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31,32) 인간에게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은?
돌아온 탕자 시리즈 (9)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1,32)
타국으로 이민 갔던 둘째 아들은 미리 받은 유산을 탕진한데다 큰 흉년까지 닥쳐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 집의 종이라도 되어 목숨만 부지하려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건강히 돌아온 것만도 기뻐서 한마디 추궁도 없이 큰 잔치를 벌려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처사가 너무 못마땅해서 집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 동안 쌓였던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러 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종했으나 자기에겐 염소 새끼를 잡는 잔치도 벌여주지 않았는데 창기와 놀아난 동생에겐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따졌습니다.
본문은 아버지가 장남의 원망을 무마하며 당신의 입장을 밝힌 내용입니다. 비유의 결론으로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려는 핵심 주제가 담겼으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 하나님
먼저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너는 그 동안 고생은커녕 전혀 불편함과 부족함 없이 잘 지냈다는 것입니다. 네 동생이 고생한 것에 비하면 네 매일의 삶은 사실상 잔치와 다름없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네가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이 집안을 내가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최근에 동생이 이민 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는 자들도 있다고 해서 내가 매일 기도하고 수시로 먼 길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된 것도 옆에서 지켜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형은 동생에게 잔치란 가당치도 않고 그 잘못을 엄격하게 꾸짖고 근신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동생이 사서 한 고생인데다 마땅한 벌을 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그동안 아버지가 동생의 안부를 걱정하며 계속 기도하는 모습도 싫었던 것입니다.
이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있었고 한 시도 그들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을 숭배하는 음란한 땅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서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근원으로 세워주었습니다. 또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해주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는 복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창12:1-3) 출애굽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시내 산에서 그 언약을 계승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출19:5,6)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열방 앞에 복의 근원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그가 종과 횡 어디로 행하든지 함께 하고 그가 밟는 땅을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창13:14-18) 실제로 하나님은 그는 물론 그 후손에게 그 언약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낼 때에 그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아홉 가지 재앙이 전혀 임하지 않았고 애굽 땅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애굽이 노예로 혹사했고 남자 신생아들을 죽이는 등 이스라엘을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당신 혼자서 대적을 물리쳐주었습니다. 성경에는 비슷한 예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컨대, 모압 왕 발락의 청탁을 받은 이방 주술사 발람의 저주를 이스라엘 진영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세 번이나 막아주셨습니다. 심지어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혼자서 다곤 신상을 깨트리고 역병을 내리는 큰 권능을 발휘해서 언약궤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잠을 못 이룰 때에 그의 생각을 주관해서 아각 사람 하만의 음모로 몰살당할 뻔한 유대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에게 긍휼한 마음을 심어서 아무 공로 없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비록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로마 제국의 압제를 받게 허용은 했으나 로마의 포용정책에 따라 성전에서 맘껏 제사드릴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일은 분명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려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자기들이 만든 규정을 위반했다고 동족까지 정죄 심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이 곧은 백성임에도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셨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 때부터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구원의 길을 열려고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물론 그들이 정죄한 자들까지 전혀 꾸짖지 않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그 진리 됨을 당신의 사역과 이적으로 증명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탕자이든 종교적 거짓을 따르던 당장에 또 일일이 벌주지 않습니다. 도덕과 종교로는 절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데다 영적 시체가 된 인간들 또한 그 진리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자에겐 가르쳐주는 것이 먼저이지 벌부터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불신자를 상징하는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있음에도 하나님이신 아버지가 돼지 취급도 못 받게 만들어서 기어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럼 항상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신자인 맏아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권능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그래서 아버지는 이어서 맏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들이 둘 뿐인데 동생이 이미 자기 몫을 다 챙겨서 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다 형의 몫으로 동생의 두 배입니다. 법적으로는 아직 아버지 소유이나 실질적으로 장남의 것이므로 아버지가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아버지의 것만이 아들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이 아니면 아들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아버지의 것은 결코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하나님의 것은 다 이스라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더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당신께서 지시할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해준다고 약속했고 그대로 실현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따지면 그가 버린 것과 다시 받은 것이 사실상 같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정반대로 달라진 사항이 딱하나 있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기만의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사탄의 거짓된 농간에 따라 좌지우지되었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풍부해도 참 기쁨은 없고 갈급하고 허망했을 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께 받은 기업을 그분의 보호와 인도에 따라 그분의 뜻에 맞게 아름답고 거룩하게 가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음으로써 하늘로부터 거룩하고 신령한 영적인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육 간의 모든 복을 아브라함은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 후손들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맏아들 격인 이스라엘이 그분께 받은 것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일단 범사에 유익이 많다고 합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맡은 것이 가장 큰 유익이라고 합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수혜자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징표였습니다. 생명과 힘의 상징인 곳에 그 언약의 표식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께 힘을 입어 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서 사울의 군대가 꼼짝 못하고 있을 때에 다윗이 전장으로 나가면서 어떻게 소리쳤습니까?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26,47) 할례가 없는 민족의 전쟁은 오직 칼과 창의 크기에 달렸으나 여호와의 택한 백성은 그런 눈에 보이는 현실적 상황과 무관하게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이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다 받은 줄을 모르는 이스라엘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세리와 죄인을 배척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자기들이 하나님께 받은 그 유익을 잘 지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죄인인 이방인은 할례 없는 민족이며 세리는 피만 유대인이지 사실은 이방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과의 식사교제금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또 하나의 법률로 정했기에 모세 율법을 아주 잘 준행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하나님께 받은 더 중요한 말씀이 율법 외에 따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인 줄을 알게 되었고 당신의 백성을 오직 당신만의 크신 긍휼로 다스린다는 사실도 체험했습니다. 무엇보다 완전한 구원과 참된 안식으로 인도할 메시아가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치유와 이적을 베풀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메시아가 도래한 줄 알고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정식 조사단도 여러 번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소망했던 바와는 달리 로마와 상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창녀 세리 귀신들린 자 이방인 등 상대해선 안 될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헤롯왕의 악행을 꾸짖는 바람에 옥에 갇혀 있는 침례 요한조차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인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 물어보게 했습니다.(마11:3) 본인이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분 즉 메시아라고 선포하고도 그랬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사역과 가르침은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라면 당연히 성전에서 성실하게 제사 드리고 율법대로 살아가며 기도와 십일조와 구제에 열심인 자기들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믿었는데 정반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으로 따지면 하나님께 저주 받아 마땅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만나고 사랑을 베풀고 있으니 이해가 전혀 안 되었습니다. 그들을 따끔하게 야단치고 율법을 지키도록 해줘야 하는데도 오히려 잔치를 벌려주고 있으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더러 잘못하고 있다고 꾸중을 하니 분노와 증오가 싹텄습니다.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갈등이 급격히 증가되었고 결국은 골고다 언덕에서 폭발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독생자까지 유대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을 이스라엘에게 다 주었다는 뜻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도 더 이상 줄 것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당장 눈앞에 다윗 왕국의 현실적 영광을 회복시켜주지 않았기에 하나님께 받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맏아들의 불평이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정확하게 반영했습니다.
너무나 마땅한 잔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맏아들에게 죽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에게 이런 잔치를 벌여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끝이 나는데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이 있습니다. 동생의 경우와는 달리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형의 반응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당시 상황에선 주님이 구태여 그들의 반응을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대 당국이 금하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를 하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뒤에서 숙덕거렸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대답한 내용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런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유를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들에게 달렸습니다. 그 후의 사정은 알다시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분명히 자기들을 견책하는 의미인 줄 알아챘을 텐데도 전혀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들의 반응도 추측컨대 아버지 말에 수긍은커녕 화가 나서 씩씩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정말로 마땅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온 세계사람 다 모아 놓고 물어도 초등학생이라도 정말로 마땅하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맏아들에게만은 아버지의 말씀이 전혀 마땅하지 않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마땅하다고 번역된 헬라원어는 “꼭 필요하다. 반드시 해야 한다” 등의 뜻입니다. 그럼 형은 그렇게 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이큐가 낮은 것도 아니요 도덕성 종교성 영성에서 뒤처지는 것도 아닙니다. 허랑방탕하게 인생을 허비하는 동생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이 다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진리, 아니 윤리, 아니 상식조차 혼자서만 부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선 너무나 마땅한 조치인데 집안의 장남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런 억지와 심술의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가 동생에게 자기는 받아보지 못한 큰 잔치를 벌려준 때문만이 아닙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추하고 악한 본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장남으로서 관계가 전혀 문제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과 할례의 언약을 지닌 것을 다른 민족들 앞에서 크게 자랑했듯이 아버지와 그 집안의 장남이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주변 이웃들도 방탕한 동생과 달리 아주 의젓하게 장남의 역할을 충실히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가 밟는 땅을 다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대로 실행하신 이유는 열방더러 당신을 알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남에게 내 모든 것이 네 것이라는 말에도 동일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게 받은 것으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내가 지금껏 이뤄온 가문의 신용과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장남도 그 선한 뜻에 동의하고 평소에 실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십일조와 구제에 열심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았듯이 말입니다.
그랬던 형이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주는 순간 단번에 완전히 비뚤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악한 동생을 착한 자기보다 더 우대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이들은 열심히 구제했으나 세리와 죄인과는 동전 한 푼, 밥 한 끼도 나누기 싫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리와 죄인을 더 우대하는 것 같으니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에 큰 손상이 갔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모든 선한 것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현실적 고난 때문에 죄에 빠지는 것은 인간 사회의 법정에서도 정상 참작을 받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든지,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랴 등의 한국 속담들도 현실적 고난은 어쨌든 잘 견뎌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견디기 힘든 것은 자기 자존심에 상처받는 것입니다. 친구, 가족, 부모는 물론 하나님조차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순간 인간의 눈이 뒤집어집니다.
비유에서 동생이 돼지치기라도 해서 연명하려 했고 그마저 막히자 돼지사료라도 먹으려 했습니다. 그 전에 이방인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지내는 것부터 도무지 마음에 형의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형이 봤을 땐 유대인으로선 절대 행해선 안 되는 일로 언약 백성의 자부심을 완전히 망가뜨렸고 아버지의 얼굴과 가문의 명예에 지울 수 없는 먹칠을 한 것입니다. 그런 자를 동생으로 다시 맞아주기에는 장남으로서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하지 않은 이방인은 물론이고 로마에 빌붙은 세리는 유대인의 자존심을 내팽개친 것이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선 상대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자기들과 항상 함께 했고 그분이 모든 좋은 것으로 공급해주신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베풀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첫째 이유는 자기들 기분을, 특별히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인간
지금 비유의 장남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만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예수님을 모르는 자연인은 이 장남과 똑같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크게 문제가 되고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사실은 돈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장남은 둘째 아들보다 두 배의 재산을 가졌기에 송아지 한 마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이 문제되는 것은 자신을 치장하고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른 이를, 심지어 친동생마저 깔보고 멸시하는데 돈을 이용할 뿐입니다. 돈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는 까닭도 돈이 자기에게 기쁨 만족 행복 안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가 가장 소중히 가꾸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의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 좋은 생활여건을 마련해 주었고 동산의 모든 열매를 아담은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항상 함께 해주었습니다. 유일하게 선악과만 먹지 말라는 뜻도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네가 낙원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다스리는 청지기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비유에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일하게 바랐던 것도 당신의 심정을 헤아려서 아버지로서 합당한 대우만 해달라는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마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매사를 자기 생각대로 하고 싶어서 모든 것이 실제로 자기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하나님을 몰아내고 소유권마저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분의 피조물로서 자신의 출생과 죽음도 전혀 주도할 수 없는 주제에 도무지 품어선 안 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낙원에서 생명나무를 하늘로 옮기고 천사들로 지키게 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즉, 삼위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창3:23) 선과 악을 분별하는 실력이 신적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당신일 뿐 아니라 당신이 바로 완전한 선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선해진 것은 전혀 아니며 선악을 분별하는 방식만 하나님과 같아진 것입니다. 자기 생각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었고 더 나아가 자기만 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아버지가 죽었다 살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주는 것이 선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맏아들은 자기만 선이라고 합니다. 왜 자기 송아지를 아버지가 마음대로 잡았느냐고 트집 잡는 셈으로 자기 기분을 망쳤으니 악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를 사탄의 미혹에 빠졌다고 설명하는 성경이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을 인간 세상에 없는 것처럼 치부했습니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 인격적 살인을 한 것이며 그들의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존감마저 철저히 망가트렸습니다. 자기들 자존심을 세우려고 다른 사람의 자존심은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세리와 죄인이 비록 윤리적 종교적 잘못들을 저질렀어도 하나님 안에선 엄연히 살아 있고 당신의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 죽었다 살아온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큰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듯이 예수님도 인간세상에서 죽었던 그들을 다시 살려서 당신의 아들로 다시 회복시켜주려고 식사교제를 한 것입니다.
현재 세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 칭하는데 가장 큰 특징은 절대적 진리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진리가 여럿이거나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차원에서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부인 실종되니까 절대적 선악의 기준이 인간들 자신이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자기 마음에 들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이고 내 편에 붙어야만 선이 됩니다. 내가 아니면 다 악이고 다른 쪽에 붙으면 무조건 전부 악이 되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마땅한 일이 맏아들에겐 가장 마땅하지 않은 일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작금 전 세계가, 그것도 기독교가 아주 우세한 미국과 한국의 모든 사정이 돌아가는 것이 실제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이 비유로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핵심이 둘째 아들처럼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또 그러고 싶은 소망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모두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 청개구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아버지의 마지막 이 말씀이 너무나 마땅하다고 인정해도 막상 큰 아들의 위치에 서면 그와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어떤 인간도 자기 자존심 때문에 이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과 교통이 완전히 끊어져서 도덕은 물론 상식마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우리의 관절과 골수와 심령을 찔러 쪼개어주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새롭게 거듭났기에 무엇이 진짜로 선한지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실천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고 쉽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너무나 마땅하기에 그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그분의 것이 다 내 것이로되 비록 창기와 재산을 탕진했던 동생이라도 죽었다가 살아났고 하나님으로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에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언약궤 혼자서 블레셋을 다 물리치고 스스로 당신의 백성에게 돌아오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그분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 아닙니까?
(3/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