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게벳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
성경은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살리기 위해 갈대상자를 엮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게벳이 그 갈대상자를 갈대사이에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이 장면을 많이 보아 왔으며 당연히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갈대상자를 그려왔습니다.
성경은 "갈대 사이에 두고", "갈대 사이에 상자를 보고" 라고 기록하며 두번씩이나 갈대 사이를 강조합니다.
어떤분은 상자가 갈대사이에 있던지 물에 둥둥 다니던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겠지만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성경의 기자는 이 짤막한 구절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게벳은 모세를 더이상 숨길 수 없게되자 모세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릴 것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모세가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부모된 마음에 그저 갈대상자을 만들어 강물에 띄우고 기적을 바라면 그만이었겠지요.
하지만 상자를 강물에 그냥 띄워 보내는 건 99% 아이를 포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무시 무시한 나일강 악어들의 맛있는 간식거리를 제공 하는 일이니까요.
그녀는 갈대상자를 만들기 전에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수많은 고민끝에 그녀는 모세를 살릴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바로의 딸이 목욕하는 장소에 바구니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요게벳은 분명 딸 미리암과 함께 공주가 목욕하는 하수가 어디인지, 언제인지 철저하게 조사하고 준비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다가오자 그녀들은 바구니를 정확히 공주가 목욕할 장소에, 목욕할 시간 얼마전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고 공주에게 발견될 때까지 떠내려가지 않도록 갈대사이에 놓습니다..
이순간, 이장면을 성경은 "갈대 사이에 두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믿음의 태도입니다. 믿음의 태도란 하나님이 하실 것을 분명히 믿는 사람이라야만 가능한 확신을 통한 최선의 노력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라고 미리암의 그 후 행동에 대해서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시간 요게벳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미리암은 바로의 딸에게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세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라고 이야기 하고 바로 어미를 불러옵니다.
또한 성경은 바로의 딸이 그 어미에게 "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라고 요게벳에게 이야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게벳이 무엇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진 않지만 미리암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합리적 추론을 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바구니가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어지는 것이나 바로의 딸이 아이를 키우게 하는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그녀는 공주가 목욕하는 장소, 시간등 여러가지 사안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하고 준비해서 이제 모세를 바구니에 넣고 갈대사이에 두는등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이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에, 이제 더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녀는 가까운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한번 믿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진심으로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는다면 나는 어떤 행동들을 하게될까?
확신이 있으니 힘을 내어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찾을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내가 계획했을지라도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노력과 하나님의 기적이 만나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그렇지만 이 말씀이 여전히 우리에게 위로를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가 안될때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죽어갈때 모세만 살리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모세를 살리신 하나님이 세월호의 수많은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두신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또한 요한이아빠님과 같이 자녀를 위해 기도할때 무엇보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다가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나 사고로 아이들을 데려가신다고 상상하면, 그래서 도대체 무슨 좋은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면' 그때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샘솟습니다.
심리학에 인지부조화 이론 (Cognitive Dissonance Theory)이라는게 있는데 주로 자신의 신념과 행동의 모순에 대한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이론입니다. 비슷하게 적용시켜보자면 우리가 가진 믿음과 신앙관(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가끔씩 기적으로 나쁜일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하나님)과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큰 간격이 있을 때 (세월호와 같은 사고, 갑자기 닥쳐 온 병이나 사업실패) 우리는 그 부조리에 굉장한 불안을 느끼고 어떤 식으로든 그 간격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으시겠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고 인재지, 그 아이들은 천국에 갔을테니 세상 고통은 안받아도 되지 등과 같이 주로 우리가 이해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 (justification)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적당한 이유들을 만들어서 인지부조화의 간격을 줄일 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사건사고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나 목회자들도 이런 사건사고들이 있을 때마다 글과 설교로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거나 니느웨로 가라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명령들이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이 신뢰와 순종을 신자에게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기도하는 것은 제가 이해되지 않는 슬프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때에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게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왜냐면 제 힘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묵상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모세가 건짐받은 것이 요게벳의 믿음과 기도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당시 모세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그 아이 부모들의 믿음과 기도가 부족해서 죽었을까요...
카타콤에 살던 부모들이 믿음과 기도가 부족해서 그들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죽어간 것은 아니였을 것 같습니다.
저도 아이가 있지만, 아이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먹먹해 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위해 기도하다가도,
이 아이의 생명을 거두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신다면 어떻하지... 싶을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