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내적 증거(2)

조회 수 2709 추천 수 243 2008.09.21 19: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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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내적 증거(2)

성경은 그 내용이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외부 사람들이 단지 성경 스스로 그렇게 선언한 것을 그대로 믿는, 아니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록해 놓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불과하지 객관적으로 타당한 증거가 없다고 반발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정말 문자 그대로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라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들의 선입관이나 편견과 심지어 믿음과도 상관없이 스스로 진리 됨을 선언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성경을 믿는 자가 다 사라지고 한 명도 남지 않는 경우가 올지라도 그 안에 계시된 진리는 여전히 진리로서 빛을 발한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권면도 엄밀히 따지면 모순이 있다. 그 말은 일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로 결단하라는 뜻이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 말씀 여부에 대한 100% 확신이 없거나, 아닐 가능성도 있으리라는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보다는 정말로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와야만 성경에서 기록된 문자를 넘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말씀 한절 한절을 대해야만 그 권능과 은혜를 생생하고도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다. 단순한 호기심, 지적 탐구심, 윤리적 열심, 종교적 의무감으로는 결코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토록 도와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의 진리가 진리로서 가치를 발하는 것은 오직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뿐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불신자나 회의를 가진 신자의 접근마저 차단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정적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진정으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면 성령이 그 사람의 영혼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깨닫게 해주신다. 성경이 구원으로 열린 책이 되느냐 심판으로 닫힌 책이 되느냐는 독자 마음의 열리고 닫힘에 달렸다.  

인간이 성경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오직 둘 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대로 창조주 하나님, 특별히 독생자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느냐 않느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없이는 이 땅의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제대로 대적할 수 없음을 절감하는 자에게는 성경이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밖에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지 여부는 오직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스스로 자증(自證)할 뿐이다. 그런 자증의 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만 살펴보자.
  
이유 없는 고난

욥은 하루아침에 도무지 이유도 알 수 없는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된다. 처음에는 자녀들이 모두 죽고 모든 소유가 다 약탈당한다. 그러나 그런 불행을 겪고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이다”(1:21)하고 그 모든 일에 하나님께 범죄는커녕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푼 소유물의 다소(多少)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오직 그분을 바라며 경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곧 이어 욥의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이 나는 고통을 겪게 된다. 말하자면 자기 주위의 것이 다 사라지고난 후에 이제는 자신의 신체도 완전 무력화되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또 다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라고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아니했다. 현실적 파산 뿐 아니라 자신에게 직접 가해진 재앙도 그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전혀 흔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신실한 욥에게도 하나님과 씨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나 남아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로 어떤 고난을 겪게 하더라도 그분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지만 도대체 그 고난의 원인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욥기의 전체 주제는 바로 모든 인생이 겪는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병문안을 온 욥의 세 친구는 고난의 원인을 오직 죄에 돌렸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안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하면서 욥이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욥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 된 것을 깨닫게 하라. ...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고 하면서 그 고난이 자신의 죄와 상관없다고 항변했다. 나아가 고통이 너무나 위중해서 차라리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라고 죽여 달라고까지 간구했다. 그럼에도 그는 고통의 원인만은 못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그 원인에 대해선 침묵하셨다. 대신에 자연의 온갖 오묘한 섭리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져서 욥더러 대답해보라고 추궁하셨다. 말하자면 그런 눈에 보이는 자연계의 이치도 미처 알지 못하면서 고난의 원인을 기어이 알아야겠다고 덤비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취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하늘에서 사단과 욥의 믿음을 걸고 내기(?)했던 실상을 이야기해 줄 수 없고 또 이야기해준들 욥이 도무지 알아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욥은 어떤 고백을 하는가?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1-6) 한마디로 하나님 하시는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선하므로 인간은 오직 그 앞에 경배와 감사만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항복한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허락하는 고난의 첫째 이유는 그 믿음을 정금같이 단련시키려는 뜻이다. 그러나 욥기의 핵심 주제는 그 외에도 이유 없는, 사실은 하나님 쪽에선 이유 없는 것이 없지만 인간 쪽에서 원인을 모르는 고난이 인생에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 없어 보였던 고난도 신자가 천국에 가면 그 전말을 훤히 깨닫게 된다. 나그네 같은 이 땅에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키우며 살라는 것이다.

또 이유 없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에는 이 땅에서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고 신자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궁극적으로는 신자가 흥하든 망하든 하나님의 영광만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 따라서 올바른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경외해야만 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현실에 따라 그 믿음이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욥기는 하늘에선 인간의 영혼을 두고 하나님과 사단의 눈에 안 보이는 싸움이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벌어지고 있으며 또 그 싸움의 결과가 이 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체 스토리와 중요 주제만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이외에도 욥기에는 인생과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심오한 뜻이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다.

그런데 욥이 언제 적 사람인지 아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의 사람이며 성경으로 기록된 연대만 따져도 약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사 이래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상정(想定)하는 신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상벌을 비례해서 주는 분이다. 오늘날의 모든 종교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도 아직 그러하며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조차 기복적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그런 종교가 더 융성하게 번창한다. 반면에 성경은 이미 수천 년 전에 그 사상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한다. 나아가 절대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경배만이 인간이 취할 태도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욥의 고난이 그와 자녀들의 죄 때문이라고 세 친구들이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레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노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42:7)고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당신을 인간이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기껏 시험 채점관 같은 신분으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무조건 벌을 주지 않고 어떤 죄인이라도 당신만의 무한한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뜻이지 않는가?

기독교는 고난에 대해 너무나 풍성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욥기가 구약성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 소름끼치도록 정밀하고 심오한 그분의 말씀과 실제로 우리 인생을 말씀대로 다스리시는 그분 앞에 욥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완전히 엎드려야 한다. 욥기가 성경 말씀으로 이미 수천 년 전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 말하는 모든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무리 궁리해도 인간의 저작이라고는 도무지 쳐줄 수는 없다.  

악의 도성도 사랑하신 하나님

요나가 악의 도성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소명을 받고도 당시의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스로 도망갔다. 그 후 전개된 사건은 잘 아는 대로 폭풍우를 만나고 그 원인을 제공한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큰 물고기의 배속에서 삼일 간 생존해 있다가 결국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메시지를 전했다.

감히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을 갔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다. 특별히 적국의 포로들을 너무나 잔혹하게 다뤘는데 산 채로 톱을 썰거나 피부를 벗기기도 했고 또 그 해골로 탑을 쌓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유대인 요나로선 이를 갈아 먹어도 시원찮은 철천지원수였다.

그가 니느웨에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너무 두려웠다. 그런 곳에 가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선포하면 당장 자기를 산 채로 톱질할 것은 너무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야할 극악무도한 죄인들인데 왜 하나님이 구원의 기회를 주는지 도대체 이해도 되지 않았다. 요나로선 어차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바에는 악인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고 차라리 자기가 죽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번 경영하신 일이 이뤄지지 않고 변경 취소되는 법은 절대 없다. 그는 니느웨로 가야만 했고 또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안에 이 도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기 소명에 대한 진정한 열심과 이방인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했을 리는 없다. 정말 마지못해 억지로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3:5) 그 소문이 왕에게 들리자 드디어 전국적인 금식회개의 기간이 심지어 가축들에게까지 선포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니느웨의 심판을 취소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하나님이 40일 간의 회개기간을 주었으니 뜻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되었다.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차라리 지금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구했다. 그로선 당장 죽어 마땅한 저런 악독한 자들을 구원하다니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굽은 것 같았다. 다른 말로 하면 “나 같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구제에 열심이었던 의인과 저들과 결과적으로 다른 점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어 내가 얻은 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따진 셈이다.

요나서의 결론을 보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9-11) 하나님은 어떤 악독한 자도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인지라 진정으로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일 또한 예수님 오시기 76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은 원죄로 타락한 피조세계가 아무리 부패된 상태에 있어도 여전히 끔찍이 사랑하신다. 예수님 오시기 전 이스라엘 밖의 땅 니느웨의 가축과 요나에게 햇볕을 가려준 박 넝쿨까지도 그랬듯이, 모든 세대와 장소의 죄인들은 더더욱 그러하시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죽기 직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에 그의 영원한 행선지는 그 즉시로 낙원으로 바뀌었지 않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타락한 피조세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십자가 구속의 영원한 진리는 구약시대에도, 그것도 니느웨 같이 죄악이 절정에 달한 도성에도 분명히 유효했다. 성경 66권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공통된 주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아주 명백한 또 하나의 증거이지 않는가?  

나게로 오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회개로 초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주목할 것은 “내게로” 오라고 했다 기독교로, 교회로, 신조로, 성경으로 심지어 믿음으로 오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당신과의 인격적 만남과 교제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 말씀을 전도에 많이 활용하면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인생살이의 현실적 고난으로 해석해서 전한다. 예컨대, 사업의 부도, 가정의 파탄, 건강의 상실, 학업이나 직장에서의 실패, 인간관계의 상처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께 맡기면 다 해결해 주시니까 스스로 그 짐을 지려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라고 권한다. 이는 초점이 완전히 어긋난 해석이다.

예수님이 당신께 나와 얻게 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쉼”이라고 했다. 현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그렇다고 작금 교회마다 성행하는 내적 치유를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당신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와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을 뜻한다.

반드시 바로 직전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고 하신 말씀과 연관해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십자가 계시를 받아들인 자라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일련의 말씀을 하게 된 계기도 바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책망”(20절)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에서 수고의 헬라어는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힘을 쏟아 붓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아 십자가의 계시를 모르면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자력으로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의 쉼을 도무지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야만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죄책감, 공허감, 갈급함 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쉬게 한다는 원어의 뜻도 단순히 고통이 끝나고 안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영어로 치면 refresh, revive)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 이전과 정반대로 바뀌며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게 된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바리새 율법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 수많은 규정들을 지켜야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가르침만 받았다. 그 때까지 그들을 비롯해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는 정말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그대로였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선 평생을 두고 물을 저축지 못할 웅덩이에서 물을 구해보려 하니 탈진할 때까지 수고할 수밖에 없고 그 삶과 인생에 항상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다른 말로 인간이 고안한 어떤 심오한 철학이니 경건한 종교 체계라도 인간의 심령에  절대 온전한 평강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따르라. 나의 믿음을 본받아라.”고 했다면 기독교도 세상 여느 종교와 다를 바 없으며 성경도 단지 위대한 선각자의 깨우침을 적어 놓은 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자신에게, 그것도 당신이 이 땅에서 없어지고 난 이후에 성경을 읽을 독자에게까지, 오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바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기에 마음을 열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당신께서 직접 마음의 쉼을 주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성경에 기록된 계명을 열심히 지켜서, 즉 마음의 수양을 통해 안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구원의 길에 헬라인과 유대인의, 남종과 여종의, 자유자와 노예의 차별은 전혀 없다. 단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 만든 종교로는 수고하고 짐만 질 수밖에 없다. 구원은 당연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소용없다.

상기의 세 가지 말고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내증하는 내용들은 얼마든지 많다.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자를 취하고 심지어 혼외정사에서 낳은 아이를 맡아 기르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 신들도 음란하게 함께 섬기는 정말로 완악한 죄를 지었어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다섯 남편과 살다가 지금도 한 간부와 동거하는 여인의 심령에 구원의 생수를 부어주셨고 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용서해 주셨다.  

또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이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죄인이 왜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득세하는지 하나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의인은 죄인이 어떻게 살든 아무 상관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대적이 침공해 와서 과수원의 열매마저 다 수탈해 갈 것이 뻔하며 앞으로 그 전쟁으로 당할 고통 때문에 두렵기 짝이 없더라도 믿음으로 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공의는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절대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달렸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또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셔서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흘 후 부활하셔서 세상 임금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든든히 세우셨다. 죄에 대한 공의와 죄인에 대한 사랑을 당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실행하셨다. 예수 안의 의인은 이제 아무리 악인이 형통하고 본인은 핍박과 궁핍에 내몰려도 오직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8-10)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쏟아 놓은 하나님의 한탄을 보라. 오직 복만 받기 위해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니 오히려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 후안무치한 죄를 짓고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멸시한 적이 전혀 없다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하나님이 성전 문을 닫겠다고 하는 원인이 강도 살인 같은 흉악한 죄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을 신령과 진정으로 섬기지 않았고 오직 자기들 형통을 위해서 당신의 힘만 빌리려 한 죄였다.

예수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꿔놓은 유대인들을 야단치며 성전에서 쫓아내었다. 당신께서 그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다. 당신의 몸으로 이뤄진 영원한 영적 교회다. 또 “주여! 주여!”하면서 입술로만 당신을 찾는 자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했다. 예수님은 말라기 선지자가 받은 계시와 똑 같은 말씀을 하셨고 나아가 말씀하신 그대로 직접 행하셨다. 당시에 어느 누가 감히 성전을 뒤엎을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럴 꿈이라도 꾸겠는가? 십자가에 달릴 각오를 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수도 없는 말씀을 직접 몸으로 완벽하게 실천하셨다. 그분이 아무 죄 없이 사심으로 율법을 완성한 정도만이 아니다. 구약 계시의 전부가 그분의 가르침, 사역, 생애, 십자가 사건으로 모두 성취되었다. 앞에서 예언이 이뤄질 확률로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따져보았지만 사실 그런 증명은 너무 가난한 차원이다. 그보다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따져 보아야 한다. 특별히 구약성경의 계시와 연결해서 말이다. 정말 진지하게 성경을 읽어 본 자는 그분이 처음이자 끝이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한다. 이것만큼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지 더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도 없다. 성경은 한마디로 오직 그 내용이 말할 뿐이다.    

특별히 골고다 십자가는 유사 이래 있어온 세상 모든 종교의 구원관이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에게 선언한 것이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에 관해 기록된 성경은 오늘 날에도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적 개념의 오류들을 철저하게 파헤쳐 놓은 책이다.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 맞다, 이유 없는 재앙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되었거나 하나님이 없는 것이 맞다, 왜 의인이 고생해야 하는가, 죄인을 우대하는 하나님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잘 믿었는데도 고난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등등에 관해 성경만이 유일하게 정확한 답을 주고 있다. 그것도 일반인들의 통념과 철학자나 종교가들의 심오한 사상과도 정반대되는 진리를 밝혀 놓았다. 요컨대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신 그 한 마디 말만으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충분하게 증명이 된 것이다.    

9/20/2008

강진영

2009.12.29 07:55:43
*.107.104.32

하나님을 인간의 지식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알고 알고 안다 하여도,
고작 그 아는 것이 티끌보다도 작은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탐구의 대상이 아닌 경배의 대상이요,
감사의 대상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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