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조회 수 1227 추천 수 25 2013.03.08 02: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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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24:4-6)


시기심에 붙잡힌 사울이 장래에 자기 아들 요나단과 이스라엘 왕권을 다툴 경쟁자로 여긴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앞으로도 또 어떤 위급한 처지에 빠질지 알 수 없었던 다윗으로선 사울의 부하로 천부장이었고, 심지어 사위였음에도 기약 없는 피신 길에 나섰다.  

그런데 삼천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에 나선 사울이 마침 다윗 일행이 숨어 있는 굴로 “발을 가리러” - 용변을 보러 들어왔다.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므로 사울을 죽이자고 부추겼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십중팔구 부하들 말에 따랐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죽일 수 없다는 다윗의 믿음이 유난히 돋보이고 또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가 부하들 말을 듣고선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었다”는 점이다. 그도 처음에는 사울을 죽일 마음이 있었던가? 최소한 그런 유혹에 순간적으로 흔들렸던 것일까? 개인적 인연이 여러모로 걸려 그만 둔 것인가?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는데도 살려주었다는 도량을 보이고선 나중에 사울을 압박하려는 사전에 계산된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던가?    

성경에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없기에 섣불리 어느 경우에 해당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이런 상황에, 말하자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여겨질 정도로 모든 정황이 성공할 수밖에 없게끔 완벽해 보일 때에, 어떻게 결정하여 행동해야 할지에 관한 영적 원리는 추정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주변 여건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해야 옳은지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서 거의 모든 신자들이 간과해버리는 측면이 하나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확실한 징조 내지 기회라고 판단하려면 그전에 반드시 어떤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 문제를 가지고 그 때까지 하나님께 꾸준히 기도하고 있었든지, 최소한 성경과 연계해서 계속 묵상하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사건에 대입해 설명해보자. 다윗이 이런 완벽한 기회를 갖기 전에 사울을 죽이려고, 기도를 했다면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자 징조다. 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나도록 혹은 안전하게 지켜달라고만 기도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울에게 중병이 생기거나 나라에 더 위급한 일이 생겨 더 이상 자신을 쫓지 못하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잠시 스쳐지나갔을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가 표현하는 대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개입해달라는 바람이다. 그러나 자신이 편해지려고 사울과 나라를 어렵게 해달라고 기도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다윗에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쳐도 그의 성품상 곧바로 부인하고 회개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향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신자에게 알리길 원한다. 당신만의 방법으로 신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그 방식은 수 천, 수 만 가지다. 환경과 사람과 사건 등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통해 당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 있다. 신자는 항상 깨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자가 그분의 뜻을 최종적이면서도 가장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은 바로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다.

쉽게 말해 신자는 자기가 소원하고 계획하는 일들을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그 다음에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기도했던 제목들에 비추어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응답 혹은 응답을 위한 사전 징조라고 여겨지면 다시 성경 말씀에 합당한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묵상하여 얻은 깨달음이 당신의 뜻에 부합된다면 자기 안에 확신과 평강을 심어달라고 또 다시 기도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도 하지 않은 일을, 그것도 대박 같은 행운을 그냥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기도도, 묵상도, 고민도, 갈등도, 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 거저먹기 식의 은혜와 권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은 없다. 본문 같은 경우 다윗은 하나님이 왜 이런 완벽한 기회를 주었는지 오히려 고민해야 한다. 대박같이 풍성한데다 모든 사정에 빈틈이 없이 완전하다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다시 말하지만 다윗 본인조차 사울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줄 리는 없지 않는가?  

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부인하려는 태도다. 보이는 것 때문에 내면의 평강은 없어지고 대신에 의심과 걱정만 잔뜩 생겨서 믿음으로 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냥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하나님의 더(?) 심오한 뜻만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이 심해지면 그분의 뜻이 초자연적 신령한 방식을 통해 자신에게 분명하게 알려져야 한다고까지 기대한다. 나아가 겉으로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모습과 결과를 도출하지 않으면 아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간주해버린다.

또 다른 극단은 영적 원리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그 정반대의 경우다. 모든 보이는 것들 안에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 모두가 그분이 보여주시는 계시 내지 징조로 여기는 것이다. 다윗의 부하들의 예가 바로 그러하다. 왕인데도 부하를 한 명도 대동하지 않았고 용변을 보느라 전혀 반격할 틈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 잘못한 일 없이 억울하게 쫓겨 다니는 다윗을 보상해주려고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기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에 대해 내린 정의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전자의 극단은 보이는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고 본문을 해석한 셈이다. 후자의 극단은 보이는 것이 모두가 나타난 것 즉, 그 사안의 가시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만으로 되었기에 보이는 것 안에 하나님 뜻이 이미 다 들어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창조에 관한 설명이다. 나타난 것(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들)이 그 사물(보이는 것)의 창조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사람과 원숭이의 유전자가 아무리 거의 일치해도 즉, 과학으로 나타난 것을 정확히 분석했지만 진화는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는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 이루신 그분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조 이후의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도 만물의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운행 통치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범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철두철미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뜻과 인도를 구하라는 아주 기본적인 말씀이다. 일상생활에서 눈에 보이는 환경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관한 가르침은 아니다. 굳이 신자의 삶에 적용하자면 눈에 보이는 현상에 묶여서 그 뒤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계획, 은혜, 권능 등을 놓쳐선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보이지 않는 그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해서 나타난 현실을 100% 무시하라는 의미 또한 전혀 없다.

그럼 과연 신자가 보이는 것들을 얼마만큼 무시해야 하는가, 또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하는가? 우선 보이는 것에 관해선 이미 기도했던 제목들과 평소 묵상하고 고민하던 주제와 연결하라는 이 글 서두의 언급은 납득이 되고 그 적용도 비교적 용이할 것이다. 문제는 전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비상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다. 너무나 기가 막힌,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간, 여건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판단하기는 솔직히 쉽지 않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다윗은 사울을 죽이려고 기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모든 여건이 마치 사울을 없애라고 하나님이 마련해 준 것 같이 완벽했다. 다윗이 사울의 겉옷을 베었을 때의 구체적인 심정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울을 죽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말하자면 부하들에게 죽여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임기웅변으로 내건 명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에 다윗은 항상 생각해왔던 그대로 행동했다. 만약 그가 평소 살인을 그리 심각한 죄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다윗이라도 그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렇게 쉽게 무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이지는 않았어도 포승줄로 묶고선 부하들이 칼로 위협을 주는 가운데, 사울에게 앞으로는 다시 나를 쫓지 말아달라고 반은 경고 내지 위협, 반은 읍소 내지 간구를 했을 것이다. 이번 한번은 왕이자, 장인이기에 살려주지만 다음에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통보했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울이 옷자락이 베어지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다윗은 겉옷에 살짝 칼만 갖다 대었다. 나중에 다윗이 옷자락을 보이며 그 사실을 알리자 비로소 자신이 죽을 뻔하다 다윗의 자비로 살아났음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놀라고 고마워 사울은 본심과 달리, 어쩌면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다윗에게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라고 칭송했다. 심지어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20절)라고까지 말했다.

재차 강조하지만 다윗은 평소의 자기 소신대로 행동한 것이다. 부하들이, 아니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여길 만하고 설령 그를 죽였어도 아무도 다윗을 비방하지 않았을  상황이었음에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또 다윗의 평소 소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을 묵상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합하게 된 후에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을 저지른 그 때를 빼고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좌우되지 말라는 것이 단순히 환경을 부인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 보이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해서 매번 하나님의 뜻을 기도해서 말씀보고 분별할 수 있는 시간적 상황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본문의 경우도 시간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이었지 않는가? 이처럼 불시에 긴급하게 닥치는 경우에는 신자는 자신의 평소 신념과 인생관대로 행하면 된다. 또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신념과 인생관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이 바라는 방향으로 이미 바뀌어져 있는지 여부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에 항상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매사를 그분 중심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하나님이 원하시고 정해주는 방향으로 바꾸어서 그 방향으로만 걸어가고 있어야 한다. 그럼 모든 보이는 환경을 얼마든지 그 일관된 방향과 연합되게 분별 판단 결정 시행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가는 방향으로 자기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정한 자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기도해서 구할 필요도 사실은 없다. 이미 자기는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어떤 비상한 상황이 닥쳐도
자기가 지금껏 걸어온 길에서 돌이키거나 멈추지 않는다. 다윗이 본문처럼 대박 같은 행운이 통째로 굴러들어 와도 아무 미련과 주저함 없이 거부하였고, 그 반대로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는 말도 안 되는 비참한 처지에 빠졌어도 그를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아들의 안위를 염려했던 것같이 말이다.  

사울은 그를 두 번이나 죽이려 시도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막으셨다. 다윗은 그를 두 번이나 너무나 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어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기에 두 번 다 그를 살려주었다. 또 그래서 성경은 그의 전 생애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4,5)

3/7/2013


사라의 웃음

2013.03.08 22: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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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 다윗의 기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상황이로군요. 사울을 죽이고저 했더면 그때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 그러나 부하들의 간절한 바램도 권면도 무시할만한 다윗의 하나님 맘에 합한 기도가 꾸준했었던 것이였음을 배웁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지을 수 밖엔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벗겨주시고 지속 씻겨주시는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함을 또 배웁니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행하면 실패하기 쉬운, 다윗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두극단의 생각으로 자기 편한대로 행하고야 말터인데요…

말씀으로 배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또 깨달으며 하나님 맘을 조금씩 배워가는 신자로 살아가야함을 이 말씀을 읽으며 다시 맘을 추수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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