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교습 중에 이혼하는 부부
흔히들 주부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에 절대 남편에게는 배우지 말라고 당부한다. 길거리 실습을 하다가 심심찮게 위험한 경우를 겪기에 견디다 못한 남편이 평소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불같이 화를 내고 핀잔을 주게 된다. 남편으로선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경고를 준 것이다. 그런데다 아내의 운동 신경이나 교통 상식이 너무 둔한 것을 보고 자기 마누라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되는가 싶어 본의 아니게 신경질도 부리게 된다.
반면에 여자는 본성적으로 남자들과는 달리 기계의 원리나 작동법에 익숙하지 못하고 교통 상황을 전체적으로 멀리 보지 못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도 남편이 화부터 내고 인격적인 모독마저 주니 도대체 말도 안되고 통이 형편없이 좁은 꽁생원처럼 보인다. 그래서 다투다 차에서 내려 버리고 심하면 이혼까지 간다.
두 사람 다 상대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직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사로 잡혀버린 것이다. 이처럼 감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칫 고삐 풀린 망아지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모든 주위 상황을 무시하고 질주해버리게 만든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도저히 되 담을래야 담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러자니 또 다시 자기 감정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
감정이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좋은 것이라 해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하면 항상 낭패가 따른다. 마음 속 깊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남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본인의 인격이나 품성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난히 스스로 자책을 많이 하거나, 남들과 만나기를 아예 꺼려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쉽게 신경질을 내는 등, 사람마다 경우마다 다르지만 삶과 인생에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감정상의 찌끼들이 잘 제거되지 못하고 계속 쌓이면 심정적으로 괴로운 것을 넘어서 죄악에 빠지게 되고 주위 사람에게도 아주 나쁜 영향력을 끼친다. 심하면 후대에까지 그렇다. 자식들이 부모의 잘못된 감정 처리의 희생이 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나쁜 감정들이 인격과 품성에 고착화되고 또 그것이 자식에게 유전인자를 통해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최근 연구에 행복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부모가 감정을 항상 좋게 유지하면 그 자식도 행복해질 수 있다.
한 마디로 감정의 절제는 인생의 행불행 및 성공과 실패에 너무나 큰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실패한 후에 한결같이 “그 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혹은 “그 쓸데 없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등의 한탄을 하지 않는가?
결과적으로 인생살이의 모든 문제가 감정을 잘 절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 같고 감정만 잘 통제하면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무슨 일이든 잘 처리해 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조건 감정을 죽이려고만 한다. 이 또한 감정 처리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일 뿐 결코 이성적 대응이 아니다. 감정이 모든 것을 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지 진짜 실패의 원인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분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해야 한다.
사람들은 절제라는 말 자체를 오해하고 있다. 무조건 눌려서 겉으로 감정이 표출 되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것은 통제(統制) 혹은 억압(抑壓)이다. 절제(節制)란 말 그대로 적절하게 콘트롤 한다는 것이다. 감정은 절제해야지 통제 내지 억압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감정을 일단 억압부터 하려는 이유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해 큰 낭패를 보았다”는 막심한 후회감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 실패한 주범(主犯)은 감정을 절제 못한 본인이지 감정이 아니다. 그런데도 애꿎은 감정에만 모든 핑계와 과오를 다 덮어쒸운다.
인간은 그 본성이 감정적인 동물이다.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신 뜻 가운데 하나는 감정의 표출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감정을 주시고 표출하라고 의지까지 주신 것은 당연히 하나님 당신을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감정이 완전히 억압되어 표출 안 되면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방법이 없다는 말과 같아진다.
나아가 인간이 아무리 감정을 통제하려 들어도 100% 완벽하게 억압할 수 없다. 자기 본성에 반해 억압하려 애쓰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도 반드시 남들이 알 수 있도록 감정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완전한 포커페이스는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생기는 대로 하나의 가감 없이 100%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도 없다. 당장에 미치거나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는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한 이웃의 감정도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는 관계이지만 사실은 다들 조금씩 모자라는 이웃이다. 연약하고 유한하며 죄성이 펄펄 살아 있는 이웃이다. 서로가 감정으로 인해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개연성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있다는 뜻이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서로 사랑할 이유나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세상에 죄라는 세력이 있는 한 어떤 인간도 감정을 100% 완벽하게 표출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만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창2:25) 즉 감정을 있는 그대로 100% 표출해도 서로 상처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감정을 절제해야만 한다
흔히 감정은 발생하는 그때마다 즉시 겉으로 드러내버리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도 좋고 속에 쌓아두면 해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만도 않다. 겉으로 표출 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속에 쌓이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상황은 반대가 되지 않겠는가? 언뜻 보기에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비교적 감정 처리에 자유로워 오래 살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고혈압으로 일찍 죽는 경우도 많다. 신체적 특성과 감정적인 특성의 연관 및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는 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섬세한 자도 얼마든지 건강할 수 있는 법이다.
‐절제의 원칙
감정을 겉으로 많이 죽이면 속에는 적게 남게 마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절제란 겉으로 일부 표출하고 속에도 일부 남기는 것이므로 외부로 분출되는 감정의 질과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감정을, 얼마만큼, 언제, 어느 장소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그 여분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감정의 절제다.
흔히 나쁜 감정은 밖으로 표출해 버리고 속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한다.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속에 나쁜 감정이 쌓이지 않는다는 면에선 맞지만, 나쁜 감정이 표출되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면 그 피해자만 나빠질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또 다른 죄책감이 생기고 또 나빠진 관계의 여파가 새로운 나쁜 감정을 야기한다.
따라서 감정 절제의 원칙은 겉으로 표출하는 것도, 속에 남기는 것도 둘 다 좋은 것이어야만 한다. 그럼 당장에 나쁜 감정은 어떻게 처리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너무 간단한 문제다. 나쁜 감정은 겉으로 표출도 하지 말고, 속에 남기지도 말고 없애야만 한다. 문제는 나쁜 감정을 없애는 방법을 모르고 또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서 자꾸 나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따라서 감정을 하나님의 원리에 따라 처리하면 없앨 것은 쉽게 없어지고 키워야 할 것은 얼마든지 더 키울 수 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슬픔이란 분명 부정적 감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이 감정을 주신 근본 목적대로 서로 위로하는 방식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긍정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도 감정상의 문제로 온갖 상처를 주고 받는다. 심지어 원수가 되어 외면하고 그 사람 때문에 교회를 옮기거나 신앙마저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를 교회로 부른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완전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로 불완전한 사람끼리 모여 깎이고 다듬어지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란 본질상 상처를 주고 받게 마련이므로 그런 속에서 자라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끼리 감정 상의 상처로 교회를 외면하면 서로 마주쳐서 낭패되는 꼴은 면하겠지만 자랄 수가 없어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감정이 처리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두 사람간에 끝까지 앙금이 남고 나중에 자신의 삶에도 알게 모르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12:22‐25)
교회 안에 약한 지체를 돌보아야 한다고 너무 고상하고 거룩하게 사랑으로 섬기려 들 필요는 없다. 최소한 교회란 당연히 상처를 주고 받는 곳이고, 상대가 나의 감정을 잘못 건드리듯이 나 또한 상대에게 그럴 수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정하면 된다. 요컨대 모든 성도가 심지어 목회자도 연약한 지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고 그것을 감정 처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나쁜 감정이 생겨도 없애거나 무시하려는 시도가 훨씬 쉬워진다.
불신자 남편과 사는 아내들이 많다. 이때는 당연히 불신자 남편이 연약한 지체다. 감정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신자 아내가 감정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잘 처리해야 한다. 남편이 남자니까 더 의젓하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잘 리드해주길 바라선 안 된다. 왜냐하면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는 아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남편은 감정 처리를 오직 인간적 판단과 기분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인간이란 절대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허물과 약점 투성이이다.
결국 감정을 제대로 절제하는 길은 좋은 감정만 표출하고, 좋은 감정만 속에 남겨야 하며, 나쁜 감정은 다 없애야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더러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보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심지어 환난 중에도 기뻐하라고 한다. 이 모든 말씀들이 특별히 종교적, 윤리적, 영적 계명이라기보다는 따지고 보면 감정을 잘 다스려 좋은 감정만 간직하라는 뜻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일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감정이 복받칠 때에 기도만 하면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갑자기 마음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감정 처리를 하나님의 원리대로 잘하여 나쁜 감정이 원천적으로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감정의 특성을 좀더 세밀하고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 뜻에서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우선 살펴 보기로 하자.
왠지 전에 없이 감정이 푸석해지다 못해 목석이 되어지는 것 같은
이상함을 발견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의 사랑으로 제 속의 모든 나쁜감정들이 뽑혀져
나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