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5-14) 신자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구원
구원 얻는 믿음 (9)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5-14)
구원을 이루어라.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이었던 6-11절을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바울이 정작 그 고백을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려는 내용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은 그 앞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반드시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에 관해 설명하려고 그 고백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이유부터 알아야 하는데 앞 문단의 서두에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2:1, 2)라고 말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라, 같은 사랑을 가져라, 뜻을 합하라, 한 마음을 품어라, 계속 같은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간의 교제를 온전히 하기 위해선 성도들 모두가 똑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도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고 그런 뜻을 재확인했습니다.(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는 것이 참된 성도의 교제이고 그러려면 성도들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고백에 이어지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는 말씀입니다. 일부 교파는 이 구절을 두고 구원을 얻으려면 인간 쪽에서 노력해야 하고 또 신자가 된 후에 다시 잘못하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6-11절이 독립된 단락이라면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만 살펴본 대로 앞 1-5절과 뒤 12-14절 사이의 삽입절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이루라는 12절 말씀도 전체 문맥의 주제인 성도 교제에, 그것도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일에 비추어서 따져봐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헬라 원어 ‘카델카조마이’는 농부가 경작하듯이 꾸준히 열매가 맺힐 때까지 어떤 일을 성취해 나간다는 의미인데, 문법상 시제도 현재형입니다. 영어 성경은 그런 의미를 살리려고 전치사 out을 붙여서 “work out”으로, 우리말 ‘표준새번역’본도 같은 의미로 “구원을 이루어나가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추수하려면 씨앗은 당연히 심어야 하며 매일매일 온도 습도 바람에 맞춰서 돌보고 벌레도 막아주어야 합니다. 그럼 그 열매는 때가 되면 반드시 맺힙니다.
성도 간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끝까지 성실하게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2절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과거형인 칭의의 구원이 아니라 신자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평생토록 거룩하게 자라가야 할 현재진행형인 성화의 구원에 관해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성도 교제를 예수님의 마음과 연결시킨 이유도 문맥 안에서 간단히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 교제에 대한 가르침을 2:1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므로 앞부분의 설명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1:27)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한마음, 한 뜻, 협력이라고 같은 의미를 세 번이나 강조하는데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온전한 성도 교제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려면 복음을 알아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데, 그 복음은 너희가 예배 중에 행하는 신앙고백에 드러나 있다는 뜻으로 그 고백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컨대 바울은 너희가 믿고서 고백하고 있는 그대로 성도들을 섬기라고 명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주일 예배 때 입술로만 고백하지 말고 일주일 내내 실제 삶에서 그 고백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입술로만 당신께 주여주여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마7:21)
성도 교제의 실상
바울은 그런 성도 교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절)라고 권합니다. 또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기를 남보다 낮추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도 교제가 이 말씀과 일치하게 행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주일은 교회라는 경건한 분위기 안에선 지내므로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거의 없고 굳이 은혜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꺼내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풍성한 식사도 제공합니다. 어떤 이에겐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오히려 예배 후 성도 교제가 더 즐겁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본질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라 성도의 교제라고 말할 수 없고 제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주중의 소규모 모임이나 구역 예배에서 서로 간에 진정으로 섬겨야 하는데, 성도들과 조금 더 깊이 접촉하면서 서로의 민낯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도 교제할 때 신자들이 품는 진짜 마음은 솔직히 그리스도의 마음과 반대이거나 훨씬 부족한 모습이 아닐까요? 예컨대 장로와 권사 직분을 맡아 믿음 좋아 보이는 부부가 주일날 교회에선 그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다른 교인들을 헐뜯기 바쁘며 때로 서로 의견이 달라 다투지 않습니까? “재수 없는 누구 집사와 어쩔 수 없이 친한 척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그 친구 꼴도 보기 싫어서 교회 못 나오겠다. 다시는 그 사람에게 잘해주라는 소리는 아예 하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다들 경험하듯이 교회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그 아픔은 세상에서 받은 상처보다 더 크고 깊고 오래 갑니다. 주일 예배 같이 전 교인이 공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모임 외에 가능한 교회 활동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신자가 많습니다. 대신에 어렸을 적부터 친구나 사회에서 신뢰를 쌓은 사람과 속내를 털어놓고 교제합니다. 아예 집에서 혼자 온라인으로 신앙 생활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꽤 늘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누구에게나 더 크게 느껴지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이고 성령이 주관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영적인 처소입니다. 교회 일들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고 그 행하는 사람도 연약해도 반드시 신자들의 영적인 차원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며 그분과 진실한 교제를 해야만 참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이 아닌 영적 존재이므로 영적 상처가 훨씬 더 깊고 오래 갑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가 성자들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이요 불신자는 아직 그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죄인으로 둘 다 죄인이긴 마찬가지입니다. 현실 세상에선 자기 이익과 감정에 부합되는 사람과만 교제하면 되지만 교회에선 누구에게나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졌어도 여전히 자기를 가장 높이려는 본성이 남아 있기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곧바로 상대가 누구든 미워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영적 차원에서 교제하는 사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고 다시 강조하지만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 모두 바울이 가장 강조하는 뜻과는 달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 성도 교제에서 가장 실패하는 부분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꼴 사나운 교인을 어쩔 수 없이 매주 마주쳐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미운 마음부터 생겨나니까 절로 죄책감이 듭니다. 본문이 구원받는 믿음과 연결하니까 자신이 구원받은 신자인지마저 의심이 듭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가질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해답도 바울이 다른 서신서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성도들의 삶의 태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당연히 성도의 교제와 섬김도 포함되는데, 상기 본문은 그에 대한 영적 진리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는 말씀부터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자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첫째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신자가 거부할 수 없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역사한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 사랑에 대해서 주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신자가 새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주님이 성육신한 은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빌립보서 말씀과 사실상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권하여 신자로 행하게 하는 일은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빌1:27)에 해당됩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모습으로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성도와 교제를 할 때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문, 혈통, 인종, 재력, 권력, 지성, 신분 등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비교 판단 차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롯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도 육신을 따라 판단했다고 말하는데 그의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성전과 율법을 부인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인 줄로만 알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그 추종자들을 박멸하려고 설쳤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예수는 할례받지 않은 로마인에 의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모습으로 죽임을 당한 사형수였을 뿐입니다. 그가 생전의 예언대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들었어도 제자들이 그 시신을 훔쳐서 숨겨놓고는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을 펼친다고 믿고 신자들을 더 증오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고는 사흘간 봉사가 되어 완전히 죽음과 방불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당신을 미워했던 자기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고, 그동안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한 핍박만으로 마땅히 죽여야 함에도 목숨은 살려주었습니다. 대신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기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시켰습니다. 오직 주님 당신과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만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영혼이 삼 일간 시체나 다름없이 완전히 발가벗겨서 드러나자 바울은 자신이 정말 아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부활했고 죽기 전에 가르친 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러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바쳐졌음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육신에 따라서 판단하고 차별대우했던 일이야말로 하나님에게 대놓고 거역한 가장 큰 죄라는 점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죽음 같은 절망에 빠져서 어떻게 해볼 수가 전혀 없어서 두 손 두 발 다 놓고 주님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이름도 없는 한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자기를 찾아와 기도해주자 다시 광명을 찾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정작 죽었어야 할 자가 자신인데 예수님이 자기 대신 십자가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좋은 소식, 복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심지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고 스스로 자랑했던 자였습니다. 육신으로 따지면 당시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춘 상위 1%에 속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이라”(빌3:8)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되니까 다른 모든 것이 배설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자랑하던 가문, 혈통, 신분, 학식, 재력, 권력 등등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서 완전히 다 버린 것입니다. 배설물을 계속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자는 변비 환자 외는 없습니다. 그가 그동안 쌓았던 학식 신분 경험 등이 인생살이에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는 기준이 된다고 끝까지 완악하게 고집한 자신의 그릇된 생각이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선물을 받는 데는 어떤 인간적인 자격 조건 기준도 전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절감한 후에 생각하니까 그런 잘못된 가치관과 구원관이 부끄러워졌고 또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별했던 일이 더더욱 너무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아주 실감 나게 설명하자면 죄송하지만 남을 똥이라고 봤는데 자기가 똥이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
바울은 이어서 아주 놀랍고도 너무나 중요한 진술을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기독교의 구원 진리로 간주해선 안 됩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반드시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신자는 존재적으로 이전 것이 지나고 존재론적으로 새것이 되었는데, 새것이 된 가장 대표적인 증거를 바로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는 물론 다른 모든 사람을 육신에 따라 판단 차별했는데 이제 새사람이 되고 난 후로는 그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것이 신자가 된 첫째 증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큰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사소한 잘못만 보고서 남들만 고치라고 지적 정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뜻은,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영적 실상을 정확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또 정말로 자기 눈의 들보를 발견했다면 남의 눈의 티끌을 문제 삼을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적으로 말해서 자존심 덩어리입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그런 본성이 남아서 실제로 다른 이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만 남을 좋게 여길 수 있습니다. 자기가 다른 이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하거나 상대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열등하면 절대로 진심으로 그를 낫게 여기지 못합니다. 솔직히 많은 신자가 아니 저부터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듯이 교인들끼리니까 경건한 척, 의로운 척, 잘 믿는 척, 예수님을 닮아가는 척, 외적으로 겸손을 떨기 바쁠 뿐입니다.
예수님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바울로선 삼 일간 봉사가 되자 생전 처음으로 자기 영혼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대면해서 곰곰이 살펴봤을 것입니다. 자신이 남에 비해서 하나 나을 것 없으며 그동안 율법에 대한 지식과 종교적 헌신으로 그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서 남들 앞에서 겉으로만 의로운 척했을 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너무나도 부끄러운 죄인을 다시 살려내려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으셨고 새사람으로 바꿔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예수님을 위해서 살기로 했는데 가장 먼저 할 일은 당연히 다른 이를 육신으로 알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요컨대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으니까 빌립보 교인더러도 너희 신앙을 고백한 그대로 실천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바가 따로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했지, 다른 이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했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섬기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연약한 인간 본성에 수시로 넘어지는 우리로선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상대를 살려낼 만한 영적 실력이 없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좋고 사명감에 불탄 사도였지만 그의 서신서 곳곳에 성도들은 물론 사도 사이에도 이런저런 알력과 다툼이 있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직접 자기 지체 속의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 아래로 자기를 사로잡아 무력하게 만들기에 이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고 한탄까지 했지 않습니까?(롬7:23,24)
그런데도 그가 아무도 육신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고 또 그런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바울을 포함한 인간에게 사랑해줄 만큼 예쁜 측면이 있어서 구원해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자기 같은 원수도 구원해주었지 않습니까?
대신에 죄에 빠져서 자기가 최고라고 높임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선과 단절된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형수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진 것도 자기를 제물로 바쳐서 인간의 죗값을 갚으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킨 근본 원인을 제거해서 하나님과 화목시키려 한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와 위로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온전한 자비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먼저 있고 그 자비를 정확히 깨달은 자라야 그분의 사랑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법입니다.
바울이 보통 사람이 도무지 겪을 수 없는 고난을 수없이 당했음에도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 다른 이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연약하기에 애타고 안타까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참 인간답게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자기처럼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들어가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고난을 감수하면서 오직 십자가 은혜만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자기 전부를 바쳤던 것입니다.
신자의 형제
그리고 중요한 사항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성도 사이에만 적용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권면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교회에 소속된 교인들 끼리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는 신자라면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제는 몰라도 긍휼과 자비는 신자보다 주로 불신자들에게 베풀어야 할 덕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실제로 이방인이 아주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끼리는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불신자들을 대할 때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인 비유에 따르면 길 가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받은 유대인들만 사랑을 베풀 형제로 한정시켰습니다. 만약 이방인도 율법을 따르기로 하고 할례받아서 개종하면 형제의 범위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모세의 율법이 그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인들이 교인만 사랑하는 꼴이었습니다. 기절해서 꼼짝하지 않으니까 율법에 시신에 접근하면 부정해진다는 규정 때문에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만약 죽었다면 그 장례를 치러주어야 할 신분인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사람을 차별한 것입니다. 가장 경건하고 의로워야 할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그랬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유대인과 앗시리아인 사이의 혼혈이라 유대 사회에선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끝까지 보살펴서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육신으로 판단 차별하지 말아야 할 가장 명확한 예로, 더 정확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첫째 증거로 이 비유를 가르친 것입니다. 당신께서도 생전에 세리, 창녀, 귀신 들린 자, 이방인, 불치병 같은, 부정한 자들을 전혀 주저하지 않고 교제하고 치유하고 가르치면서 이 비유를 직접 몸으로 실현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세상은 육신의 풍요와 안락만이 목표로 자기가 최고로 좋은 것을 최고로 많이 차지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에 얼마나 풍요한지에 따라 자기들 교제 범위를 정합니다. 일단 그 기준에 합당한 사람들끼리는 결속력이 아주 강하고 심지어 자기 것을 희생해 가며 섬깁니다. 그런 우월적인 신분과 여건을 함께 누림으로써 자신들의 탐욕과 교만이 더 충족된다고, 즉 자기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신자의 가장 큰 특징이 육신으로 차별하는 것이므로 신자 된 가장 큰 특징은 그 반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기쁨
그러나 단순히 자신을 낮추며 남을 더 높이는 도덕적 종교적 섬김이라면 굳이 성경이 가르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 간의 교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고안한 일반 종교와 도덕이 절대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인간 만사를 거룩하게 통치하시며 인간의 상태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당신께서 직접 계시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느냐 못 받느냐, 진짜로 살고 죽는 문제가 걸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그분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현실적으로 형통해도 갈급하고 허망할 죽음일 뿐입니다.
바울이 성도 간의 교제에 굳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도 문맥 안에 나와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다 보면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1:29)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8)고 제자들에게 실토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구해내려고 가장 고통이 극심한 십자가에 죽어야 하니까 심히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원수 되어 죄 중에 있음에도 인간이 너무 불쌍하기에 십자가 죽음의 그 사명은 너무나 고귀했으며 그래서 주님께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그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더러도 너희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고백한 그대로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이에 대해 진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불쌍한 자를 온전히 살려내는 길은 복음뿐이므로 주님과 같은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자만 일방적으로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합니다.(빌2:4) 자신이 최고로 낮은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남이 나보다 조금이라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남이 높아지면 원망과 시비도 자연히 사라집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럼 그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사랑도 자연히 충만해지고 기쁨도 넘치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이 역사하면 그 사랑이 강권하여서 모두가 주님을 위해서 살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신자는 누구나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아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극악한 죄인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구하면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자신은 도무지 가망이 없는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런 십자가 복음을 알고 그로 인해 새 사람으로 바뀌어 복음을 전하면서 어떻게 다른 이를 육신으로 차별할 수 있습니까?
지금껏 내용적으로는 성도 교제보다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를 갖고 있다면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자신을 점검해보십시오. 불신 이웃들을, 아니 교회 안의 성도들이라도 육신의 기준으로 차별대우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역으로 말해서 자신도 그런 일로 세상과 교회 안에서 차별당해도 크게 상처받지 않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최소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로 내가 가장 추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라는 확신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처절했던 절망적 자기 인식이 날이 갈수록 옅어집니까? 성도나 이웃을 볼 때 겉으로 드러나는 육신의 기준이 종종 되살아납니까? 그러니까 처음 십자가 앞에서 자기 실체를 발견했던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화의 구원을 평생 꾸준히 이뤄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도덕적 종교적 노력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인생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또 절감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고 모두 불쌍하다는 마음이 없이 우리 실력만으로는 이웃과 성도들을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주위를 정말로 진지하게 그들의 입장에서 둘러보십시오.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고 명합니다. 자신과 이웃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래야만 온전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이웃 사랑을 온전히 할 때에 진정한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5/2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