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8:20-22 & 9:8-11) 노아 언약에 숨겨진 진짜 의미

죄인 구원 담화 (2)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8:20-22 & 9:8-11)

 

이해 못할 십자가의 도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후에 에덴에서 쫓아내었지만 때가 차면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인류역사를 이 원시복음이 이뤄지는 방향과 모습으로 이끄실 것을 이미 계획해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사탄에겐 엄중한 경고가 되었을지라도 막상 그 선고를 함께 들은 아담과 이브로선 구체적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들오들 떨면서 자기들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사탄의 처지까지 따져볼 겨를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사탄이 장래의 어느 때인가 하나님에게 크게 혼이 날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자 동정녀 탄생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사랑과 이적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려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바쳐졌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셨고 그 목격자들이 오백 명이 넘었습니다. 십자가 구원 진리가 생생하게 가시화되었고 특별히 성령은 역사상 가장 충만하게 역사했습니다. 

 

그렇게 부활의 증인들이 살아 있었던 초대교회 때에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으나 유대인은 거리끼는 것으로 이방인은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고전1:23) 신구약 성경이 완비되고 오순절 이후 성령이 보편적으로 역사하고 있으며 교회도 복음에 대해 상세히 풀어 가르쳐주는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믿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물론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십자가 대속구원 진리를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도 원시인에게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소개하는 꼴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일단 죄로 타락한 인간들을 자유롭게 행하도록 두었는데 세상은 이브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이 원수가 된다는 당신의 예언대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결국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마저 사탄을 따르는 완악한 자들에게 완전히 오염되자 세상을 홍수로 심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을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한다고 해서 십자가 구원의 도에 하자나 부족 사항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가 어리석고 자기만 높이려는 죄의 본성에 묶여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피조물인데다 죄가 그 영혼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어떤 경건한 스승이 와서 영적 진리를 잘 가르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원시 복음만 선포된 상태에서 곧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무조건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노아 때에 아무도 회개하지 않고 거꾸로 조롱만 했어도 120년의 유예기간을 주었습니다. 원시복음을 사람들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 조금씩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비록 극소수의 사람들만 제대로 회개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해도 당신의 뜻은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뜻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해도 자식에게 유익이 되는 훈계는 최선을 다해 자식이 이해할 수 있는 어법과 내용으로 가르쳐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시복음과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원시복음의 의미를 하나씩 밝혀 나갔습니다. 새로운 진리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표현된 처음 약속을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하는데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알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은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을 상면할 수 없고 어리석고 완악해진 영성으로는 그분을 제대로 알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보여주시고 만나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고 열어주는 만큼만 알 수 있고 그 범위 내에서만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인간지혜로는 그분을 정확하게 알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므로 계시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란 아버지가 손바닥에 알록달록한 사탕을 움켜쥐고 있으면 어린 아기로선 자기 힘으로는 열어볼 수가 없기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주면 그 가장자리부터 보이다가 다섯 손가락이 다 펼쳐져야 비로소 사탕인줄 알고 여러 색깔까지 정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원시복음은 마치 아빠가 사탕을 다섯 손가락으로 움켜쥐고는 아기에게 내 손 안에 너에게 줄 최고로 좋은 선물이 하나 있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빠 말을 순전히 믿는 아이로선 어떻게든 그 손을 펼쳐 좋은 선물을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최초 인간에게 그런 의도로 원시복음을 약속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확장되면서 그 소원을 가진, 아니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로 노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아빠 손 안에 숨겨진 사탕이 중간에 바뀔 리 없듯이 원시 복음도 아무리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역사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향해 이끌고 가되 아빠처럼 움켜쥔 당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보여야만 합니다. 본문처럼 인간과 추가로 이런 저런 언약들을 맺으면서 첫 약속을 조금씩 구체화해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학적으로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눕니다. 인간이 특정한 조건을 이뤄야만 약속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행위언약이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은혜언약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광대하신 계획과 뜻에, 특별히 무한한 인자와 긍휼에 비추어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그분의 모든 언약은 사실상 은혜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금령의 경우 인간이 순종해야만 영생할 수 있었고 불순종하면 죽음이었기에 흔히들 행위언약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창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 되었기에 인간이 타락할 줄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아담과 이브가 불순종해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뜻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으므로 은혜언약인 셈입니다. 금령의 뜻도 어기면 벌준다기보다는 제발 당신의 사랑의 품을 벗어나지 말라는 호소에 방점이 찍힙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만하면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그분의 일방적 은혜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전에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했고 이 땅을 당신 대신 다스리라는 고귀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그분이 일방적으로 미리 다 공짜로 마련해주셨습니다. 창조 자체가 인간으로선 계획은커녕 전혀 기대 예상도 할 수 없었는데 짐승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어주신 것부터, 말하자면 인간으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은혜입니다. 또 그 본성이 죄로 물들어 당신을 거역했어도 실제적인 벌을 주지 않고 사탄을 심판하겠다는 원시 복음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처음으로 구체화된 언약   

 

본문은 원시복음을 조금 더 구체화시킨 첫 번째 언약인데 마찬가지로 은혜 언약입니다. 우선 노아 가족을 구원해주신 것부터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홍수 후에 행한 행적을 보면 약점이 많고 수시로 죄를 범하는 우리처럼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이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듯이(창6:8) 하나님이 당신만의 주권으로 그를 택하여 끝까지 당신을 믿고 따르도록 섭리하셔서 당신의 일을 시킨 것입니다.  

 

그럼 홍수 심판 후에 주신 이 언약에서 원시 복음이 더 구체화된 내용은 무엇입니까? 먼저 다시는 홍수 때처럼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겠다고 합니다.(8:21a) 그런데 그렇게 하신 이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했습니다.(8:21b) 노아 홍수로 심판할 때의 이유(6:5)와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심판 전과 후과 동일한 이유인데도 하나님의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절대적 주권자이시긴 해도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일관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지구상의 생물을 방주에 탄 것 외에는 다 멸망시켰고 땅마저도 깊음의 샘물이 터지게 하면서 지각변동까지 일으켰습니다.(창7;10)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럴 뜻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땅이 하나님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사람의 죄악이 갈 데까지 갔기에 함께 심판 받았습니다.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은 인간이지 땅과 다른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시사철이 있고 정상적인 수확이 있을 것이라고 추가로 약속했는데 만물의 운행질서는 정상적으로 작동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창8:22) 홍수 심판할 때도 하나님은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한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창6:6,7) 심판의 귀책 사유는 오직 인간에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 하리라고 마찬가지로 두세 번 강조한 것입니다.(8:21,9:11)  

 

그런데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을 인간에 대해서 형벌을 가하겠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창9:1-7) 오히려 인간을 창조할 때에 주신 축복과 동일하게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이 인간을 무서워할 것이고 그것들을 인간의 손에 붙였다고 말합니다. 홍수로 공룡 같은 거대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작은 동물들만 남겨두었다는 뜻일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그보다는 다른 피조물과 땅이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 받았다는 뜻을 다시 강조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 때에는 인간의 식물로 채소와 곡물을 주었으나(창1:29) 산 동물도 먹으라고 허용해주었습니다.(9:3) 이는 현실적인 상황과 영적인 차원 두 가지 측면으로 살펴야 합니다. 먼저 홍수로 땅의 식물이 다 죽었고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다시 자라서 수확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는 일곱 쌍씩 방주에 태운 정결한 동물의(창7:2) 여유분으로 먹고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라고 금지한 것은 영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 수단으로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 째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생명을 절대 훼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물도 식용의 목적 외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피 채 먹으면 반드시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는다고 합니다.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나중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이웃의 가축에 고의든 실수든 피해를 주면 배상을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짐승보다 인간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절대로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살인을 금지한 이유는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것 즉, 하나님 그분을 죽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라멕에서 네피림으로 발전된 죄악 즉, 마음에 드는 여자를 취하려고 예사로 살인하는 그런 죄를 다시는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절대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죽음의 벌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을 식용의 용도 외에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예외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노아가 홍수가 끝나고 마른 땅에 발을 디디게 되자 정결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번제부터 드렸다고 바로 앞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잡아서 완전히 피를 빼고 전부를 태우는 제사인데 죄에 찌든 자신이 바로 그 제물처럼 완전히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는 감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용서해주신 그 은혜가 자기에게도 임했다고 노아는 고백한 셈입니다. 

 

동물을 식용으로 사용하려고 죽일 때도 동물의 피를 완전히 빼어서 버려야 합니다. 그 의미는 생명의 주권자가 하나님이라고 겸손히 인정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예컨대 짐승을 잡아먹으면서 드리는 식사기도는 죄로 타락한 인간으로서 자기 죄에 대한 속죄제를 드리는 셈입니다. 또 고기를 식구들이 나눠먹음으로써 그런 죄인들에게 여전히 생육과 번성으로 축복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화목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연 재앙과 종말

 

혹시라도 노아 언약을 살인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다른 생물만 인간으로 인해서 저주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인간은 여전히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실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자체가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다른 생물을 심판에서 제외시키려면 모든 자연 여건도 사계절에 따라 정상적으로 운행되어야 합니다. 대신에 사람의 생각은 항상 악하다가 노아 때처럼 겉으로 온 땅에 드러나면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방식만 전에 행한 것과 달라질 뿐입니다. 

 

인간의 죄악상은 동일한데 왜 노아 때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망시켰고 그 후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인간을 지으신 것을 두 번이나 한탄했으니 인간에 대한 화풀이를 자연에까지 퍼부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결정으로 구체적인 뜻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도 침묵하고 있기에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당신 대신에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 직분을 그만큼 심각하게 여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이 먹고 입을 자원까지 다 없어지는 처참한 결과를 눈으로 생생히 보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임을 온전히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자연은 그대로 두고 너희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당대의 인간들이 알지 못했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온전한 뜻과 절대적 진리를 온 천하에 드러내어야만 했고 노아를 통해 그 후손에게 전해지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 환경을 마지막 날까지 그대로 둔다면 자연재앙 자체가 종말론적 현상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이니라”(마24:7b-8)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 예언했지만 종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연 재앙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므로 종말이 다가온다는 징조는 될지언정 종말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 밖으로 쫓아낸 것이 인간 타락을 더 부추기게끔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처한 여건과 환경이 힘들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악한 생각만 하는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을 때만 악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인간 생각이 항상 악하다고 하나님은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의 시기와 방식만 그분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인간을 멸절 시켜도 인간은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의 심판이 아니라고 해서 혹시 불처럼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심판이 있을까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판의 방식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처음 약속대로 구원과 심판은 여자의 특별한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방식으로만 결정될 것입니다. 사탄이 모든 인간을 미혹하고 있으므로 그의 노예가 되어 항상 악한 생각을 하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꿔서 죄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는 자는 물이 아니라 지옥 불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노아 가족에게만 주신 계시

 

이 노아언약은 사실상 자연을 축복한다는 한 가지 내용뿐이지만 인간에게도 현실적으로는 아주 심각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차피 인간들이 자기 죄악으로 자연을 더럽힐 것이므로 하나님으로선 그대로 두시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작금 지구 온난화로 인해 자연이 완전히 망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주에는 미국 켄터키 주에서 엄청난 홍수가 있었고 캘리포니아 주는 지난주에 발화된 산불이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홍수나 산불은 항상 있었으나 피해자들의 반응은 한 결 같이 내 평생에 이런 엄청난 재앙은 생전 처음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불규칙적이고 순간적으로 급격한 규모로 번지며 갈수록 빈번하게 또 이전에는 전혀 일어나지 않던 곳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예측 못할 시간과 장소에서 감당 못할 피해 규모로 그것도 전 지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번 여름에 전 지구를 장기간 덮치고 있는 폭염 현상은 기후 관측 이후로 처음 있는 현상입니다. 미국 NASA에서 열 감지 카메라로 우주에서 지구를 찍었더니 하나의 완전히 붉은 공처럼 보였습니다. 아이슬란드나 양극 지방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양과 속도를 이전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북극에서도 반바지 반팔로 지내야 할 정도로 더워졌다고 합니다. 

 

미국의 서부 지역의 식수를 감당하는 유타 주 파웰 호수와 네바다 주 미드 호수의 저수량도  바닥이 드러날 정도입니다. 이 상태로 기근이 계속되면 금방 식수 전쟁이 일어날 판입니다. 지구상의 물의 전체 양은 동일하니까 언젠가 장마 비가 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불규칙적이고 예상 못한 지역에 쏟아 부우니까 정작 인간이 사는 도시에선 가뭄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규모의 산불도 대기상태를 격변시켜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게 만들고 그 번개로 새로운 산불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인데도 기독교계 일부에선 지구 온난화는 인간과 관계없이 이전부터 있었던 자연 현상일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또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조정해서라도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땅이 있을 동안에 사계절을 그대로 두고 땅에는 아무 손을 대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면 못 할 일이 없어도 당신께서 하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일을 당신이 번복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다 더럽혀서 자연을 망칠 것도 다 아시니까 굳이 자연은 벌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말씀입니까?  

 

그리고 이 언약을 들은 것은 오직 노아 가족뿐입니다. 신자에게만 계시해준 진리인 셈입니다. 신자가 자연을 보존할 청지기로서 일차적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그런 책임마저 부인하고 세상 사람처럼 자연을 맘껏 어지럽혀 놓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자연을 지켜주고 특별히 성도들을 재앙에서 보호해주신다고 믿으니 너무 뻔뻔한 것 아닙니까? 현대의 신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전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 은혜 받을 만한 잘나고 예쁜 구석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분문을 두고 살인만 범하지 않으면 심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로 형제를 바보라고 상처를 입혀도 살인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말과 생각으로 배우자는 물론 자식도 예사로 하루에 여러 번 죽이지 않습니까? 나아가 자기만 치장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고 있고 필요하다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무고하게 흘린 피로 온 사방에 넘치고 신자라고 큰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것도 다 아시고 계십니다. 선악과로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자유의지를 주었고 타락했어도 다시 당신께서 구원을 주셨듯이 지금도 살인을 그치지 않을 줄을 아시고도 하나님은 인간더러 생육 번성하라고 하고 이 땅의 풍요는 보장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물로 자연까지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시 복음이 실현되는 범위와 방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당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으로서 행해야할 바를 한 치의 차질 없이 신실하게 행하고 계십니다.   

 

멸망을 막아주시는 하나님

 

정작 이 언약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멸망당하고 노아 가족만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노아 후손을 통해서 기어이 특정한 여자의 후손이 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악을 절대 씻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그 은혜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하므로 예수님 오신 이후에도 이 땅과 인간은 당장 멸망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계속해서 악해질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이 세대는 누구나 종말이 왔다고 혹은 곧 올 것이라고 시인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셔도 인간은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 진리는 노아의 방주에 탔는지 여부로 영원한 심판과 구원이 나눠졌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왔는지 여부로만 인간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아담 때부터 인간이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에는 원시복음은 유효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구원의 방식과 대상이 수시로 바뀌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때까지 계속해서 죄로 타락해가도 하나님은 이 땅을 멸망치 않도록 나아가 성도들이 사탄에 넘어가지 않도록 당신만의 권능으로 붙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2:6,7) 그가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고 즉 천국보좌 우편에 좌정해 계신 예수님이 완전한 때에 재림하여 마지막 구원을 완성시킬 때까지 성령 하나님이 이 땅을 붙들고서 성도들을 보호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또한 아주 간단한데 본문의 언약대로 실행하면 됩니다. 당연히 살인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환경을 그분 대신에 아름다고 생명력 넘치게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 직분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다른 생물들도 생존하기에 적합하도록 이 땅을 가꾸고 보존해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묵묵히 짓고 있었던 것은 자기 가족만 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동물을 한 쌍씩 실어서 자연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것입니다. 노아 때는 완악한 불신자들로부터 조롱 받았으나 지금은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이 자연보호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있으니 정말로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원시 복음이 말하는 또 다른 내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브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이 원수가 된다는 것으로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하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노아 때처럼 점점 사탄의 후손들이 득세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거의 다 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원시복음을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실현하실 것입니다. 신자도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시대의 영적 흐름을 분별하고 혈과 육이 아닌 하늘의 권세 잡은 흑암의 세력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 세대와 이 땅에 주님의 은총이 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와 방식으로 완악한 사탄의 후손이라도 이웃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물론 신자도 연약하고 때로 자기 본성에 져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고 여전히 어리석고 무능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겸손히 주님의 권능만 소망해야 합니다. 이 땅과 자신을 붙들어주고 있는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에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대로 이 땅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해서 주변의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님을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소개해야 합니다. 그들의 구원 여부는 주님께 맡기고 최소한 이 땅을 함께 더 잘 보존하는 일에 동참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이 누룩처럼 번져나가는 시초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8/7/2022)


모루두개

2024.03.16 02: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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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 세계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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