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1-3) 믿음의 실체가 없는 신자들
구원 얻는 믿음 (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3)
믿음의 가장 큰 오해
안타깝게도 오래 동안 교회에 출석한 신자들조차 자기 믿음을 다른 이에게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해서 전도하기를 꺼립니다. 이는 단순히 표현력이 모자라거나 내성적인 성격 탓이라고 변명할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자기 믿는 바를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한다는 뜻인데 사실상 믿음의 실체가 없는 셈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선 규정된 계명대로 따르기만 하다가 죽은 후에야 구원과 심판으로 나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생전에 성령이 역사하여 새사람으로 거듭나 구원받음으로써 믿음이 생깁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구원받은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배경과 이유는 물론이고 앞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서 살고 있다고 유창하지는 않아도 진솔하게는 말할 수 있는 법입니다. 아직 그런 단계가 아니라면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열심히 공부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솔직한 실상은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확신이 없으며 심지어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잘 모르는 신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신구약 통독을 한 번이라도 해본 신자가 드뭅니다. 심지어 일부 교회에서 믿음을 잘못 가르치는 경우마저 있는데 대표적인 구절이 본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니까 자기 소원을 의지적으로 믿고서 끈질기게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이뤄내는 것을 믿음의 핵심이라고 간주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니까 현재는 볼 수 없어도 그렇게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현실로 성취되어서 보이게 되니까 끝까지 그런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기독교 믿음에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 의지를 굳게 가지는 방식의 믿음이 매번은 아니지만 간혹 선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매번 그렇게 되지 않고 또 의지가 약한 신자도 많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신자들이 그런 믿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 자신의 현실적 소원과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하고, 사업이 대박 나서 흥하고, 중병이 나아서 강건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 목표들은 사실상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실제로 간혹 목사님들이 신자들에게 기도할 때 그 제목들이 완벽하게 이뤄진 이후의 모습들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 특별히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고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기독교 신앙을 심리학의 적극적 사고나 마인드컨트롤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잘못이 더 큽니다.
이런 식의 오도된 가르침이나 권면이 생기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반드시 전후 문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성경 해석에서 첫째가는 원칙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만 따로 떼어서 해석하는데, 그마저도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따져보지 않습니다. 앞뒤로 연결해 읽지 않으면 저자가 강조하려는 주제와 다르거나 부족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올바른 뜻
가장 먼저 본문 자체가 말하는 뜻부터 정확히 따져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영어 문법적으로 따지면 “I am a boy.”와 같은 가장 간단한 1형식(주어 + 보어)입니다. 주어와 보어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동격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가진 믿음이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끈질기고 강한 믿음을 가지면 바라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이미 믿음이라는 형태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믿음으로 인해 실상과 증거가 이뤄질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믿음이 바로 그것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신자가 바라거나 계획하는 미래의 어떤 일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믿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이나 증거라는 확정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까닭도 미래의 특정한 일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서로 다른 것을 뜻한다고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같은 의미를 반복해 말함으로써 더 강조하려는 히브리어 특유의 어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이 같은 뜻이요, 실상과 증거도 같은 뜻으로 봐야 합니다. 실제로 실상과 증거의 헬라 원어에는 확신이라는 공통적인 뜻이 있습니다. 두 문장을 연결하면 믿음은 바라기는 해도 결코 볼 수 없는 일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3절의 보충 설명에서도 선진들이라는 믿음의 증거만 다루는데, 구체적으로는 4절 이하 11장 전체가 말하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따라서 그 선진들이 믿음으로 무엇을 바랐으며 실제로 그 바랐던 것들 어떤 모습으로 이뤄졌는지 자세히 살펴봐야만 1절이 말하는 믿음의 실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 안에 간단한 설명이 있는데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가장 좋은 예가 창조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3절)라고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아나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신 줄 성경을 비롯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생기기 전에 이뤄진 창조는 어떤 인간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연을 인간이 살아가기에 최적한 상태로 만든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은 우주는 제쳐두고 동식물의 창조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태초에 끝이 난 창조는 인간의 상상조차 초월하는 엄청나고도 거룩한 하나님만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창조가 없기에 평생 아니 영원토록 인간은 창조를, 즉 믿음의 증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바로 창조의 증거인 것입니다.
또 그래서 믿음에 대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고, 나타난 것도 자연과 인간입니다. 물질이 스스로 진화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된 것도 아니요, 인간이 그 창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후에 계속 다스리고 인간의 역사도 당신의 뜻대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주로 구약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인내하는 믿음
그런데 이 2-3절도 믿음의 가장 알기 쉬운 예로 든 것이므로 믿음의 일부 측면입니다. 히브리서 11:1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선 문맥상의 주제부터 살펴야만 하는데, 먼저 앞부분에서 무엇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5-39)
저자는 지금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하라고 권하면서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한 큰 상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 상은 바로 예수님이 잠깐 후에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너희는 절대로 멸망 당할 자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받았기에 그럴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큰 핍박 가운데 있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더러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신앙으로 끝까지 견디라고 위로 격려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을 히브리서에는 성전 파괴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아직 성전이 건재했던 네로의 핍박 때로 봅니다. 성전 제사에 관한 율법을 자세히 설명하므로 기독교 태동 때부터 계속 있어 온 유대교의 박해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책 제목이 ‘히브리인에게’이듯이 양쪽의 극심한 핍박을 견디지 못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신자를 수신자로 삼아서 저작했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저자도 여러 가설이 있으나 바울의 제자로서 유대교에 대해 박식하고 그 핍박 상황을 함께 겪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추정합니다.
저자는 예수 십자가 복음을 끝까지 붙들게 하려고 1-10장까지 주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이 유대교의 제사 제도에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제사라는 설명으로 일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천사와 인간 선지자와 대제사장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탁월하다고 변증합니다. 그런 주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 당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침으로써 모든 세대의 모든 죄인에 대한 속죄를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에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아무리 너희가 유대교의 전통 제도 율법에 친숙해도 주님의 완전한 십자가 구원을 이미 받은 자라고 강조한 것인데, 앞에서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마찬가지로 앞에서 “뒤로 물러가 멸망할 수 없다”고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전체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며, 신학적으로 따져도 기독론을 이만큼 잘 설명한 책도 없습니다.
본문을 앞의 설명과 연결해 보면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 신자들에게 핍박을 끝까지 견디라고 권면했기에 이제부터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근거와 이유에 대해 변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첫마디가 너희는 이미 영생을 확보한 자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갖고 있으며 장차 실현되고 증거될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1:1을 풀어서 쓰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는 것을 실제 사실로 아는 것이 믿음이요, 또 장차 반드시 볼 수 있다는 너희의 믿음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아이들만 집에 놓아두고 아버지가 잠시 외출한 경우입니다. 아버지는 떠나면서 누가 와서 행패를 부려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고 집안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아빠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분명히 있고 아빠는 약속 시간에 틀림없이 돌아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선 이는 절대적 사실이자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동안에 동네 나쁜 형들이 계속 찾아와서 괴롭게 해도, 그래서 공포에 질리고 큰일 날 것 같아도 끝까지 문을 튼튼히 잠그고 집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핍박받는 신자들에게 조금만 더 참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 승천하셨고, 너희는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시며, 혹시 그 전에 너희가 죽더라도 부활 영생으로 이끌 것이므로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잘 믿어야만 부활과 재림을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믿은 자니까 그 둘을 이미 소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과 증거로 확보하고 있는 주님의 미래 재림에 대해선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이 땅에서 어떻게 핍박을 이겨낼 것인가만 기도하면 됩니다.
믿음의 큰 상
본문의 뒷부분도 같은 주제를 강조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이 실존함을 믿고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는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이며, 심지어 불신자도 위급하면 때로는 하느님을 찾아서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이방인도 간구하는 것이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분명히 가르쳤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저자가 한 책의 한 문단 안에서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 같은 주제에 대해서 같은 의미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견디면 큰 상을 얻을 것이라고 10:35에서 위로했는데, 11:6절도 하나님을 찾는 자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두 문장의 상은 같은 의미입니다. 앞부분에서 말한 큰 상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었으므로 11:6절의 상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자라면 그분의 이 재림 약속도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진들을 믿음의 증거로 열거한 후에 11:26에서 모세에 대한 말씀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도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봤는데 정작 그분께 받은 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였다고 말합니다.
모세를 그리스도와 연결한 본문에서의 의미는 그가 자기가 받은 수모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받은 수모가 가장 큰 재물, 즉 하나님께 받은 더 큰 상이 됩니다. 애굽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동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에 순종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 그 자신의 인간적 소망과 계획이 이뤄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보면 자신 안일과 형통과는 정반대로 쓰라리고 길었던 인고의 계절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가나안 땅에는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소지하고 그리스도가 걸어간 길 대로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셈입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살고 예수님으로 죽는 믿음을 너희가 이미 가졌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그분이 믿음의 실상이자 증거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며, 현재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내 속에 계신 예수님 때문이며, 앞으로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첫 부활에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이 정체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한 치의 변화 수정 취소 없이 지속될 것인데 그것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것, 즉 핍박받고 있는 일들이 믿음의 실상도 증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상의 정반대인 허상이며 증거는 오직 주님의 재림 하나라는 것입니다. 현실 삶이 중요하지 않으니 천국으로 도피할 것만 바라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조종과 농간 아래에 있기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주권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문화, 사조, 사상, 철학, 권세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계획이 개입되지 않기에 비록 겉으로 의로운 모습이 있어도 그 결말은 반드시 허망하게 끝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 중에 빠진 모든 인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인격적 개인적으로 화목하고서 사랑하는 관계부터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신자가 된 후로는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와 인도 아래에서 그분의 온전한 권능과 사랑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 개인에게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계획과 또 죽은 후의 부활은 반드시 이뤄지며, 인류 공동체적으로도 때가 되면 세상의 사악한 세력이 심판받고 하나님의 공의도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허다한 거짓 증인들
그렇게 살아간 믿음의 증인들이 히브리서 저자는 허다하게 많아서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합니다.(히12:1a) 그 증인들이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다고 말합니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12:1b)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 허다한 증인들이 믿음으로 행한 일은 죄를 벗는 일이었고 또 주님께 받은 자기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2:2a) 바라는 것들의 실상도 예수님이었으니까 히브리서는 신자가 믿음으로 바라볼 대상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소원 계획을 비전이라고 종교적으로 근사하게 포장해서 매일 그것을 상상해가면서 뜨겁게 기도해 이뤄내는 것이 믿음이라고는 히브리서 아니 성경 전체 어디에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기독교의 성장세가 주춤하고 조금씩 쇠퇴하기는 하지만 전 세계에서, 특별히 한국과 미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종교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그런 믿음을 가진 증인들이 허다하게 많아서 주변에 구름처럼 두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11장의 선진들처럼 살고 있는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자라는 허울만 쓰고서 미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아주 잘 봐주어야 자기 문제만 해결하려는 기복신앙 주의자들만 주변에 구름처럼 허다하게 있지 않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본문이 말하는 바와 전혀 다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도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진 줄 알았습니다. 비록 구전이나 쪽지로 그 말씀이 전해졌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대로 순전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죽기까지 싸우며 자기 앞에 맡겨 놓은 그분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이 서신을 읽을 네로와 유대교의 핍박을 받는 신자들도 아직은 신약성경이 본격적으로 회람되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게 된 자기들의 영생과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순전히 믿고서 순교까지 감당했습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성경과 이 서신에 비추어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믿는 바를 정확히 따져봤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정체 혹은 쇠퇴하는 이유는 성경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도 주님이 대신 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현실적 고난으로 호도하여서 교회에 오면 다 해결해준다고 큰소리친 목회자들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죄송하지만 일부 목회자가 성경을 본문의 경우처럼 정확히 가르치지 않습니다. 목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몰라서 가르치지 않았다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성경 진리는 다 배워서 알지만 교인 숫자만 늘리겠다는 인간적 욕심으로 교회에서 현실적 복도 풍성하게 준다고 사기 쳤다면 하나님이 먼저 그들부터 칠 것입니다.
간혹 이왕이면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 낙관적으로 믿으면 삶도 그렇게 바뀌고 하나님도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강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지병이 너무 괴롭고 심지어 자기 사역하는 데에 방해가 되니까 고쳐 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으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지금껏 일부 교회가 가르쳐온 적극적인, 정확하게는 기복적인 믿음이 전혀 먹히지 않은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이라고 시작했으니 바울은 자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내면의 음성으로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 응답은 치유 대신에 오히려 바울이 계속 아파야만 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 응답을 받고서 능욕 궁핍 박해 곤고한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을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요컨대 능욕 궁핍 박해 곤고가 하나님의 뜻이자 그분이 주시는 복이었습니다. 바울로선 그런 것들이 절대 기쁘지 않고 육신적으로 아주 괴로웠겠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너무 기뻤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믿음
신자들도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절대적 진리를 정확히 깨달아야, 최소한 자기가 읽고 있는 본문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모르겠으면 목사에게 묻고 또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말로 동의 수긍, 무엇보다 삶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만약 믿음을 갖는 목적이 잘 믿어서 복 받으려면 교회 안에 남아 있어선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현실 축복을 보장하는 종교는 물론이고 세상 처세술을 가르치는 곳은 구름처럼 허다하게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거룩한 공동체를 그런 탐욕적 세속적 믿음으로 더럽혀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기 이전에 신자 본인의 시간적 금전적 낭비인데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나 주중의 모임 등에 참여하려면 따로 시간을 내어야 하고 그만큼 장사 못하고 헌금도 내야 하니까 두 배로 손해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축복은 성경에 없습니다. 많은 신자가 그런 식으로 기대했으나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으니까,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녔는데도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구원의 확신은 없고 자기 믿음에 대해 제대로 설명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바 내용이 무엇인지, 아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정확히 모르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세상 종교 중에 기독교만큼 자기들 경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니 읽지도 않는 종교는 아마도 기독교뿐일 것입니다. 결국 신자들 책임이자 자기들 손해입니다. 주일마다 교회 마당만 밟고 돌아갑니다. 초대교회 베뢰아 교인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과연 진리일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 그분과 실제로 교제 동행하여서 그분의 거룩한 구원 진리가 실상과 증거로 신자의 삶에 드러나야 합니다.
물론 성경은 금방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책이므로 정말 열심히 세밀히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반 신자도 해석의 키를 예수님으로 잡아서 성령의 조명을 구해 천천히 묵상하면서 읽고 또 읽으면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에게 비춰봤더니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신자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현실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을 사탄이 조종 미혹하는 권세 아래 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 뜻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고 설명합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에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열쇠를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신자들을 계속 괴롭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재림을 실상과 증거로 이미 소지하고 있는 신자더러 바울처럼 본인은 괴로울지라도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들의 영적 멍에를 풀어주는 경주를 달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여서 구원으로 택한 우리는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본문대로 하자면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생할 수 있는, 장차 자연히 그럴 수 있는 몸이 이미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이 차고 넘치며 더 받을 복도 없습니다. 남은 일이라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리 사악하고 고통스러워도 신령하게 바뀔 그때를 기다리며 참는 것입니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으로 굳이 따로 더 노력할 것도 사실상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지금도 그분이 당신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줄 아는 것이 믿음이요,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현재 이 땅을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목표와 방향으로만 다스리고 있습니다. 평생을 주님과 함께 교제 동행하는 신자에겐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선이 넘치도록 임합니다. 보이는 현실은 주로 사탄에게서 오는 능욕 핍박 궁핍 곤고일 것이나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는 십자가 복음에 따라 세상만사와 신자의 인생이 주님에 의해서 거룩하게 다스려질 뿐입니다. 바울처럼 자기 앞의 경주를 열심히 경주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땅에서도 반드시 실현되고, 때가 되면 이 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하늘의 장막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6/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