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8:51-56) 아브라함도 예수 믿어 구원받았다.
구원 얻는 믿음 (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1-56)
유대인의 치명적 잘못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아(창15:6, 롬4:3)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믿음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백 세가 되어 불임 상태인데도 아들을 준다는 초자연적 기적보다 자기에게 그런 기적을 베푸실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둘째는 자신과 자기 후손을 통해 다른 민족이 복을 받게 하는 세상의 상속자로 세워준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의 후손인 유대인들 대부분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지 못했는데 그 둘을 자기들 믿음으로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그분보다는 그분이 주시는 현실적 축복만 믿으려 했고, 또 세상의 상속자가 되려 하지 않고 자기 민족만의 상속자로 안주하려 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구약 이스라엘이 그 두 가지 오류보다 더 큰 잘못을 범했다고 가르칩니다. 그 세 번째이자 결정적인 잘못은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인데,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이 아니라 구약 이스라엘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항변한 대로(53절), 아브라함과 구약 선지자들이 다 죽은 후에 예수님이 오셨기에 아예 알지도 못하는데 왜 구약 이스라엘의 잘못이 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한데 예수님이 아브라함도 당신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고 즉, 당신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56절) 그럼 유대인들이 그의 믿음의 후손이 되지 못한 이유도 당연히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외의 다른 나라들은 십자가 복음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도 알 수 없었기에 구원에서 아예 제외되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만 따로 택해 수많은 기적을 베풀며 당신을 믿고 따르게 했기에 그들만 편애한 불공평한 분이라는 불만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되는 데 실패했고 지금 예수님도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이방인이 먼저 훨씬 많이 구원받았으며(롬9-11장)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말씀드린 세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결과적 현상만 따지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이스라엘이 오히려 가장 괄시받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게 된 발단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용서해준 후에(요8:1-11),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따르지 않으면 어둠의 자식으로 생명의 빛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주축이 되어 자기들 선조가 아브라함으로 어둠의 자식이 아니니 당신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주님의 말끝마다 대적했습니다. 오랜 논쟁 끝에 주님은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가 아버지께로 온 나를 사랑해야 하나 그러지 않으니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거짓의 아비 마귀에서 난 자식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고 맨 처음에 선포하신 구원의 진리(12절)를 재확인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구약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왜 네 말을 지키면 죽음을 맛보지 않느냐고 따지며 너야말로 귀신 들린 자라고 주님께 받은 정죄를 되돌려주었습니다.(52, 53절)
예수님의 때를 보았다.
오늘날의 신자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니까 주님의 모든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당시 유대인들로선 예수님과 대화할수록 자기들 종교관과 완전히 배치되는 내용이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자기를 믿고 자기가 가르치는 대로 행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의 위치에 두는 셈입니다. 나사렛에서 온 이름 없는 비주류 랍비가 인간이 절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아가 그 엄청난 잘못을 따지는 자기들을 오히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도덕적 종교적으로 가장 의로운 유대인들로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일은 상상조차 못 했으니 격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또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날의 부활을 기다리며 음부에서 잠을 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자기가 가르친 대로 행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관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사전에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란 아예 없으니까 영적 차원의 죽음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자기가 사람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셋째 계명을 어겼기에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선 상식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데도 주님이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니까(51, 58절) 정말로 귀신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당시의 바리새인으로선 예수님이 지난주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내가 신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단 교주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본문에까지 대화를 이어온 것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려 한 것입니다. 급기야 주님이 이천 년 전의 선조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고 기뻐했다고 하니까 실제로 돌을 들어 치려 했고 주님은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59절)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분명히 같은 하나님을 믿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도 신학적인 접점이 전혀 없는 정도를 넘어서 정반대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하나님이냐 아니냐 여부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그들이 주님에게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라고 물은 뜻은 네가 인간인 주제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맨정신이 아니라 귀신에 씌어서 말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어도 흔히 말하는 식으로 예수의 ‘예’ 자도 몰랐던 아브라함이 당신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본문 말씀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당신을 직접 보았다고 하지 않고 당신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때에 대해선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도 그럴 수 있으므로 주님이 특별히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된다고 강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출생을 보고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예표로 판단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그렇게 예상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살펴본 대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마저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지 않습니까? 셋째는 아브라함에게 성령이 간섭해 영적 안목이 열림으로써 자기 후손을 통해 메시아가 오실 것을 소망하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나 실제로 예수님의 때를 봤다고 과거로 표현한 설명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렵게 따질 것 없습니다. 주님과의 논쟁에서 유대인들의 잘못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막은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그 반대로 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미리 알고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의 토론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계속 강조했듯이 해석의 키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시대 장소 민족의 구분 없이 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 가르침대로 행하면 예수님을 믿고 그 가르침대로 행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고 그분의 자녀로 그분에게 순전한 믿음으로 반응했으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본문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생은 하나님만 믿어선 안 되고 그분이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받으신 뜻을 정확히 깨달아야 얻는다고 합니다. 본문도 같은 맥락의 말씀인데 우선 ‘때’의 헬라 원어가 영어로 Day로 번역되었듯이 하루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바로 그날인 셈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그날을 어떻게 미리 보았고 무엇을 기뻐했는지 주님의 뜻하는 바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
먼저 그는 75세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고대에는 오랫동 자식이 없으면 믿음과 무관하게 신의 벌을 받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브라함의 집안이 갈대아에서 제사장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로선 그곳에서 직간접적으로 우상숭배 제사에 참여하고 또 그로 인한 죄악에 연루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모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갈등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새로 만난 하나님이 후손이 창대해진다고 약속해주었으니 자기가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었으며 비로소 생명의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시에 갈 바 모르면서 외국으로 이주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절대 아니므로 하나님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이나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우상을 섬기는 이방의 왕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아무리 피치 못할 상황이긴 했어도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한 잘못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가 기적적으로 간섭해서 원상 복귀해 주었으므로, 만약 처음부터 여호와께 기도하며 거부했어도 하나님이 또 다른 기적으로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막아주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얼떨결에 그랬다고 쳐도 여호와의 큰 권능을 한 번 체험했다면 다음에는 그러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오히려 그가 나서서 아내를 설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창20:11-13)
아마도 애굽에서 보호해준 전례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하나님이 바로 잡아주리라고 믿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을 가볍게 보고 그분에게 섣부르고도 교만한 기대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기에 무슨 일에서나 보호해주시는 분이라고 믿더라도 미리부터 자기 죄를 다 용서해주고 더 좋게 해결해준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그것은 참믿음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두 번째에 하나님의 역사를 당연하게 여기고 또 여자를 재산 취급했던 당시의 관습에 젖어서 회개에 소홀했다면 그 또한 큰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의 죄와 무관하게, 심지어 죄 중에 있어도 당신의 계획과 방식에 따라 풍성히 베풀어주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자로선 전후 사정이 어쨌든 죄를 짓게 되면 자신부터 엄밀히 돌아보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으나 어쨌든 아브라함이 두 번의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죄를 통분히 여기며 진심으로 회개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라 밤새 아내와 아들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으며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기적으로 아들을 주었고 또 그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으로 세우겠다고 언약해놓고 이제 그를 앗아가면 그 모든 약속은 물론 그동안의 은혜는 물거품이 됩니다.
모리아 산까지 가는 사흘 길 내내 혼자서 갈등하고 또 갈등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를 바치라고 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 이삭을 위해서 당장에라도 군말 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권능을 이미 여러 차례 맛보았고, 특별히 소돔을 심판할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간단한 명령을 어겼다고 롯의 아내가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하는 벌을 받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을 바치지 않으면 오히려 그 벌로 자기는 물론 이삭과 사라까지 심판받을 수 있으니 도무지 거역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혹시 이삭을 다시 살려주시거나, 백 세에 기적으로 주셨으니 다시 새 아들을 주실 수 있고, 그러지 않아도 하나님만의 거룩한 뜻이 있다는 사실만은 믿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면서 사흘 내내 하나님이 왜 이런 명령을 주셨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알고자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아브라함
그러다 생각이 어디까지 미쳤겠습니까? 신자는 예상치 못한 큰 고난이 닥치면 가장 먼저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가보다 여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온갖 잘못들을 회상하다가 자기가 살려고 아내의 정절은 물론 생명까지도 이방 왕에게 두 번이나 내어준 그 큰 죄를 다시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죄를 전혀 묻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닫고는 그 죗값을 외아들 이삭에게 물리는가 보다 판단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심령에 바로 네가 당신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그로선 심판받을만한 죄악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새삼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볼까 봐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고 속으로 눈물 흘리며 참회했을 것입니다. 제발 나를 데려가고 아무 죄 없는 이삭을 살려달라고 모리아 언덕에 오르기까지 계속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순종하는지 확인하려는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옛 자아를 완전히 깨트려버리기 위해 성령으로 간섭한 역사였습니다. 제단 위에 네 외아들 이삭이 너를 대신해 올라가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은 없어도 아브라함은 “저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속으로 참회의 고백을 하며 자기를 바치는 심정으로 칼을 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면 이미 살 대로 다 살았고 무엇보다 사라를 팔고 자기 살려고 했던 큰 죄가 있어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기 죄를 갚은 도덕적 종교적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긍휼은 일절 적용되지 않아서 행위로 구원하는 율법적인 신이 됩니다.
정작 제물로 바쳐진 이삭은 아직은 청소년이라 평소와 다른 아버지가 아주 이상해 보이긴 해도 거역할 수 없었고 시종일관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선하게 끝나자 마치 기이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삭의 믿음에 이 일이 영향을 미치는 바가 그리 없었기에 하나님 명령의 진짜 의미는 아브라함더러 너를 죽여서 당신께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실제로 칼을 치켜들자 곧바로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당신께 전부를 바치는 것을 보고는 아브라함이 자기 옛사람을 완전히 죽였다고 확인한 것입니다. 비로소 당신께 의롭게 여김을 받은, 즉, 구원받는 믿음이 되었다고 인정해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정작 하나님의 더 큰 은혜는 따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그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는 뜻)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오래전부터 그런 상태로 있었다는 뜻)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22:13) 하나님은 그가 자신이 죽어야 할 철두철미 죄인이라고 고백할 것까지, 사실은 성령이 그렇게 간섭하셨으니까,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대신할 어린 양 제물을 이미 준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삭을 제물로 받을 의사는 하나님께 처음부터 없었다는 뜻이므로 이 명령으로 잔인 냉혹한 분이라고 오판해선 안 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영적 죽음의 자리에까지 떨어트린 후에 다시 숯 양의 죽음과 바꾸어서 새 생명을 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죽으신 날, 예수님의 때를 그에게 보여주려는 명령이었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아브라함의 죄 없는 외아들 이삭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죄 없는 외아들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이삭 대신에 그 양이 죽임을 당한 것은 이삭은 물론 특별히 아브라함을 대신해 예수님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린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걸었던 하나님이 침묵하신 사흘 길은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흘간 장님이 된 체험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죗값을 당신의 죽음으로 갚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계셨던 기간으로 아브라함과 바울의 옛사람을 무덤에 장사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리안 산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보다 먼저 나시고(요8:58) 태초부터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예비 된 예수님이 그 현장에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양으로 새 생명을 얻고서 엄청난 감격과 기쁨에 휩싸이면서 그는 예수님의 때를 본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영안이 열려서 현장에 함께 하신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의 부패한 종 게하시의 눈을 열어 여호와의 천군 천사를 실제로 보게 하셨던 하나님이 이 사건에선 당신의 천사를 통해 진리의 말씀만 들려주었습니다.
그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이 철두철미 부패한 죄악의 덩어리임을 새삼 절감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길은 세상에 전혀 없고 오직 죽음만으로 그 죄를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신학적 교리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체계적으로 알 수 없어도 자신의 행위 공적 하나 없이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세상의 상속자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생생한 구원의 체험으로 다시 확신시킨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후손들이 그 언약을 준행하는 일에 실패했으나 때가 차매 원시 복음에서부터 약속했던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언약을 완성할 것입니다.
정말로 거듭난 신자는?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비추어 보면 자신 심령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채로 어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죄를 많이 지었다고 시인하는 정도로는 예수님의 때를 볼 수 없고 일반종교 아니 도덕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에 올라가 반드시 죽었어야만 하는 자가 바로 자신인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의롭다고 인정받아도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자신의 내면에서 추하고 역겨운 냄새만 올라온다는 사실을 실제로 처절하게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없었다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지옥 심판이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세상 사람들 사이에 인정받는 의인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야말로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죄의 덩어리라고 절감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교회 모임에서 간증 혹은 고백하는 교리적 나눔으론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완전히 발가벗겨진 자신의 실체가 너무나 추악하기에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절규여야 합니다.
성경에 이와 동일한 사건을 겪은 자가 또 있는데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알다시피 자기 원수인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고 범사에 기도하고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잠시 하나님을 멀리하자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나중에 그 충성스러운 부하마저 죽여버렸습니다. 그 불륜의 씨앗인 아들에게 하나님이 중병을 내리자 다윗은 성전에서 밤새도록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삼하12:15,16) 틀림없이 그도 정작 죽어 마땅한 죄인은 자기라고 고백하며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로운 영적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그를 살리고 죄 없는 그 아들을 대신 데려갔습니다. 그 아들은 다윗에게 새 생명을 주려는 여호와 이레의 양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일을 회상하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3,4) 자기 죄가 항상 자기 앞에 있다고 했으니 자기는 항상 죄의 뒤만 따라다니는 철두철미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주께만 범죄했다고 해서 그가 자기가 죽인 부하 우리야나 자기 때문에 죽은 그 아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죄들이 결국은 자신이 주를 멀리함으로써 생겼기에 죽음의 심판을 받을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서 자신의 구원과 심판을 주의 처분에 완전히 맡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시편의 후반에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합니다.(17절) 또 자기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한 끝에 구원의 은택을 입었다고 고백합니다.(10,11절) 다윗도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흔히 구약에서 기적을 베푸시는 큰 능력의 하나님만 찾으려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도 백 세에 아들을 얻은 은혜에 주목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정작 믿은 바는 살펴본 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자기 전부를 그분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인물도 사실상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사기꾼 야곱, 철없이 아버지 믿고 까불었던 요셉, 이방 족속의 왕자요 제사장의 사위로 인생 황금기를 보낸 살인자 모세 등 다 그러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큰일을 맡긴 주의 종이 아닙니다. 각자의 인생에 들어가 보면 모두가 하나님 외에 아무 소망이 없었으나 철두철미 낮아지고 깨어진 체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 복음으로 은혜 주지 않았으면 전부 지옥으로 떨어졌을 천하의 죄인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율법대로 따르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신하는 구약 유대인처럼 교회 생활을 성실히 행하므로 구원은 이미 확보했고 현실 복을 받는 일만 남았다는 신자들이 꽤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자를 마귀의 자식이라고 정죄하신 뜻을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던 자는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향이 이전과 정반대로 바뀌게 마련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삶을 통해 실현하면서 세상의 상속자가 되어 있고 또 그것 외에는 인생에 참 기쁨이 없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 솔직히 또 진지하게 질문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 가난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고 속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통곡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은 후에도 내 속에서 나오는 전부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15:19) 같은 것들 뿐이라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소망하면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3/1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