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4:36-39) 말세에 관심 끊고 혼자만 잘 믿어라. 

구원 완성 담화 (7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6-39)

 

종말에 관한 과도한 관심

 

신구약 성경 66권이 말하는 내용은 순서별로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네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의 세 주제는 이미 다뤘고 이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고 신자들도 신령한 육체로 부활하는 마지막 완성에 대해 일곱 번째로 알아보려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죄로 오염되고 부패한 모든 인간과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의도대로 회복시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까지 전체적 완성은 전혀 다루지 않고 개인 구원의 완성에 관해서만 여섯 번을 살펴봤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본문에서 종말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에 관한 신자의 관심은 ‘언제’(when)와 ‘어떻게’(how)에 집약될 수밖에 없고 그중에서도 ‘언제’가 우선입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역이신 예수님도 종말의 징조만 설명했지 그 때는 당신께서도 모른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36절) 

 

신자들이 종말에 대해, 그것도 최근에 아주 큰 관심을 갖게 된 절박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죄로 타락하는 양상이 날로 극악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사조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 진리를 부인하는 정도를 넘어서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 덩어리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을 전설과 신화를 믿는 어리석은 자를 넘어서 인간 사회의 단합을 깨트리는 광신자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국가, 그것도 청교도가 세운 미국에서조차 알게 모르게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기후 온난화로 인해 급격히 증가한 자연 재앙으로 전 지구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번 펜데믹 같이 전 세계인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세균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인류를 공멸시킬 핵전쟁의 위험성이 가시적 범위 안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인류는 지금껏 전혀 살아보지 못하는 시대에 들어섰고 나아질 전망보다 더 나빠질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당장에 온 땅이 멸망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종말론적 현상은 그 정도만 달랐지 인류 유사 이래 모든 세대마다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2000년을 맞을 때 전 세계인이 종말의 공포를 한번 크게 실감했습니다. 그때까지 컴퓨터는 연대에 대한 인식을 두 자리 숫자로 해왔기에 2000년을 표기할 방안이 없었습니다. 전 세계의 전산망이 일시에 혼동을 일으켜 공공기관, 은행, 회사, 경찰, 군대 등 모두가 일시에 정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일종의 무정부 상태가 되어서 폭력, 약탈, 강도, 전쟁 등이 일어나도 막을 방도가 없다고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1999년 12월 31일 자정에 New Year Party를 하지 않고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시험하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단 일 초 사이에 그동안 누렸던 풍요가 완전한 파멸로 바뀔 수 있다고 가슴 졸이면서 말입니다. 기술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전문가들이 적절히 대처해서 큰 탈 없이 넘어갔습니다. 작금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누구나 느껴도 그날 저녁의 공포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한번 곰곰이 잘 따져보십시오. 지금처럼 매일의 상황이 종말의 확실한 징조라고 여겨지면 굳이 ‘언제’와 ‘어떻게’는 알아볼 필요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수 있다고 각오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다시 오실 것이니까 준비만 잘하라고 당부했습니다.(44절) 신자는 전체적 종말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 없이 개인별로 자기 구원의 완성에 힘을 쏟으라고 예수님이 이미 이천 년 전에 가르치신 것을 저는 지난 6주 동안 대언했을 뿐입니다. 

 

예수님도 모르는 종말의 시기

 

신자로선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작금 종말이 피부에 와닿고 있기에 ‘언제’와 ‘어떻게’를 가능한 정답에 가깝게 추측은 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려면 재림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마태복음 24-25장에서 종말에 관해 직접 가르치신 내용을 숙지해야 합니다. 성경 밖 세상의 뜬 소문에는 완전히 귀를 닫아야 하며, 성경 안에서도 사도들의 간접적인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말에 대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당시에 인근 제국에까지 그 위용을 자랑하며 관광명소가 되었던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했습니다.(1절)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절)라고 질문했습니다. 유대인 제자들에게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세상 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파괴했고,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마저 헬라의 안티오쿠스 4세가 우상과 돼지 피로 모독했던 처절한 체험을 이스라엘이 다시 겪어야 할 판국입니다. 주님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니”(2절)라고 했으니 이전 같은 재건할 희망도 없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스승을 모시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볼 꿈을 꾸고 있는 제자들로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지난 삼 년간 주님을 따라다닌 모든 노력이 완전히 물거품이 될 판입니다. 

 

따라서 그 질문 이후의 주님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세상 종말보다는 이스라엘 왕국이 로마에 의해서 망하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한 문장 안에 그 당대, 가까운 미래, 마지막 날 등을 다 포괄하는 이중(삼중)적 계시입니다. 때로는 당대의 예언을 하다가, 문장을 바꿔서 가까운 미래를 겹쳐서 말하다가, 나중에는 먼 훗날만 말하는 식으로 삼 단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치 겹쳐 있는 산들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나 가까운 산은 명료하고 맨 뒤의 먼 산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 안에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한 설명도 함께 상징적으로 포함시켰습니다.(4-28절) 마지막에는 해와 별들이 어두워진다는 이사야서의 종말적 예언(13:10, 34:4)을 인용해서 당신께서 재림하여 심판을 완성 시킬 종말에 대해서만 따로 예언했습니다.(29-31절)

 

이어서 그 재림의 때를 아무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30절에서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보이고, 33절에 그러면 인자가 가까이 이른 줄 알라고 했습니다. 본문 마지막에도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처럼 된다고 했습니다.(37절) 다니엘 선지자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킬 구세주이자 심판주를 ‘인자’라고 칭했는데(단7:13,14)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가르치면서 공사역 내내 그 인자를 당신에게 적용했습니다. 본문에서도 당신을 뜻하는 인자의 오심에 대해 당신께서 설명해주었기에 그 시기를 주님 본인이 모를 리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예언의 의미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재림에 관해 미리 알려주어도 제대로 이해하기는커녕 지금 성전이 파괴되면 자기들 꿈이 산산조각이 날 판이라 먼 훗날에 관한 말씀에는 집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초림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선 마지막 완성의 시기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에 초림이 완성된 이후의 후대 신자들도 재림의 시기가 가장 궁금할 터인데 예수님으로선 지금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어서 성경에 기록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대신에 종말의 징조에 대해선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자기 시대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징조들을 본문에서 한 마디로 줄여서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을 올바르게 준비하려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부터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의 때 같은 종말

 

노아 본인이 홍수의 시기에 관해 가장 궁금했겠지만 하나님은 일언반구 힌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120년 동안 배를 건조했지만(창6:3) 명시적으로 홍수 시기를 예고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로선 배를 건조하는 구체적인 명세와 방식만 계시받았기에 배를 다 지을 때까지 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방주에 취하라는 명령을 듣자(창7:2) 비로소 홍수가 곧 닥치리라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 본인이 홍수 시기를 몰랐다면 세상 사람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 주님은 그 사실을 굳이 제자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홍수가 날 때까지 몰랐고, 정확하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일순간에 다 멸망 당했다고 말합니다.(38절) 홍수 심판의 시기와 징조 대신에 그 결과만 강조한 것입니다.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 사항이므로 구체적으로 알려 하지 말고 그 의미만, 특별히 누가 심판받았는지 정확히 알아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틀림없이 노아를 종교적 광신자나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백이십 년 동안에 폭우로 홍수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나 막상 끝나고 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찾는 자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종을 통해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진심으로 스스로 회개하며 당신께 기꺼이 돌아오는 자만 찾으십니다. 

 

노아도 당시 사람들에게 언제 있을지 모르는 홍수 심판에 대해 경고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했을 것입니다. 단지 홍수만 경고하려면 백이십 년이라는 시차는 너무 깁니다. 노아 가족 외에 단 한 명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가 나오길 하나님은 그만큼 오래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동물들이 거대한 방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뒤늦게라도 깨달았어야 하는데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38절) 일에 바빠서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배를 짓고 있는 현장 근처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르고 주님은 불시에 또 순식간에 전 세계인이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이뤄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노아 심판 때에 그랬듯이 먼저 경고의 말씀들이 충분히 있고 방주와 동물들의 움직임 같은 가시적 징조도 보여줍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 징조로 기근 지진 전쟁 같은 현실적 재앙을 열거했으나 재난의 시작이지 끝은 아니라고 합니다.(7-8절) 재림의 직접적인 징조에 대한 가르침은 ‘그 때에’라고 시작하는 9-12절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정작 눈여겨봐야 할 종말적 상황으로  넷을 들었습니다.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믿음 때문에 핍박받고 심지어 죽임으로 내몰리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고, 불법이 성하고, 사람들의 사랑이 식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노아 때처럼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노아 때처럼 미리 확실하게 예고해주어야 하고 또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네 가지 징조를 미리 다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적으로는 전혀 이치가 맞지 않지만, 사전 경고도 없는 심판은 불공평하다고 항변하는 인간들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림은 성경에 이미 예고되었으니까 남은 것은 그 네 징조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신자들에 대한 핍박을 빼고 나머지 거짓 선생, 만연한 불법, 사랑의 실종, 셋은 넘치도록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재림의 시기를 제가 감히 추측하자면 기독교가 완전한 사회악이 되고 신자들이 그 믿음을 소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큰 박해를 받게 되는 때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성령이 역사하여 막아주고 있기에 그런 단계에 완전히 이르지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믿음의 자유가 있는 서방 민주국가에서도 유독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핍박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습니다. 

 

불신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도 노아 때와 동일하게 120년이나 폭우는 있어도 심판은 없었듯이, 성경의 심판 예고와는 달리 그동안 큰 재난들이 있었지만 인간이 노력하여 극복하면서 세상을 점점 발전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대도 노아 때처럼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단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실존마저 부인하고 있습니다. 전도하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신자를 신령한 육신으로 부활시켜 주고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로 심판하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노아 때처럼 코웃음 치며 광신자라고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십자가 구원 진리를 전하는 순간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속담처럼 크게 반발하며 집단 테러를 당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노아 때에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에서 노아와 그의 경고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이 아주 길었지만 성경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뜻에 비추면 120년이라는 기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의미합니다. 그럼 한 세대에 단 한 명의 회심자도 나타나지 않은 셈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심판을 더 미룰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노아의 때라는 것은 같은 시대에 전혀 다른, 정확하게는 정반대의 두 부류의 사람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중간의 회색지대의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어지는 40절에서 밭에서 일하는 두 남자와 41절에서 가사 일을 하는 두 여자가 정반대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진다는 예를 들어서 보충 설명해준 것입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재림 심판에 대해 아무리 주의 종들이 세상에 경고하고 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징조들이 나타나도 끝까지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분의 경고를 확신하고 삶에 반영하여 실현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간에서 양쪽에 두 다리를 딛고 사는 신자는 없으며 그럼 그는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세상 사람이 확연하게 그 둘로만 나뉠 때,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세상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조롱거리로 삼고 온갖 핍박을 가하고 죽음으로 내몰 것인데 바로 그런 때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신자. 

 

혹시라도 마지막 때의 그런 환난이 두려워집니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극심한 핍박이 시작되어도 신자들이 완전히 멸망되기 전에 주님이 홀연히 다시 오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물론 본문 13절에서도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끝까지 참으라고 당부하신 뜻은 완전히 멸망 당하기 전에 당신께서 와서 해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간혹 그사이에 순교하는 자도 나오겠지만 그런 자에겐 특별한 믿음의 은사와 능력을 주시고 스데반처럼 주님이 직접 영접하여 죽음의 고통도 경감시켜 주십니다. 

 

홍수 심판 당시의 노아의 영적 상태를 한번 추측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받았고 그에 순종하여 열심히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배가 완성될 때까지는 심판이 오지 않을 것이며 완성된 후에는 언제 닥쳐도 자신의 안위에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자기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막고 도끼 자루가 썩는지도 모르고 세상 재미에 빠진 사람들만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나 처음에는 자기를 불쌍하다고 여기다가 점점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노아가 너무 어리석다고, 어쩌면 미쳤다고 동정하고 있었겠지만 노아가 오히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었을 것입니다. 

 

신자도 노아처럼 똑같이 행하면 됩니다. 재림의 시기와 징조에 대해서 전혀 걱정할 필요도 없고 굳이 자세히 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신자의 구원은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므로 오히려 기쁨과 설렘으로 소망하며 기대해야 합니다. 지구 전체를 삼킬만한 폭풍우가 덮쳐도 예수 십자가라는 가장 안전하여서 절대 침몰 되지 않는 영원한 방주에 이미 타고 있습니다. 매일의 삶이 그 방주 안에서 이뤄진다고 확신하기에 노아처럼 자기 종말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방주 밖의 사람들만 안타까워해야 참 신자입니다. 

 

이런 불신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은 주님이 가장 컸을 것이며 그런 뜻을 본문에서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절) 세상 끝과 세상에 충만해진 복음을 평행으로 표현했습니다. 끝날에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단순히 신자들더러 그렇게 되도록 선교 소명에 충성할 것을 독려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과 복음 밖에 있는 자들로 확연히 구분될 때까지 세상 끝날의 심판을 유보하고 기다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종말적 상황을 보고 신자들은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정작 주님은 오히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당신의 방주에 승선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지구 전체 종말의 준비는 이미 다 된 것입니다. 매일을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살면 됩니다. 바울은 어서 빨리 천국 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좋기에 지금 당장 순교해도 기쁘게 감당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과 불신 세상을 위해서 더 유익하다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신자가 요한계시록을 아무리 훤히 꿰뚫고 있어도 이런 상태로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비난 멸시 대적해도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통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경고해주셨습니다. 당장 오늘 내일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막상 그렇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주님의 일에 충성하고 있을 때에 주님을 맞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세상에 들어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가 주님을 만나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혹시 주님이 주일 날에 다시 오리라 절대 기대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쭉정이와 알곡을 골라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자가 평일에 정말로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모든 신자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지만 쭉정이 신자들의 억울하다는 핑계와 항변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역사와 인류 전체는 주님의 재림이라는 목적지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 밖의 사람들은 AI가 인간에게 충성하며 삶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줌으로써 인간은 편안하게 매일을 유토피아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목표로 삼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컴퓨터가 너무 발달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공격하면 멸망할 수 있다는 걱정까지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선진국들이 유토피아 실현을 위해서, 아니 단순히 빈부격차 해소 같은 문제 하나라도 해결하려고 온갖 정책을 세우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실패만 거듭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신냉전(新冷戰) 시대로 돌입하면서 자국 이익 우선주의를 견지하며 이웃과 담을 쌓고 있는데, 그것도 세계 최고 부국이자 최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고 어떻게 인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종말을 잘 준비하려면?

 

무엇보다도 신자가 실제로 대비하고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종말은 바로 자신의 육체적 죽음뿐입니다. 물론 마침 예수님이 불시에 재림하실 때 생존해 있다면 그 엄청난 영광을 직접 목격 아니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전에 전체적 종말이 일어나리라 믿고서 현실 삶은 포기하고 종교적 일에만 전념할 수는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언젠가는 반드시 로또에 당첨된다고 믿고 미리부터 빚을 내서 큰 저택과 최고급 차를 사고 세계여행하며 살아가는 꼴입니다. 평생 로또에 걸리지 않으면 도무지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습니다. 

 

평생토록 종말이 자기 생애 안에 곧 닥친다고 믿고 주님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주님의 재림만 바라보고 사는 신자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주님의 꾸중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마25:26) 달란트 비유가 포함된 마태복음 25장이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종말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꾸중을 받기 이전에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을 완전히 허비하는 너무나 바보 같은 짓입니다. 교회사적으로 그렇게 종말만 대비한 교파는 전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단 한 번도 그들의 모임에 주님이 변화산 같은 모습으로라도 임재해 주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 신자라면 죽음이 절대 끝이 아니며 곧바로 천국으로 입성해서 홀연히 영광스럽게 구원은 완성됩니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천국의 성도들은 물론 예수님을 얼굴로 맞대면하여 교제하고 천국 보좌를 향하여 이 땅에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배와 찬양을 충만한 기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은 보장되었으니 정작 관심을 두고 가꿔나가야 할 구원은 이 땅에서의 자신의 믿음 생활입니다. 제가 여섯 번이나 지구 전체 종말보다 개인 구원의 완성부터 강조했던 까닭입니다. 

 

달란트 비유처럼 천국에서 예수님과 교제할 때 영적인 대화를 제대로 이어갈 수 없으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누구라도 이 땅에서 궁금했던 상황과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에 관해 물어보면 확실한 답을 얻어서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 진리는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 쪽에서 “그럼 이제부터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라고 질문을 던지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나게 자랑할 거리는 없다 쳐도 최소한 아무 대답도 못해 너무나 부끄러워지는 신세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껏 교회가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가르칠 때 요한계시록을 육하원칙에 따라서 종말에 일어날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경쟁적으로 시도했고 신자들도 오직 그런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성경을 정확히 알아보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좋으나 대환난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아무 문제 없이 평안하게 종말을 맞을 수 없는지 미리 알아보려 한다면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이 땅에서 살았던 삶에 대해 물어보신다고 해서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말을 해야만 알 수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 땅에서 기도할 때도 신자가 현재 처한 문제나 고난을 또 그가 소원하고 계획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몰라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적 상황을 자신이 어떻게 이해해서 대처하는지 자신의 말로 고백해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주님이 이 땅의 삶에 대해서 물어볼 때 신자 스스로 자기 인생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꾸려왔는지, 그래서 죽을 때도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 비추어서 그 인생을 정리하고 마감했는지 네 자신의 말로 설명해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날 것을 설렘과 기쁨으로 기대했듯이 온전한 믿음에 따라 주님께 온전하게 충성했다면 얼마든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고 대화할 내용도 무궁무진해질 것입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천국으로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며 죽음에서 눈을 뜨면 이미 그 종착지에 도착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것은 마치 어린이가 어른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의 인생은 천국에서 예수님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잘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아이가 훌륭한 어른이 되려고 준비 훈련하듯이 말입니다. 천국 보상만 바라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대로 충성하면, 아니 정말로 거듭난 신자라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소명에 충성하게 되므로 천국에서의 주님과의 대화도 정말로 신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완성이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인류 역사를 신자가 주도하여서 바꿀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자기 문제도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는 판국에 인류 전체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자가 자기 코가 석 자라 새벽마다 자기 문제만 붙들고 기도하는데 믿음을 거의 다 소진합니다. 그럼 인류의 종말과 세상의 심판에 대해서 걱정은 물론이고 미리 알아볼 자격조차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 땅 전부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항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위인이라도 역사의 흐름에 선한 영향력은 끼칠 수 있어도 흐름 자체를 바꾸거나 주도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자기 믿음을 자기 주변에서부터 신실하게 실현하고 있으면 십자가 복음의 거룩한 능력이 다른 이들을 변화시켜 주시며 그 변화된 개인들이 함께 모여 인간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더 크게 끼쳐야 하는 곳이 더 큰 방주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을 누룩이나 겨자 나무 씨앗에 비유한 것입니다. 

 

종말에 대해 기억하고 대비할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 시기와 방식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이 불시에 재림합니다. 신자의 완성을 위해서 오시며 신자가 환난에 멸망 당하기 전에 오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매일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는 대신에 소명에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노아 때에 멸망 당한 세상 사람만 강조하신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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