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13-16)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가?
구원 얻는 믿음 (11)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구원의 절대적 원리
히브리서 11장은 통칭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데 많은 선진들을 믿음의 본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의 삶을 구체적으로 추적할 여유는 없기에 그들 믿음의 공통된 핵심을 설명한 본문을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이 “이 사람들은”이라고 시작했으나, 앞에서 거론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삶에 관해 8-12절에서 간단히 설명한 후에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 뒤에 거론된 선진들도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승계한 셈이므로 본문은 믿음 장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졌는지 진지하게 대조 확인해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구원에 관한 절대적 원칙 하나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그 성품, 속성, 능력에서 전혀 변화가 없이 동일합니다. 인간의 성정도, 특별히 죄에 찌든 영혼의 상태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두가 동일합니다. 나아가 세상과 인간을 사탄의 공중 권세 아래에 있도록 허락하신 이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원수 된 인간들을 죄 중에서 구원해내는 방안도 시대, 장소, 사람과 상관없이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시대 장소 인물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런 하나님은 인간이 의지할 수 없는 다중 인격자가 되어버립니다. 죄로 영혼이 타락하여 이성마저 왜곡 파괴되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선 큰 혼선만 생길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창조 때의 타락 이후부터 마지막 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까지 구원의 방안은 동일해야 합니다.
본문도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기도 전의 사람인 아벨, 에녹, 노아를 믿음의 본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선 모세 때에 가서야 하나님께 수여 받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은 당연히 구원의 기준이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구약시대에도 예수님이라는 구체적인 인물과 그가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과 나아가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 승천을 알 수 없었어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성경은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이 구원받았고(왕하5장), 모압 여인 룻은 예수님의 선조가 되었다고(룻4:18-22)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만 편애한 불공평한 하나님이라는 비평과 반박도 전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의 한국도 예수님은커녕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몰랐으나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오지나 북한에서도 확률은 아주 낮아도 이 선진들처럼 믿으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모르니까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여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양심은 인간의 영혼과 함께 부패하였기에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 악하기도 합니다. 지금 미국에선 LGBTQ를 차별하면 법을 위반한 죄이나 일부 국가에선 거꾸로 동성애자는 사형에 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나, 하나님의 절대적 뜻 안에선 나라 간의 전쟁은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무엇보다 어떤 인간도 그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윤리마저 온전히 지켜내지 못합니다. 모든 이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대로만 살았어도 세상은 벌써 유토피아가 되어 있을 것이나 실상은 오히려 정반대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유사 이래 세상을 타락시킨 가장 큰 요인은 윤리와 종교를 무기로 삼은 사회 지도층들의 교묘하고 음흉한 죄들이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기준에 합격할 자는 모든 세대에서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의롭다고 볼 수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자기들 탐욕과 교만을 채우려고 악용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두려워하는 자도 없고 그 발이 피 흘리는 일에 바빴던 것이 인류 역사라고 선언합니다.(롬3:9-18) 한 마디로 하나님을 등진 인간은 그분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간혹 예수님이 훨씬 일찍 오시고 또 오래 사셔서 더 많은 족속에게 더 빨리 구원의 길을 제시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여 수많은 이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따르게 한 유대인들조차 막상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거역 대적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 복음을 배척하는 자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많습니다. 아무 선행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그 알량한 인간 양심에도 위배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서 억울하게 구원받지 못했다는 불평은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완악한 죄인인지 드러내는 반증일 뿐입니다.
멀리 보고 환영한 약속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영적 시체가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만의 비상한 방안이 동원될 수밖에 없고 그것도 당신 쪽에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믿음 장의 예수님 이전의 구약시대 인물들도 바로 그런 구원 절차를 거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첫마디가 조금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모두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믿음을 갖는 목적인 현실에서 형통하거나, 최소한 고난을 해결 받는 것과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제일 먼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을 대비하는 차원이었습니다. 거기다 소망을 품고서 죽지 않고 믿음으로 죽었다고 하므로 죽기 전부터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같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인은 혈연 가문 같은 동질성을 지닌 뿌리가 없어서 삶의 모든 차원에서 차별대우 받으며 사는 자입니다. 나그네는 고정된 정착지가 없이 금방 왔다가 금방 떠나가는 삶이고, 무엇보다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둘 다 어느 곳 어느 사람들과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신실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고아처럼 이 땅에선 온전히 신뢰 의지할 대상이 마땅히 없는 외톨이 인생입니다.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것들을 멀리서 보며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원받지 못해 지옥 심판이 예정되어 있었다면 멀리서도 볼 수 없고 환영할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는 문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앞에서 유대인 신자들더러 예수님이 곧 재림한다는 약속을 붙들고 핍박을 견뎌내라고 권면했습니다.(히10:36,37) 저자가 한 문맥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했기에 같은 의미인데, 구약 인물들인지라 예수님의 재림보다 초림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와 같은 맥락의 표현입니다. 멀리서 보았기에 간절히 바랐으나 명료하게 보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환영했기에 그리스도가 와서 죄 중에 있는 인류를 구원해주신다는 약속은 확정적인 사실과 진리로 믿은 것입니다.
구약의 선진들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모습으로 구원해준다는 것까지 구체적으로 바라거나 믿은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자기와 닮은 선지자가 온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받았습니다.(신18:18) 아브라함도 마지막에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통과하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22:18)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직접적으로 홍수 심판을 계시받아서 그 일을 수행하는 일꾼으로 참여했습니다. 그 후에 더 이상 홍수로 심판하지 않고 다른 방식의 구원과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무지개 언약을 받았습니다.(창9장)
십자가로 구원받은 선진들
더 근본적으로는 다섯 사람 모두는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원시 복음의 계승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자기만 높이는 죄로 타락하여 사탄의 미혹 아래 있겠지만(그렇게 허락하겠지만) 장차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가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해서 그 멍에를 벗기고 구원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을 어긴 아담과 이브에게 죽음의 심판을 내려야 했으나 오히려 짐승을 대신 죽여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는 방식으로 구원해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인류의 죗값을 갚으심으로 구원해줄 것을 예표 상징한 것입니다. 최초 인간도 사실상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선악과 금령을 어기면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겼으나 막상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자 곧바로 수치심, 죄책감, 공포심 등이 엄습했고 아무리 스스로 노력해도 그것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선악과 금령은 절대적 진리였고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죄는 죽음 외에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지라 그분을 등지면 완전히 무력 무지해지며 무슨 일을 해도 기쁨은커녕 평안도 없고 대신에 갈증과 허무함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타락은 스스로 고의로 능동적으로 행했으나 그 후로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음에도 아담은 자꾸만 두려워져서 숲속 깊이 숨어들어 갔습니다. 그런 아담이 너무 안타까워서 하나님이 먼저 애타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대속 제물로 삼아 하나님이 자기들을 용납해주자 그들에게 비로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참 평안을 느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생겼던 것입니다. 결국 구원이 당신과 원수 되어 죄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받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점도 절감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담과 이브는 자신의 타락과 하나님이 구원해준 방식을 그리스도에 대한 원시 복음과 함께 두 아들에게 철저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바쳤으나 불행하게도 사탄의 종이 된 가인은 인류 최초로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 원시 복음은 하나님이 아벨 대신 주신 셋과 그의 경건한 후손에게 처음에는 구전으로, 나중에는 모세오경의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태초 때부터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그 구원 진리를 당신께서 택한 자에게 당신만의 방식으로 각각의 시대적 상황에 적합하게 조금씩, 조금씩 또 그 단계를 높여가며 깨우쳐 주셨습니다. 때가 차서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함으로써 창조 때의 그 약속은 모든 이에게 명확하게 보여서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에서부터 십자가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고 구약시대 내내 자라다가 골고다 언덕에서 완전히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구약의 선진들은 현실에서 보이진 않으나 말씀으로 계시받은 그 약속을 마음으로 믿으며 열매가 속히 열리길 멀리서 보고 환영한 것입니다.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진 줄 알았듯이, 메시아가 와서 구원해준다는 약속의 말씀도 그들은 이미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구약의 선진들도 사실상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이 미리 준비한 어린 양을 제물로 대신 받으시고 이삭은 살려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베풀어진 그 구원,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자기 눈앞에서 이뤄지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선언한 것입니다.
약속을 실현하는 삶
구약 선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삶에서 살아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첫걸음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지 않았다는 진리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만 되는 줄 압니다. 이 땅의 물질계와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인생의 전부이고 죽음으로 인간 존재는 완전히 끝난다고 믿습니다. 구약 믿음의 선조는 그 정반대로 믿었고 그 믿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독교 구원교리는 몰라도 그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고 또 그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신약 이후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의미도 이 땅만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았던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늘의 천국을 바라보며 산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람이 죽은 후에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와 그것을 부인하는 자의 삶은 정반대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임을 믿는 자는 현실에서 최고로 풍요롭고 화려하게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인간 사회가 정한 법률과 관습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남들에게 피해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형통만 추구하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사후에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천국을 지향하는 사람을 살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일을 감당한 후에도 술에 취해 죄를 범했고, 모든 인간이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일이 악뿐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에 공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살려고 두 번이나 마누라를 이방인에게 팔아넘긴 너무나 비겁한 자였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고 다윗은 살인에 간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모두는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현실적 궁핍함을 도와달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윤리적 종교적으로 힘껏 노력해도 수시로 죄로 넘어지는 자신들의 영혼에 아무 소망이 없으니까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하고선 자신의 비참한 영적 실상을 붙들고 통곡했듯이 아브라함도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고 나선 얼마나 자신이 처참하고 미워졌겠습니까?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65:3)라는 다윗의 기도가 그들이 여호와께 엎드릴 때마다 자신들의 기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애굽의 왕자면 인간 세상에선 최고의 신분으로 그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평생토록 이 땅에서 풍요 사치 안락 쾌락이 보장된 신분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리 바로의 궁정의 보화가 화려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기에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고 반대로 절망과 죽음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당당하게 궁정을 떠나서 그 후 80년간 광야의 쓸쓸한 길만 걸었으나 여호와와 동행하는 삶이라 그의 영혼에는 평안과 은혜가 넘쳤습니다.
한마디로 구약 선진들이 살았던 믿음의 삶이란 이 땅에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 현실을 하늘의 본향으로 가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자 미리부터 천국의 맛을 보는 천국 체험으로 삼은 것입니다.
두 종류의 증거
구약 선진들이 예수님이 오시기도 전에 이런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가졌던 것에 대해서 신학자 죠셉 맥도월은 두 가지 증거로 변증했습니다. 먼저 과학적 증거는 특정 여건에서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서 특정 결과를 맺는 실험 결과나 관찰된 자료, 사진, 물건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한 것, 아침 식사로 베이글을 먹은 것 등은 그런 자료나 증거물이 없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의심과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상식적으로 합당한 일이므로 그 사실 자체가 증거가 되는데 이를 역사적 합법적 증거라고 칭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살아 있는가, 그분이 온 땅을 창조했는가 같은 명제는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대신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는 말씀처럼 과학적 증거가 없어도 역사적 합법적 증거로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하늘의 본향이 있음도 도무지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역사적 합법적 증거에 의거해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19)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합법적 역사적 증거가 넘치니까 당신을 불신하는 것에 대해서 핑계 댈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향수가 심령 깊숙이 남아 있어서 굳이 과학적 증거나 변론이 필요 없이 우리는 그분의 연약한 피조물인 줄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나고 경이로우며 세밀하게 완벽한 자연의 이치만 봐도 이 땅은 나타나는 것으로, 즉 저절로 혹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살피고 또 자신의 인생길을 조금만 그분을 중심으로 반추 회상하면 그분이 거룩한 계획을 갖고 이 땅과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호 인도 간섭하는 줄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영원한 절대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 땅과 자신을 거룩하게 다스린다면 사후의 심판과 구원도 반드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후에 그런 일이 없다면 인생은 이 땅이 전부인지라 그분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땅의 삶도 자기 노력의 결과이거나 요행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죄를 지으면 도덕 교육과 종교 훈련이 없어도 곧바로 자신이 너무 추하다고 느끼며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저절로 생깁니다. 더 나아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는 바울의 고백에서 자유로울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럼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영적 실체를 인간 세상의 철학 도덕 종교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심령을 계속 두드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음성에 견주어 봐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겐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은 절대자의 심판대 앞에 절대로 온전히 설 수 없다는 것을,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아도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오직 그분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의 한국에서, 예컨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같은 인간 세상에서 최고의 의인일지라도 그 구원 여부는 오직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원리에 따라서 이뤄질 뿐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아니라 이름도 전혀 남아 있지 않는 하나님의 택한 선조가 천국에 올라갔을 수 있습니다.
현대 신자의 믿음
히브리서의 주제는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 당국 양쪽에서 가해지는 큰 핍박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인 신자들을 위로하려는 것입니다. 저자는 지금 구약의 선진들도 하늘의 본향만 바라보고 살았기에 이 땅의 일로 전혀 염려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변증합니다. 말하자면 이 책의 독자들에게 너희는 예수님과 그 부활 승천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와 유대 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은 종교적 영적 핍박으로 너희 믿음을 온전히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놓고 거역 대적하라고, 즉 다시 창세기의 선악과 금령을 아담처럼 위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완전히 죽음이요 곧바로 지옥 형벌입니다.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신자라면 썩어질 이 땅 쪽으로 걸음을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일부 극단적 이방 지역을 빼고는 종교적 핍박이 없어서 굳이 그렇게 인내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처럼 현실의 보화는 더더욱 큰 의미와 가치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세상의 불법 불의 부정에 동참하지 않고서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서야 하지 않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작금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기들과 똑같거나 더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고 죽은 후에 구원과 심판이 있음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아는데도 말입니다. 일부 신자들의 삶은 사실상 불신자와 같습니다. 모든 가치관이 자기중심이요, 이 땅 우선이요, 물질 추구이면서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믿음의 실상과 증거인 예수님, 즉 하늘나라 본향이 아예 없으며, 약속은 배워서 머리로만 알고 있지 멀리서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계속 하나님과 등져왔으나 어쨌든 본성적인 죄책감은 가졌습니다. 지금은 아예 그마저 없어졌는데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이라는 책으로 진화론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물질에서 와서 물질로 끝나고 이 땅이 전부라는 과학 이론이 발표되자 모두 다 그쪽으로 우루루 몰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실존이 부인되자 심판에 대한 염려가 벗겨지고 죄책감도 싹 날아갔습니다. 이 땅에서 제멋대로 신나게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부할 핑계는 없다고 했는데, 이젠 핑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예 없다는 과학적 증거를 찾았다고 오히려 떳떳이 자랑합니다. 성경은 전설 동화 미신이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드러나는 것만으로 되었기에 하늘의 본향도 사라졌습니다. 현대인들은 오직 인간 중심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일부 신자들도 이런 사조에 물들어서, 사실은 진화를 믿고 있기에 그들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후 심판에 대해 보험은 들어야 하니까 교회 생활은 근근이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의 본향을 완전히 부인하고 살던 자들이, 교회 안의 쭉정이 신자들도 포함해서, 죽을 때 가서는 하나님이 나를 용납해주실까 염려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 소망 염려가 다 사라진 상태가 되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모습과 가장 가까워지니까 그분에 대한 본성적인 향수가 다시 저절로 발동된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입에 거품 물어가며 그분을 대적하다가 혹은 겉으로만 믿는 척하면서 세상 사람처럼 살다가, 지옥 심판만 두려워서 후회한 것이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결국 이런 영원에 대한 염려를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인간이 물질에서 출발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역사적 합법적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길 외에는 인간에게 소망이 없는데 이 또한 합법적 역사적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은 예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구약 선진들 믿음의 마지막 열매로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바꿔 말해서 이 땅에서의 현실적 삶은 다른 이와 비교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벨은 인생에 열매를 맺어보기도 전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노아는 120년간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 멸시받았습니다. 그만이 멀쩡한 사람이라고 증명해줄 모든 사람들은 직계 가족만 빼고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서 우거하면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고 죽을 때는 자기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토굴만 소유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계속 원망 불평만 들었고 다윗이 왕이라 해도 그가 당한 수모는 우리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사탄에게 미혹되어 죄로 타락한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아주 싫어합니다. 신자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따르며 살고 있다면 그들은 신자를 절대 환영하지 않고 왕따 취급할 것입니다. 그럼 여러 측면에서 심지어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렇게 올바르게 사는 신자는 겉모습이 궁핍해질 수밖에 없어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된 속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까지는 몰라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신자도 세상과 사람과 사탄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물질로만 자랑하는 불신자와 다른 자랑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가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전혀 외롭지 않고 오히려 그분과 그분을 따르는 자기 인생이 자랑스럽습니다. 바로 그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증거입니다.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완전히 그리스도 중심 즉, 천국의 본향으로 바뀌었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6/1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