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에 "안 심심해" 발끈...문제는 '문해력'이 아니다

중앙일보 2022.08.25. 00:01 임명묵

 

최근 세상을 뜨겁게 달군 화두는 ‘심심한 사과’였다. 지난 20일, 한 웹툰 작가가 열기로 한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와 관련해 주최 측인 카페에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라는 공지문을 게재한 게 발단이었다. 논란의 진원지인 트위터에서는 ‘하나도 안 심심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면서 해당 카페를 성토하는 트윗이 쏟아졌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뜻의 심심함을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다’는 심심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뒤늦게 이 논란을 알게 된 트위터 바깥 인터넷 세계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요즘 젊은 세대의 문해력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한자 교육이 제대로 안 되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 어차피 언어는 늘 바뀌는 것인데 호들갑 떨 필요가 있냐 등등.

 

심심 대란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지난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명징하게 직조해낸’ 작품으로 평했다가 구태여 어려운 용어를 썼다고 비난받은 일, 그리고 지난 2020년 명절 연휴 때 언론 헤드라인에 뽑힌 ‘사흘’이라는 단어에 ‘사’자가 포함됐다는 이유로 사흘을 3일이 아니라 4일로 받아들인 일부 사람들이 "왜 굳이 직관적이지 않은 단어를 쓰느냐"고 역정을 낸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아니 교육받은 대다수 사람에게 명징과 직조는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사흘은 너무나 명확한 표현이다. 그렇기에 이런 논란은 사회 퇴보의 징조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심심 논란도 신세대의 빈약한 어휘력, 그리고 이로 인한 문해력 하락을 우려하는 흐름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우린 앞으로 이런 논란을 더욱 자주 보게 될 것이란 점이다. 그때마다 이런 논란으로 시끄러울까? 아니 무엇보다 이런 현상은 왜 자꾸 벌어지는 걸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늘 있어 온 ‘꼰대’들의 호들갑일 뿐일까?

 

어휘력 논란의 직접적 이유는 모든 세대가 공통으로 참여하는 언어 채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정보를 받아보고 즐길 수 있는 콘텐트 자체가 극도로 부족했다. 인류 대부분은 텍스트로 쓰인 한정된 콘텐트만 소비하고 살았다. 제한된 콘텐트 공급자가 제공하는 양질의 텍스트 콘텐트는 문어(文語) 전통 속에서 이어지는 다양한 어휘를 모든 국민에게 공급하는 원천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반이 인터넷·SNS·유튜브의 등장으로 붕괴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공통 텍스트를 읽기보다 당장 내 관심사에 맞는 커뮤니티에 참여해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원래도 서로 소통이 잘 안 되었다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언어는 인터넷 이후 시대에는 아예 이해할 수조차 없는 외국어 수준으로 분리되었다. 신세대가 '명징''직조'같은 기성세대의 어휘를 모르는 것처럼 기성세대도 신세대의 어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 인터넷 문화는 변동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에, 불과 한 두 달 사이에 유행어가 생겼다가 사라지기 일쑤다. 심지어 신세대 커뮤니티끼리도 소통이 안 될 때가 있다. 커뮤니티마다 자기들만의 다양한 은어를 만들어 유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초고도 연결사회가 역설적으로 극단적 파편화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작금의 어휘력 논란을 단순히 한자 교육의 부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물론 한자를 알면 한국어 어휘들의 의미를 더욱 ‘명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또 중요한 이웃 국가 언어인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우는 데도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한자 교육 강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한자를 전혀 모르고 순 한글로만 텍스트를 읽는다 하더라도 수준 높은 어휘력을 갖추는 데는 사실 별다른 문제가 없다. 어떤 문맥에서 단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아는 데는 국어사전이면 충분하고, 텍스트를 많이 읽다 보면 사전 없이도 어휘를 파악하는 직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 ‘어휘력 위기’의 진짜 원인은 단순히 교육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더 심원한 수준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많은 사람을 진짜 놀라게 했던 것은 어떤 특정 단어를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휘는 늘 바뀌고 있으며, 공동의 소통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모르는 어휘는 늘 발생한다. 신세대의 부족한 어휘력을 개탄하는 기성세대 역시 분명 그 자신들이 젊은 시절 신세대로서 옛 어휘를 몰라 당황한 기억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태도다. 수많은 어휘력 논란의 사례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던 게 ‘왜 구태여 그런 단어를 써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냐’며 역정을 내는 장면이다. 모르는 어휘가 나왔을 때 그 뜻을 찾아 자신의 어휘 사전에 넣을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의 진짜 문제는 심심하다는 단어를 모른다는 것보다도, 문맥을 통해 자신이 아는 뜻이 아닌 다른 뜻으로 쓰였으리라고 짐작할 시도조차 안 하고 그 말을 쓴 상대에게 화부터 냈다는 데 있다. 이는 ‘문해력’이 아니라 ‘문해 의지’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풍부한 어휘력을 갖추고 독해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다 해도 문해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소통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 채널의 파편화, 영상 매체의 압도적 지배력, 실시간 소통 등의 경향은 새로운 세대의 문해 의지 자체를 고갈시키고 있다.

 

문해 의지의 고갈은 우리에게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실제로 일단 문해력 자체가 낮아지고 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 추이를 보면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읽기 점수가 12년째 하락하고 있으며, 읽기 영역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은 2009년 5.8%에서 2018년 15.1%로 증가했다. 모르는 어휘가 종종 등장하는 긴 글을 차분하게 읽을 생각이 없는데 읽기가 재밌을 리 없고, 그러니 점점 더 읽기와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늘 수밖에 없다.

 

차분한 읽기가 사라지고 표현을 정교히 할 다양한 어휘를 배울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필수 전제인 성숙한 시민 문화가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의 쟁점들은 날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사람들은 그 복잡함을 감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면, 거짓으로 단순한 해법을 제시하는 포퓰리즘 지도자들만 부상하기 좋은 조건이 마련된다. 그렇게 명징하게 직조된 언어 대신에 분노의 이미지만 난무하는 세상이 온다면 심심한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명묵 작가

대학원생

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하는 서울대 대학원생. 역사와 국제정치가 주 관심사.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을 다룬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과 2021년 화제작 『K를 생각한다』를 썼다. 최근 대중문화와 관련한 사회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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