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6:8-11) 성화를 달성하는 간단한 방안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2)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8-11)
교회에 대한 상반된 인식
지난주에 인용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올해 초 조사에서 개신교인들조차 3분의 1이 넘는 37.0%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단체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기 마련인데도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사람은 보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러 예배에만 참석한다고 말하듯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고서 교회를 다닌다는 뜻입니다.
이 응답이 2020년 조사에서 22.4%였는데 지난 3년 사이에 무려 15%나 증가했고 합니다. 펜데믹에 대면 예배를 고집하여서 국가적인 방역 노력에 역행한 것이 교인들 눈에도 부정적으로 비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다 다른 교회들과 온라인을 통해서 비교해 봄으로써 미처 몰랐던 자기 교회의 단점을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틀림없이 교회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신앙 생활하는 속칭 ‘가나안’ 교인들이 더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선 이와 반대로 교회 문제 카운슬러인 샘 레이너 목사가 이번 주에 한 크리스천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미국교회의 미래가 낙관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하기를 펜데믹으로 인해 교인이 줄고 출석률도 떨어졌으나, 대신에 진정성 있는 교인들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년 8월의 조사에서 교인의 82%가 자기 교회에 만족하고 목회자들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응답했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미국의 그 조사에서 주목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해 순전한 믿음이 없는 쭉정이 신자들이 거의 다 빠져버렸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근사한 예배당과 잘 정비된 조직을 갖춘 지역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불려 나온 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로 따지면 신자 숫자는 사실상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남아있는 교인들은 펜데믹으로 오랫동안 모이지 못했기에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전 처음 겪는 대환난으로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도 새삼 절감했습니다. 매주 교회로 모여 진리의 말씀을 배울 수 있음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교회 부흥에 힘쓰고 삶에서도 복음을 자랑스럽게 실현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으로 일어난 전 세계적인 환난에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오묘한 방식으로 미국교회와 성도들을 당신께서 오히려 더욱 든든하게 세워주었습니다. 참 신자들이 모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애정은 아무리 현실 세상이 힘들어도 절대로 쇠퇴 수정 포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실현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항상 함께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18-20)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시간과 장소와 그 대상에 따라 다르게 역사할 리는 없습니다. 펜데믹이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의 조사 결과가 상반되게 나온 것은 그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보편적인 사고의 패러다임이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국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한국 신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비추어서 미시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소에도 한국교회의 이런 신앙적 성향이 드러나는데, 현실 삶이 풍요해지려고 최소한 골치 아픈 문제들을 없애려고 조급하게 하나님의 능력만 구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일단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그 후로는 자기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이므로 예수님과 영적으로 개인적인 교제를 이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교회 활동에 성실히 참여하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고 단순하게 믿습니다. 엄밀히 말해 그런 신자들의 진짜 주인은 재물이거나, 하나님과 겸해서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펜데믹 후에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어도 그들은 교회 회원은 될지언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닙니다.
알곡 신자 된 첫째 증거
정작 문제는 신앙 연륜이 오래되었고 순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입니다. 교회 출석 이후로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했어도 죄에서 전혀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도 죄의 본성이 남아있어서 완전한 성화는 평생을 두고 불가능하다는 진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의 열매는 열려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니까 아주 괴롭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저런 죄를 짓고 있고 여러 번 간절히 회개 기도까지 했는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은연중에 그 죄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며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절망에 빠집니다.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자라나는 일은 거의 포기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발버둥 칩니다. 성화에 아예 관심이 없는 쭉정이 신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성화를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슬그머니 한 곁으로 밀어 놓습니다.
이처럼 알곡 신자들마저 성화를 포기하다시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보다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 상황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야 할 신자가 죄를 지었다는 결과에만 너무 붙들려 자신을 쉽게 정죄해버립니다. 성화를 계속 실패했다고만 여기니까 사실상 성화를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셈입니다. 성화의 본질에 대해서 한국교회들이 조금 잘못 혹은 부족하게 가르쳐온 탓도 있습니다. 본문은 신자라면 누구나 괴로워하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분문을 살펴보기 전에 강조해둘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 한두 번 실패하면 자신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그 일부터 고쳐야 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정죄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을 순전히 믿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면 죄에 대해서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민감해집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흉악하고 파렴치한 죄는 범하지 않았어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려다 보니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짓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비록 왜곡되었어도 양심의 형태로 남았기에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 않았고,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남들도 다 그러니까 죄의식이 점점 옅어집니다. 나아가 절대다수가 자기와 같으니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여기다가 뉴스에 온갖 중범죄자들이 나오니까 자기는 최소한 평균 이상으로 의롭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믿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면 성령님이 내주해주십니다. 성령이 신자 개인에게 간섭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해서 구원을 얻게 해주십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신자에게 내주해서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게 자라고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을 따르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죄를 범했거나, 혹은 죄로 더럽혀질 수 있는 여건, 장소, 사건, 인물 등과 함께 하면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이전에는 죄를 잘 모르고 또 죄를 지어도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죄를 잘 알게 되고 죄를 지으면 바로 큰 죄책감이 생기고 또 죄라고 인식되는 종류가 아주 많아지며 그 추악함까지 절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웃이나 사회에 행동으로 손해를 끼치는 것은 죄의 극히 일부분일 뿐 죄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전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상대를 배려하며 위로한다고 권면하는 중에도 자기 의를 자랑하려는 교만이 숨겨져 있고,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을 도와주면서도 은연중에 상대를 무시 비하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취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잘못을 범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차원과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죄를 범하고 있고, 특별히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심령의 너무나 가난하고 추한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자신이 너무 싫어지고 예수를 믿어도 아직도 이 모양밖에 안 되지라는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끼는 것은 사탄에 미혹되어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일로 성령님이 은혜롭게 간섭해주신 열매입니다. 원죄의 멍에에 벗어나지 못한 본성은 여전히 살아 있으나, 죄를 감지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대폭 확장된 것입니다. 성령은 또 죄가 만들어내는 부정적이고 추악한 열매에 대해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컨대 이전에는 아파트 부정 청약으로 단번에 수억씩 버는 사람이 너무 부러웠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습니다. 이제는 간단한 교통법규 하나만 위반해도 마음이 괴로워졌고 돈을 벌지 못해도 불의에 참여하지 않은 자신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성화 실패의 원인
그런데도 신자가 성화에서 계속 실패하는 원인은, 사실은 실패가 아닌데도 실패라고 여기는 원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성경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권면하니까(히12:4) 문자 그대로 의지적으로 죄 하나하나를 이기려 듭니다. 젊은 과부가 밤마다 솟구치는 욕정을 이기려고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찔러서 피를 흘리는 그런 방식으로 성화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건 별로 고치려 시도해보아도 완전히 고쳐지지 않고,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니까 절망에 빠지고 거의 포기해버립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행하는 도덕적 훈련과 똑같습니다.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행동만 죄로 여기는 셈인데 불신자 시절의 사고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도덕과 종교의 연습으로 절대 온전하게 선해질 수 없으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성화는 매번 행동의 죄를 고쳐나가기 이전에 인생 전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일관된 방향성을 정립하는 문제입니다. 지난주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과 평생토록 교제 동행하는 삶이 성화라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해서 매번 죄에 완전히 이기라는 뜻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죄와 싸우는 노력을 최고 세기로 높이는 차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주님 쪽으로 변함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피를 흘릴 정도로 끝까지 죄와 끈질긴 싸움을 해야 하는데 대체로 피 흘리기 전에 포기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그것을 유발하는 인간 내면의 힘입니다. 세상의 어떤 존재, 심지어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탐욕과 교만을 채우려는 자기 속에 남아있는 끈질기고도 교묘한 성향입니다. 그 성향부터 예수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사탄도 어떻게든 신자를 하나님과 등을 지는 반대편으로 끌고 가려고 평생토록 쉬지 않고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제일 매력적인 유혹으로는 현실적 형통과 재물의 풍부함을 주겠다고 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했던 다윗마저도 평안해지자 충성스러운 부하의 아내와 간음했고 그 남편을 죽여버리는 죄까지 범했습니다. 반대로 고난이 닥치면 불신자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새벽 기도에 생전 출석하지 않던 신자가 나타나면 목사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데 틀림없이 그 집에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화에서 신자는 시쳇말로 조금 뻔뻔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가 짓는 모든 죄의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보는 데서 예수님을 향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불신자 시절과 달리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지고 또 아주 괴로워서 열심히 고치려고 노력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이미 그 삶의 방향을, 특별히 도덕적 차원에서 오직 예수님 쪽으로 고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의 자비 가운데 넘어지는 것이므로 그분이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고 기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수시로 죄에 넘어져도 자기 인생의 전체적인 방향에서 따져봐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인 줄 깨닫고 괴로워하는 것부터 성화의 삶을 제대로 시작했고 자기 속에 내주하신 성령이 역사해준 증거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나아가 죄와는 평생토록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고 단단히 각오해야 합니다. 비록 완전하게 이겨낼 수는 없어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괴로워하거나 부정적으로 볼 필요 없이 계속 싸워서 기어이 승리하겠다고 결단하고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시행해야 합니다.
부활에 연합하라.
본문에서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신분이 되었다고 합니다.(8절) 앞부분의 설명과 연결하면 그 일차적인 뜻은 부활 영생이 확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그런데 바울은 성화를 가르치는 맥락에서 부활을 언급한 것입니다. 로마서 6-7장이 칭의와 성화 중에 어느 것을 가르치는지에 관해서 신학자들 간에 의견이 나눠지는데 저는 주로 성화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여유가 없으며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칭의와 성화의 구원은 동시에 시작되어서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므로 본문을 포함한 6-7장을 굳이 둘을 구분해서 따질 필요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앞의 5장까지는 칭의의 구원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6장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1,2절)라고 시작합니다. 이미 구원 얻은 신자에 대한 권면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의미가 아무 자격과 공로 없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죄 중에 있어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죄를 지어도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죄를 많이 지으면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겠다고 착각하는 경우마저 생깁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죄에서 구원해준 것은 죄를 더 짓지 말라는 뜻인데 계속 죄를 짓는 것은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의미도 모르는 셈입니다. 아들이 잘못하면 아버지가 이번만 아무 벌칙 없이 용서해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단단히 야단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계속 용서해주는 부모는 없으며 만약 그러면 친부모가 아닙니다.(히12:7,8) 예수님도 간음죄를 지은 여인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주면서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명했습니다.(요8:11)
바울은 다시 죄를 짓지 말고 성화를 이뤄나가야 하는 첫째 이유로 예수님의 부활에 이미 연합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텐데 회개의 노력은 물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죄를 지은 채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가 죄를 당신과 함께 장사하고, 신자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 까닭입니다.(4절)
그래서 너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권한 것입니다.(11절) 비록 죄의 본성이 살아서 수시로 죄에 넘어져도 절대 성화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함께하는 예수 생명으로 인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바뀐 신분과 특권을 정확히 알면, 또 그래서 십자가 은혜를 다시 묵상하면서 매번 기도로 내주하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 죄를 점차 조금씩, 조금씩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명하기 전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고 권면했습니다.
가나안 신자의 잘못
유감스럽게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서 신앙 생활하는 가나안 신자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하나에만 연합한 자들이 꽤 있습니다. 자신은 죄에 대해서 평생을 두고도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않아도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는 계명에 넘어지는 때가 너무 잦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중의 한 사람인 오리겐처럼 스스로 고자는 될 수 없어서, 매번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오니 저를 용서해 달라는 고백만 하고 치웁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만 참여한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는 일에만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는 연합하지 못해서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반쪽 복음만 믿는 셈입니다. 부활은 어렴풋이 먼 장래에 이뤄질 궁극적인 축복으로만 여기고 현실 삶에 참 생명으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받는 회개만 계속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화를 이루려 열심히 노력하는 신자를 두고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모른다고까지 판단합니다. 자기처럼 죄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으니 계속해서 용서해달라고 고백하는 편이 성경 진리를 더 깊이 알고 영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간주합니다.
과부가 자기 허벅지를 바늘로 피가 나도록 찔러서 수절하지 못하는 행동의 죄를 범하진 않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속에 매일 밤 솟구치는 욕정은 절대 잠재울 수 없습니다. 그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새 신랑을 만나서 재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옮겨졌고 안식일 후 첫날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새 생명을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자기 죄를 정확하고도 깊이 인식하게 하여 절망에 빠트리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 저주에 눌리게 하는 것은 율법으로 충분했습니다.(롬4,5장) 신자는 죄에 져서 넘어질 때마다 골고다 언덕의 처형장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에게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하며 하나님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부활에 연합해 성령으로 그분이 함께하는 신자도 마찬가지로 죄에 계속 죽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곰곰이 따져보십시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아무래도 많이 의로워졌습니다.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죄를 싫어하게 된 것만 해도 아주 큰 진보입니다. 어쨌든 죄를 짓고서 괴로워지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그 죄를 이겨보려고 노력합니다. 또 그렇게 지속하다 보면 아무래도 죄를 짓는 빈도와 세기가 줄어들고, 다음에 죄를 지을 때까지의 인내의 기간도 길어집니다. 자기는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 안에서 분명히 더욱 거룩해지는 중입니다.
신자 속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평생토록 끈질긴 힘을 발휘합니다. 고달픈 현실과 세상 사람의 풍요와 형통이 부러워질 때도 많습니다. 교묘하고 음흉한 사탄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끝까지 신자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신자로선 인식하는 죄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성화에 실패했다는 자각도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많이 깨달으니까 죄가 너무 싫다는 인식도 질적 양적으로 더 풍부해집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고 싶어야만 행하는 존재입니다. 말로 타일러선 안 듣습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도 그러합니다. 죄가 정말로 추악하게 여겨지고 싫어져야만 고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또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사소한 차원에서라도 성령의 인도로 그 죄에서 빠져나오면 심령이 아주 상쾌해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선하신 인도에 따라서 죄를 이겨낸 작은 경험들이 쌓이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그 길을 조금씩 따라가는 일이 너무나 즐겁고 신이 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고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순전한 진심으로 섬기고 싶어집니다. 펜데믹 사태가 끝났어도 그 두려웠던 경험과 점점 고달파지는 작금의 모든 현실 상황 때문에 더더욱 갈 바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처럼 불쌍하고 애통한 심정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시작이 반이다.
현재의 교회 타락상에 비추어보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혼자 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 사정과 심정이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원래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 여러모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죄의 문제를 다루는 교회에서 받는 상처는 더 괴롭습니다. 어느 교회나 분명히 쭉정이 신자도 많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현재 진행형으로 구원으로 섭리하고 있는 사람들도 반드시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영적인 상처를 받지 않고 경건하고도 의롭게 믿음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생각 자체는 꼭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함께 모이면 자신이 미처 몰랐던 자신의 단점과 잘못부터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새롭고도 정확히 발견하여서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부분적일지라도 자신이 이미 극복하고 의로워진 모습으로 다른 이에게 성화에 대한 도전을 줄 수 있고 또 함께 격려하고 기도하며 서로 자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1)고 권면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도끼리 모여서 교제해야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집에 혼자 있으면 더 나빠지지 않을 수는 있어도 현재의 수준에서 더 자라기는 아주 힘들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엄격히 말하자면 가나안 신자는 자기 혼자 의로우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는다는 고상한 선비 정신은 조선시대 유교에선 큰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선 그만큼 교만한 죄도 없습니다. 주님부터 이 땅에 오셔서 인간사회에서, 특별히 종교적으로 가장 악하다고 평가받는 죄인들과 주로 교제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신자가 어떻게 혼자만 의로워지려고 고집할 수 있습니까?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회적 소명은 아예 무시하는 것이고, 더 심하게 말하면 한 달란트 받아서 땅에 묻어두는 꼴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이 쭉정이 신자는 물론이고 가나안 신자가 되라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무조건 교회로 모여야 한다는 단순한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일수록 성화를 거의 포기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는 죄에 대해선 죽었고 예수 안에서 산자로 여기라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11절)
성화의 첫걸음은 나는 할 수 없으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빌4:13) 그 능력이 문제와 고난을 기도해서 기적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신자는 다 건강하고 형통하여 부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은 하나님만이 소지하고 당신만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행사하십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어떤 능력을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죄와 사탄을 이기고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설 수 있는 성화의 능력입니다.
개신교인들조차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으나, 한국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역사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번 주에 펜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열린 한국 CCC(대학생선교회)의 합동 수련회에 폭우와 폭염이 몰아쳤는데도 수많은 청년이 모여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알곡 백성의 숫자는 줄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세워주셨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반이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성화를 거의 포기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이뤄나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다시 시작만 하면 거꾸로 반은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100%의 완성은 되지 않으나 날이 갈수록 더욱 은혜롭고 기쁘고 즐거운 경건과 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굳이 교회의 신뢰도를 나서서 변증하지 않아도 됩니다. 날마다 기쁨과 감사로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고 있으면 그분의 영광이 자연스레 신자를 통해 주변에 번져 나가게 됩니다.
(7/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