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지름길

조회 수 2184 추천 수 154 2008.11.03 21: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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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지름길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2,33)



배트맨과 조커

배트맨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온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도대체 배트맨과 악당 조커 중에 누가 더 힘이 센 거야?” 아빠는 “그야 당연히 배트맨이지. 그런데 왜 그걸 물어?” 아이는 “배트맨이 힘이 더 세다면 당장 그냥 없애면 될 텐데 왜 자꾸 당하기만 해? 마지막에도 조커는 도망간 것으로 끝나버렸지 않아?”라고 따지듯이 반문했다. 아빠는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조커가 완전히 죽지 않은 현실적 이유는 물론 영화사가 계속 2편, 3편을 만들어 돈을 더 벌 계획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그런 사정을 알 리도 없지만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를 어른들 돈 이야기로 실망시킬 수는 없다. 또 힘센 자가, 그것도 정의의 편이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아이를 제대로 납득시킬 만한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도 없었다.  

아이로서 진짜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아니 제대로 대답 못한 아빠처럼 대부분의 어른들마저 깨닫지 못하는 진리다. 조커 같은 악당 모두 없앤다고 악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악이 끼치는 나쁜 영향도 마찬가지다. 그럼 결국 세상에 설치는 악한들과 별도로 악은 끝까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마저도 이 아이의 사고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의 어려운 난관에 부닥치면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조금만 그 해결이 지체되면 초조, 염려, 불만, 의심, 불신까지 쉽게 번져버린다. 정말 진지하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사태가 풀리기는커녕 더 꼬여 가고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환난까지 생기면 하나님이 도대체 왜 이렇게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원망만 쌓인다.  

말하자면 아이가 배트맨이 조커를 이길 힘이 있는데도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듯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능력을 일부러 제한하고 있다고 여겨져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나아가 열심히 기도했으니 신자로서 내가 할 바는 다 했고 이제는 하나님의 몫인데도 그 책임을 등한히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도 신자들은 여전히 그 아이처럼 어리석기만 하다.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에 악을 허용하지 않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분 같이 여긴다. 그러나 그분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악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묵인했다. 또 주님이 오셔서 사단의 흉계를 깨트리기는 했어도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여전히 악이 세상에 머물러 사람을 미혹시키고 죄에 빠트리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처음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까 이어지는 사고도 오류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님이 악의 존재를 세상에 두었어도 인간이 겪는 환난의 원인이 사실상 하나님 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무리 하나님이 인생 만사를 주관하고,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단마저 그분의 주권적 통치를 받는다 해도 그분은 악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한 분이다.  

그렇다고 사단에게 전적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인간이다. 물론 사단이 죄악의 최초 발단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배반 외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인간이었다. 또 그 당연한 결과로 죄를 올바르게 인식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따라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죄가 죄인 줄을 모르고 나면서부터 죄에 빠져 즐기기까지 한다. 모든 인생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추구하며 산다.

쉽게 말해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서 풍요와 안락을 이루려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보니 필연적으로 경쟁, 시기, 분쟁이 끊일 새 없고 죄악이 범람한다. 그러나 죄가 인간관계의 왜곡이나 비뚤어진 사회적 환경의 결과적 산출물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의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는 것, 그래서 오직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 모든 인간의 영혼에서부터 자리 잡고 있다. 신자도 예외 없이 그 세력 아래 노출되어 있다. 그 세력은 예수님 오실 시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기승을 부릴 것이며 죄인들은 더더욱 하나님을 멀리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관영되는 죄의 원인과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귀속한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도, 배트맨이 조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악이나 죄인을 당장에 다 없애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아무리 의롭게 살고 또 간절히 기도해도 환난을 겪는 것이 결코 이해 못할 비정상적 상태가 결코 아니다.  

환난이 단지 믿음 성숙용인가?  

신자가 간과하고 있는 진짜 중요한 사항이 또 하나 있다. 환난의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신자 자신의 잘못과 죄로 기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이 닥치면 신자는 가장 먼저 혹시 자신의 죄로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닌지, 또 자기가 무지하고 게을렀던 부분이 없었는지, 아니면 교만하게 서두르다 과오를 범한 것이 없는지 철저하게 자기 점검부터 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마음 자세부터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으로 바뀌어 문제의 원인을 잘 분별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무조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만 해달라고 기도하면 잘못은 자기가 범해놓고 하나님더러  뒷설거지만 시키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어린 아이는 부모에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부모도 처음 한두 번은 몰라도 아이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나중에는 손을 놓지 않는가? 부모가 자식 스스로 성숙되기를 원하듯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설거지 파출부로 당신을 호출하는데 쓰라고 주시지 않았다.  

만약 욥의 경우처럼 진짜 자기 쪽에 원인이 없고 세상에서 억울하게만 당한 경우라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 믿음을 욥이 고백한 그대로 닮게 만드는 것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23:10)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는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럼 자기 쪽에 원인이 없는 환난이야말로 자기 힘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당하는 우리로선 힘들어도 하나님 입장에선 이 만큼 믿음을 성숙시키기에 좋은 방도가 없지 않는가? 바로 된 백만장자일수록 자식을 젊었을 때 일부러 고생시키려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생사의 방관자나 심술꾸러기밖에, 일반인들이 갖는 신관이 바로 그렇듯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점검하거나, 죄를 회개하거나, 품성을 의롭게 바꾸거나, 믿음을 성숙시키거나 간에 전부 자기 노력으로 자신을 바꾸고 자라게 만드는 측면이다. 물론 그 모든 일을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긴 하지만 출발점은 자기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잘못되었거나 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란 당연히 믿음으로 평생을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싸우고 환난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신자에게는 일생의 어느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른 시점은 없다. 바울처럼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천국에 예비 된 면류관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노력 외에 다른 요소가 있다. 사실은 이쪽 측면이 더 강해야 한다.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다 승리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악과 고통과 상처와 부끄럼까지 몽땅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죄로 인해 부패된 인간의 영혼을 당신의 보혈로 깨끗이 씻으셨고 타락한 세상을 조종하고 있는 사단의 권세도 부활하심으로 완전히 깨트리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분명히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이미) 입었다고 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다 이루셨다. 더 이상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이루실 것이 따로 없다.  

환난을 통해 본인의 존재가 특별히 그 믿음이 자라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또 자신이 자라는 부분은 스스로 인지하고 체험할 수 있어서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환난 중의 신자에게 하나님이 진정으로 또 최종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공로로 당신의 자녀가 겪는 어떤 고통과 환난도 이미 나음을 입었다는 진리를 확실히 붙들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신자는 환난이 처음 닥칠 때부터 사실상 “더 자랄 필요가 없는 믿음”을 가지고 그 환난을 대해야 한다. 바꿔 말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미 다 이겨놓으신 환난이기에 절대로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다. 단순히 의지를 강하게 하여 마음을 바꿔 먹는 것이 아니다. 마음만 강하게 바꾸면 의지력이 약해지면 허사이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루신 공로와 승리를 온전히 믿는 것이다. 진정으로 십자가만 붙들면 환난 중에 즐거워하며 심지어 하나님이 이번에는 어떤 영광으로 인도할까 사뭇 설렘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자라려고 하지 말고 담대해져라.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도 악의 세력과 죄인들은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 여전히 죄와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 또 그 훼방은 신자에게 더 심하다. 예수님도 분명히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담대할 이유는 이미 모든 악의 뿌리인 사단을 당신께서 완전히 이기셨기에 어떤 죄악과 환난도 더 이상 신자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 당신께서 신자와 항상 어디든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들어 온 신자는 이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분이 되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죄악과 사단과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따랐고 아니 알지도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노예인줄도 모르고 스스로 죄악을 즐기며 영원한 사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님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반대편에만 머물러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요컨대 스스로는 아주 똑똑하고 인생을 즐기며 산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사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이제는 그 노예 신세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옛날 주인이었던 사단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아 있다. 자연히 자기 수하를 벗어난 옛날 종을 가장 미워하게 된다. 신자는 죄악과 사단과 죽음의 권세에 묶여 있지는 않지만 더 심한 시험과 유혹과 방해를 받는다. 사단이 어떻게 하든 신자를 넘어뜨리려 집적대긴 하지만 이제 신자는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 신자가 갑자기 거룩해지고 믿음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기셨던 그 권세가 신자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죄악과 사단이 또 그 부작용인 환난이 신자를 겁주고 불안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절대로 실패케는 못 한다. 신자 스스로 예수님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주의 이름만 부르면 반드시 구원하시고 최종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한 마디로 신자란 항상 예수 안에 있기에 이미 담대해진 자다. 어떤 환난이 닥치더라도 그 담대해진 상태가 바뀐다면 사실은 엉터리로 담대해졌거나 아직도 믿음으로 담대해지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을 자기가 다시 씨름하겠다고 끙끙대며 덤비는 꼴이다.
  
근 사천년 전 사람이었던 욥도 종국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실제 체험으로 십자가 은혜와 권능 안에 든 최초의 두 사람 중의, 다른 한 사람은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 하나다. 그가 당한 것 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을, 그것도 일시에 겪은 자는 우리 주위에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의심, 불만, 분노, 불신앙을 털어 놓을만한 자격(?)이 있는 자를 꼽으라면 바로 그였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대신에 고난의 원인만은 알고자 했다.  

그러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의 입에서 나온 최후의 고백이 무엇이었는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쉽게 말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극심한 고난이라도, 반드시선하며 또 믿음의 자녀를 당신께서 끝까지 붙들고 계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뜻도 무엇인가?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 권능과 은혜를 믿는 신자는 어떤 환난이 닥쳐도 당신께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않는가?

신앙이란 그래서 항상 이중적 역설을 지닌다. 신자 쪽 입장에선 환난과 죄악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정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도록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이미 다 이겨놓은 환난인지라 아예 처음부터 기실 걱정할 것이 따로 없다. 당당하고도 담대하게 대적만 하면 된다. 정작 자기 믿음에 더 자랄 것 없이 예수님이 다 이뤄놓은 것을 믿기만 하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내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랄 필요도 없다는 역설마저 성립된다. 이미 다 자란 자로서 그저 예수님의 손을 잡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환난과 죄악이 눈앞에 닥치는 순간부터, 아니 언제 어디서나 그래야 한다. 환난의 고통을 실감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승리했다는 확신을 갖고 환난과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  

문제는 항상 거치적거리는 자기다. 정말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러나 오해는 말아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정작 죽여야 할 것이 자신의 정욕과 교만과 불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환난과 악이 닥치면 신자로선 일단 전보다 강한 믿음을 갖추어서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가? 사실상 정욕, 교만, 불신앙이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현재 상황을 잘못 분별하는 어리석음은 포함될지 몰라도 말이다.

대신에 환난 가운데 진짜로 자기를 부인해야할 측면은 자꾸만 믿음마저도 오로지 자신의 의지적 노력만으로 키우려는 몸에 붙은 타성 내지 습관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이미 이뤄놓으신 승리를 계속해서 잊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신분으로 바뀌었고, 또 어떤 특권을 지녔는지 미처 알지 못하거나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현재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중이지 않는가? 진짜 문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그 풍성하고도 힘 있는 의미를 모르거나 잊고서 무조건 구해달라고만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 믿는 신자로 이미 바뀌어져 있는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모르는 것이다.

흔히 간절히 기도하여 환난을 이기고 또 이긴 후에 하나님께 감사, 찬양한다. 그러나 사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그 순서를 바꾸는 것이 맞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찬양하고 그 은혜 안에 든 것을 감사해야 한다. 말하자면 환난과 죄악은 찬양으로 당당히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찬양 가운데 역사하는 예수님이 내 대신에 싸워서 승리를 주신다. 아니 이미 다 이겨 놓으신 싸움이다. 그래서 그런 승리를 완전히 맛 본 후에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순서라는 뜻이다.  

그러는 것이 또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환난을 두려워 한 적이 있었는가? 연약한 인간적 육신에서 오는 자연적인 두려움은 그분도 갖고 계셨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도 비록 십자가 죽음이 육신적으로는 두렵기 짝이 없지만 아버지가 함께 하므로 담대하게 그 짐을 지겠다고 말한 것이다.

또 그를 이름은 우리더러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였으므로 환난을 당해도 담대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환난을 당해도 담대해야 하고 또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자가 된 기쁨과 능력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환난과 죄악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참 기쁨과 능력은 예수님이 다 이기었으므로 환난의 처음부터 끝까지 담대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로 환난을 이기기보다는 찬양으로 이겨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연약한 우리인지라 둘 다 동시에 하긴 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는 오히려 찬양과 감사가 자꾸 약해지려는 것을 날마다 점검하고 보충하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11/2/2008


김순희

2010.09.10 12:31:53
*.161.88.93

이중적 역설, 이미 다 이겨놓으신 사건임에도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라는 것, 정말 이중적 역설인 것 같습니다. 이미 다 이겨놓으신 것을 믿으면 되는데 그 믿음이 생기기까지는 또 피 흘리며 싸워야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심을 믿을 수 있는 그 믿음을 허락하시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을 죄인임을 철저히 고백하고 또 짐승만도 못한 죄인이 새로운 피조물로 허락하신 몸에 바짝 붙어 있음을 알고 수치스럼에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치며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2.06.28 22:57:37
*.109.85.156

정말 역설인 것 같습니다. 환난을 당하면 자기의 소위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 퍽으나 중요한데 또 이미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공로로 승리가 확정되어진 것을 믿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임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또 육신의 죽음을 맞는 그 날까지 그 장성한 분량에 이를 자가 없다는...
그러하기에 믿음을 키우려하는 것은 엄격히 따지면 자신의 공로가 개입될 수 있는 것이며 오직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속에 있음을 늘 감격하여 이미 승리해 놓은 전쟁이기에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찬양함이 더 중요한 것임을...

이러한 역설 속에서 죄만 즐기던, 죄로만 물들던, 사단의 노예였던 옛신분이 오직 예수님의 대속하여주신 사랑으로 새신분이 되었음을 더더욱 찬양하는 자 되길 기도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9.01 16:34:53
*.14.99.253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역설적이기 이전에 우리의 완악하고 이중적 잣대를 가진 마음이 가장 큰 장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모두 이루시고 선포하신 것이 불변이 진리이거늘 걱정없이 편안하거나 아니면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기분에 맞춰 주님의 말씀을 자의반 타의반식으로 잊어 버리는 조급한 어리석음..

우리의 신앙에 이러한 약점이 아직 남아 있다고 느낀다면 특히나 더욱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전신갑주를 닦고 손질하는 저희 자녀들 되도록 성령님께 도우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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