고하게 세우고 진전할 수 있더라는 자백이다.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항상 기쁨이 넘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아무리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자신의 형편도 초라해 보여도 예수님께로만 향하여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면 세상에 없는 평강과 자유로 채워주심을 날마다 체험하는 것이다. 매일을 그분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권세로 당당하게 악한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예정론이라는 신학이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구원의 기준이나 근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오직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를 의롭다고 칭해줄 때에 일어난다. 우리는 도무지 그분 앞에 엎드릴 계획, 의사는커녕 꿈도 꾸지 못했다. 세상 속에 천국이 없다는 것을 세상 속에 묶여서 세상을 목표로 사는 자는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 세상 밖의 절대적 힘이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서 세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씨앗인 예수님이 흑암이 장악하고 있던 한 죄인의 심령에 심겨져야만 가능하다. 또 그 일은 예수님이 심을 자에게만 심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을 얻은 자는 그 보배가 너무나 귀해서, 이 땅에서부터 천국 안에 사는 것이 너무 기쁘고 소망스러워서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고 살아야 한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정말로 개인적으로 만나서 예정의 은혜를 제대로 아는 자는 다른 모든 것은 다 포기해도 그 은혜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신자더러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선교에 매진하고 필요하다면 순교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자 일상적인 모습에서 꼭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 신앙의 품격에 따라 은혜도 차등하게 받아야 한다고 섣불리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열심히 믿은 만큼 하나님도 비례해서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정론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실은 예정의 은혜를 부인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그분과는 아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를 택하여 영원토록 십자가 천국 안으로 품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귀하기에 호흡이 있는 동안 예수님께 감사와 경배와 찬양만 돌려야 한다.

8/19/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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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착각에는 왜 세금이 붙지 않는가? (마13:47-50) [2] 운영자 2012-10-17 976
225 선택이 아니라 교환이다. (마13:44-46) [1] 운영자 2012-10-09 1178
224 풀무 불에 던져질 자는? (마13:36-43) 운영자 2012-10-06 1091
223 나물보다 커서 나무인가? (마13:31-35) [1] 운영자 2012-10-03 1360
222 날로 소망을 거두시는 하나님 (마13:24-30) 운영자 2012-09-21 938
221 당신은 정말로 좋은 땅인가? (마13:18-23) 운영자 2012-09-13 1881
220 구원으로 받은 벌(?) (마13:10-17) [1] 운영자 2012-09-08 974
» 너무 간단하고 쉬운 예정론 (마13:10-17) 운영자 2012-08-31 1394
218 최소 단위로 축소된 믿음(마13:1-9) 운영자 2012-08-31 1164
217 당신은 예수의 형제와 자매인가? (마12:46-50) [2] 운영자 2012-08-30 1345
216 기도의 차원을 높여라.(요17:1-5) [2] 운영자 2012-07-02 1055
215 다시 일곱 귀신이 들지 않으려면? (마12:43-45) [1] 운영자 2012-06-22 2227
214 하나님을 제일 잘 사랑할 수 있는 길(신6:4,5) [2] 운영자 2012-06-01 1080
213 영적 분별력의 본질 (눅11:5-13) [2] 운영자 2012-05-23 2040
212 평생에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말(마12:38-42) [1] 운영자 2012-04-04 1183
211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약1:2-4) [1] 운영자 2012-03-22 1105
210 조급증을 없애는 최고 비결(고전10:31) [2] 운영자 2012-02-10 1029
209 하나님의 양자 된 신자(롬8:12-15) [1] 운영자 2012-02-02 894
208 십 점 만점에 십 점인가? (마5:3) [2] 운영자 2012-02-02 896
207 너무나 느긋하신 예수님 (막1:32-39) [1] 운영자 2012-01-27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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