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서론
1. 감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오해
‐감정과 감정적인 것
대부분의 신자가 교회에서 지금껏 듣고 배워 온 것은 “감정은 신앙을 지키고 성숙시키는데 방해가 되는 나쁜 것이니까 통제 내지는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모든 사물을 영적으로 판단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무엇보다 우리말 어법(語法)이 항상 그렇듯이 너무 애매모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신앙을 키우려면 영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사실 영적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그 정의부터 따져보아야 하지만 본 주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나중에 따지기로 하자.) 그렇다면 신앙에 방해되는 것은 영적(靈的)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 예를 들어 경험적, 합리적, 도덕적, 종교적, 지성적,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어야 이치가 맞다.
그런데도 지금 감정 자체를 영적으로 판단하는 일과 동격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신앙의 반대어로 등장시켰다. 신앙의 반대는 불신앙이어야 한다. 따라서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신앙에 나쁘니까 하지 말라고 해야 그나마 어법상 맞는 표현이 되지 “감정은 나쁜 것”이라고 해선 안 된다.
감정은 어떤 일을 겪을 때에 인간 지정의에 의해 생겨지는 ‘느낌’인 반면에, 감정적인 것은 주로 그 생겨진 느낌에만 의존하여 반응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향’을 말한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성경은 돈 자체는 악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돈이 죄악이니까 신자는 아예 돈을 멀리 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나쁜 것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감정에 반응하는 태도인데도 마치 감정과 감정적인 것을 같은 것인 양 취급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단 보통의 평상적 감정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정도가 심한 격한 어떤 감정이 생기면,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따지지 않고, 무조건 신자로서 잘못하고 있다고 지레 판단해 버린다. 거의 자동적, 조건 반사적인 반응이다. 거기다 한국인들은 무엇이든 과하면 나쁘다는 유교의 “중용(中庸)의 도(道)”라는 가르침이 몸에 베여 있어 일단 과(過‐over)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5:32)라는 말씀을 든다. 좌와 우를 서로 대칭 되는 개념으로만 간단하게 생각해 마치 종교적인 열심을 너무 내서도 안 되고 적게 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예수를 그렇게 미친 듯 믿지 말고 적당히 믿어라고 권면까지 한다.
이 말씀의 뜻은 신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사는 오직 하나의 길, 즉 똑 바로 곧은 정로(正路)만 있는데 그것을 좌든 우든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다. 좌든 우든 정로가 아니긴 마찬가지다. 구태여 율법과 연관시켜 비유하자면 무엇을 하라고 하는 데도 하지 않는 것,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하는 것이 각각 좌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에게 미쳐라.
감정의 통제에 관해 널리 오해를 하는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또 있다. 그런데 앞의 예와는 정 반대로 이해되지만 잘못 해석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경고한 말씀이다. 차든지 덥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하니까 교회 생활을 하면서 아주 열정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또 지성적으로는 냉정하게 교리를 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씀은 당시의 라오디게아의 식수 사정에 빗댄 비유다.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공급 받은 찬 물이 길다란 수로를 거쳐 오는 과정에서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그 물을 토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더운 것은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염두에 둔 비유다. 즉 물이란 골로새의 찬물처럼 차든지,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처럼 덥든지 해야 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그 중간인 미지근한 물은 아무 짝에도 못쓴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가 수로를 통해 온 미지근한 물 같다는 것이다. 차든지 덥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그들의 믿음이 미지근해져 실제 삶에서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해 전혀 그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다.
이어지는 17절 말씀에 그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 양” 생각한다고 지적했듯이 어떤 영적 각성이나 부흥을 이루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단순히 의무적, 습관적으로 형식적 신앙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외적으로 풍요할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오히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다”고 야단을 맞은 것이다.
또 이 말씀은 신자란 더워야 할 때는 반드시 더워야 하고 찰 때는 반드시 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그야말로 온천수처럼 뜨겁게 하고 세상의 죄악과 악한 세력, 나아가 자신의 잘못과 나태한 신앙에 대해선 얼음장 같이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의 도를 지켜 적당히 믿어라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신구약 공히 화끈하게 믿어라고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예수를 믿음에 적당히 믿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 분께 완전히 미쳐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회색적인 신앙은 기독교에선 없다. 세상 사람의 눈에 광신도 아니 맹신도처럼 보여도 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모든 피를 쏟고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며 주위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물론 불신자를 대할 때에 바울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8)고 고백한 대로 그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에 미치라고 해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언제든 아무데서나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법도대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지성에 맞추어 교제하고 예수를 증거 해야 한다.
신자가 미치고 뜨겁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은 우리의 심령과 중심이지 태도와 형식과 말이 아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성령으로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옛 사람이 죽었다 거듭 태어난 새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분께 안 미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면 그 분을 위해 얼마든지 자기 인생을 불태울 수 있고 또 그렇게 된다.
‐경건한 신앙의 본질
중용의 도에 익숙하다 보니까 경건에 대해서도 잘못 인식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겉으로 화를 내지 않으며 죄악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체신머리 없어 보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경건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자가 너무 큰 소리로 떠들면서 웃거나, 혹은 눈물 콧물 흘리며 울부짖으면 아주 잘못하는 줄 안다. 심지어 세속적인 농담이나 유머를 나누면 불경건을 떠나 죄를 지은 양 따돌림 마저 당한다. 항상 고상하고 온유하고 잔잔한 미소를 띄면서 말투도 사근사근하게 해야 경건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쉽게 잘 울거나 화를 내는 것은 신자가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성격이나 기질에 관한 문제이지 결코 죄냐 아니냐의 문제로 따질 성질이 아니다. 최대한 양보하여 약점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만 그렇다. 그 말은 경우에 따라 오히려 장점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운의 선지자 에레미야는 곧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동족의 비참한 운명이 너무 안타까워 눈물이 마를 여가가 없었고 오죽하면 애가(哀歌)마저 기록했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나면 그전과 비교해 확실하게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는데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우선 자신의 심령이 가난한 상태를 깨닫고 애통해진다.(마5:3,4) 또 동료 성도가 환난 가운데 궁핍한 형편과 눌려 있는 심령을 보면 너무나 불쌍해진다. 나아가 사단에 그 영이 미혹되어 예수를 외면하고 있는 자들을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기도하며 잘 우는 자가 경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되어서도 잘 울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경건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경건이 얼마나 고상한 상태를 유지하느냐의 싸움에 불과하다면 시편 기자들의 그 처절한 간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시88:1,6,10) 주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구원의 약속이나 응답이 없어 나중에는 심지어 “죽고 나면 하나님 할 일도 없고 저도 당신을 찬양할 수 없지 않느냐?”고 떼를 쓰며 불만 섞인 절규를 토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고 약속하셨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상한 태도를 흐트러지지 않는 자와 울면서 부르짖는 자 둘 중 누구에게 가까이 있으며 또 누구를 경건하다고 하겠는가? 벌써 마음이 상했고, 중심에 통회한다는 것 자체가 감정이 평상적 상태를 넘어 아주 격해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것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가득 차 있는 상태다.
경건한 신앙이란 오히려 우리의 감정 상태를, 비록 그것이 아주 격해 있던 부정적이든 심지어 시험과 죄에 빠져 있든, 있는 그대로 유지한 채 하나님 앞에 몽땅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 아니 원수 되었을 때에 당신께서 그 모든 죄와 허물을 감당하시고 대속해 주셨듯이 구원 이후에도 언제 어디에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나와 오직 그분의 긍휼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신자에게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간섭으로 그 마음 속에 눌려 있던 영에 새 생명이 되살아 난다. 감정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제 자리를 찾을 때에 격해졌던 감정이 온유해지고,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으로, 시험과 죄로 향하던 것이 거룩과 의의 옷을 입게 된다.
그래서 진정 경건한 신자란 세상 사람과 비교해 인간과 인생을 감지하는 느낌과 또 그에 반응하는 태도가 다른 자다. 신자가 감정을 더 고상하고도 차분하게 절제할 줄 안다는 뜻이 아니다. 알기 쉽게 말해 예수 믿기 전에 자기 아내, 남편, 자녀, 이웃, 동료, 대적 등을 바라 볼 때의 느낌과 믿고 난 후에 그들에 대해 갖는 느낌이 180도로 달라지는 것이 경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감정은 나쁜 것이 결코 아니다. 또 감정적인 것도 죄거나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분노, 짜증, 질투, 염려, 눌림 같은 부정적 감정이 드는 것마저도 그렇다. 예수님도 우셨고, 염려하고 두려워 했으며, 한탄했고 심지어 분노를 불 같이 토해 내었다. 이제 그 감정에 대한 우리의 모순된 인식과 잘못된 대응 방법을 하나하나 고쳐 나가 보기로 하자.
그전에 먼저 스스로 자문해 보라. 내가 감정적인 사람인가? 절대 실망하지 말라. 오히려 신앙을 한 차원 더 높일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갖춘 것이다. 대신에 나는 과연 경건한 사람인가 아닌가? 울며 불며 주님 앞에 엎드리는가 아니면 교회 안에서 아주 인품이 고상하다고 누구에게나 존경 받고 있는가 말이다? 만약 후자라면 절대 자신을 경건하다고 섣불리 평가하지 말라. 그것 만큼 큰 착각은 없다. 통회하는 심령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중심이 없다면 아직 경건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여전히 감정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