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악령을 구분하는 법

조회 수 3721 추천 수 119 2009.05.15 19: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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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해서 구하라.  


2.3.1. 성령과 악령을 구분하는 법


예수님 공생애의 가장 큰 특성

예수님이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면서도 그 모든 상황에 적절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활력을 더 불어넣은 모습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감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좋은 것으로 주셨기에 분명히 그 자체에 그분의 선한 목적과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감정을 절제했기에 해(害)가 되기보다는 득(得)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에 충실했다. 불쌍한 자들을 살리기 위해 은총을 베푸는 일만,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일도 같은 맥락임, 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이 맡긴 일에 헌신하면 감정도 오직 그 일을 이루기 위한 방향으로 절제할 수 있다. 또 이웃에게 베풀기 위해선 자신보다 상대의 감정을 살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 일을 통해 진정으로 남을 살리면 자신의 감정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충만해진다.

말하자면 감정을 단순히 스스로의 정신 훈련으로 치유, 조절, 절제, 표출 하려 해선 너무나 부족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은 주신 분의 뜻대로 활용해야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아닌가? 최신 전자기기를 구입해 매뉴얼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작동하면 금방 고장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자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실천하고 자기를 희생해 이웃을 살리려면 혼자선 힘에 부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한두 번은 자신의 선한 도덕성과 경건한 종교성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두고는 그러지 못한다. 또 성공과 실패가 거듭되니까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볼 때에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는 일관성(integrity)이다. 당신의 소명을 실천함에 쉬거나 나태한 적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해도 당신의 소명과 그 실천하는 방식을 변경, 굴절, 왜곡, 타협,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생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유함을 누린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박해를 가하는 군왕들과 멸시를 퍼붓는 군중들 앞에서나, 당신의 도움을 시급히 요구하는 죄인과 병자들 앞에서나 여일(如一)하게 온전한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신의 내면에 이미 자유함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자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소명의 실천을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를 구해서 따랐기 때문이다. 소명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라면 성령의 인도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도 혹은 그 방도를 얻는 길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소명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에 반드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실천해야 하며 그러면 감정 절제라는 부수적 효과도 따라온다.

대부분의 신자가 가장 고민하는 사항이 바로 자기 믿음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말씀보고 기도하며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교육, 행사 등에 참여한다고 그 믿음에 온전한 일관성이 생기는가? 솔직히 잠시 은혜는 받지만, 그 은혜가 약하다는 뜻은 아님, 현실의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금방 사그라지고 초조와 불안이 따라오지 않는가?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는 온전한 자유함을 얻지 못한다. 오직 예수를 따라갈 때에 내면의 참 평강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신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신자를 변화 성숙시켜서 사람들 앞에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 아닌가? 신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신분으로 이미 바뀌었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분의 은혜가 충만해질 수가 없다. 예수님께 배울 세 번째 감정 절제 방법은 바로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첫 걸음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이 말로는 쉽다. 그러나 단지 종교적 수사에 그치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는 의미조차 잘 알지 못하는 신자도 꽤 있다. 솔직히 성령의 인도로 깨닫는 하나님의 뜻, 사단이 심어준 생각, 스스로 사고한 것, 셋 중에서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 거의 분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불신자 시절에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행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셋으로 따져 분별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니 하나님이나 사단이 외부에서 자기 생각을 바꾸거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믿음을 갖고 나니까 그 셋이 항상 혼재(混在)함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구별이 힘들어 곤혹스러울 때가 자주 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나 인간적 욕심에 따른 생각이다. 넓은 의미에서 사단에게 속한 생각이다. 신자는 또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여러 방안 중에 무엇을 선택할 지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주로 묻는다. 결국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과 사단의 방해 둘 중 하나를 구별하는 데로 모인다.

따라서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 전에 성령의 인도인지 악령의 꾐인 지부터 분간할 필요가 있다. 많은 신자들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초자연적인 신령한 능력이 나타나기만 하면 전부 성령이 하신 일로 간주해버리고 만다. 아니다.

사단도 얼마든지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거기다 사단인줄 확연히 알 수 있도록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다른 모든 수를 써도 안 되거나 당장 어떤 목적에 이용하려 들 때뿐이다. 더럽고 추하고 무서운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도망가기 바쁘지 않겠는가? 물론 불신자에겐 공포심을 유발해 아주 효율적인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신앙을 가진 자에게 그랬다간 도리어 역효과만 낳는다.

그래서 사단은 도리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다. 아주 경건한 종교적 행사를 주관하게 하고 심지어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서 나타난다. 광야에서 예수님에게조차 그렇게  행했지 않는가? 사단은 오직 신자를 속일 목적으로 천사, 도덕, 종교 특별히 능력 같은 선한 모습으로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다.  

신령한 능력이 나타났으니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들면 확실해지기 전까지 일단 부인하는 것이 영적 분별력의 시초다. 신자들마저 겉모습에 너무 쉽게 반하기 때문에 사단은 주로 그 점을 노린다. 가시적이고도 신령한 능력이 나타날수록 오히려 악령이 배후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 큰 능력과 은혜를 맛보고도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실제적 능력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금 신상은 그런 소원을 대리 만족 시켜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하나님은 가시적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령의 은사 가운데도 방언, 통변, 신유 등 가시적인 모습을 띄는 것도 있다. 초자연적 능력은 인간이 가질 수 없고 사단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같은 능력이지만 믿음을 가진 신자도 겉모습에 너무 속아 넘어가니까 사단은 가시적 방식을 흔하게 사용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음에도 제대로 믿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방식을 자주 쓰신다.      

이세벨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가 광야 깊숙이 호렙산으로 피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왕상19장) 그 때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11,12절)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 또 귀로 들리는 음성마저 아닌 성령의 깨우침으로 엘리야더러 당신의 뜻을 알게 하셨다.      

사단의 꾐의 가장 큰 특징

성령과 악령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 모습이 산출해내는 결과에 따라야 한다. 나아가 그 결과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나 다행스럽게 그런 분별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은 이미 성경말씀으로 그 기준을 제시해 놓았다.  

먼저 악령의 경우는 반드시 사람을 묶는다. 주로 불신자에게 흉측한 본래의 모습으로, 신자에겐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 나타나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혹시키려는 것이다. 사단은 사람으로 어떤 사안을 전체적으로 넓게 보아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잃게 만든다. 별달리 힘들이지 않고 자기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것이다.

묶인다는 것은 하나의 방향, 행동, 방법, 생각, 사상, 주의에 편도(偏道) 되어 고집스럽게 바뀌는 것이다. 당사자로선 그 하나가 절대로 잘못되고 나쁜 생각 내지 방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실제 모습도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우며 종교적으로도 경건하고 신령한 모습일 수 있다. 아니 겉모습을 보고 넘어가게 만들어야 하니까 더더욱 그렇다. 단지 특정한 일 하나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일 뿐이다.

현혹시킨다는 뜻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마치 진실인양 완전하고도 확고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 거짓이 들통 나지 않으려면 당연히 그것에 집착시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혹시라도 상대주의, 다원주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절대 오해 말아야 한다. 진리를 사수하는 것과 거짓에 집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진리는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사람을 살리지만 거짓은 악한 폐해만 만들어 내고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그 결과와 그런 결과를 산출한 목적을 살펴봐야 구분이 된다고 한 것이다.  

사단이 이브를 꾈 때에 어떻게 했는가?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3:6) 열매로 보이게 만들었다. 먹음직, 보암직, 나아가 지혜로운 것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브로 오직 선악과를 먹어야만 자신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 하나에 사로잡히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사단은 너무나 교묘한 책사(策士)다. 하나에 집착시키기 위해서 그 전에 인간으로 다른 것과도 비교하게끔 하는 특전(?)도 베푼다. 이브가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동산의 다른 실과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열매로 보였다. 눈에 콩깍지를 씌워서 다른 모든 것들과 비교해도 현재 직면하고 있는 사안이 가장 크고 중요하고 좋아 보이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나에 묶여서 끝까지 고집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자연히 파당이 생기고 분열을 불러 온다. 분열이 오면 또 필연적으로 시기, 분쟁, 분노, 미움, 저주가 따르고 그에 파생하는 온갖 죄악들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브가 범죄 하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또 인간끼리, 나아가 각 자가 자기 자신과도 분리가 생겼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 즉, 자기 생각이 사단에 넘어가 묶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처음에는 능력이 많고 천사 같은 모습에 현혹되었지만 그것에 집착하여 분리가 일어났고 그  결과도 자연히 애초의 분리가 더 벌어지는 모습일 뿐이다. 특이하게도 그 육체의 일이 현저하다고 했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가시적 모습에만 집착했으니까 그 결과도 그럴 수밖에 없다.

정말로 유의할 사항은 사단이 신자로 어떤 하나에 묶는 것은 그 묶음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에 묶이면 묶임 자체에 함몰되어서 다른 어떤 것도 못한다. 무엇보다 하나님 그분을 보지 못한다. 그 전에 그분에게 나아가는 길이 막힌다. 인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으로부터 멀어지게, 아니 반대편으로 몰아가는 것이 사단의 궁극적이자 유일한 목표다.

특이하게도 사단에 묶였어도 말과 행동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안에 예수가 없으므로 사랑은 실종되고 분열만 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해도,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니까 사실은 종교적 일에 불과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되지 않고 불균형만 양산한다. 성경을 절대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다.

또 하나에 집착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풍성한 은혜를 다 체험하지 못한다. 위에 인용한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도 육체의 일에 집착한 결과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 않는가? 특정한 한 가지 은혜가 가장 좋다거나 그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못 받는 양 착각한다. 바로 이단의 특징이 그러하지 않는가?

예컨대 교회 안에 서로 자기 쪽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파당이 생기고 법정 소송까지 가는 것은 모두 사단의 놀음에 놀아난 것이다. 양쪽 다 분명 선하고 의로운 일을 앞세워서 그런다. 이미 현혹 되었기에 자기들이 더 옳다는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 또 눈에 보이는 것에 넘어 갔기에 자연히 눈에 보이는 업적만 중요시하게 된다.  

사단은 화합, 관용, 용서, 사랑이라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명분마저 자주 동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가 빠진 채 그러는 것은 참이 아니라 거짓이나 변장된 것에 불과하다. 종교끼리 조건 없이 관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 대표적 예다. 관용하는 겉모습에만 묶어서 정작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에 묶인다는 것은 평강과 자유함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하나만 하고 있으니 마음 편하고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묶이는 것은 항상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성이 따르고 또 강제성이란 알게 모르게 상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 초조하다. 뭔가 나쁜 일이 더 생길 것 같은 염려가 끊이지 않는다. 반면에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더 좋아지는 것은 없고 겨우 불안만 가시는 정도밖에 안 된다.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하는 일에 자유가 있을 리가 없으며 또 자유가 없는데 어찌 평강이 따르겠는가?

예컨대 술 담배 그 자체로는 꼭 나쁘다고 할 수 없어도 중독 즉, 집착이 되니까 나쁜 것과 같다. 몸에 좋지 않아 끊으려 들면 이미 몸에서부터 금단 현상이 나타난다. 까닭 없이 초조 불안해진다. 술 담배가 사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단의 묶임을 가장 잘 비유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은 필요한 것이며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돈에 집착해서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돈이 없으면 그저 불안해지지만 아무리 채워도 그 불안이 없어지고 평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외부 상황에 대해 자연적으로 반응하는 일차적인 감정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그 감정 하나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사단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역으로 말해 사단은 분을 해가 지도록 품게 만들어서 즉, 그 한 가지 분노에 집착하게 만들어서 결국 분리와 죄악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악령의 인도는 재물, 권세, 명예, 지성, 건강, 외모 등 한 가지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항상 하나님보다는 사람과 일과 사상 등이 앞서게 한다. 자연히 분리가 생기고 그에 따른 부정적 폐해가 나타난다. 궁극적 목표인 예수를 멀리하게 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는 것, 즉 선하고 의롭게 여겨지는 모습을 확실히 보이게 하는 것이다.

성령 인도의 특징

이제 성령의 인도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다 나온 셈이다. 악령의 인도와 정반대되는 사항을 따지면 된다. 우선 신자를 절대 묶지 않는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으로 신자와 진정한 교제를 원하신다. 강제성이 개입되어선 인격과 인격의 온전한 교통이 이뤄질 수 없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진심과 소망과 열의를 갖고서 서로를 대하는 것이 참된 교제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후에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뜻이다. 죄악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또 인간끼리 어떤 강제성도 개입되지 않았다. 자유의지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경배했다. 선악과 금령이 자신의 자존심을 갉아먹는 귀찮은 훼방꾼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에게 넘어가 타락하자 그 영혼이 죄의 노예로 묶여버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의 반역 사건에서 보듯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풍요하고 안락하게 해줄 때만 하나님으로 모시고 경배했다.

다른 말로 자유의지의 기능이 정지된, 정확하게는 제한 된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 둘 중에서 자의(自意)로 택하여 기꺼이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는다. 어렴풋이 알기는 해도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보다는 자신을 치장하는데 그분의 능력만 동원하려 든다.

하나님이 주셨던 그 선한 자유의지가 그분을 완전 배제시키는데 사용되자 그분이 부재(不在)한 가시적 물질계 내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추구하는 데만 그 기능이 한정되었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 쾌락과 죄악을 쫓기에 바쁘다. 원죄 이후 사단이 공중 권세를 쥐고 모든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사단을 따르는 일에만 아주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사단의 그런 억압적 지배에 종식을 고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보내어 그 영혼에서 사단을 쫓아내었다. 말하자면 자유의지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졌다. 신자에 한해 일상 삶에서 하나님과 사단 중에 택하여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구원 받은 신자도 믿기 전의 타성(惰性)이 남거나 예수에게 붙어 있는 것을 등한히 하는 바람에 또는 스스로 택하여 사단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에게만은 하나님과 사단의 뜻을 정확히 분별할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불신자 시절에는 아무 고민 없이 자기 생각대로 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매순간이 사단과의 영적 전쟁인지라 그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성령을 항상 내주시킨 것은 그런 분별력을 돕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그분의 역사 또한 눈에 안 보이는 모습이 가장 큰 특징이라는 뜻이다. 이미 신자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평생을 떠나지 않는데 구태여 가시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실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또 너무나 기본적인 이유지만 그래야 신자가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그분의 뜻을 항상 찾게 될 것 아닌가?

성령의 역사에 가시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드물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이 사단에 비해 적거나, 성령이 신자를 사랑하는 열의가 사단이 신자를 방해하려는 열의보다 약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성령이 사단에게 모든 면에서 모자랄 리는 절대 없다. 신자가 자유의지를 사용해 스스로 감사하며 기꺼이 자신을 따르기 원하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이 빚는 결과에 비교하여 성령의 그것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그 특징이 무엇인가? 그 전부가 신자의 내면의 평강과 사람 사이의 화평이다. 눈에 현저히 보이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제다. 또 어떤 것에 집착되어 묶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이다.

물론 하나님이 신자가 전혀 보지 않도록 자신을 감추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기 전에 하나님은 세상 어느 민족도 보지도 알지도 상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이적들을 많이 누렸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이적과 음식 하나 없는 광야에서 먹고 마셨다.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실망에 빠지기 전에도 갈렙 산에서 엄청난 가시적 이적을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큰 이적 다음에 바로 침묵으로 돌입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혼동 속에 빠져버렸다. 참 오묘하지 않는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절대로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에 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보이는 것에 매이면 자칫 하나에 집착하여 분열로 이어지고, 나아가 보이는 현상 자체에 묶여서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이나 사단은 정작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사단이 보여주는 것은 그 보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다. 사람을 현혹시켜 하나님으로부터 차단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는 것은 그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것으로 인도하려는 당신만의 뜻이 있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으니 당신이 하나님임을 증명하려는 정도의 단순한 뜻이 아니다. 사단도 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는가?

엘리야의 경우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죽음으로 벌했고 대신에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숨겨 놓았음을 그로 알게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경우도 당신의 백성들을 사단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당신만을 섬기며 열방에 증거 하는 제사장 역할을 맡기려 하셨다. 둘 다 가시적 현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오직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셨다.  

성령의 첫째 역할

성령이 하시는 가장 첫 번째이자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예수를 주라고 인정하는 자는 성령이 임하여 그 인도를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비방한다고 했다.

바울은 이 말씀 앞에서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1절)라고 했다. 부정을 두 번 겹쳐 사용하여 긍정을 아주 강조한 표현이다. 신령한 것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알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2절)고 했다. 이방인일 때는 성령이 없어서 사단에게 묶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해 가장 먼저 또 크게 달라지는 점은 바로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아닌가? 니고데모가 구원 얻는 길을 묻자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다. 그 말은 바로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당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진리를 성령이 임하여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 마디로 구원은 예수님 당신을 믿어야 하는데 오직 성령의 인도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남이, 말하자면 그분의 임재와 인도와 깨우침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엘리야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은 주로 세미한 내면의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성령이 내주한 신자에게는 더더욱, 아니 당연히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령의 인도는 반드시 예수님 그분이 더 확실하게 증거 되는 모습이어야 한다. 우선 신자 자신부터 죄가 씻어지고 오직 그분을 따라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예수님의 사신으로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도 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사랑으로 섬겨서 완전한 화목이 이뤄지는 모습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물질계에 제한되어 사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현혹되기 쉽다. 사단의 가장 흔한 수법은 눈에 보이는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경건성과 능력이 가시적으로 개입되어 있어도 하나님의 인도라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악령은 사람으로 특정 사안에 묶어 집착하게 하여 분열을 낳고 죄악을 양산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찾지 않게 하고 한 개인, 일, 사상 등이 칭송 받게 된다. 보이는 현상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신자가 어려운 환경과 위급한 사건에만 붙들려 불안 초조하게 되는 것도 사단에게 묶였거나 성령의 임재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약해진 것이다.  

반면에 성령은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사안 하나에 묶지 않는다. 자유롭고도 인격적으로 신자를 대하신다. 그래서 신자 스스로 기꺼이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어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더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이끄신다. 신자의 현실적 형편과 상관없이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다. 또 신자가 죽더라도 성도 간에는 참 사랑의 섬김이, 불신자 이웃에게는 참 생명이 전해질 뿐이다.

한 마디로 악령은 신자도 포함해 사람으로 당장 직면한 세상의 일 하나에, 성령은 신자에 한해 오직 십자가 복음의 확장에 묶이도록 한다. 주지할 것은 사단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해야 안락과 평강과 자유가 보장된다고 속삭인다. 성령은 당장의 고달픈 상황을 고쳐줄 요량은(?) 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내면에 들려줄 뿐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8:32, 12:25)

5/15/2009
 


Sarah

2009.05.19 13:49:25
*.216.87.236

아멘~

archmi

2009.05.19 22:29:20
*.169.103.128

진리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아멘.

사라의 웃음

2012.05.06 23:18:11
*.109.85.156

자주 속게되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된 사단, 그로 인해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되고
그 보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게되고... 그리고 분리가 시작되고, 분리는
이웃과 또 자기자신과의 무서운 분리도 일으킴을 배웁니다.
말씀을 읽으며 늘 움찔 움찔 놀랍니다. 마치 죄를 들킨 것 같은.....

날마다순종

2020.08.10 17:08:55
*.14.99.2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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