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1:4-10) 이상하게 일이 자꾸 꼬이면?

조회 수 42 추천 수 0 2020.10.23 11:18:23

(욘1:4-10) 이상하게 일이 자꾸 꼬이면?

요나서 강해 (3)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1:4-10)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

 

요나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고 도리어 회개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당시의 세상의 끝이자 니느웨의 정반대 쪽인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려 요나가 탄 배를 파선될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4절) 그 풍랑의 원인을 알고자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걸렸고 요나도 지은 죄가 있어서 바다에 던져져 폭풍우를 잠재울 제물이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미국의 한 신학자가 요나서에는 다섯 번의 우연의 일치가 있다고 분석했는데 그 첫째로 태풍이 일어났다는 본문 4절을 들었습니다. 둘째는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풍랑이 그친 일을(1:15), 셋째는 큰 물고기를 예비해서 요나를 삼키게 한 것을(1:17), 넷째는 그늘지게 하려고 박 넝쿨이 나게 한 것을(4:6), 마지막 다섯째는 그 넝쿨을 하루 만에 시들게 한 일을 꼽았습니다.(4:7) 강해를 해나가면서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 두 배인 열 번도 더 되는 것 같습니다. 당장 1:3에서부터 다시스로 도망가려 했는데 마침 그 배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요나서는 우연의 일치 즉, 일상적 상황이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판타지 소설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요나는 물론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뿐 아니라 전부 하나님과 직접 연관되는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겪은 신자 본인이 아니고는 기록할 수 없다고 해석해야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본문이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요나가 배 밑창에서 깊이 잠 들었다고 합니다.(5절) 여호와의 낯을 피해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작용하여 밑창에까지 숨어든 것입니다. 스스로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너무 비겁하고 부끄럽게 여겨져 아무도 만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깊은 잠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후로 이래저래 신경을 많이 쓰는 바람에 육신적으로도 아주 피곤해졌던 것입니다.

 

본문은 또 여호와께서 큰 풍랑을 일으켰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인식에 따른 진술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요나가 바다에 제물로 바쳐지고 풍랑이 잠잠해진 후에야 여호와가 일으킨 풍랑이었다고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여호와께 무슨 잘못을 범했는지 잘 아는 요나로선 풍랑이 일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이방인 사공들도 두려워서 자기들 신의 이름을 부르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버리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지중해의 사정에 능통한 전문가로 언제 어디서 어떤 풍랑이 부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태풍의 계절에는 배를 운행하지 않으며 통상적인 풍랑은 항해기술로 뚫고 나갑니다.

 

지금 풍랑을 만나자 바로 자기들 신의 이름부터 불렀고 짐을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마른하늘에 갑작스럽게 격렬한 폭풍우가 불어 닥쳤기에 뭔가 신의 큰 노여움을 샀으며, 풍랑의 세기로 봐선 짐을 바로 버리지 않으면 전복하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선장이 배 밑창에서 곤히 자고 있는 요나마저 깨워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6절)고 재촉할 정도였습니다.

 

상이한 두 종류의 신관(神觀)

 

선장이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었거나 인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공들이 각자 자기의 신의 이름을 부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선장과 사공들의 생각에는 요나에게 나라와 민족이 생업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듯이 각 지역 민족 나라마다 신이 다를 뿐 아니라 각 신들이 통치하는 전문 분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각 항구마다 신이 다르고 거기다 바다의 신, 비바람의 신, 구름의 신, 안개의 신 등등으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은 분명한데 그 많은 신들 중에 어느 신인지 모르니까 한 명도 빠짐없이 각자의 신에게 빌라는 것입니다. 원어로도 선장이 말한 하나님은 통상적인 의미의 신(神)으로 복수형 엘로힘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도 너의 하나님을 불러서 용서를 빌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장은 누가 믿는 신이 노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비를 뽑자고 제안했는데 마침 요나가 당첨되었습니다.(7절) 이 또한 하나님이 마련해놓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우연이란 자기가 소원 계획 시행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그 배경에는 그것들을 필연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인간 사회에 비상한 큰일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 사탄 둘뿐인데 지금은 당연히 성경이 말하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제비를 미신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비는 인간의 불완전한 뜻과 다수결의 횡포가 작용될 소지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엔 성령이 본격적으로 강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도 성경으로 확정되기 전이라 하나님은 종종 제비로 당신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제비로 뽑았습니다.(행1:26)

 

제비에 뽑힌 요나는 자신의 도피 행각을 순순히 인정하고서 자신을 “히브리 사람이요”라고 소개했습니다. 히브리인이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9절)라고 덧붙였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은 지구 전체를 다 만들었고 영계에 계시는 분이므로 특정 지역에서 제한된 역할만 맡은 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선장과는 달리 하나님이라는 명칭에 여호와라고 붙였습니다. 여러 신들을 동등하게 보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고유명사 즉,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은 상천하지에 유일한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었으니 이 풍랑도 일으켰고 나중에 안전하게 육지에 도착시켜줄 분도 오직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보면 요나는 분명히 유일신 창조주가 실존하실 뿐 아니라 지금도 그분이 세상만사를 통치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가 이번 일을 통해 생전처음 그 크신 여호와를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고, 때에 맞지 않는 급격한 풍랑도 일었고, 제비에 자기가 뽑혔습니다. 세 번의 우연의 일치가 겹쳤으니 요나가 그 배후에 여호와가 살아 역사하심을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실행한 이후로는 틀림없이 여호와께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염려했을 것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도 이 일을 묵인하는가보다 쉽게 판단하고 그간의 피로가 풀리면서 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걱정했던 큰 형벌이 실제로 자기 눈앞에 딱 벌어진 것입니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며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 때문이라고 자백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벼락 맞아 즉사하겠다는 예상도 쉽게 되었을 것이므로 순순히 선원들에게 자기 때문이라고 실토한 것입니다.

 

머피와 셀리의 법칙

 

세상 사람들이 우연이 겹쳐서 필연으로 바뀌는 현상을 묘사하는 용어가 둘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려는 일이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불행하게 진행되는 현상을 머피의 법칙( Murphy's law)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반대는 샐리의 법칙(Sally's law)으로 계속해서 자신이 바라던 대로 일이 순조롭게 일어남을 뜻합니다.

 

그럼 지금 요나의 경우는 이 둘 중에 어떤 법칙이 작용한 것입니까? 또 어떤 것이 하나님이 행하는 법칙입니까? 둘 다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한 가지 법칙에 매이면 벌써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나 말대로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피조물인 바다가 그분을 이렇게 저렇게 제한할 수는 결코 없으며 당신께서 바다와 하늘을 움직입니다. 그분만이 세상 어떤 것에도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요나서에 기록된 여러 번의 우연의 일치를 일부 목사님들이 셀리의 법칙으로만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매번 어김없이 당신만의 큰 권능으로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고난에서도 건져주신다고 합니다. 요나에게 시킬 일이 아직 남았기에 그랬다는 사실은 빠트리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소원하고 계획하는 대로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고 하면 일종의 셀리의 법칙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만 역사합니다. 때로는 머피의 법칙이 때로는 셀리의 법칙이 한 사건에서도 교차적으로 작용되게 만듭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속담처럼 당신의 마음대로만 만사를 이끌며 그분의 마음에 개입하여 간섭할 수 있는 존재나 사건은 우주 전체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고도 도망갔으니 큰 벌을 받으리라고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큰 풍랑 즉, 큰 불행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큰 벌을 내렸구나 싶었다 여겼는데 제비에 자기가 뽑혔으니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땅 끝인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것은 시간을 끌다보면 하나님이 체념 내지 계획을 변경해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소원과 간구가 배를 타자마자 무산되었고 죽음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사태는 머피의 법칙대로 흘러갔습니다.

 

이것으로 자기 인생이 완전히 끝인가 보다 체념하고 있는데 바다에 던져지자 금방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이젠 셀리의 법칙이 작동되었고 헤엄쳐서 육지에 도달하면 살 수 있겠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고래가 와서 자기를 통째로 삼켜버렸습니다. 또다시 거꾸로 머피의 법칙이 작동되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다시 살아날 것은 전혀 기대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죽었다 싶었을 것입니다. 음식물을 분해해야하므로 사람의 위액도 아주 독한데 통째로 삼키는 동물의 경우는 그 독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사흘을 아무 탈 없이 견디며 기도까지 할 수 있었으며 결국은 산 채로 토해내져서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가 기도하는 동안 고래가 육지까지 대신 헤엄쳐 준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셀리의 법칙대로 되었습니다.

 

신자의 통상적인 오해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너무 단편적 표피적으로 정리하고선 삶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대표적으로 머피의 법칙은 사탄이 행하는 것이고 셀리의 법칙은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불행한 일이나 궁핍이 닥치면 사탄이 훼방한다고 여기고 행복한 일이 생겨서 풍부해지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다고 판단합니다.

 

성경은 오히려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다고 선언합니다.(고후11:14) 출애굽 사건 때에 보듯이 사탄도 큰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그 졸개인 무당마저 때로 병을 고칩니다. 사람들로 하나님을 등지고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외면하게 만들기 위해선 사탄은 자기 간까지 빼줄 듯이 미혹시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마저 현실적인 복을 주는 메시아로 만들려고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했었고 사탄은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었습니다.(마4:8,9)

 

인생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듯이 믿음이 좋거나 나쁘거나, 그 전에 불신자이건 신자이건 관계없이 행복과 불행이 교차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대로 한 명의 예외 없이 온갖 고달픈 사연으로 구성된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입니다. 한 사건 안에서 그것도 같은 장소와 시간에서 머피와 셀리의 법칙이 함께 작용합니다. 체질이 연약하고 영적으로 어리석기에 우리의 믿음도 그에 따라 널뛰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이라고 오해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 원인이 없는 억울한 고난들이 일어났다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들은 깊이 따져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은 본인의 실수 허물 욕심 교만 죄악 때문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나머지도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비뚤어졌거나 궁극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온갖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병을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변화무쌍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청개구리처럼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맘껏 어질러놓은 일의 뒤처리를 하시느라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가끔 하나님이 정말로 병을 준 것처럼 여겨지는 일도 실은 당신의 백성들로 거룩하게 성장시키려는 징계입니다.(히12:5-10)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면 가장 먼저 부모님의 입장에 대입하면 그런대로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이 잘못하면 벌을 주지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달아 알게 해주어서 더 잘 자라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자식이 아무 잘못하지 않았는데 벌 자체를 목적으로 주는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정신병자나 알코올 중독자가 아닌 다음에는 그렇습니다.

 

거기다 세상 모든 부모는 벌을 주고도 자식이 아파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금방 벌을 중지하고선 다시 사랑으로 품어줍니다. 화가 나서 조금 심하게 때렸으니 울면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처럼 자식이 잘못하면 당신의 종아리를 매로 때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규범으로 율법을 수여했습니다. 그 첫 계명에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오직 당신만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 후에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신자의 선악 간에 대한 상벌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이어서 자동적으로 유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치로 대수를 표현한 것은 비유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죄는 아주 짧게 기억하고 그 벌도 삼사대 즉, 금방 그치나 당신을 순전히 경배하는 자들에겐 천대까지 즉, 은혜를 넘치도록 아주 오래 동안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잘못에 대해 징계는 하지만 금방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모습을 띄던 그 마지막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중간 과정이 셀리의 법칙이 작동하여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아도 마지막에 오히려 완전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사탄의 농간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 밖에 할 줄 모르며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형통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결실이 맺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미래가 언제나 분홍빛 카펫이 깔린 것처럼 거짓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외면시키는 것이 사탄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세속의 풍요와 재미에 푹 빠치게 만들어서 골고다 십자가 쪽으로는 눈을 감게 만들고 영원한 죽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바울이 고백했듯이(빌4:12,13) 신자로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궁핍 혹은 풍요에 처하게 하시되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당신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맙니다. 궁극적으로는 신자의 유익이 되게 하고 무엇보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높아지는 결실을 맺습니다. 그분의 신자 인생에 대한 결론은 당신의 선한 뜻 안에서 성공밖에 없으니까 그곳으로 가는 과정은 어리석은 인간의 눈에는 대체로 고난과 연단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일이 자꾸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 같아도 지쳐서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만 소망하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면서까지 하나님의 의의 열매를 맛보게 해주십니다.

 

요나에게 일어난 우연의 일치들은 매번 목숨이 오가는 역사상 최고 난도의 가장 무서운 롤러코스터였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은 요나를 안전하게 붙들어 매어서 당신의 목적지에 이르게 했고 무엇보다 당신의 당신 되심을 정확하게 계시해주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는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유대인 특유의 종교적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모든 이방 민족들을 멸시 천대했고 특별히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괴롭힌 니느웨는 저주했습니다. 니느웨를 용서해주는 것도 하나님의 본심이 아닐 수 있다고 기대 내지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인 기원전 765년에 니느웨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었습니다. 이 또한 지금 살펴보고 있는 우연의 일치에 속합니다. 요나서와 시간적인 전후 순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요나를 포함한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이 니느웨에 벌을 주시는가보다 짐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감히 도망갈 시도를 했을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 역병을 니느웨더러 회개하는 계기로 삼으라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죄악의 도성 니느웨도 머피와 셀리와 상관없이 행복과 불행이 교차 되는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역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니까 마치 우연히 일어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죄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양보해도 인간이 잠간 실수한 것뿐인데 너무나 큰 불행과 고난이 겹치니까 억울한 기분마저 듭니다. 신자들로선 그 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며 불신자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전도했는데도 불신자들과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교회에 모이지 못하고 성경공부나 기도모임까지 금지당하니까 더 억울하게 여겨지고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니느웨에 역병을 일으킨 것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선 요나서 주제대로 모든 인간으로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신자들이 요나처럼 당신에 대해 오해하지 말고 온전한 믿음 위에 바로 서서 세상으로 당신의 메시지를 들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와 의미와 결과 등에 대해서 정확히 알리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 앞을 가리기 바쁘기 마련이라 먹고 사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나 본문의 선장과 사공들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선지자 요나마저 자기 욕심과 뜻대로 배 밑창에서 잠에 골아 떨어져 자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큰 풍랑이 일게 만들고 고래를 배 근처에 데려다 대기 시켜놓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혼자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배에 폭풍우가 치고 니느웨에 역병이 돌게 하는 것들 모두가 당신이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당신께서 그 모든 일을 합력하여서 선으로 이끌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높일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고난이 닥쳤다고 사탄의 훼방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도 아니라 인간의 잘못이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징계를 목적으로 풍랑을 허용했을 뿐입니다. 징계는 심판과 달라 회개하면 그치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혹시 회개하지 않는다 해도 벌 받는 어린이로선 자기 잘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할 수 있고 부모도 적절히 벌을 주고는 그치듯이, 이 사태를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종식시켜주십니다.

 

코로나 사태의 궁극적인 해결책

 

작금 신자들마저도 종말적인 공포심에 젖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지만 하나님만은 당신의 완벽한 뜻과 계획에 따라 묵묵히 일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 뜻을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의 현실에 실현시킬 자가 있어야 합니다. 요나 때나 지금이나 당신께 헌신 순종하는 신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억울해 하거나 핍박받는다고 여기고만 있다면 그분의 일에 동참하지, 아니 부름받지도 못합니다.

 

혹시라도 코로나 사태에 교회로 자꾸 모이려는 것이 교회에 모여 기도해야만 불안감도 없애고 병도 안 걸릴 것 같은 생각 때문은 아닙니까? 요나처럼 배 밑창으로 깊숙이 숨으려는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는 여호와께 가까이 간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여호와의 낯이 우리를 피하지 않을까요? 신자가 된 것이 우리끼리 기도해서 우리 목숨을 지키는 정도라면 독생자 하나님이 십자가에 그 큰 희생을 치르며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신자들 중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시고 계십니다. 온라인 예배의 참석률이 교회등록 인원보다 훨씬 적고 이 사태가 끝나도 그럴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습니다. 당장 추측 가능한 원인들이 몇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태에 무력하게 손 놓고 계시다고 여겼거나, 주일에 교회 가서 봉사하지 않고 지내보니까 너무 편해졌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도 별다른 벌을 받는 것 같지 않아 교회에 출석할 필요 없다고 여겼거나, 인생에 아무런 해결책도 절대적 진리도 없는 것 같아서 너무 허무해졌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요나서에서 보듯이 기어이 당신의 거룩한 뜻을 당신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해본 적이 없는 신자들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자기를 전부 바치며 항복해본 적이 없는 거짓 신자들입니다.

 

미국의 크리스천포스트 9/24 보도에 따르면 18-36세의 밀레니엄 세대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믿는 자가 겨우 2% 밖에 안 되며 전체 평균도 6%에 그친다고 합니다. 다양한 질문과 답변을 종합한 결과이지만 아주 쉽게 말하면 신자들 거의 대부분이 창조가 아니라 진화로 이 땅과 인간이 생겼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연히 형성된 물질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이라면 교회, 예배, 성경, 기도, 진리 등이 아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리라 믿는 것은 말도 안 되며 단순히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합니다. 비록 다시스로 도망갔지만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다와 육지를 지으셨다고 고백하는 요나의 수준도 안 됩니다. 세상은 니느웨로 바뀐지 이미 오래이며 그것을 하나님 쪽으로 되돌려야 할 교회와 신자도 점점 똑같은 수준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 사회가 어떻게 될지는 신학과 교리를 몰라도 너무 빤하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머피의 법칙에 따른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에 따른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실을 정확히 알아야만 참 소망을 회복 실현할 수 있습니다. 당장에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영양제 몇 알을 먹이고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만 하는 의사는 살인한 것과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일부 목사님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인해 지구가 황폐화된 탓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인류 역사 내내 항상 있어왔습니다. 지구 황폐화는 최근에 생긴 것이라 지금이라도 인간끼리 힘을 합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의 결론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났다가 시들은 박 넝쿨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해야만 합니다.

 

(10/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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