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감정의 본질
전장에서 감정은 죄가 되거나 나쁜 것이 결코 아니며 심지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마저도 경우에 따라선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과연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따져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감정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이기에 나쁘지 않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gift)
감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 감정을 갖고 있고 나아가 감정적인 분이기도 하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한 후에 특별히 인간을 만드신 후 심히 좋아하셨다. 아담과 함께 에덴 동산을 다스릴 때에 너무나 신이 났다. 또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어 그의 배필로 삼아주는 최초의 결혼식을 주례했을 때는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아직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이라 아담과 이브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피차 하나 감출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아담이 범죄하여 숨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간절히 찾으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 이후 그분은 단 한번도 아담의 후예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놓은 적이 없다. 그 백성이 겸비해지면 축복을 주시다가 죄가 관영하여 인내의 한계에 이르시면 심판하시기를 되풀이 하셨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9) 단 한 순간도 인간을 향한 불타는 긍휼을 버리지 않으셨다.
급기야는 불 타는 긍휼이 넘치다 못해 당신 자신을 태우기로 작정하셨다.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죄악과 사단과 사망 아래 눌려 신음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고통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요19:30)는 한마디 신음과 함께 아담 이후 처음으로 한 숨을 돌리셨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의 속은 십자가로 나오지 않는 영혼들을 향한 긍휼로 불타 오르고 있다.
하나님은 감정이 충만하신 분이다. 나아가 모든 일을 감정대로만 행하신다. 완전히 100% 감정적인 분이다.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그분에게 감정과 지성과 의지가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되게 작동할 수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분히,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감정적인 분이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똑 같이 지정의가 있으며 그분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어졌다. 그분의 속성을 지성과 의지 뿐 아니라 감정도 온전한 선물로 받았다. 말하자면 인간도 감정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지정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두 말 할 것 없이 죄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는 비록 잠시이지만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처럼 감정적으로 100% 완벽한 상태였다.
감정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감정 자체는 원래 선하게 의도된 것이며 또한 감정을 인간에게 부여한 데는 그분만의 선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다름 아니라 인격자이신 그분이 인간도 인격적으로 만들어 함께 인격적 교제를 나누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감정이 충만하지 않고 어떻게 찬송을 부르겠는가? 그것도 선하고 의로운 감정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감정에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는 예컨대 심지어 분노 안에도 당신의 선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세상에 분노할 일이 있을 테니까 분노하라는 것이다. 더럽고 추한 죄악들에 분노해야 한다. 부정, 부패, 불공평, 테러, 음란, 퇴폐, 사기, 거짓 등등 화를 터트려야 할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뒤집어 말하면 반드시 분노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절대 분노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꼭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해선 안 될 일에 분노하는 것은 감정을 잘못 다스린 것이다. 이 구별을 잘 하면, 즉 분노도 하나님의 원래 의도한 바 대로 제대로만 터트리면 바로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감정적인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단 한번도 분노하지 않으신 적이 없다. 비록 징계를 미루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긴 하셨지만 말이다.
사춘기 아들이 공부도 안 하고 갱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데도 화를 내지 않는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격이 전혀 없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아내가 신자이니까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해야지, 원수라도 사랑해야지, 남편에게 순종해야지 하면서 분노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아들과 남편의 잘못된 행동에는 불같이 분노하되 그 당사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자꾸 이 순서를 바꾸거나 아무 구별 없이 혼동하여 반응하니까 힘들게 된다. “사내 자식이 어렸을 때 좀 별나게 놀 수도 있지” 혹은 “남자가 한 두 번 바람 피울 수도 있지 뭐!” 식으로 겉으로는 아주 관대한 것처럼 얼버무리면서도 정작 본인을 보면 미워 죽을 지경이다. 차라리 함께 끝까지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이 낫다. 단 서로 잘못된 죄악에 대해서만은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해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면 결코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당신 생명과 맞바꾸면서까지 용서하시되 그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였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주님처럼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쳐 가며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하라는 뜻 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와 죄인을 구별하여 취급했듯이 아내의 허물과 잘못을 아내 본인과 구분해서 대하라는 것이다.
분노가 하나님의 선물로 선한 의도가 있듯이, 심지어 신경질, 짜증, 초조, 불안도 그렇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이런 감정들도 분명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한 마디로 어떤 일에 대한 조심하라는 경고다. 준비 상태를 재 점검하거나, 계획을 수정하거나, 혹시 잘못이 있는지 반성하거나, 잠시 물러나 관망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라면 그럴 때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자기 믿음과 연결 시켜서 더 확실한 인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결국 어떤 감정이라도, 우리 느낌에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것은 없으며 반드시 나름대로 그분의 선한 목적이 각 감정마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기분이 나빠지고 눌리며 당황 되어 도저히 어쩔 줄 모르게 된다고 해서 무조건 그런 감정 자체가 잘못 된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지어선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불쏘시개를 지고서 불 섶으로 뛰어드는 행위나 다름 없다. 감정은 무조건 나쁘다고 판단하는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부정적인 올가미를 더 많이 덮어 쓰려는 짓이다. 올가미란 항상 말려들면 들수록 헤어나오기 힘든 법이지 않는가?
‐살아 있는 증거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다. 그것도 이미 살펴본 대로 지정의가 다 함께 조화롭게 작동하도록 만드셨다. 반면에 어떤 종교에선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소유(無所有)를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친다. 감정에 전혀 좌우되지 않아 매사를 달관하고 초월자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말하자면 감정을 완전히 죽이는 데 의지적 노력을 전부 경주하는 셈이다. (무념은 감정적 측면, 무상은 지성적 측면, 무소유는 의지적 측면이라고 본다면 심지어 지정의 자체를 없애거나 전혀 작동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정의 중에서 하나 내지 전부가 완전히 빠진 인간을 목표로 한다는 것과 같다.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살아도 죽은 것과 방불한 시체다. 분노가, 그런 감정이 든 상황과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 없이, 그 자체로서 인간이 살아 있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가 되지 않는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면 자연적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감정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웃지도 울지도 않는 법이다.
온갖 죄악이 만연하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부조리가 판치고 있는데, 이웃이 굶어 헐벗고 있는데, 그래서 어린이나 노약자들이 억울하게 죽어 가는데도 아무 감각이 생기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라. 백번 양보하여 그런 악한 일은 일부러라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 준다 치자. 그러나 정말 즐겁고 신나는 일이 생겼는데도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의 느낌은 어떨까? 또 그런 자를 주위에 가까운 사람으로 두고 있다면 두 번 다시 그 사람을 상종이라도 하고 싶겠는가?
하나님은 동물도 비록 그 수준은 아주 낮아도 지정의를 주셨다. 그런데 인간은 아이큐 세 자리인데 동물은 한자리 내지 두 자리라고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된다. 동물은 지정의가 오직 본능에 따라 작동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배 고프면 허기지고, 짝 지을 상대를 두고 경쟁자가 나타나면 분노가 끓어 오르고, 자기 새끼를 잃으면 슬퍼진다.(삼상6장의 벳세마스의 젖 안 뗀 암소의 예)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 외의 목적으로 동물이 그 지정의를 작동시키는 법은 결코 없다.
인간은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당신의 목적대로 이 피조세계를 거룩하게 변화시킬 책임을 진 존재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물어 그 뜻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만은 만물 중에 유일하게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 말은 인간의 내면에는 지정의(혼‐soul) 외에도 영(spirit)이 있다는 뜻이다.(지금 인간을 이분법 혹은 삼분법으로 나누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주제와 상관 없으므로 일단 보류해 두자.)
반면에 동물은 하나님과 교통할 영이 없다. 동물은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므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외부 세계에서 오는 자극에 대해 오직 본능에 따라 감정이 생기고 또 그 본능 대로 처리 한다. 한마디로 동물의 경우 감정의 발생 근원, 작동 원리, 처리 결과에 본능 외에 어떤 것도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교통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그 지정의의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하나님이 영을 별도로 주신 이유는 지정의를 외부 자극에 따라 작동시키지 말고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작동시키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 그 영이 충만해지면 지정의도 올바르게 균형이 잡히고 제대로 절제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자극대로만 지정의가 작동되도록 방치하면 그 때는 정말 동물과 그 ‘수준’(level)에선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똑 같은 ‘종류’(kind)의 피조물이 된다. 말하자면 아무리 인간이 온갖 산해진미와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을 만들 수 있어도, 결국 먹고 마시는 것만 밝힌다는 본질적 수준에선 동물과 도토리 키재기란 뜻이다. 바로 불신자들의 경우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 당신을 찬양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바뀐 존재와 보호 받고 있는 삶과 당신의 영광으로 이끌림을 받는 일생에 대해 감사하며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정말 교회에 모여 박수 치며 즐겁게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보라. 이웃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겨보라. 아내와 남편을 주께 하듯 대해보라. 자녀를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하는 일군으로 변화시켜 보아라. 그것만큼 세상에 큰 기쁨이 없다. 또 예수를 믿지 않는 영혼에 복음을 전하고 그 인생이 뒤집어지며 주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라.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이 땅에는 없다.
감정을 무조건 죽이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수명을 줄여 나가는 어리석은 짓과 다름 없다. 심하게 말해 자살 행위다. 하나님 안에서 감정을 주신 그분의 선한 목적대로 바르게 절제되고 표출되는 감정 만큼 인간에게 생기를 넘치게 하는 것은 없다. 또 감정이 선하게 표출 될 때에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인정할 것이며 본인도 삶의 참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인간을 참 인간답게 하는 수단
흔히 허물이 없고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미가 없다고 말한다. 대개 그런 사람은 감정 조차 극도로 자제해서 소위 방정맞은 짓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흠이라고는 없고 선한 일만 하는데도 아무도 그 곁에 가려고 하지 않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다. 결점이 없는 것이 자기와 비교가 되어서도 그렇지만 상대가 감정 표현이 너무 없어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자연히 접근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감정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은 감정을 즐겨라는 뜻이다. 그 말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분노와 염려도 선한 목적이 있음을 보았는데 분노가 표출되지 않으면 분노로서 의미가 없다. 죄악과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직 감성(emotion)이 되지 않고 여전히 본인의 느낌(feeling) 단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라는 것은 결국 인간끼리 드러내라는 것이다. 때로는 동식물에게 감정을 쏟아 붓거나 혼자서 삭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감정을 대하는 근본 원리가 아니다. 인간으로 인해 생긴 감정은 인간끼리 표현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 표현이 없으면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예가 짝사랑이지 않는가? 아무리 속에는 불같이 타오르는 열정이 있어도 막상 상대를 만나면 숨어버리고 그 상대로선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혹시라도 자기의 가슴 속에 비밀스레 간직한 사랑이 오히려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까지는 좋다. 그래도 감정 표현이 없기에 아무 진척이 이뤄지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은 있어도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동정, 애통, 긍휼, 자비, 애정 등은 인간 관계를 올바르게 시작할 수 있는 근거이자 시발점이 된다. 심지어 미움, 저주, 분노, 시기, 질투도 제대로 반응하면 얼마든지 참 사랑으로 반전 내지 승화시킬 수 있다. 애증(愛憎)은 동전의 양면이자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 마디로 감정이 없이는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참 사랑도 할 수 없다. 결국 감정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요일4:7,8)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에 당신을 닮게 만드셨다. 인간도 범죄 이전에는 그 가장 중요한 속성이 사랑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결혼이 그 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정을 선물로 주신 본질적인 이유는 공동체를 당신의 사랑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유일한 윤활유 역할을 한다. 말을 바꾸자면 신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아주 즐겁고도 신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쾌락이나 유흥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쁘고도 아름답게 교제 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이란 매개체를 통해 참 사랑이 그 공동체 안에 끊임 없이 공급되어지기 때문이다. 신자란 다른 사람들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반응하고, 교통하며, 교제하고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자이며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라도 교회다.
엄격한 가훈을 걸어 놓고 율법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가정을 보라. 곧게 자랄지는 몰라도 기쁨이 없이 딱딱하기만 하다.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자유 방임 주의로 키우는 가정을 보라. 그저 놀기만 하는 나이트 크럽식의 즐거움은 있을지 몰라도 참 기쁨은 없다. 감정이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이성만 강요하거나, 혹은 이성은 생략하고 감정만 강조해선 참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감정을 서로 나누라는 것은 교차되는 감정이 쌍방 간에 균질(均質)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만 보고 나이 많은 갑부에게 시집간 젊은 여자는 날마다 얼마나 애교가 넘치는 감정을 표현하겠는가? 그러나 그 속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다. 나아가 노인과 젊은 아내가 주고 받는 감정에는 질적, 양적으로 너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전혀 감정이 서로 교통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끼리 모이는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로 자리 매김을 하려면 그 구성원끼리 서로 참사랑을 나눠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 말고는 인간을 참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곳은 없다. 세상의 도성 가운데 하나님의 도성을 꾸밀 책임이 신자에게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감정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다. 혼자서 아무리 똑똑하고 거룩해도 무인도에 혼자만 살고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참 사랑으로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만이 인간이 참 인간다워진다. 감정은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본질적인 근거이자 아주 강력한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