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말게 하라”(엡4:26,27)
‐화를 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역으로 말해 분을 내어도 얼마든지 죄를 안 짓는 경우도 있으며 나아가 분을 내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서 “… 하지 말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했지만 “분을 내어도”라고 명시적으로 허용했다. 결국 분을 내기는 내되 절제를 잘못하면 죄로 변하고 또 역으로 잘하면 분노도 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감정 처리를 빨리 해치우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해가 지도록”이라는 말은 죄로 연결되고 마귀에게 틈을 내주기까지 계속해서 분을 품고 있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식어일 뿐이다. 낮에는 싫컷 화를 내다가 저녁에 누워 잘 때에는 화를 진정시켜라는 의미가 아니지 않는가?
구태여 시간으로 따져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낮 동안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작 본인이 집중해야 할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감정을 절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죄나 잘못된 결과로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죄나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자의 감정 처리의 원칙이지 얼마나 오래 동안 그 감정을 지속하느냐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좋은 일이 생겨 기뻐지면 낮 동안 일터에서, 퇴근 후 집에서, 저녁에 누워 잘 때까지, 아니 며칠이고 가능한 오래 그 감정을 유지하고 싶지 않은가? 또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는가?
‐분을 받아 주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분을 낸다는 것은 반드시 그 분을 받아 주는 대상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물건이라면 크게 문제 삼을 거리가 안 된다. 어떤 유명 배우가 도저히 자기 분에 못 이겨 한강 고수 부지에서 차를 완전히 부셔버렸다고 했다. 자기 재산을 자기 기분 풀이로 없애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변심한 애인에게 화가 나서 직접 복수는 하지 못해서 그랬다고 하니 오히려 잘한 일일 수 있다. 물론 신자의 경우는 항상 근검절약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물질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분을 푸는 상대가 사람이라면 분을 내어 죄를 짓고 사단의 꾐에 넘어가는 것은 그 상대에게 분을 잘못 표출했다는 뜻이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그 분을 받아 주어야 할 사람이 잘 받아주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엉뚱한 사람에게 분풀이하면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러나 분이 상대방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일단 어떤 사람에게 분이 났다는 것은, 잘잘못이 아직 정확하게 누구에게 있는지 불명해도, 어쨌든 상대에 대해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상대가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화를 내는 사람으로선 상대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감정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자기 잘못을 확실히 인정한다면 모르지만, 영문도 모르고 당하거나 별로 화낼 일이 아니다 싶은데 화를 낸다고 느끼면 서로 감정이 격앙되어 분이 분을 부르며 싸움으로 번진다.
감정이란 이처럼 항상 인간관계에서 교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혼자서 일방적으로 다스리려 한다고 제대로 절제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함께 잘 풀어야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말하자면 감정에는 누구나 죄에 빠지기 쉬운 요소가 이미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감정을 잘 절제하기보다 실패한 경험이 훨씬 많고 또 그래서 감정은 일단 억누르려는 성향을 갖게 된다.
억누른다는 것은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속으로 눌려져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둘 중 하나다. 속으로 곪아 터지든지 아니면 다른 엉뚱한 방향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마치 풍선을 사방에서 동시에 힘을 주어 누르면 터져버리고 또 한쪽으로만 누르면 다른 쪽으로 불쑥 솟아나듯이 말이다. 풍선 안에 들어 있는 공기의 양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사람끼리의 관계에서 생긴 것이라 반드시 그 감정이 발생한 관계 안에서 제대로 처리되어야만 한다. 분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분을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되 양 당사자가 제대로 만족할 정도로 절제되어 질 때만이 죄를 안 짓게 된다.
상호 간의 관계에서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몇 가지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감정의 질과 양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상호 작용이라 두 사람이 다 갖고 있다. 또 그 감정을 간직하는 기간도 각기 길고 짧을 수 있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함께 공유하고 있다. 또 그 감정을 처리하고자 하는 방법과 상황을 각기 다르게 상정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어떤 계기가 되었든 그 동안 간직했던 감정을 함께 나누고 처리하고자 하는 소원은 각기 갖고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감정의 질과 양과 간직한 기간과 처리하는 방법이 같아진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에선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다.
그럼 결국 누군가에게 혹은 쌍방에 조금씩 앙금이 남게 된다. 그래서 감정 처리는 이차에 걸쳐서 하게 된다. 일차 처리가 잘 안되면 때때로 서로 속을 털어 놓고 그 조금씩 남은 앙금마저 반드시 씻어내며 서로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간혹 주위 제 삼자의 도움을 받든지 심지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 두 사람이 진지하고 격의 없는 대화로 풀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수는 없다.
‐신자끼리 결혼해라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신자는 가능한 신자끼리 결혼해야 한다. 신자가 불신자보다 인격적 도덕적으로 성숙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이 같아졌기 때문에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말 힘들 때는 서로 혹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인간 관계 안에서만 발생한다는 사실은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또한 . 그 관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두 당사자끼리만 해결하라는 뜻이 아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부부끼리 화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부부관계를 잘 이끌어 보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부부끼리 운전 교습 중에 화를 내고 이혼하는 것도 출발은 아내에게 운전을 잘 교습 시키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처음부터 싸우고 헤어지려고 작정하여 시작하는 부부는 없다. 그런데도 운전은 둘째 치고 이혼으로 끝이 나면 결국 빈대 잡으려다 초가를 태운 격이 되었다.
따라서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가 탈 기미가 보이면 일단은 빈대 잡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정은 마치 기름에 성냥을 그어대는 것과 같아서 조그만 계기로도 촉발되기 마련이다. 특별히 화, 시기, 질투, 염려, 공포 같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 감정은 더 그렇다. 그럴 때는 잠시 냉각기를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펄펄 끓는 열기를 조금 삭히면 성냥 불로 그어대도 쉽게 다시 불붙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 관계에서 발생한 감정을 처리하려다 그 관계마저 손상이 간다면 과연 그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부터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한창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그렇게 냉정하게 관계를 되돌아 볼 여유가 있는 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 감정 처리는 어지간한 성자,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정말로 골치 아픈 딜레마가 된다.
그래서 감정을 관계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은 결국 평소부터 그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관계든 당사자간에 가슴을 털어 놓고 대화를 해 나가는 습관을 갖추어 감정 처리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상대의 기분을 존중하며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항상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떤 난관과 방해가 닥쳐도 아름답고도 귀하게 가꾸겠다는 각오와 헌신을 평소 때부터 갖고 있어라는 것이다.
감정이란 하나님이 인간 관계의 윤활유로 주신 선물이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를 잘 맺어라는 목적으로 인간에게만 아주 다양한 감정과 또 그것을 절제할 수 있는 의지까지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정을 서로 사랑하는 방도 외에 표출한다면 죄에 빠지거나 사단에 넘어갈 수 밖에 더 있겠는가? 한 마디로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는 방법으로 감정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감정을 표출 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표출의 대상이 되어 받아 주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뜻이 바로 이 것이다. 서로 간에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 각오가 가장 먼저 되어 있어야 한다. 부부, 부모와 자식, 이웃, 직장 동료, 사회의 어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울 사도가 본문에 이어서 부부, 부모 자식, 상전과 종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로 비유하여 주께 대하듯 하라고 권면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1,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며…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5,9)
당사자들 양쪽 모두에게 같은 내용으로 권면하고 있다. 주고 받는 감정이란 사실은 한 사람이 감정을 표출하고 받아주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자라면 어느 누구와도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한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해야 할 순서와 세기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맺어 주신 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소원과 헌신일 뿐이다.
감정이 벌써 일어난 후에 절제하는 것은 이미 늦을 수 있다. 죄를 짓고 사단의 시험에 빠질 위험성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무조건 억압하는 것은 더 나쁘다.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상대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대해야 한다. 더 정확하게는 좋은 관계를 일상적으로 유지하여 자기가 속한 어떤 공동체이든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려는 분명한 목적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