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20,21) 아담과 이브는 구원 받았는가?
인간 타락 담화 (11)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0,21)
하나님은 당신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에게 각기 합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브는 출산의 고통을 크게 얻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아담은 이마에 많은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선고했습니다. 이는 그들을 포함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사실상 형벌이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당신의 창조 목적대로 순종하면 당신께서 변함없는 은혜로 함께 하시겠다는 소망의 약속이었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그런 뜻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힌 아주 간단한 조치였으나 성경 전체 내용이 다 계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러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죽음을 처음 보는 아담과 이브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한 일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로 하나님은 애꿎은 짐승 한 마리를 죽였습니다. 그 종류와 크기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인간적 사고로는 그들을 속인 뱀을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앞을 가리는 간단한 옷이라도 만들려면 뱀의 가죽은 너무 얇고 또 양이 적으므로 최소한 양이나 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맥락에 비추어보면 양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그 짐승도 당신께서 창조한 피조물로서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오직 인간을 위해서 희생시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동물을 무시 내지 멸시하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동식물을 다 만드신 후에 생육 번성하라고 축복해주었고 당신을 대리할 인간더러 당신의 뜻대로 아름답고 활기차게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최초 인간은 그 소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에덴의 주인이 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손을 놓고 가만히 있으면서 자기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일만 시켜 먹는 귀찮은 존재이니까 스스로 독립하겠다는 시도였습니다.
인간의 독립은 하나님에게 큰 죄가 되기 전에 불가능한 일이며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하나님으로선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비상조치로 안타깝지만 짐승을 죽였습니다. 인간으로 당신을 대리할 청지기 위치로 회복시켜서 동식물을 당신의 뜻대로 다시 잘 다스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의 죽음은 틀림없이 아담과 이브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던 동물이 한 순간에 부르르 떨면서 숨을 멈추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곤충이나 벌레가 죽는 것을 보았더라도 너무 미물이라 별로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로선 생전 처음으로 육체적 죽음의 실체를 생생하게 대면한 셈입니다.
숨이 완전히 넘어가는 모습도 충격적이지만 그 전에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공포심에 휩싸여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어서 입도 벙긋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를 강렬한 새빨간 색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빨간 색은 사람으로 두려움부터 생기게 해서 전쟁과 살인은 물론 폭행을 막으려는 예비 조치입니다. 불도 붉은 색인지라 오늘날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해 주의하라는 경고표시는 전부 빨간 색입니다.
문제는 죄로 타락한 인간 중에 일부는 피를 보는 순간 두려움보다 극도로 흥분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더욱 피를 많이 흘리려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사탄의 후손으로 온 대표 격인 라멕은 예사로 살인하면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4:24)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잘못 없는 동생을 죽인 가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기에게 최고 최대의 벌을 내려도 자신은 전혀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사실은 살인할수록 더 커지는 죄책감과 형벌에 대한 공포심을 남들 앞에 감추고 스스로 진정해보려고 허세를 부린 것입니다.
피의 빨간 색이 주는 두려움은 다른 생물은 물론 특별히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반면에 사람을 흥분케 하는 특성도 함께 있어서 인간 죄의 본성을 더욱 부추길 수 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인간에게 선과 악 중에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듯이 빨간 색 즉, 피를 보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사탄을 따라갈 것인지 본인에게 맡겨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을 강제로 따르게 하지 않으며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마련해주십니다. 그러나 동일한 여건이나 사건 안에서 반대로 인간이 당신을 거역 대적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맞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선악과를 주시면서 당신을 따르면 참 생명을 누릴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라고 계시했듯이 말입니다.
범사에 이중적 선택옵션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참된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주고 싶은 것은 죽음의 심판이 아니라 생명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나쁜 쪽을 택해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큰 낭패를 겪더라도 그 잘못을 깨닫고 당신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이제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취한 첫째 조치는 짐승을 통해 죽음의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권위를 높이고 싶어서 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고 그런 잔인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당신을 대적 거역한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아담과 이브에게 생생하게 체험적으로 보여주시려는 뜻입니다.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의 뜻이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라고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바로 저렇게 죽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자기들을 살려주려고 대신에 저 짐승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구원의 영적 진리까지 알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일을 목격하는 아담과 이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서 그런 각성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이 심어준 인간만이 갖는 이성과 상식으로만 따져도 아무 잘못이 없는 짐승이 지금 죽음을 당하니까 자기들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는다는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행하신 두 번째 일은 짐승의 가죽으로 그들의 옷을 지어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짐승을 죽인 것으로 그들의 형벌로 대신하고 살려주었으니까 그들의 죄는 완전히 용서가 된 셈입니다. 그럼 그들을 구원해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복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가죽옷을 지으려면 짐승의 내장을 잘라내고 가죽을 벗겨서 깨끗이 씻어서 말려야 합니다. 아마도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이 천사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 자리에서 짧은 시간 안에 그 모든 과정을 행했을 것입니다. 짐승의 실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멀쩡한 짐승이 가죽으로 바뀌는 동안에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속에서 피와 내장이 쏟아지고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들의 죄를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한 아주 크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만들어 입고 있던 무화과 나뭇잎 옷을 벗기고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훨씬 더 튼튼하여서 오래 입을 수 있다는 내구성의 차원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당신을 거역했던 이전의 모습에서 완전히 되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인간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특별히 죄악을 처리하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더 중요하게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이 만든 옷을 입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잘못은 하나님이 해결해주지 않고는 어떤 인간적 대책도 아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꾐에 넘어가 자신이 에덴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멋대로 살아보려 했으나 오히려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도무지 어쩔 줄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용서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당신을 제외해버린 인생은 끝까지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을 지으신 당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미 하나님이 자기들을 질투하고 시기해서 가장 좋은 것을 숨기고 안 주었다는 생각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시는 당신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옷으로 바꿔서 입혀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옷을 벗지 말고 평생을 입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죄로 타락한 인간들로 인해 이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해질 텐데 당신의 보호 인도 없이는 제대로 이겨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징 아니 대신하는 가죽옷이 아담과 이브의 신체를 평생 덮어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께서 동행해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외면 대적하는 순간 반드시 죽으니까 다시는 당신의 사랑의 품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 가죽옷을 입는 순간 그 동안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었던 수치심과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짐승의 죽음을 목격할 때에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든 극도의 공포심도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뭔가 부족하고 갈급하며 허망했던 내면에 안식과 평강으로 충만하게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엄중한 형벌을 내리지 않고 말로만 견책했을 때부터 이미 그분의 크신 긍휼을 어느 정도 감지했었는데, 하나님의 가죽 옷을 입고나선 선악과 금령을 주신 목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더더욱 확실하게 인식했을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를 혼자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 구원은 최초 인간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식과 절차로 진행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면서 그분을 원망하고 있었던 차라 그들의 영적 분별력은 최하 수준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도 없었고 어떻게 행해야할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서 입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들 전부를 온전히 맡기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입이 열 개라도 한 마디 변명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들에겐 그럴 자격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그들을 죽여 버려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여 구원하시고 계속해서 보호해주시는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너무나 큰 인자와 사랑을 깨닫는 순간 아담에겐 처음 피를 보았을 때보다 더 강력하여 온 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에 완전히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하는데도 살려주고 또 그 뜻을 정확히 깨달아 알게 해주려고 손수 옷을 지어 입히는 귀찮은 일까지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어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큰 자비를 베푸시는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절로 신음소리처럼 새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런 고백마저 자신들의 지정의로 스스로 각성 회개한 것이 아니었고 성령의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은 자기들은 전혀 생각도 못하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심지어 미워했던 생각은 순간적으로 눈 녹듯이 사라지고 오히려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에 대한 감사 경배 사랑 찬양의 감정이 속에서 저절로 솟아나왔을 것입니다. 이런 내면의 변화도 자신들이 의도하여 노력했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특별히 죄에 직접 처음 넘어간 이브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게 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죄악의 최초 원천인 이브를 오히려 구원의 참 생명의 기원이 되게 했습니다. 그 후손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또 지금 같은 천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최초의 죄악을 온전하게 씻어서 회복 구원해야만 예수님의 십자가도 새로운 참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조치를 신학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은혜 구원의 두 가지 단계를 실현한 것입니다. 먼저 짐승을 대신 죽인 것은 십자가 예수님의 대속죽음의 의에 근거하여 그 은혜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해주는 칭의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은 구원 후의 신자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보호 인도해주는 성화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이어서 그 두 절차를 행했습니다. 구원의 이 두 과정이 절대 따로 분리될 수 없으며 칭의 되는 순간 성화도 바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순간 거룩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신분이 되는데 둘 다 성령님이 주관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약2:17) 인간이 착하게 산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 받은 자라면 반드시 이전과 다른 선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담과 이브는 바로 직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의 죽음과 함께 완전한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갔다가 무화과 옷을 벗고 가죽 옷을 입음으로써 완전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은 후로는 그들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살았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의 그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동산 밖은 하나님께 거역하고 악행을 저지르기 더 쉬운 데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 다시는 그분을 배역할 꿈도 꾸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짐승의 가죽옷을 통해 행하신 구원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예수님과 다른가?
세상 사람들은 물론 많은 신자들조차 구약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용서하지 않고 크게 분노하며 잔인한 벌을 주는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만큼 잘못된 신앙적 오해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진노의 심판보다는 계속해서 용서해주고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는 기록이 훨씬 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사기에는 인간의 죄악과 타락이 먼저 있고 하나님의 징계와 구원이 뒤따르는 패턴이 계속 반복되지 않습니까? 그 결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을 왕으로 모시기 싫으니 전쟁에 능한 인간 왕을 달라고 하는, 말하자면 선악과를 다시 따먹는 것과 같은 패역적인 요구를 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었지 않습니까?
구약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넘치는 인자에 비해서 인간이 얼마나 끝없이 완악하게 그분을 거역하는지 명확하게 대조시킨 기록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가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 이스라엘의 구약역사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인데도 말입니다. 구약을 제대로 정확히 읽으면 하나님의 죄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영원하신 뜻이 결코 죽음의 심판이 아니라 생명의 구원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최초 인간이 감히 당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덤벼들었던 인류 역사상 최고 최악의 죄에 대한 뒤처리를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가장 큰 죄악이므로 가장 큰 형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넘치는 인자와 긍휼로만 그들을 용서 회복 구원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선악과 금령대로 죽여 버리면 후대의 인간이 안 생기고 창조 자체가 실패가 될 것이므로 마지못해 살려준 것이 절대 아닙니다. 타락할 것을 알고 자유의지를 주셨고 충분히 당신을 따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고 무엇보다 태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다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면에선 한 번 타락한 후에 용서 받아야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타락을 묵인한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은 절대로 아담과 이브의 자유를 묶는 속박이 아니라 그들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는 첫 관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이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는 것을 실감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당신께서 구원해준 것입니다. 살아 있어야 죽음의 실상도 깨닫고 또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많은 신자들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몰랐는데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의문을 갖는데 사실은 성경을 그것도 오늘 본문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지금 아담과 이브부터 사실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로 구원해주셨지 않습니까? 바로 앞에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원시복음을 바로 그 자리에서 실천한 셈입니다.
서로 숨기기 바쁜 인간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 대해서 철두철미 부패한 죄인이라 창조주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한시도 참된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비유컨대 자동차를 만든 사람의 설계대로 따르지 않으면 자동차는 출발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절대로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닙니다. 종교와 무관하게 에덴 이후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부인할 수 없는 실제적인 영적 정체성입니다.
최초 인간은 하나님 자리에 오르려다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행한 일이라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은 것 하나였습니다. 당장 부부끼리 서로에게 자기 잘못과 수치를 감추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면 부부 사이에도 가면을 쓰고 자신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자기를 봐도 너무 추하게 여겨져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이들 부부의 모습과 자기는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결국은 썩어 없어질 세상 재물 권력 명예 지성 가문 인종 문화 종교 관습 등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자랑하려는 한 가지 목적뿐이지 않습니까?
예컨대 고급식당에서 최고급 요리를 먹고 있다, 해외 휴양지에 여행 와서 럭셔리 호텔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자랑하는 SNS 열풍이 부는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남들보다 잘 나간다는 최소한 뒤처지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 실체를 보여주면 너무 부끄러우니까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그런 모습이 마치 자기 실체인양 위장합니다. 여전히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리기에 급급해하는 꼴입니다. 솔직히 교인들도 그리 예외가 아니므로 성령님의 인도로 성화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간혹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교리를 배우고서 스스로 자신의 영성을 갈고 닦아서 스스로 믿고 구원 받았다고 여기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선할 수 있고 그래서 구원을 거부할 권리나 쟁취할 능력이 있다고 큰소리치는데 너무나 교만한 죄악입니다. 라멕의 큰소리와는 정반대 내용이지만 그 성격은 사실상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비참한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예수 십자가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이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져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교리로만 정리 주장하는 것인데 그 또한 종교로 자기 앞을 가려보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십자가만이 참 생명이다.
최초 인간부터 십자가로 구원했는데 그 이후의 구약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이중인격자요 위선자가 됩니다. 본인의 뜻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인간은 전혀 무력하고 무지하고 죄에 찌들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스스로는 절대 구원할 수 없음을 당신만큼 잘 아는 분이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전적인 은혜 외에 다른 구원의 방도를 그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이 아브라함이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깨우쳐주었습니다.(요8:56) 그가 단순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선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히11;13-16) 이 땅에서 자신의 인간적 노력으로는 자기 죄를 도저히 씻을 수 없음을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구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그대로 하면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함)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는 먼 거리임)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0-11) 이게 바로 온전한 십자가 복음이지 않습니까?
다윗은 비록 인자한 왕이었고 백성들을 위해서 선정을 베풀었고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했지만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 손에 검붉은 피를 많이 묻혔고 그래서 성전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하나님의 견책을 들었습니다. 밧세바 사건 하나만 해도 간음, 살인, 거짓증거, 이웃의 것을 탐하는 죄 즉, 십계명을 최소한 넷 이상 위반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네 번 사형을 당해야 했으니 다윗은 하나님의 전적인 용서가 아니면 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도 그 사실을 성령의 역사로 온전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창세기의 원시복음부터 시작해 하박국 선지자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거쳐서 말라기의 메시아의 오심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나 다윗처럼 실제로 십자가로 구원해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관 통치하여 완성하시는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신께서 택한 자들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게 하고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다시 확실하게 점검해보길 원합니다. 현재 하나님이 지어준 가죽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의 은혜를 실제 성령의 거듭남으로써 체험적으로 받아 누렸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참 생명을 누릴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여자의 후손임을 확신하고서 사탄의 후손들의 어떤 훼방에도 당당하게 맞서서 십자가 영광의 빛을 세상 앞에 비춰내고 있습니까?
최소한 신자가 된 배경에는 내 공로 자격 선행이 심지어 내 영적 분별력과 의지적 결단력도 전혀 필요 없고 오직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찌 내 같은 죄인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런 은혜가 없이는 완전히 죽음에 처해졌을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십니까? 십자가에 내가 올라갔어야 하는데도 주님이 대신 올라가 죽으신 그 은혜만으로도 평생을 그분과 동행하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거룩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고 그래서 참 생명과 유일한 기쁨으로 실제 삶에서 제대로 누리고 있습니까?
(7/17/2022)
시편 8:4이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