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날로 소망을 거두시는 하나님 (마13:24-30)

조회 수 938 추천 수 34 2012.09.21 01: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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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소망을 거두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 (147)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24-30)


너무나 불공평한 하나님

최근 한국에선 길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칼을 휘둘러 다치게 만든 무차별 폭행 사건이 있었다. 또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여아를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일도 일어났다. 자연스레 도대체 세상이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탄식이 쏟아진다. 유력 대선후보 한 분은 스스로 사람이기를 거부하는 자는 사형시켜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벌써부터 초등학교나 중학교 전체를 감옥처럼 높은 철망으로 울타리 쳐놓았다. 부모라도 반드시 교무실에 체크인을 해야만 출입할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도를 해보면 불신자로부터 이런 반발을 자주 듣게 된다. “악인이 저렇게 득세하는데 반해 가난하고 착한 자는 손해만 당한다. 모순과 불공평한 일이 세상에 너무 많으니  하나님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이런 불의를 보고도 손을 놓고 있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이유가 없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그들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문제는 일부 신자들마저 그런 반발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실사회의 공의를 세우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고, 어떡하던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틀린 생각이다. 이 문제로 불신자에게 변론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은 제대로 정리해 두어야 하는데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불신자들이 제기한 그런 의심, 반발, 질문에 관한 해답이 바로 본문에 제시되어 있다. 특별히 30절 한 절만 다시 보자.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선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유보, 연기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반드시 곡식과 가라지로 구분하신다. 이 비유에서 추수 때는 물론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를 말한다. 그러나 각 개인에게 적용하면 인생을 마감하는 때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모든 인간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된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인생을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 그 한번 산 일생을 갖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인생에 제 2의 기회나 패자부활전 같은 것은 절대 없다.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행하든, 아니 말하고 생각하는 것 전부가 하나님의 데이터베이스에 하나 빠짐없이 입력된다.

다윗이 어떻게 고백했는가? “주께서 나의 않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이 광대한 우주의 중심에 계시면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이다. ....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에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2-8) 하나님의 신을 떠나 피할 곳이라곤 전 우주에 한 군데도 없다.

미래성 천국과 현재성 천국      

그런데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나, 각 개인이 죽음으로 맞는 심판은 먼 미래의 일이다. 미래에 완성될, 아직은 유보된 상태의 천국이라 별로 실감을 하지 못한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된 것 같은 느낌은 여전히 시원스레 해소되지 못한다. 그에 대한 해답도 본문에 있다.

가라지는 끝까지 가라지라는 것이다. 겉모양은 곡식과 똑 같고 심지어 똑 같은 모양의 열매도 많이 달린다. 그러나 그 속에 알곡은 전혀 없다. 본문에서 가라지는 불에 타게 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지옥 형벌에 떨어진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도 땔감 용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겉모양이 똑 같아 모두가 곡식인줄 착각한다. 비록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거기다 가라지 스스로는 자기가 가라지임을 알고 있다. 아무리 형통하고 출세하여 돈과 권력과 명예에 하나 부족한 것 없어도 결코 만족과 자유와 평강이 없다. 삼성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인생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 24가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 죽은 후에 무엇이 있는지,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평소 성적은 일등이었지만 막상 대학입시 날에 패닉이 와서 낙방한 것과 같다.

어차피 죽은 후는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혹시라도 그처럼 일생을 풍족하고 호사스럽게 살았으면 싶은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재벌 회장이 겪는 고난과 문제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고 중하다. 나아가 그가 죽을 때에 이르러 갑자기 철학가나 종교가가 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해도 답을 얻지 못해 평생 숙제로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비유컨대 공부는 항상 잘했지만 입시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불안을 떨치지 못했던 셈이다. 현재 상태로 가다간 틀림없이 낙방하리라 이미 알았거나 최소한 짐작했을 수 있다. 그런 염려가 불러오는 스트레스를 제대로 이기지 못하다 마지막에 가서 폭발한 것이다. 가라지라고 해서 악행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큰 업적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아무 향방이 없으니 갈 지(之) 자 행보만 하다가 삶을 마친다. 허공만 치다 만 헛된 싸움이다.

물론 곡식도 자기가 곡식임을 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죄 사함의 확신을 얻고 거듭난 신자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성령이 간섭하여 믿음마저 선물로 얻은 구원의 초자연적 과정은 구체적으로 몰라도 자신의 속에 예수님의 참 생명의 씨앗이 이미 심겨져 있음은 안다. 좋은 땅으로 변모된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열매가 그분의 인도에 따라 맺히고 있음을 실제로 보게 된다. 시일이 경과할수록 그 열매가 점점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열리는 것을 체험하기에 기쁨과 감사 또한 넘치게 된다.

고 이회장과는 전혀 반대의 삶이 된다는 뜻이다. 세상 형통과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전혀 부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이름도 빛도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특별히 재벌 회장도 갖지 못하는 영혼의 만족과 자유와 평강을 누린다. 평소 학업성적은 별로지만 낙방하리라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천국의 비밀을 보고 듣고 깨닫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다. 죽음으로 인생이 결코 끝이 아님을 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안다. 영원하고 아름답고 풍성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이 땅의 내 인생을 그분께서 이끌고 계심을 믿는다. 아니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이미 그분께 완전히 의탁하고 있다. 비록 그분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자신의 게으름과 죄 때문에 조금씩 더딜지라도 말이다.      

현재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신자가 개인적으로 자신이 알곡임을 확신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인간 사회 전체에 하나님의 공의가 서는 것과는 여전히 무관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예수를 믿는 신자는 이렇게 많은데도 세상은 왜 거꾸로 막장으로 향하고 있는지 그 까닭을 모르는 것이다. 처음 제기된 질문의 핵심인데 그 최종적 해답 또한 본문에 나와 있다.

가라지와 곡식,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하는 것이다.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태가 바로 이 땅에 실현중인 현재형 천국이라는 뜻이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가? 천국이라면 대다수 신자들은 한숨, 눈물, 고통, 모순, 갈등, 죄악, 등이 전혀 없는 유토피아만 상상한다. 죽은 후나 마지막 때에 구원이 완성되는 천국은 그렇다.

그러나 천국의 본질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만사를 그분께서 통치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가 천국이다. 지금 하나님이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했다. 또 그 전에 밤사이에 악한 자가 와서 가라지 씨앗을 뿌리고 간 것도 허용하셨다. 그럼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이자 그분이 통치하신 그분의 나라이지 않는가?

물론 세상에는 인간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불평과 불신은 물론 분노마저 치솟는 모순과 고난과 재앙이 수시로 발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고 크고 높다. 현실적으로도 모든 일을 당신께서 합력하여 당신의 선으로 이루신다. 모든 일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야 만다. 완전하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면 그 통치도 인간의 이해여부와 무관하게 당연히 완전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하신 통치를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시는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통치하신다.

그럼 처음에 제기된 의문대로 하나님은 세상의 공의를 세우는 것보다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데 더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말인가? 아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니까 그렇게 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되는 것은, 그분이 현재 이 땅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게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거듭나게 해주신다. 죽기 직전의 예수님을 영접하는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다 그렇다. 만약 하나님이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죽은 후에 구원하시면 그만이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출생 전에 이미 선택하여 예정하셨지 않는가? 대신에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을 믿는 자를 구원해주신다. 말하자면 신자가 살아갈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 동안에 구원되는 방식을 통해 그분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는 현재형 천국이 임한다는 것이다.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어떤 문제든 제대로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맹장염으로 판정되면 수술만 하면 간단히 치료되는데도, 대장이나 위암인지 조직검사에 MRI 촬영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면 그 동안에 맹장이 터져 죽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공의마저 의심될 만큼 세상의 모순과 질곡과 고난이 많은 근본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이단은 모든 잘못의 원인을 사탄에게 돌린다. 감기가 들어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축사(逐邪) 기도를 한다. 이는 잘못이다. 감기는 바이러스 탓일 뿐이다. 주술사가 판을 치던 원시시대 때나 통하던 이야기다. 모든 것이 사탄에게 휘둘리면 그야말로 하나님은 수수방관하고 있거나, 병 주고 약 주는 셈이 된다. 자칫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서 선과 악이 교차해서 승리한다는 이원론으로 변질된다.  

또 사회 경제적 환경이 열악해서 잘못이 생긴다고도 한다. 쉽게 말해 못 살아서 그러므로 소득 수준이 향상되거나 최소한 평등해지면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답해보라. 브라질 밀림의 원시인 사회와 미국의 LA와 어느 사회가 더 선하고 의로운가? 스스로 느끼는 행복지수가 어느 쪽이 높겠는가?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실패했지 않는가? 그럼에도 아직도 빈민구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해방신학의 기치를 높이 드는 자들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간의 시민의식 교육과 훈련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긴다고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범죄 수준을 비교해보라. 선진국일수록 죄의 종류는 다양화, 지능화되어 음흉하기 짝이 없지 않는가? 현재 전 세계가 힘들어 하는 경제위기도 바로 하버드, 예일 대학 출신의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때문에 생기지 않았는가?

성경은 인간 세상의 모순과 고통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을 거부한 죄라고 말한다.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잘못이 기인한다는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가운데 첫째가 생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거부하여 타락한 까닭에 모든 죄악과 모순과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해결책이 전도하여서 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인가? 아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미련한 것은 전도가 아니다. 전도방식이 잘못되었거나, 체계적으로 교리를 전하지 못하거나, 지금 제기된 것 같은 질문들에 제대로 변증을 못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려한 내용임에도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저자가 동일한 문단 안에서 동일한 용어를 사용했으면 당연히 그 뜻도 동일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18), 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1:23)라고 했다. 그럼 미련한 것은 십자가의 도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메시아이므로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이다. 세상 모순과 죄악의 근본 원인이 타락한 영혼이기에 그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심어 해결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방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자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을 주시길 기뻐한다고 해서 천국 시민의 숫자를 최대한 늘리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교세를 세상 모든 종교 가운데 으뜸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모든 종교에 영적 실체가 없으며 당신과 아예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별 교회의 교인 숫자를 늘리고 교회 건물을 크게 짓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십자가 앞에 항복한 자에게 성령을 내주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좋은 땅으로 당신께서 변모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신자로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물과 햇빛과 영양분만 잘 받아들이면 자연히 또 반드시 자라서 삼십, 육십, 백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 행하는 선한 행실을 보는 불신자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께 맡겨주신 소명을 다 이루셨다고 했다. 좋은 씨가 뿌려진 좋은 땅이 결실을 못하게 만드는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셨다는 뜻이다. 더 이상 흑암의 세력이 신자를 훼방하고 넘어트려 실패케 만들 수 없다.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를 받아 누리는데 근본 장애는 다 없앴다. 신자가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 성령의 인도를 통해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를 소망만 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 주시길 기뻐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 제국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거룩한 남은 자를 통해 이 땅을 천국으로 바꾸시겠다는 뜻이다. 당신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는 완전한 통치를 신자를 통해 지금도 당신께서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정치, 경제, 문화적 영웅들이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으로 편하고 재미있게만 할 뿐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에만 기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과는 하등 무관하다.

최근 인터넷에 “오바마의 진실”이라는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스스로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천명한 그가 코란을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면서 그 구절들을 인용해서 무슬림을 칭찬하며 연설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가 회교도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충분한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를 상대할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롬니는 이단인 몰몬교도이다.  

청교도 선조들이 기독교를 지키려 세운 나라가 이젠 이런 상황까지 변질되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구약시대의 느부갓네살 왕이나 애굽의 바로 같은 이방 군주나 다름없다. 도덕적 성적으로 너무나 타락한 미국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수단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미국 사람의 배를 조금 더 불리게 할지는 몰라도 성경적 타락상이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될 것은 너무 빤하니 말이다.
  
지금 세상은 그런 정치가보다 오히려 애플과 삼성이라는 두 IT 강자가 다스린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집트나 리비아의 장기 독재를 종식시킨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모바일 폰을 이용한 SNS 덕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 두 절대 강자들마저 돈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할 것이냐를 두고 세계 곳곳에서 법정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 젊은이들의 Role Model 이자 우상은 애플의 창업주 고 Steve Jobs다. 그가 죽어서도 젊은이들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정보혁명이라는 그럴싸한 구호로 치장했어도 한마디로 무조건 돈을 벌라는 것이다. 하늘의 곡식을 맺기 보다는 이 땅에서 가라지 같은 인생으로 사는 것이 낫다고 권유하는 셈이다.    

신자의 소망과 세상의 소망

인류 역사를 살피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개혁은 소수의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자에 의해서  이뤄졌다. 하나님은 아무 이름도 빛도 없는 단 한명의 남은 자를 통해서도 당신의 큰일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노예제도의 폐지나, 여권신장,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공교육 제도 같은 일들이 대표적 예다.  

남은 자들은 평생 동안 현실적인 궁핍함은 물론 세상 사람들의 핍박을 견뎌내면서 그런 일을 수행했다. 예수님의 참 생명이 그들 안에서 역사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신은 섞어 없어지는 밀알이 되어도, 주님처럼 순교를 당해도, 그들에게  맺혀진 열매는 모든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발한다.

하나님 보시기엔 이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다. 믿음의 위인들을 열거한 히브리서 11장에 유다왕국을 오래도록 태평하게 다스린 웃시야 왕 같은 이의 이름은 빠져 있다. 아니 이스라엘을 가장 풍요롭게 번창시킨 솔로몬의 이름마저 찾을 수 없다. 세상의 영웅과 하나님의 영웅은 다르다.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식으로 이 땅을 천국으로 바꿔가고 있으며 그 일을 지금도 당신의 거룩한 남은 자들이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의 모순, 질곡, 고통, 죄악, 불공평 등을 그대로 방임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한숨, 신음, 눈물, 외침 등을 다 보고 듣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함께 신음하고 눈물 흘리신다. 이 땅에 공의를 세우는 일은 그분이 정말로 더 간절히 소망하신다. 솔직히 우리 가운데, 믿음이 좋은 신자라 해도 과연 얼마나 이 땅의 불의와 죄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가? 아니 안타까워하기라도 하는가? 제대로 관심이라도 갖는가? 신자마저 이럴진대 인간들이 어찌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고 감히 비평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하나님이 인간들이 바라는 식으로 공의를 세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에 맞는 벌을 준다면 말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 땅에 인간이라곤 단 한명이라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제부터 가장 먼저 없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0-12)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신자들이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만 감격을 한다. 공의로 따지면 더더욱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신앙의 출발은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로 따지면 자기부터 제일 먼저 가장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우리 죄과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는 그 크신 자비에 바탕을 둔 그분의 공의 앞에선 오히려 입도 벙긋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을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이 세상을 여전히 인간들의 자율학습의 장으로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대의 경우는 이미 골고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실현되었음을 보고 들었다. 신자가 진정으로 소망만 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그분의 남은 자들이 되어서 이 땅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다.  

신자에겐 하나님만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소망이다.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누릴 수 없다면 아무 소망이 없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남은 자로서 그분의 이 땅을 향한 온전한 통치에 참여하는 신자는 세상의 소망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소망이다. 세상은 무엇이 참 소망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또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신자가 한 알의 밀알로서 세상에서 썩지 않으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소망이 없어지는 것이다. 남은 일은 진짜로 하나님이 인간들이 바라는 그 방식대로 공의를 세우는 일 즉, 마지막 심판 밖에 없다. 지금 이 세대가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신자들마저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것 같다는 불만을 갖고 있고, 불신자들의 그런 반발에 전혀 변론을 못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다른 말로 신자가 믿음으로 가장 잘못하는 일이 도덕적 종교적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 앞에 거룩한 남은 자로 서있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저를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하나님은 대체 무엇하고 계셨느냐고 의심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다. 왜 나를 수수방관하셨느냐는 것은, 세상에서 손을 놓아 공의를 실종케 했다는 불신자와 동일한 반발일 뿐이다. 그분이 남겨두신 자로서 세상을 거룩과 의와 생명으로 개혁할 시도는 전혀 않으니, 아니 자신이 그런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으니 말이다.

9/9/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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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당신은 예수의 형제와 자매인가? (마12:46-50) [2] 운영자 2012-08-30 1345
216 기도의 차원을 높여라.(요17:1-5) [2] 운영자 2012-07-02 1055
215 다시 일곱 귀신이 들지 않으려면? (마12:43-45) [1] 운영자 2012-06-22 2227
214 하나님을 제일 잘 사랑할 수 있는 길(신6:4,5) [2] 운영자 2012-06-01 1080
213 영적 분별력의 본질 (눅11:5-13) [2] 운영자 2012-05-23 2040
212 평생에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말(마12:38-42) [1] 운영자 2012-04-04 1183
211 정말로 믿음이 자라고 싶은가?(약1:2-4) [1] 운영자 2012-03-22 1105
210 조급증을 없애는 최고 비결(고전10:31) [2] 운영자 2012-02-10 1029
209 하나님의 양자 된 신자(롬8:12-15) [1] 운영자 2012-02-02 894
208 십 점 만점에 십 점인가? (마5:3) [2] 운영자 2012-02-02 896
207 너무나 느긋하신 예수님 (막1:32-39) [1] 운영자 2012-01-27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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