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하나님이 창조하신 감정
1. 창조 과정에 드러낸 하나님과 인간의 감정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하나님
감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분은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과는 차원이 다른 지정의를 갖게 하셨다. 신자가 경건해지기 위해서 감정을 외면 내지 무시한다면 지정의 셋 중에서 감정 하나를 빼고 살겠다는 것과 같다. 감정 대신에 지성과 의지에만 의존하면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졌다면 감정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바로 그분을 닮은 모습이다. 신자가 감정을 도외시하면 자신 속의 하나님의 성품 중의 일부를 자의로 필요 없다고 결정해 없애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표출까지 한다. 성경의 하나님이 감정을 드러냈다는 여러 기록들이 단순히 인간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모습에 비추어 표현한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진노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격하신다.
성경은 시작부터 하나님이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4)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 무질서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각 피조물에게 고유 기능과 목적을 부여하고 온전히 그대로 작동되게 했다는 뜻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무질서(chaos)에서 질서(cosmos)로 들어가는 첫 단계로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다.
빛이 생기기 전의 무질서 상태라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심지어 흑암이 혼돈 상태에 있어도 완전하고 좋은 것이다. 그분에게 부족함과 불완전이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나아가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잘못되고 더러운 것은 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분이 창조하신 것은 오직 선하고 좋은 것뿐이었다.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신 이유와 근거는 분명히 드러났다. 우선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면서 기쁨이 생겼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무질서는 혼란과 짜증과 염려를 파생 시킬 뿐이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빛이 창조되어졌기에 기뻐하셨다.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면 기쁨이 온다는 뜻이다. 반대로 인간의 뜻대로 하면 기쁨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이 부분은 차후에 더 상술하도록 하자.)
이어진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때마다 기뻐하셨다. 모든 동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좋아하셨다. 종류란 하나님이 그 개체에 부여하신 기능과 목적이 다 다르다는 뜻이다. 동시에 각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 또한 다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창조하셨고 또 그렇게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또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실 수 있는 충분한 근거이자 합당한 이유다.
창조의 궁극적 목적
창조 과정이 당신의 계획한대로 완벽하게 차근차근 진행되자 그분의 기쁨의 강도도 더 세어졌다. 의도된 목표를 향해 그 기쁨도 치달아 올랐다는 뜻이다. 즉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창조는 대단원의 막이 내렸고 하나님은 심히 좋아하셨던 것이다. 인간이 창조사역의 마침표이자 느낌표(exclamation point)로서 그분에게 기쁨의 절정을 안겨주었다.
다른 말로 그분은 모든 천지창조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인간에 두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완벽한 환경을 조성하셨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창조에 드러난 당신의 영광이었다. 대신에 인간에게는 이 땅의 자신 외의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거룩한 소명을 주었다. 그야말로 인간은 이 땅에서 그분을 대신하는 청지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그분의 기쁨에 동참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그 세계의 주인이 될 수는 결코 없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2)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오직 찬양하게끔 지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더러 창조세계의 운행질서를 직시하고 자신들의 소명을 잊지 말도록 선악과를 두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뜻은 인간이 없으면, 특별히 인간의 찬양이 없이는 하나님 당신의 기쁨조차 없다는 말이다. 당신이 이 땅을 섭리할 의미와 목적조차 없어진다. 그분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인간의 가치를 과장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다른 피조물이 이 땅을 어떻게 그분의 뜻대로 다스릴 것인가? 또 인간 외의 어떤 피조물이 자발적인 기쁨을 안고 그분께 찬양드릴 수 있겠는가? 비록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기쁨의 산물이자 그분의 신성을 내포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창조의 절정은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게 만드는 선악과로 인해 완성된 셈이다. 이제부터 인간이 선악과를 바라볼 때마다 당신을 경배하고 찬양해 줄 것을 기대한 하나님의 감정은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겠는가? 또 그분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닐며 이 땅을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다스릴 꿈에 부푼 아담 또한 얼마나 큰 기쁨에 들떠 있었겠는가? 에덴은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기쁨으로 충만했던 동산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당신의 지성으로 계획하고 의지로 실행되어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이 충만하지 않았던 단계는 하나도 없었다. 다시 말하건대 인간은 하나님의 뜻 안에 순종하면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감정은 인간에게 너무나 좋은 그분의 선물이자 영적으로 성숙하고 거룩해질 수 있는 귀한 자산이다.
최초의 부정적인 감정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처음으로 기쁨 대신 다른 감정을 느낀 사건이 생겼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아담이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을 보고 안쓰러운 감정이 생긴 것 자체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아담의 배필을 만드시기로 즉 또 다른 창조적 사역을 하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감정이 아니라 아담이 처한 상황이었다. 인간이 혼자 있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외로움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계속 혼자 있다가 부정적 결과를 맺게 되면 나쁜 것이다.
끝까지 외롭게 있는 것은 빛을 창조하기 전의 무질서와 다름없다. 무질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상태다. 질서란 혼자가 아닌 복수가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도와 성장해 나가는 체제다. 창조의 질서를 세우려면 둘 이상이 있어야만 한다. 혼자 있으면 개인적 내면의 질서는 몰라도 사람들 사이의 외적 질서는 아예 세울 재간이 없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런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아니 적극적으로 이 땅에 질서를 세우며 다스리는 일을 함께 시작하라고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다.
인간의 외로움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인간을 서로 사랑하기 위해 지으셨다는 뜻이다. 아담이 혼자 있으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으니까 좋지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들에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고 명했다.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데서부터 사랑을 가꾸어 나가라는 것이다. 이브를 만난 아담의 첫 반응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브를 자기의 분신으로 여겨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결혼은 연합이다. 연합은 상호 우월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로 다른 인격과 특성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공히 서로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분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합쳐야 하나가 되지(0.5+0.5=1) 둘이 만났으니까 1+1=2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빠지면 완전한 하나가 되지 않는(!-0.5=0.5) 관계다. 서로가 반쪽인지라 혼자 있으면 항상 나머지 반이 부족한 상태가 부부다.
결혼을 하나님이 맺어준 연합으로 생각지 않고 두 인간이 만난 단순한 결합이라고 생각하면 한 쪽이 없어져도 2-1=1이므로 전혀 아쉽지 않다. 혼자서라도 아무 부족감이 없기에 서로 잘났다고 자랑하게 된다. 또 부부끼리도 자기가 반드시 우위에 서야겠다고 고집하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쉽게 헤어질 수 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뜻대로 연합했다. 아담으로선 독처의 외로움을 이미 겪은 후였다. 항상 반이 비워있던 상태였던지라 이브를 보자마자 자기 분신으로 대해주었다. 이브 또한 연합의 관계에 바탕을 둔 아담의 참 사랑을 받았다. 자연히 “두 사림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는”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있게 되거나, 주위에 사람이 많이 있어도 때때로 생기는 외로움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외로움을 이웃과 연합의 관계로 해소하면 참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연합이 아니라 남을 이용해 외로움을 없애려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 말하지만 연합은 항상 자기가 부족하며 상대가 없으면 절대 그 부족분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는 완전한 하나의 개체이며 상대도 그러하니까 비교 경쟁하여 우월을 가리려 든다. 다툼과 질시와 분쟁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 없다.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되 독처하는 것보다 더 나빠진다. 요컨대 인간은 연합해야만 사랑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죄로 타락한 감정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이브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은 아직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받기 원하셨던 대로 그분께 반응했다. 온전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왔다. 이해타산을 따져 본 후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단순히 성령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뿐이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이 땅은 오직 선과 기쁨뿐이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아담은 그분 뜻대로 이 땅을 잘 다스렸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부족한 상태로 서있었다. 하나님도 그런 인간을 온전한 사랑으로 대해주었다. 그분의 권위와 사랑에 인간은 겸손하게 순종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교제의 대상으로 삼았고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절감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도 일종의 연합이 이뤄졌었다.
그러다 사태는 급변했다. 완전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던 인류 최초의 부부가 범죄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시기 질투한 사단이 인간의 사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호시탐탐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사단은 인간에게 직접 구애하지 않고 우회하는 전략을 택했다. 하나님을 깎아 내리면 자연히 자기가 올라가는 식이었다. 선악과를 금한 하나님이 사실은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싫어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라는 언질만 넌지시 비쳤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똑 같은 나무요 열매인데 먹는다고 죽을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럼 구태여 먹지 말게 할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겠는가? 내가 볼 때는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것을 시기하고 염려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참으로 그럴듯한 꾐이었다.
아담은 별것 아닌 양 사단과 접촉했지만 차츰 그의 흉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란 존재가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본인은 전혀 그런 줄 의식도 못했지만 인간 영혼의 새 주인으로 군림할 사단과의 연합이 서서히 이뤄졌던 것이다.
이브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아담의 마음에 조금씩 먹구름이 끼어들었다. 그분을 이전과 똑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겸비함이 어느 듯 하나님과 일대일로 맞서 겨루려는 단계까지 갔다.
최초 인간들은 선악과를 다시 주시해 보았다. 그랬더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그 열매가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 헌신하며 열매를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여겨진 것이다. 이전에는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호 인도하여 주고 있다는 확신으로 인해 너무나 감사했다. 열매가 아무 손상 없이 그대로 달려 있는 것이 더 기뻤다. 그러나 이제 그 열매는 자신들이 더 높이 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발목을 묶고 있는 족쇄처럼 보였다.
사단은 빨리 따 먹으라고 전혀 독촉하지 않았다. 아담 스스로 세상을 마음껏 휘젓고 싶은 욕심에 아무 주저 없이 따먹었다. 그 순간 당연히 하나님과의 연합은 완전히 깨어지고 도리어 사단의 짝이 되어버렸다. 하나님 말씀대로 영원한 죽음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대신에 죄와 사망에 묶이는 사단의 노예가 되는 길을 택했다. 홀로 서기를 시도해보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으로서 천상의 보좌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범죄 하게 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독립하겠다는 마음이 최초의 발단이었다. 그 마음을 품게 된 원인은 시기 질투 즉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또 그런 감정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도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말로 육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느낌, 즉 감정이었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더 자세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들의 내면세계를 가장 먼저 자극하여 영향을 준 경로가 감정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사단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시켜 하나님께 배반케 한 것이다. 그러나 재삼 강조하건대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감정이 작동하면 아주 충만한 능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사단의 뜻 안에서 감정이 작동되면 엄청난 죄악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단이 아담더러 선악과를 주시해보도록 유도한 것은 인간의 정신 구조를 그가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다. 외부의 사물을 일차 접촉하는 것은 오감이며 그 오감을 통해 인간에게 발생하는 것은 느낌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외부의 사물에만 집착하고 있으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며 필연적으로 지성적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로 충만해 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선악과를 바라보았기에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선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망각하고 오히려 그분에 대한 시기 질투심에 가득차서 열매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감정에 사로잡혀서 오감에만 의지하니까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만 인식했다. 자연히 먹음직 보암직하게만 여겨졌고 그 강렬한 욕망을 이기지 못해 범죄로 이어졌던 것이다.
범죄 후의 감정 변화
그 범죄 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서로 벗은 줄 알게 되었다. 서로의 나신을 보고 징그럽게 여겨졌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분의 참 사랑과 온전한 권능의 보호막이 자기들에게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스스로 세상에 주인이 되려 했는데 오히려 험한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이다.
사단은 그들에게 홀로 서기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3:5)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3:7) 하나님과 같이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자 주인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직 죄의 노예만 되었다. 그분의 보호막이 벗겨졌으니까 두렵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스스로 엮어 치마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눈이 밝아지긴 했는데 죄에 대해서만 그렇게 되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만 밝아진 것이다.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 그분이 만족, 행복, 평강, 기쁨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이젠 알지도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다. 참 평강과 기쁨의 근원에서 멀어졌으니 두렵고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타락 후 인간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반응도 감정이었다. 부끄럽고 두려운 부정적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감정도 그 기능상, 목적상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 범죄 후에 부끄럽고 두려운 감정이 들지 않으면 회개의 가능성마저, 실제로 회개하던 안 하든 간에, 아예 없어져버린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해낼 방도조차 없어진다.
요컨대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필연적으로 공포와 수치의 감정을 느끼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당신께서 죄를 극도로 저주하므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또 타락 후 그 분과의 연합이 깨어지고 그 형상도 왜곡되는 바람에 비록 죄를 저주하지는 못해도 죄를 짓고 나면 사람마다 그 세기는 달라도 그런 감정은 여전히 생긴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 지어졌다는 것은 그분의 완전하고도 너무나 좋은 감정 체계도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에 인간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감정인지라 그분의 뜻 안에서 절제, 적용하면 영적으로도 더 완전해질 수 있다.
감정이 좋은 것이라면 감정의 표출도 당연히 좋은 것이다. 단 감정을 절제하고 표현하는 방식 또한 그분의 방식대로 된다면 말이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다. 사단은 그분께만은 절대로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 없이 감정을 절제 표현한다면 범죄 이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끼리 벌거벗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죄로 인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 망가뜨려진 것이다. 사단이 인간으로 오직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오감에 따라오는 일차적, 표면적, 육신적 반응에 묶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가뜩이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지라 신자마저도 쉽게 그분을 망각하게 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함께 부패한 이 땅에만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죄가 갖는 근본적 기능이다. 그래서 타락이란 사단이 인간으로 감정에 몰입하여 감정의 지배를 받게 만든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완전한 구원을 맛보려면 감정의 측면에서도 회복이 이뤄져야 한다. 감정 자체를 배제하리는 뜻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감정이 부정적인 결과를 자주 그것도 아주 손쉽게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감정의 발생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려면 눈, 귀, 코, 전부를 다 막아야 한다. 예컨대 자기 혼자 세상과 떨어져 면벽 수련만 할 수는 없다. 그러면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소명을 실천할 방도가 없어진다. 바꿔 말해 인간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감정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따지고 보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하나님 뜻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길은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여 올바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서 감정을 절제 표현한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감정의 종류별로 구체적인 절제 방안은 차후에 상술하겠지만, 일차적으로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면 된다. 요컨대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증거로서의 하나님 뜻을 우선적으로 찾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감정을 주신 원래의 의도와 목적을 찾아 감정 고유의 순전한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 영적 성숙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감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귀하고 거룩하게 가꾸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9/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