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4:4-7)

조회 수 1805 추천 수 31 2013.01.08 0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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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4-7)  


역차별 당하는 기독교

지난주에 저희 집 근처에 계시는 은퇴한 노목사님 부부를 찾아뵙고 작은 선물과 함께 크리스마스카드를 전해드렸다. 그런데 그 카드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보셨다. 일반 가게에선 Merry Christmas라고 쓰인 카드는 눈 닦고 보려도 없고 Happy Holiday 카드뿐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미국인들이 기독교와 그 신자를 싫어하다 못해 미워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지우려 혈안이 되어 있다. 종교의 자유가 가장 보장된 나라에서 유독 기독교만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기독교 고유의 절기에서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빼라고 한다. 비유컨대 석가탄신일이라는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봄의 축제” 식으로 바꾸라는 것과 같다. 만약 그랬다간 불교도들 뿐 아니라 온 국민이 말도 안 된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기독교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문화, 세태, 사조의 변화가 아니다. 그 배경에는 영적으로 추하고 음흉한 흑암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너무 극단적인 해석이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이 상식 밖의 일을 자행하고 있다. 자신들이 틀린 줄도 모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옳다고 주장한다. 지정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다른 말로 영적 차원의 세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귀신이 들려 언행이 이상야릇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평소 계획하고 행하는 것이 사악하다는 것도 아니다. 인간 사회의 측면에서 보면 의롭고 선한 행위도 많이 한다. 그러나 사탄의 본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인간을 미혹하여 비정상을 정상으로 혼동케 만든다. 불신자들이 사탄에게 그렇게 미혹당하고 있다는 한 가지 확실한 증거가 전도할 때에 여실히 나타난다.      

불공평하고 편애하는 하나님?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전도하면 불신자들이 통상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대체로 본인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수긍한다. 그러나 구원의 길이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지 반발한다. 자기 죄를 자신이 회개하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설령 스스로 온전한 회개를 하지 못한다 해도 기독교 외의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오히려 그 쪽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고 한다. 기독교는 전혀 선행도 하지 않은 천하의 악당이 단지 예수가 십자가에 그 죄 값을 다 감당했다는 사실만, 그 자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도무지 불합리하고 엉터리 같다. 착하게 산 자가 구원을 받고 악한 자가 심판을 받아야 공평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만 편애하는 너무나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미국인의 통계에 따르면 남자 성인이 하루에 평균 거짓말을 10번 정도 한다고 한다. 설마 그렇게 많이 할 리가 있나 싶은가? 솔직히 부부 사이는 물론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속이는 일이 얼마나 빈번한가? 집을 팔 때에 천장에 물이 조금 새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미국에선 감옥까지 가야하는 아주 큰 죄다.

사회에 만연하는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큰 죄다. 나중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거짓에 동의하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에 대해 의심과 불만과 분노마저 치솟는데도 성도들이 믿음이 좋지 않다고 여기고 하나님께 혹시 벌 받지 않을까 염려해 그렇지 않은 척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남의 잘못과 허물을 카버해주는 하얀 거짓말은 물론, 영적인 위선을 빼고도 하루에 열 번 정도 거짓말은 누구나 너끈하게 하고도 남는다.

그럼 평생에 몇 번의 거짓말을 하겠는가? 어렸을 때를 빼고 60년만 잡아도 누구나 무려 216,000 번의 거짓말을 하게 된다. 만약 평생 백 번 미만의 거짓말을 한 자는 구원을, 또 20만 번 한 자에게 심판을 준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통사람이 216,000 번의 거짓말을 하기에 단순히 판단할 계제가 아니다. 착한 자를 천국 보내려면 Cut-line이 있어야 하고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어쩔 수 없이 중간선에서 자를 수밖에 없다. 그럼 평생 216,000 번의 거짓말 한 자는 천국으로, 216,001번의 거짓말 한 자는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

인간의 죄가 어디 거짓말뿐인가? 수천, 수만 가지의 죄가 있는데 인간의 평생에 적용하면 인간이 평생 짓는 죄는 가히 천문학적 숫자가 될 것이다. 뭉뚱그려 백만 번이라고 치고 선악 간에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백만 번까지 죄 지은 자는 구원을, 백만 한 번의 죄 지은 자는 심판을 주어야 한다. 과연 이런 신이 공평한 신인가? 가장 불공평한 신이 아닌가? 아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지 않는가?

도토리 키 재기하는 인간들

그럼에도 불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은 자기들 선행 구원관이 도리어 불공평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다. 그 반대로 자기들 생각이 절대로 옳고 기독교는 완전히 틀렸다고 여긴다.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속인 결과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사탄이 세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종교교육이나 영성훈련을 시킨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의 영혼에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주입시켰을 뿐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라.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다. 네 스스로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 있다. 종교도 네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믿으면 된다.”라고 부추긴 결과다.

이것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 너무나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어느 인간도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한다. 인생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선택, 주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중간 과정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은 물론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선물로 준 것임에도 마치 자기가 자기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라는 차원에선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그 크기가 1-2센티에 불과한 도토리에게 1-2 밀리미터 크고 작아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착한 자를 구원하고 악한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은 시험점수 채점관에 불과하다. 또 사후세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너는 이쪽으로, 너는 저쪽으로 가라고 지시해주는 문지기일 뿐이다.

나아가 그런 사후 심판관 같은 신은 인간의 이 땅에서의 일상생활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현실의 고달픔으로 한숨 쉬고 슬퍼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며 남들에게 상처 받고 분노하고 죄로 추해지고 영적으로 눌리며 갈급하며 허망해하는 아픔을 전혀 해결 못해주고 아예 관심조차 없는 신이다. 거기다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 땅에 실현시킬 의사마저 없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결국 자신들은 평균 이상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셈이다. 감옥에 갈 만한 죄는 물론, 남에게 폭력이나 사기로 손해를 끼치는 잘못을 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올곧게 살려고 노력했기에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악하고 추한 세상의 죄악과 부패를 외면하고 침묵한 거짓말을 빼고도 평생 26만 번 넘게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거기다 말로 형제를 살인하고, 마음으로 간음하는 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매일 범하고 있음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이 오신 뜻

본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냈다고 한다. 이천년 전 오늘에, 정확한 날짜와 계절은 다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율법에 묶여 있는 자들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율법이 나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수여받고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신6:1) 약속의 땅인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  앞에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자들답게 사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모든 열방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만들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살고 있어야 할 삶의 방식이 율법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양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변질시켜버렸다. 쉽게 말해 착하게 사는 자가 구원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 셈이다. 유대인들 스스로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평균 이상이라는 자부심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엄밀히 따지면 당신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 하나님을 잘못 소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들 같이(?) 평균 이상의 사람만 상대하는 분으로 말이다.

착한 자를 천국으로 보내는 하나님이야말로 그분을 가장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가장 불공평하다고 그분을 모욕하는 셈이다. 당시로선 하나님께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아서 영적으로 가장 뛰어났고 그분을 성실히 믿고 따르던 유대인들조차 그랬다. 그들마저 당신을 잘못 알고 있으니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와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가르쳐주어야 할 수밖에는...  절대로 평균 이상의 사람만 상대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사역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리, 창녀, 문둥병자 같은 불치병 환자, 장님이나 귀머거리 같은 불구자, 귀신 들린 자들을 먼저 찾아가 교제하며 치유하고 가르치셨다. 단순히 사랑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더 깊은 뜻이 있었다.

복음서의 예수님이 죄인과 교제했다는 표현이 감옥에 갇힌 죄수를 찾아갔다는 것이 아니다. 율법, 그것도 모세의 율법이 아닌 바리새인들이 정한 세부규정을 어긴 자들을 말한다. 예컨대 안식일에 오 리 이상 여행했거나,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은 자들이다. 물론 한두 번 어겼다고 죄인 취급을 하지는 않는다. 혹시 어기면 제물을 바치며 속건제를 드리면 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여유가 없어서 정결례를 드리지 못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또 그 이후로 성전 제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 모두가 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한 자들이었다. 재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세리는 돈이 많았고 나름 권세도 휘둘렀다. 그들 모두가 성전 문 앞까지는 가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에게 저주받아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진 자들이었다. 인생에 그 어떤 소망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착하지 않고 악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정한 기준으로 평가, 판단, 정죄하여 지옥 가기 마땅하다고 낙인찍혀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먼저 찾아가 한숨을 거두게 하고 눈물을 닦아주셨다. 그대로 가만 두면 상할 대로 상해 완전히 썩어 없어질 갈대였고, 또 꺼질 대로 꺼져 완전히 소멸될 촛불들이었다. 참 하나님은 절대로 평균 이상의 사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평균 이하의 사람에게 가까이 있음을 알게 해준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직간접으로 세상에 선포한 메시지는 이렇다.  

“너희들 중에 누가 더 착하며, 누가 더 악한 구분이 어디 있느냐? 모두 다 내가 귀하게 창조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하나 없듯이 전부 내 소중한 자녀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나는 너희를 단 한 번도 외면, 거부한 적이 없다. 이방 여인 하갈이 광야에서 목을 놓아 울 때에 사자를 보냈듯이 너희 모두를 하늘에서 감찰하고 있다. 침 삼키는 순간에도 놓치지 않고 머리카락까지 센 바 되었다.”

“너희는 세상의 것이나 인간의 사랑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다. 너희 부모마저  너희를 버릴찌라도(시27:10) 나는 너희를 떠난 적이 없다. 너희가 죽고 난 이후에 그저 점수나 매기는 그런 하나님이 절대 아니다. 제발 사탄에 속지 말라. 나의 품 안을 벗어나 방황하지 말라. 그러면 목마름과 황폐함만 따를 뿐이다.”

세상에서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하면서 자기들이 정해놓은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평균 이하라고 정죄한 자들조차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셨다. 당신에게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식으로 추궁하는 그들 앞에서 전혀 한마디 변명도 않으셨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서야 딱 한마디 말씀만 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로 말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구원의 길을 도무지 알지 못해 말로 설명해도 깨달을 수 없기에 주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것이다. 또 그런 자들을 당신께선 이미 용서하셨고 당신 앞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행구원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참 구원의 의미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만 즉, 말이 아닌 행동으로만 만천하에 드러내셨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보내려면

오늘 주님 오신 날을 맞아 그 오신 뜻,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다는 엄청난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나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권능 안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여러 종교를 비교해 선택하여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종교는 선택할 수 있어도 한 분 하나님은 절대 선택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그분이 부어주시는 일방적인 은혜 앞에 항복하느냐 거부하느냐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또 천국 보험 들듯이 밑져야 본전으로 구원을 준다니 일단 믿어보기로 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죄를 스스로 씻을 길이 없기에 십자가 대속의 공로만 붙들어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에 동의한 것도 아니다.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사탄이 예수 이전의 사람의 마음에 심어준 생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해! 종교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믿어! 아무 선행도 하지 않았는데 구원을 준다니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였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에게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빼어버린다. 그리고는 “나는 절대로 평균 이상의 사람만 편애하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다.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골고다의 십자가를 보라.”는 마음을 심어주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평균 이하로 취급당하는 사람일수록 그 곁에 오셔서 함께 눈물 흘리고 한숨을 쉬고 계심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사방이 다 막혀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보여주신다.

예수 믿은 특권은 그래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절)는 확신 가운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어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고 당신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려 주셨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다하고 천국 문에 이를 때에 하나님이 첫째로 하시는 말씀이 바로 “내 아들아 너무 잘 왔다.”라는 것이다. “네 성적표 꺼내놔. 좀 보게!”가 아니고 말이다.  

신자는 불평을 할 수 없는 존재다.

혹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인격, 도덕성, 종교적 열심, 하나님을 아는 영성 등에서 평균 이상이라는 자부심이 조금이라도 드는가? 혹은 단 한 명이라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앞선다는 마음이 드는가?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는데도 사탄에게 잠시 속고 있는 것이다.

또 혹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죄를 지었거나, 예컨대 주일 성수를 어겼다든지 할 때에 “이러다 하나님에게 벌 받는 것은 아닌지?”라는 염려와 두려움이 드는가? 마찬가지로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십자가 안에선 무슨 잘못을 범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식이 잘못했다고 일일이 벌을 주는 부모는 없다. 그럼에도 바로 된 자식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회개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가? 신자가 비록 잘못을 범해도 십자가 앞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하게 나아가 용서를 구하면 그 성품과 믿음이 더 성숙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왜 이 힘든 고난이 그렇게 오래토록 기도했는데도 끝이 나지 않는지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한다는 의심과 불만이 드는가? 이 또한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더 강건해지라고 어려움에 빠져도 잠시 모른 척할 때가 많지 않는가? 아니 일부러 그런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앞섰다고 자랑하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환난과 두려움과 염려와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는 자에게 새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주려 오셨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의심과 불만과 걱정과 공포와 분노가 생길 때라도 골고다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십자가 구원의 진리에 비추면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상고하면 예수 믿는 신자에겐 엄격히 말해 현실의 삶에 대한 불평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12/23/2012 성탄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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