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22-24)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인간

인간 타락 담화 (12-完)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인간 사회 비극의 시작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냄으로서 당신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죄에 대해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후로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따라서 에덴 이후 예수님이 오시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인간들의 삶은 본문의 하나님의 마지막 조치에 근거해 영위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한 최초의 통로로 가장 큰 벌을 받았어야 할 이브를 아담이 이름을 지은 대로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는(20절)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특성, 인생 전체 등을 대변하는데 하나님 안에서의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이브의 이름을 “산 자의 어미가 되었다”는 뜻으로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구원해주신 의미를 성령의 역사로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은 후 죄의 부정적 결과로 스스로는 해소할 수 없는 수치심과 공포심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피의 제사를 통해 자신들이 죽었다 살아나는 엄청난 영적체험도 했습니다. 그 일을 두 아들에게 틀림없이 간증했을 것이며 자기들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가르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그런 신앙교육을 받은 두 아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으나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기쁘게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각기 자기 생업의 소산물을 바치는 감사의 제사였으므로 하나님이 제물의 종류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닙니다. 아벨은 첫 소산을 바쳤으나 가인은 그런 언급이 없기에 뒤늦게 마지못해 제사를 드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창4:4,5) 사람 이름이 먼저 나온 것은 하나님이 각자의 사람됨과 믿음이 당신의 뜻에 합당한지 여부를 먼저 판단한 후에 제물의 열납 여부도 결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두 형제 중에 아벨을 편애했거나 신앙교육을 더 철저히 시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로 죽다 살아난 그들로선 오히려 첫 생명으로 받은 가인을 더 사랑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같은 부모에 의해 동일한 여건에서 같은 신앙교육을 받고도 정반대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라고 심판하신 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와 거역하는 자로 나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에게 아무 잘못을 범하지 않은 친동생 아벨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죄악은 최초 인간에 의해 인간 세상에 들어온 죄악이 발전 확대된 결과입니다. 또 죄에 찌든 인간들끼리 그렇게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모습으로 인류 역사는 진행되었습니다. 점점 이 땅은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 차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까지도 우리의 의사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한 고난 불행 재앙 등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처지에 빠진 것은 최초 인간의 죄 때문이므로 감내할 수밖에 없지만 아벨의 경우처럼 착한 사람이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으니 문제입니다. 실제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손해만 입는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이 절로 나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 밖으로 쫓아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심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럼 인생사의 모순과 고난들이 에덴 밖과 안의 상황이 달라진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 자체가 달라진 것인지, 둘 다인지, 이 마지막 조치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각 사람의 죄를 징벌한 결과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간

 

본문은 하나님이 이유 두 가지를 먼저 밝힌 후에 그에 상응하는 두 조치를 취했다고 평행구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한 조치는 첫째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내보냈고,  둘째 그 후에 천사들로 에덴 동쪽에 있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은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기 때문이며 둘째 그가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으니 에덴에서 내보내었고 또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영생할까봐 천사로 길목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순서가 뒤바뀌지만 둘 중 후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일반 과일과는 다른 두 가지 특별한 나무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와 영생을 주는 생명나무입니다. 그럼 이 두 나무의 차이는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두 나무를 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아주 정미하고 완전한 기록이므로 복잡한 문제일수록 진술된 논리대로 따라가면 간단하게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이 인간을 영생하도록 만들었으나 선악과를 먹는 바람에 육체적 죽음이 임했다고 해석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으나 조금 더 세밀히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선악과를 따먹었어도 육체적 죽음은 임하지 않았고 영적인 죽음만 겪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는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었습니다. 

 

대신에 생명나무의 열매가 본문 설명대로 육체적인 영생을 주는 과일이었습니다. 타락 후에 생명나무 길로 가는 길을 막았으니까 그 전에도 동산 안에 그 나무는 있었고 그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언제든 따먹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처음부터 아예 영생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언제라도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으면 육체적으로도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거역 대적했던 죄는 용서 받았으나 이미 그 죄로 더렵혀진 흔적은 본성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구원 이후로도 이 땅에서 언제든 죄가 발현될 수 있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들과 그 후손이 생명나무 과일을 먹어버리면 죄의 본성을 지닌 상태로 영원히 굳어버리게 됩니다. 사탄의 후손인 가인은 물론 라멕처럼 살인을 일삼으면서도 절대 죽지 않는 사이코패스들로 세상이 가득 찰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그림이 전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도 죄인들을 구원할 방도가 없어집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당신께서 행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조치를 당신께서 번복 취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인간이 타락한 상태로 영생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생명나무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먹으라고 권장하지 않았고 그런 열매가 있다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매우 강조했는데 그 이유 또한 간단합니다. 선악과만 안 먹으면 언제든 생명나무 과일을 먹을 수 있으므로 영생은 자동으로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선악과를 먹어서 당신과 단절되는 영적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이 육체적으로 영생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얼마나 오래 평안하게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당신과 순전한 교제와 동행을 하면서 거룩하게 사느냐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영적 죽음이 임했고 하나님의 이 둘째 조치로 인해 육체적으로 영생할 수 있는 기회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최초의 죄로 인해서 인간은 두 가지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 자기 복을 자기 스스로 발로 차버린 셈입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고서 당신을 거역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계속해서 기억나게 해주었지만 자기들의 탐욕과 교만에 빠져 스스로 패망의 길로 걸어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물질계의 시공간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물질적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영원한 영적 존재는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천사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들로 인간을 섬기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히1:14) 거기다 타락하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계획은 마련되어 있었고 또 타락할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분명히 영생이 가능할 수 있었던 상황 가운데는 두었지만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는 만들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본문도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그 전에 아담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3:19)이라고 동일한 맥락의 형벌을 선고했습니다.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물질적 육체로 창조되었고 물질은 썩기 마련이므로 육체적 죽음을 맞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이 나쁜가?

 

어쨌든 지금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어버렸기에 그 나무는 효능이 다했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으니 에덴에 그냥 두어도 단순한 과일나무일 뿐입니다. 생명나무 또한 이 땅에 남겨두어서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먹게 하면 안 됩니다. 불 칼을 든 천사들로 지키게 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하늘로 옮겼다는 뜻일 것입니다. 잉카제국의 잃어버린 황금을 찾듯이 생명나무가 중동의 어딘가 숲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에 죄의 삯으로 영적 육체적 죽음 둘 다를 맞아야 하는 아담의 후예들은 사탄에게 선포된 원시복음이 실현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영적인 구원을 얻은 신자들도 예수님의 재림 때에 달성될 육체적 부활을 소망하며 이 험난한 세상을 거룩하게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처럼 이 땅과는 비교가 안 되는 더 좋은 하늘의 본향 즉, 하늘로 옮겨진 생명나무를 사모하면서 이 땅에선 나그네와 이방인 같이 살아야할 것입니다.(히11:13-15) 결국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할 줄을 아시고도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여자의 후손이 될 신자들로 하늘에 있는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과 비교가 안 되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시키려는 뜻입니다.   

 

이처럼 육체적 영생을 얻는 생명나무 과일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먼 훗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이 땅의 제한되고도 고달픈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자와는 사실상 무관합니다. 정작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할 사항은 인간을 에덴에서 쫒아낸 첫째 조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낸 이유부터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우리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당연히 삼위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라고 해서 성부, 성자, 성령 중에 한 분과만 닮았고 또 세 분 중에 어떤 차이나 우열이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한마디로 그냥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의 수준처럼 되었다면 너무나 좋은 일인데 왜 하나님은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하신 것입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으니 정말로 하나님이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하신 것입니까?

 

먼저 선악과라고 나무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그 과일 안에 인간에게 없었던 도덕적 혹은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생기게 만드는 특수 성분이 포함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따먹자 오히려 그 전에 선했던 주변 모든 상황과 인간의 상태가 악하게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가장 일차적인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해하기 힘들고 어렵고 고달픈 일이나 여건에 처해도 그분의 보호와 인도 아래 있으므로 모든 것이 선합니다. 반면에 그분을 떠나면 아무리 문제가 없고 형통 안락해도 끝까지 허무하고 갈급한데다 수치스럽고 두렵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뒤늦게나마 이 진리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과일 모두는 임의로 먹되 선악과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영생을 주는 생명나무에 대해선 이미 모든 과일을 임의로 먹어도 된다는 축복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외면 대적하는 악한 상태로 육체적 영생을 하는 것이 그분의 품 안에서 선한 상태로 살다가 육체적 죽음을 맞는 것보다 인간에게 오히려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을 대적할 자들이라도 그 악한 상태로 영생을 하지 못하게 즉, 구원의 기회를 주려고 생명나무를 옮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악이며 먹지 않으면 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선한 상태이고 먹지 않으면 악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인간이 그분처럼 도덕적 영적 분별력의 수준이 높아진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당신처럼 되었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선악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입니다. 그분에게 악하고 추한 것은 눈곱만큼도 공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선입니다. 우선 본인부터가 선 그 자체입니다. 그분과 그분의 뜻도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이자 진리의 기준이 됩니다. 그분의 뜻과 어긋나면 전부 악입니다. 그분은 무슨 일을 하던 선할 뿐입니다. 구약성경에 수많은 징벌과 심판이 있었어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따른 것입니다. 인간이 어리석고 더 정확하게는 완악해서 그분의 행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 원망하며 심지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지만, 불공정 불공평 불의 불법은 물론 불합리성 등은 그분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자기만 최고로 높아진 인간

 

선악을 아는 일이라고 표현했는데 ‘알다’라는 히브리어 ‘야다’는 지식적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도 선악을 분별 판단하는 지성적 능력보다는 현실 삶에 적용 실현하는 방식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오직 자기중심적인 윤리관과 가치관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고 선이라는 아집이 생긴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바로 선이요 자신의 판단도 선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에 통용되는 선한 규정이라도 지키기 귀찮으면, 또 아무리 의인이라도 자신을 거부 대적하면, 나아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면 악이 됩니다. 반면에 아무리 잘못된 규정이나, 또 흉악한 죄를 범하는 악인이라도, 나아가 아무리 사악한 일이라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생기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손해만 끼치지 않으면 선이 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분보다 더 높아지려 했습니다. 아니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 실제로 그분처럼 되려고 시도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시험해보려고 즉,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일단 먹어나 보자는 뜻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선한 것을 공급 받았기에 부족하거나 불편한 요소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의 뜻 안에서 부부끼리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딱 한번 있었지만 그들의 삶과 생활에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안락과 평강과 기쁨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 판국에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인간 부모도 거역 대적하면 도덕과 종교에 관계없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짐승 같다고, 아니 짐승보다 못하다는 욕을 듣습니다. 감히 하나님에게 그것도 그분께 모든 선한 것을 받고 있고 직통으로 대화를 나누는 최초 인간이 그래선 절대로 안 되며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니까 먹음직하고 보기 좋고 지혜롭게 해줄 것 같은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좋은 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이 잘못이고 그야말로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판단에 하나님의 뜻은 단 한치도 개입되거나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탄이 속였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자신만의 생각과 욕심이 작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에 비춰볼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고 심지어 잠시 기도하거나 선악과 금령을 회상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이참에 세상에 자기보다 더 높거나 더 의로운 존재는 단 하나도 없어야만 했습니다. 이제부터 자기 생각 판단 욕심 기분에 따라서만 행동할 텐데 그 앞을 가로막는 존재는 하나님이라도 원수로 돌리겠다는 생각입니다. 당시는 자기들과 하나님 밖에 없으니까 또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이미 자기들이 정복해서 다스리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마저 자기들이 정복해 수하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하나님도 자기 뜻대로 역사해줄 때만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브로 산 자의 어미가 되게 했는데 그 후손으로 죄인을 구원할 십자가 복음의 계획을 이미 마련해둔 대로 따른 것입니다. 아담도 구원해서 원래대로 가장과 남편의 직분에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미 그 영혼에 그런 죄의 본성이 지어질 수 없는 심각한 흔적으로 각인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모든 인간이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온 세상은 물론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여건과 사건 등 모든 것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인간 세상은 모두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만 최고로 높이기 위해서 자기부터 최고의 것을 최고로 많이 차지하려고 들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의 원수가, 최소한 경쟁상대가 되어서 시기 분쟁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자연히 고난과 형극의 가시덤불을 낼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장소에 살고 있는지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인간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라도 죄악의 썩는 냄새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더 이상 에덴을 두실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역으로 따져 인간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여전히 그 어느 곳도 바로 에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된  세 가지 예

 

구약성경 전체가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 결과에 대한 기록입니다. 대표적으로 처음 세 경우만 살펴봅시다. 먼저 친동생을 죽인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 가인은 왜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따져봐야 했습니다. 가인은 혼자서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고 하나님의 견책을 듣고는 더 화를 내고는 아벨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도 수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려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한참 지난 후에 어쩌면 동생이 그러는 것을 보고 마지못해 바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편의와 안락이 그분보다 먼저였습니다. 가인이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했지만 하나님이 꾸중한 것은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려는 뜻인데도 가인은 하나님은 물론 동생까지 미워했습니다. 동생 때문에 이런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고 여긴 것인데 하나님이든 친동생이든 자기 생각과 감정대로만 상대했습니다.  

 

둘째로 살인을 밥 먹듯이 행한 라멕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4:24) 큰소리쳤습니다. 누가 어떤 심한 벌을 주어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전혀 막을 수 없으니 죽이려면 죽여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인간들의 사정은 전혀 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인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생명마저 자기 기분을 풀어주는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백 년간이나 심판의 경고를 발했는데도 아무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오히려 노아를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한 이유를 설명하신 내용이나 또 심판한 후에 미래 세대를 향해 한탄하신 내용이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창6:5, 9:21) 사람들이 항상 간음 강도 살인할 계획만 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문대로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기에 범사를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는 바탕에서만 생각하고 계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일부 의로운 인간들이 때로는 인간사회를 위해서 유익하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것마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절대적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행하는 의는 결국 자기 가족, 집단, 국가, 민족 등의 의를 높이는 것들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죄에서 기원된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 생각과 달라지면 완악하게 원수로 돌려버리기에 모든 이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악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

 

실제로 인간 사회의 선은 상대적, 일시적, 부분적일 뿐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자신의 생각이 최고의 완전한 선입니다. 시쳇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이나 남이 하면 불륜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혹시라도 자신의 판단과 상충되어서 현실적인 피해가 생기거나 심지어 아무 문제가 없어도 자존심과 감정만 상하면 순간적으로 가인처럼 그 상대를 죽도록 미워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이런 정체성에 대해서 현 세대가 흘러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코비나 사태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 미국 내에 낙태와 동성애를 둘러싼 논쟁, 민주주의 체제가 완비되었음에도 미국과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극렬한 대립 등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특별히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고 코로나보다 더 빨리 더 종합적 장기적인 피해를 입히며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는데도 보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최소한의 합의는 했지만 자기 나라의 아니 자기 정파의 당장의 유익부터 챙기기 위해선 곧바로 휴지조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문제는 앞으로 이런 상황이 더 악화되었으면 되었지 개선될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막상 큰 재앙을 닥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서야, 계시록이 말하는 것처럼 물의 `1/3이 썩어야(계8:10,11) 겨우 정신을 차릴까 말까입니다. 인간사회 문제들에 대해 인간이 분석한 원인과 그에 맞춰 세운 대책들은 일시적 상대적 피상적 효과만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선악의 기준이 그러하니까 대응책도 그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세상에 성행하는 온갖 고통과 불행과 재앙을 외면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다 조성했다고 비난합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어떤 개인에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은 욥의 경우에 보듯이 아주 특별하고도 비상한 목적이 있을 때뿐입니다. 현재 인간이 집단이든 개인적으로 겪든 모든 고난의 99% 원인은 살펴본 대로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절대적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런 식의 불평과 의심부터도 사실은 선악을 아는데 자신이 하나님처럼 된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선뿐이며 악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그분을 거역하는 인간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악뿐이며 선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악과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꼭 기억해두어야 할 사항은 하나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묶거나 의도적으로 죄인을 만들고 영생도 주지 않으려는 조치가 절대 아닙니다. 인간더러 당신께서 보호하고 인도해주는 사랑의 울타리 밖으로 제발 벗어나지 말라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그럼 죽음을 필두로 인생살이의 모든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최초의 인간들은 그 호소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거꾸로 오해했습니다. 자기들을 유혹한 사탄처럼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말도 안 되는 죄악을 범했고 그 후손들도 그와 같은 성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럼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강조하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인류의 과거 역사나 예수님 당시나 지금까지도 세상 죄악의 크고 중요한 것들은 전부 지성적으로 똑똑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자들이 지었거나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긍휼로 돌아가지 않고서 과연 세상이 평안해질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아무도 그분을 두려워하거나 스스로 찾지 않고 오히려 그분과 원수가 되어있기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모든 인간 속에 견고한 진이 되어 있는 사탄의 머리를 부서야만 합니다. 

 

다음 주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축약해서 미리 한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여자의 후손이 된 신자에겐 하늘로 가는 생명나무의 길에 칼을 든 천사가 가로막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최초로 순교한 스데반의 경우에서 보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랬듯이 신자를 영접하려고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7/24/2022)  

 

모루두개

2024.03.15 22:27:04
*.230.44.2

'비록 사탄이 속였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자신만의 생각과 욕심이 작용한 것', 두 번째 답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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