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조회 수 198 추천 수 0 2021.03.02 16:54:27

(눅15:11-14) 아버지를 죽여버린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4)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15:11-14)

 

두 탕자와 아버지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읽는 신자들의 반응이 윤리적 차원에 그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자기도 세상 쾌락과 죄악에 젖어있었고 특별히 부모님에게 크게 불효했던 탕자였으므로 이젠 그러지 않겠다고 회개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흔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칭하는 것도 조금 불합리합니다. 후반부는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별다른 죄를 범하지 않은 첫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과 아버지의 비유’라고 하든지 더 정확하게는 첫째 아들도 영적으로 따져서 탕자니까 ‘두 탕자와 아버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둘째 아들이 범한 잘못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인데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했다는 것뿐입니다.(13절) 그런데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었으니까 그 재산은 아들의 것입니다. 낭비하든 늘리든 자기가 책임질 문제이지 도덕적으로 따져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허랑방탕하다는 원어의 뜻은 무절제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윤리적 죄도 범했겠지만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앞뒤 문맥에선 재산을 탕진했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르치려는 둘째 아들이 나중에 회개한 내용도 과거에 지었던 도덕적인 죄들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나 믿은 후에나 착하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첫째 목표로 삼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경을 볼 때도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그런 가르침과 계명에 초점을 맞추어서 해석하고 적용하려 듭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교회도 초등학생도 다 배운 것을 어른들을 상대로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덕적 선행에 집중하다 보니까 자기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교회에 성실히 봉사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과는 전혀 다른데도 좋은 신앙이라고, 최소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덕이나 종교로 대체될 수 있는 성격이 결코 아닙니다.

 

첫째 비유는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아온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둘째 드라크마의 비유에선 여인인 예수님이 그렇게 구원한 신자와 평생토록 결혼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서 친밀하게 보호 인도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럼 마지막 가장 긴 이 비유도 당연히 앞에서 말한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좀 더 깊이 설명한 것이며 그 기본 골격도 같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탕자인 두 아들이 예수님을 찾아가기보다는 예수님 쪽에서 탕자인 그들을 먼저 되찾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윤리적 종교적 차원으로 접근하면 탕자 쪽의 회개만 보이지만 예수 십자가 복음이라는 차원에서 묵상하면 예수님이 그들로 회심케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영적인 진리가 깨달아집니다. 요컨대 탕자의 비유도 실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누구인가?

 

과연 그러한지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 이 둘째 아들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교제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단순히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킨 어떤 불효자식 개인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좁게 보면 유대사회에서 장로들이 정한 규정으로 출교당한 자들이고 첫째 아들은 그렇게 출교시킨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로마제국의 공무원으로 유대민족의 배반자이자 매국노로 취급당했으므로 죄인인 이방인과 같은 부류라고 봐도 됩니다. 그렇게 의미를 확장하면 둘째 아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뜻하고 첫째 아들은 그들을 차별하는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세 비유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둘 다 원래 소유주는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비유에서 양 백 마리는 목자의 소유였고, 둘째 비유에서 열 드라크마는 여인의 장식품이었습니다. 본 비유에서 두 아들도 처음부터 아버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세 비유에서 똑같이 강조하는 주제도 예수님이 그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니까 그 중에 하나라도 잃었다가 다시 찾으면 아주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그 셋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던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다시 찾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본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화를 내거나 추궁하지 않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에게 많은 허물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잘못을 범했지만 다시 돌아오자 곧바로 기뻐했습니다. 그것도 첫째 아들이 시기하여 크게 화를 낼만큼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런 기쁨을 정확히 헤아려서 신자가 받아 누리지 못하면 아무리 착하게 살고 교회 생활에 성실해도 사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말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에 우선적으로 집중하면 성령님의 인도로 점차 악은 멀어지고 선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령님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차단해주기도 합니다. 

 

사탄도 우리더러 죄를 지으라고 직접적으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신자들이 아무래도 죄를 멀리하려 노력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신자가 예수님과 교제, 특별히 동행하는 일에 훼방을 놓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인간적 본성을 부추겨서 주님과 멀어지고 세상으로 가까이 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골고다 십자가 은혜를 회상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믿음으로 평생토록 행할 씨름입니다.

 

결정적인 죄는 없다.

 

둘째 아들은 죄를 범했다기보다는 자기 재산 관리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 시발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절)라고 말한 데서부터입니다. 그 말 안에 그가 범한 잘못의 본질이 다 숨겨져 있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들이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유산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 재산을 자선재단에 헌납하고 자식더러 자수성가하라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자식으로선 아버지가 유산을 남겨주면 감사히 받는 것이지 미리 내 몫을 달라고 말하는 것부터 잘못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당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입니다. 재산 분배에 대한 유언을 미리 작성해도 자기가 죽고 난 후에 시행하라는 것이 통례입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아버지가 없는 것 혹은 죽은 것처럼 취급하겠다는 생각인 셈입니다.

 

실제로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자기 몫을 받자마자 며칠 뒤에 갔으니까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기 훨씬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엮이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단단히 작정하였고 기회를 봐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섭 없이 혼자 살아보겠다는 것이 평소부터 품었던 확고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가족은 물론 아버지의 뜻과 감정이 어떠할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자식이 특별한 사업을 시작하면 재산을 미리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활용만 하도록 했지 소유권은 여전히 아비에게 속했습니다. 자식이 임의로 처분하지 못했으며 사업에서 나는 이익금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 모든 관습과 상식을 어겼습니다. 오직 혼자서 자기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자기 뜻대로 펼쳐나가는데 장애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혼자 살아본 결과는 완전히 허랑방탕하게 끝났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알거지로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청운의 큰 꿈이 있었고 그럴싸한 계획도 세웠을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도 스스로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곁에 있었을 때보다 나아지기는커녕 정반대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었고 도덕적으로도 크게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훔쳤거나 강요하여 받아낸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자기 앞으로 돌아올 유산을 단지 시간적으로 미리 받았을 뿐입니다. 그 후에 아버지의 재산이 줄거나 망하면 미리 자기 것부터 챙기고 도우지 않았다는 비난은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아버지 재산이 늘어나도 더 받지 못하는 손해도 감수한 것입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많은 재산으로 사업하면서 허세도 부리고 이런저런 세속의 쾌락도 즐겼을 것입니다. 그가 소비한 돈으로 이득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친구들에게 밥도 자주 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원래 돈을 버는 데는 나쁜 짓을 많이 해도 돈을 쓰는 데는 나쁜 짓을 할 소지가 아무래도 적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 자기 돈을 탕진한 것이라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계제가 아닙니다.

 

아담의 원죄

 

그럼 이 아들이 범한 잘못은 과연 무엇입니까? 바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한 죄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동산의 다른 모든 과일은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으나 선악과 하나만은 금지시켰습니다. 그 동산의 주인이 아담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동산의 소유권을 두고 아담과 다투실 리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담의 충만한 삶을 위해서 미리 다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비유에서 아비의 재산이 결국은 두 아들에게 물려주게 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선악과 금령의 진짜 의미도 그것을 따먹으면 벌을 주겠다는 것보다는 따먹지 않을 때에 풍성한 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물론 그 인생 자체도 하나님의 소유로 당신께서 아름다고 건강하고 진실하게 가꿔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당신께서 지으신 연약한 피조물인지라 당신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만 온전한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사려 깊은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지금 너를 속이고 있다고 자꾸 충동질 했습니다. 도덕적 죄를 지으라고 유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점차 아담은 하나님의 간섭이 귀찮아지고 자기 혼자서 맘껏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겁도 없이 뛰쳐나갔는데 그의 앞에 기다린 것은 처절한 실패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없애버렸으니 이 땅의 삶이 인생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돈으로 형통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만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떠나서 사탄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 열망으로 유대인들의 비방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온 세리와 죄인들이 이 둘째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챙겨서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소비해 무일푼이 되었으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로는 이방 불신자들의 수도인 아테네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17:24-29)

 

한마디로 이방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기에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선한 것을 그분이 공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손으로 행한 것으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신다고 즉,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그분이 인간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발 그 한 분 하나님께로 겸허히 돌아오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세상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청지기로서 그분의 뜻에 맞게 번창하도록 가꿀 수 있는 사용권만 있습니다. 재물을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신8:18) 그런 믿음이 있다면 청지기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여 얻은 열매도 사실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므로 첫 열매와 십일조로 그분에게 돌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인간에게 당연히 또 반드시 그분의 보호와 인도가 임합니다. 인간이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첫째가는 축복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감으로써 아버지를 자기 삶과 존재와 인생에서 완전히 지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중요한 축복을 스스로 걷어찬 것입니다. 결국 그가 탕진한 것은 재물보다는 그의 인생 자체였습니다.

 

둘째 아들 탕자였던 목사

 

솔직히 고백하면 저야말로 이 둘째 아들과 구체적인 측면까지 흡사했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하려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있다면 당장 내 눈앞에 보여 보라,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자꾸 믿으라고 하지 말라. 왜 나더러 죄인이라고 하고 그 죄를 씻으려면 왜 꼭 십자가에 죽은 로마 사형수 예수를 믿으라고 하느냐”라고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나만의 세상에서 내 멋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내 생명은 물론 그 호흡까지 하나님이 주셨다는 인식은 아예 없었습니다.

 

저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한 죄가 그리 없었습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온유하며 착했고 종종 남들을 성의껏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마침 비유처럼 차남이었고 아버지가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삼십대 초반의 저의 시건방졌던 요구에도 아무 말씀 않고 사업 자금도 대어주었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성공할 리 없었는데 끝까지 자존심은 남아서 알거지가 될 때까지도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삶이 너무 고달파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했고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알게 되자 제가 얼마나 비참하고 추한 죄인인지 철두철미 깨달아졌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죄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니까 죄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예컨대 제가 남들에게 비교적 잘하고 그들도 나를 좋아했지만 사실은 제 마음속에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거나 내 의를 자랑하는 정도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높이느라 오히려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힌 적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워졌습니다.

 

다른 이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고 또 그들이 정작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단 한 번도 배려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사랑을 알게 되자 비로소 남을 위해서 생전 처음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몰랐다면 평생토록 하지 않았을 또 못했을 일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저를 보고 놀랄 정도로 오묘한 은혜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고 회심시켰고 계속 당신만의 사랑으로 감싸고 있음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크게 깨닫고 회개한 것은 바로 허랑방탕했던 잘못이었고 그것이 가장 쓰라리고 아팠습니다. 제가 난잡하게 놀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을 너무 헛되게 허비한 것입니다. 내 생각과 계획대로 다 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소치인지 몰랐습니다. 내 잘난 것 몇 개로 세상과 다른 사람과 인생을 아주 만만하게 본 것입니다. 인생 자체에 대해서 깊은 갈등과 고뇌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 재능은 물론이고 정말 어리석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저에게 사업자금까지 대준 아버지도 하나님이 저를 위해서 마련해주신 섭리인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저 이 땅에서 형통하려면 돈이 최고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돈을 남들보다 엄청 많이 벌어서 큰 부자가 되겠다는 탐욕은 없었어도 하나님이 제 맘에 없으니 돈이 인생에 기쁨 행복 만족 의미를 보장해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허랑방탕한 죄

 

예수님과 교제를 나눈 세리와 죄인들도 경제적 궁핍이나 도덕적 악행으로 괴로웠던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파산을 당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 취급을 해주지 않고 아무도 자기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구원은 포기하고 그분과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살아왔던 인생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스스로 자기 멋대로 살려고 했는데 인간이라면 절대로 범해선 안 되는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벌 받을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분의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는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하나님과는 정반대 쪽으로 잡았고 필연적으로 그 인생은 허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 권세 지성이 뛰어나도 하나님의 보호 인도 없이는 그 인생에서 아무런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의 고백이었지 않습니까?

 

세리와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고 주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인생을 전부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세상에선 아무 소망이 없으니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라는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한 세리가 저는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만 했듯이 말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잘 준행했으니 그에 합당한 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잘 따져보면 하나님이 만사를 통치한다는 진리도 믿지 않는 셈입니다. 자기들이 행한 도덕적 종교적 실적을 하나님더러 채점해서 그에 맞는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모든 일을 자기 실력으로 행했으니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 간섭 통치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경건하고 의로워도 자기들이 정한 기준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행위의 양에 비례해서 하늘 창고에 마련된 축복을 계산해서 내려 보내는 창고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은 필요 없고 자기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만 요구했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는 인식은 없이 의인이라고 자부한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교회 생활에 충성하니까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와 사실상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이 땅의 행복과 만족을 돈이 보장한다는 생각은 백 퍼센트 정답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그 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습니다. 돈이 나쁘다거나 멀리해야 한다거나 필요 없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더 좋고 행복하고 활기차고 의미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시간 낭비만 한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 감사 찬양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영적으로 큰 혼란과 고난과 흑암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대의 도덕 윤리 종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앞의 세대와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죄가 없어진 시대입니다. 코로나로 새로운 세상이 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격변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흑암이 깊을수록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원을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많으니까 하나님께 은혜 받을 일도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인지라 스스로 인식은 못해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칠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가도 반드시 그리스도 십자가의 군병으로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윤리적으로 조금 착하게 살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또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원리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앎으로 인해 기꺼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참 생명 안에서 그분과 비밀스레 교제하여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복음서가 증명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모습이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했어도 허랑방탕하게 보낸 것입니다.

 

주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현실적으로 여전히 환난 중에 있고 때로 욥처럼 이해도 안 되는 엄청난 고난이 닥쳐도 그 안에 예수님의 거룩한 뜻은 풍성히 넘치고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매순간 이 진리대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1/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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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눅11:13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나요? 운영자 2011-10-28 1421
45 눅4:28-30 예수님의 진짜 첫 번째 기적 운영자 2011-07-02 697
44 눅24:11,12 너무 좋아 믿기 힘든 횡재 운영자 2011-04-26 370
43 눅22:60-62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말라. 운영자 2011-04-18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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