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자연 발생적이다.

조회 수 2356 추천 수 212 2007.06.03 16:14:46
5. 감정의 특성;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

감정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와 그것을 절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봤다. 이젠 감정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5.1.감정은 자연 발생적이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 뒤 활짝 개인 푸른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상쾌해진다. 반면에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와 불쌍한 이재민들을 보면 자연히 우울해진다. 이처럼 감정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의 어떤 사실을 인지하면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정서적 반응이다. 즉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부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또 어떤 외부의 자극 없이 가만히 있는데 스스로 감정이 우러날 수도 있다. 과거 체험이 연상 되거나 어떤 사실을 궁리할 때에 각각의 경우에 알 맞는 감정이 생긴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부모가 생각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앞으로 닥칠 큰 문제를 염려하고 있다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이 또한 따지고 보면 외부 자극은 아니라도 내면의 연상 작용이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외부 자극이나 사고 활동 없이 순전히 생리적 현상으로만 감정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생리 기간 동안의 여성의 미묘한 감정 변화나 갱년기 때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우울증과 불규칙적인 감정의 흥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신생아나 유아 때에 주위 환경에 안정(stability)과 안전(safety)이 부족하다고 본성적으로 느낄 때에 울음을 그치지 않는 경우도 그렇다. 아직까지 외부 자극이나 과거 체험에 대한 반응을 보일 나이가 아니라 단지 육체가 본성적으로 예민해져 감정적  반응을 보인 것이다. 병약하면 우울증이 따르는 일반 성인도 육신의 상태에 따라 감정이 생리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외부 자극이든, 내면의 사고 활동이든, 육신의 상태든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인간은 감정을 유발하는 요인에 대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본성적으로 반응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감정을 억제한다고 생기지 않는 법은 없다. 반대로 어떤 외부의 자극 없이 억지로 감정을 내려 한다고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위해 눈물을 쥐어짜야 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극중 인물을 연상하든지 그 상황에 몰입하여야 하므로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임은 틀림 없다.

결국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에 구태여 윤리적 종교적 해석을 동원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감정의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쏟아야지 미리부터 눌러서 발생 자체를 막을 이유도 전혀 없다. 쉽게 말해 경건한 성직자에게 성적 충동이 생기는 것, 여자들이 백화점에 가면 쇼핑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 삼류 코메디를 보고 웃음이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것 등을 두고 믿음과 관련 지어 문제 삼을 것이 하등 없다는 뜻이다.

감정 발생을 막으려면 눈, 귀, 코 등을 완전히 막거나, 전혀 생각을 하지 않거나, 육신이 완벽한 건강 상태 혹은 완전히 죽어 있거나 해야 하는데 그것도 셋 다 동시에 해야 한다. 이땅에 살아 있는 한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천국에 가서도 불가능하다. 물론 그곳은 나쁜 감정이 생기는 곳은 아니지만 기쁨과 평강과 자유와 경건의 감정이 샘솟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따라서 감정이란 인간이 사나 죽으나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니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데 이를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지 않고 없애려고만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감각 기관과 사고할 능력과 가꾸어야 할 육체를 주신 이는 하나님이다. 내외부에서 자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정서적 반응이 생기도록 한 것이 인간 창조의 계획과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감정은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 없고 또 그분의 선물이라면 당연히 인간에게 좋은 것이다.

자연 발생적이란 말은 발생 자체는 인위적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의 질과 양을 스스로 조절하려 한다고 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라도 시간, 장소, 여건, 인물에 따라 감정적 반응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심지어 한 사람이 동일한 사건을 반복해서 겪어도 그 발생되는 감정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일부러 어떤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일부러 경건한 척 한다고 경건해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은 때때로 속일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을 주신 하나님은 절대 속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기에 그 분 앞에 나아갈 때는 있는 그대로 하나 숨김 없이 털어 놓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8,9) 기쁜 일은 일일이 고하지 않아도 되지만 죄는 반드시 있는 그대로 자백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그 분 앞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과연 무엇을 숨길 수 있겠는가? 죄로 인해 생긴 왜곡된 감정이든, 감정 조절의 실패로 인해 생긴 죄든 숨길 수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아니 꼭 그것만 보여야 하는 완전한 감정이 있다. 그분 앞에는 반드시 아무 꾸밈 없이 그대로 나와야 하므로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 과장이나 가식을 하기 가장 힘든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겠는가? 웃음과 울음이다. 헛웃음이나 헛울음은 아무리 해도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반면에 경건, 위선, 사기, 거짓, 교양, 냉정, 분노, 공포 등 다른 것들을 꾸며내기는 비교적 쉽다.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이런 점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이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중에는 웃음과 울음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 죄로 더럽혀진 인간 영혼 가운데서 그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인간을 바라 볼 때 기뻐하거나 안타까워 하거나 둘 중 하나로만 대하신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인간의 조건과 자격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보혈을 통과했느냐 아니냐다. 신자를 볼 때는 어떤 상태에 있던 기뻐하시고 불신자를 볼 때는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해도 슬퍼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하는 신자도 오직 감사와 찬양으로 그 분을 기뻐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가난함과 추함에 대해 애통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절대 내 보여선 안 되는 감정이 있는데 무엇이겠는가? 이웃에 대한 시기, 질투, 미움, 혹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앙이겠는가? 그렇지 않다. 신자가 어떤 상태에 있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기쁨으로 바라 보시기에 구태여 부정적이고도 잘못된 감정이나 생각이라 할지라도 숨길 필요 없다. 그래서 성경은 그대로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 깨끗케 해주신다고 했지 않는가?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던 일단 당신 앞에 나와 엎드리기 만을   가장 원하시고 좋아하신다. 하물며 인간의 경우에도 자식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있어도 자식은 자식이며 그 사랑을 포기하는 부모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고 절대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거짓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온갖 죄인들과는 교제했어도 위선적인 바리새인은 끝까지 저주하셨다. 부정적이고 죄스런 생각들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토설하면 된다. 시편 기자들의 경우처럼 기도하자마자 처음부터 하나님을 원망하며 따져도 된다. 아무 가식 없이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당신 다움을 알게 해 주시고 또 그분만의 긍휼로 소성케 해주신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 앞에 절대로 들고 나와선 안 되는 것은 바로 치성(致誠)이다. 순수한 의미로 바쳐지는 정성과 열심이 아니라 가식적인 의미의 그것들을 말한다. 바친 것의 질과 양에 비해 하나님 그분을 향한 진짜 속마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다. 쉽게 말해 바친 열심과 정성과 헌금에 비례해서 축복도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에만 관심이 있는 자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선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다.

같은 거짓이라도 더 악질적인 거짓이다. 죄에 빠져 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자 하는 것은 그나마 하나님 당신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그분과의 관계에는 가능한 손상이 가지 않아야겠다는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면서 그분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은 솔직히 그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더라도 축복만 더 내려 달라는 뜻이지 않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심령이 천국을 볼 것이며, 애통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웃음과 울음 이 두 감정은 정서적 반응이 가장 최고조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고조에 오른다는 의미는 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아야 가능하기에 가장 순수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래서 당신 앞에 나오는 신자는 언제나 이 두 가지 감정, 즉 가장 거짓이 없고 순수한 마음만으로 나오기 원하신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울거나 웃고 있는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면 여전히 자기의 의에 묶여서 십자가를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감정은 발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발생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너무 감정에 사로 잡히라는 뜻은 아니다.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감정을 순전히 감정적으로만 처리하려 들다가 감정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 죄를 짓게 되거나 사단에게 틈을 주는 경우다. 새가 머리 위에 똥을 사는 것 까지는 인간이 막을 수 없지만 새가 자기 머리에 둥지를 터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감정의 발생은 막지 못하되 이미 발생한 감정은 지성과 의지를 동원해 냉철하게 대해야 한다. 반드시 적절한 여과 절차를 거쳐서 좋은 감정만 밖으로 표출하고 또 좋은 감정만 속에 남기고, 나쁜 감정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 자체를 질적으로 분류해서 나눠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김순희

2010.10.17 22:06:01
*.161.88.93

목사님, 경상도 사투리 발견 ㅋㅋ "새가 머리 위에 똥을 싸는(사는) 것 까지는..." 경상도 사투리 특징이 "쌀"을 "살"로 말하는 것이지요. ㅋㅋㅋ 그래서 경상도 분들만 보면 제가 "쌀" 해 보세요 하고 장난을
많이 칩니다요. 목사님도 "쌀" 한번 해 보셔요.ㅋㅋ

감정은 발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감정을 조절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차이 없는 것 같으나 무척이나 중요한 차이인 것을 깨닫습니다.
감정이 생길 때 잘 조절하는 지혜를 지, 정, 의를 동원하여서 냉철하게 생각하며 여과절차를 거쳐서 좋은
감정만 밖으로 표출하고 좋은 감정만 속에 남기는 지혜를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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