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는가?

조회 수 6377 추천 수 166 2004.06.09 20:16:09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는가?

[질문]

어느 교회나 어느 훈련을 가도 빠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재정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그 중 십일조에 관하여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분이 성경에 기록된 십일조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신 것을 접했습니다.

십일조는
1. 하나님이 정한 곳에 드려야 한다. (구약의 성전)
2. 레위 지파에 주어야 한다.
3. 토지의 소산으로 드려야 한다.
4. 돈으로 드리면 안된다.
5. 흠 없고, 온전한 것으로 드려야 한다.
6. 구약 백성의 죄와 관계가 있다(대속의 의미)
7.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림자이며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신26:12, 느10:37, 말3:10, 마23:23, 눅24:44)

이러한 십일조는 이미 우리는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는 십일조의 개념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십의 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십일조는 연보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하며, 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이다.  레위 지파에 대한 의견도, 오늘날의 목사의 직분을 레위 지파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확인해보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상기 내용에 상당히 수긍이 가는데요. 그 동안 배워왔던 내용과 차이가 있어서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예수님 이후 십일조의 개념은 없어진 것인가요?

[답변]

십일조는 많이 바칠수록 좋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국에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은 목회 몇 십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성경으로만 푸시고 개인적인 명예와 영광은 전혀 추구하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교회 운영에 있어 금전적으로 너무나 투명한데다 성경만 계속 강해 설교하므로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이 아닌 이상 따로 헌금과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이 한 번은 십일조는 많이 낼수록 좋다고 설교 중에 말씀하셔서 모든 성도들이 깜짝 놀랬습니다.사연인즉 십일조를 10만원 내면 한 달 수입이 백만원이라는 이야기이고 백만원을 내면 천만원이 수입이라는 뜻입니다. 십일조를 많이 내어라 또 내어야 복을 받는다는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미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내므로 십일조를 많이 낸다는 것은 수입이 그 만큼 많아진 것을 반영하므로 당연히 십일조를 많이 내는 쪽이 적게 내는 쪽보다 나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연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내는 것입니다. 이런 뜻 외에 교회가 금전적 필요에 따라 더 많이 거두어 들이기 위해 어떤 형태가 되었든 헌금을 강요하거나, 신자가 바쳐서 더 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십일조 하는 것은 헌금으로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고 그 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질문자께서는 “십일조를 넘어서(조누가 지음, 베틀 북 출간)”라는 책을 보신 듯 합니다. 저도 사서 읽어 봤는데 공감이 가는 내용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부분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누구나 잘 아는 내용으로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자기들 치부와 권력 유지 수단으로 오용하기 위해 백성들을 오도(誤導)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 또한 그 일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참여한 죄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라기서를 이스라엘 전체를 부르면서 말씀을 시작하셨고 제사장을 야단치신 틈틈이 백성 전부에 대해서도 경고한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모두 문자적인 해석에 너무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는 어떤 자구의 사전적 정의보다 그 단어를 사용하게 된 저자의 의도를 당시의 상황과 연결해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이 우선해야 합니다. 원어의 뜻을 살펴 보는 이유도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보자는 것인데 자칫 원어의 뜻만 너무 고집하게 되면 그것조차 원어의 문자적 해석에 그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어의 문자적 의미, 문학 장르에 따른 해석, 문화사회적 배경, 저자의 의도, 앞뒤 문맥의 주제 등등 모든 분석된 자료들을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주제와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 규정에 드러난 문제점들

이런 맥락에서 질문자께서 특별히 요약하신 십일조에서 문제가 된 항목에 관해 먼저 간단하게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

하나님의 정하신 곳 구약의 성전에 드려야 하는 데 성전이 없어졌으니 안 바쳐도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은 성전과 회당과 교회가 생성된 시대적 상황과 그 역할을 율법에 대비한 복음이라는 단순화 된 교리로만 해석하려 듭니다. 십일조를 정해진 장소인 성전에 바치라는 것은 동물 희생제사로 죄 씻음을 얻는 성전 제도를 지정해서 하신 말씀인데 이제 복음으로 그 제도가 폐지 되었으니 십일조도 같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성전에 바치라고 한 것은 당시로선 회당과 교회가 없고 성전뿐이었으니 성전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성전에 바치라는 뜻은 제사장 개인에게 사적 용도로 바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에 공적 용도로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목적으로만 바쳐진 물질을 쓰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그들만의 공동체는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형태와 조직을 가지든 또 그 사역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지라도 이 원리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전, 회당, 교회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와 교육과 전도와 교제와 구제를 위해 모이는 공동체이며 그런 일을 수행하기 위해선 물질적 수요는 필수적입니다.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땅의 소산

십일조를 땅의 소산 곡물과 희생 동물로 한정시키는 것도 성전 제사 제도에 치우쳐 해석한 결과입니다. 나아가 성경에서 말하는 ‘땅’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습니다. 땅이란 토지의 의미도 있지만 성경에서는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기업(基業-heritage)-구체적으로는 생업의 기반이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고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에게 땅을 분배했습니다. 죄악의 땅에서 사단의 백성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거룩한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광야에서 유리하던 자기 백성들에게 이제 현실적인 생업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게”(수5:12)된 것입니다. 광야에선 생업이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하나님이 생수와 먹을 것과 심지어 고기도 책임져 주었습니다.-“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신8:4)

성경은 가나안 땅에 들어 온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8:7-9) 이 표현에 따르면 땅은 백성들이 먹고 살 생업 전부를 의미합니다. 농업, 과수, 목축뿐 아니라 동과 철 같은 광산업도 땅의 소산입니다. 또 “네가 먹어서 배 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8:10)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모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들 생업을 받아 살고 결실을 거두게 되며 바로 그 결실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시에 성경은 십일조에 대해 분명히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 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 왔고"(대하31:5b,6a)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열 두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지파마다 그 소산물이 다 달랐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정말 광업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할 땅도 있었고 간혹 어떤 곳은 땅의 소산이 전혀 없어 상업과 무역을 영위했을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십일조를 안 바쳐도 된다는 논리가 되면 하나님의 공평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둘 째 치고 상기 신명기 8:10의 말씀에 위배되는 결과가 되지 않습니까?

레위인도 땅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백성들로부터 받은 것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했습니다.(민18:26) 따라서 이 규정은 바로 자기 기업의 열매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레위인이 드리는 십일조 헌물 자체는 여전히 땅의 소산물이지만 그것이 생긴 경위를 경제학적으로 따지면 자신의 생계 유지 수단 즉 생업으로 생긴 소득입니다. 그럼에도 땅의 소산을 땅에서 직접적으로 경작한 산출물에 제한 시킨다면 이야말로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는 꼴이 됩니다.성경은 분명히 성전이 집에서 거리가 멀 때는 돈으로 바꾸어 갖고 와서 다시 제물을 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4:24-26) 이때도 바쳐지는 물건은 레위인의 경우와 같이 땅의 소산물이지만 바치는 자가 소유한 땅의 소산물은 아닌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경우(창4장) 둘 다 자기 생업의 소산을 바쳤는데 앞 뒤 문맥을 잘 따져 보시면 하나님은 제물의 종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바치는 태도를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4,5) 분명히 아벨과 가인의 이름이 제물보다 먼저 언급하셨기에 그들의 신앙 상태 즉 제물을 바치는 중심을 하나님은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또 만약 이 사건에서 피 흘림의 동물 제물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문제를 삼았다면 율법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의 규정을 따로 두실 이유도 없습니다.

레위 지파에 드려야 한다

레위 지파가 없어졌으니 지금은 십일조를 안 바쳐도 된다는 주장은 무리입니다. 레위 인에게 드리라는 것은 성전에 이미 바쳐진 십일조를 사용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 제물을 바쳐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는 구약의 제사법과 연관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수13:33) 본문에서는 ‘땅’을 주지 아니하였다고 표현하지 않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땅을 이용한 산업이 생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므로 땅이란 의미가 기업 즉 각자의 생업을 대변했습니다. 또 레위 지파에게는 생업의 기반이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일반인(레위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두 지파)들이 영위하는 세속적 일로 먹고 사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기업이라고 해서 기도하고 제사만 잘 지내면 하늘에서 만나를 뚝딱 떨어지게 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다른 지파에서 바치는 십일조를 통해 그들을 먹고 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민18:20-22)

이처럼 성경에서 십일조를 레위인과 직접 연결해 언급할 때의 근본적인 뜻은 구약의 제사 제도라는 영적 의미와 무관하게 그들이 현실의 생업이 없었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의 목사나 사역자들도 하나님이 분깃이 되어 세속의 생업 없이 오직 사역하는 일에만 전념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들은 구약의 레위인과 같은 신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계는 성도의 십일조를 통해 채워져야 한다는 십일조 고유의 뜻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십일조를 언급하면서 다른 지파가 회막에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아주 엄격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직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과 신성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목사 대우 잘못하면 벌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제치고 직접 제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 절차상의 잘못보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는 제사의 근본 의미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삼상13:8-15, 15장 참조)  

사울은  분명히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삼상13:9) 제사장 대신에 자기가 제사 드린 것 외에는 제사법의 제물과 절차에 관한 규정대로 다 지켜 행했다는 것입니다. 아각을 진멸하라는 명령에도 비슷한 내용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삼상15:1-9) 그러자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이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고 사울을 견책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종류와 절차가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울이 직접 제사를 지냄으로 레위인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하나님의 명시적 계명을 어긴 잘못은 아주 큽니다. 그러나 그 저지른 잘못의 핵심은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 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13:11,1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울이 불안해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제사라는 형식만 갖추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리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술이나 우상의 수준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사울의 잘못된 제사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레위인을 통해 제사의 내용과 의미를 엄격하게 보존, 유지, 계승하시겠다는 것이지 단순히 제물의 종류나 제사의 절차를 관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일을 제대로 한다면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데 현실적으로 성도들의 십일조라는 방안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회자들의 생계가 꼭 십일조가 아니더라도 주일 헌금만으로도 충분히 보장되는 현대에 와서도 꼭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인데 이는 차후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돈으로 드리면 안 되는가?

이 문제는 순전히 구약에서 하나님이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들은 십일조에서 면제해 주었는가 아닌가에 달렸습니다. 땅을 포괄적,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이 성도 개개인에게 허락하신 기업으로 보느냐 아니면 문자적, 실제적 의미로 직접 소출을 내는 토지로 보느냐의 차이에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 성전 마당에 있던 환전상과 제물을 파는 장사치들을 청소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이 구약의 제사제도를 부인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직은 십자가 복음이 이뤄지기 전이라 구약 제사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주님은 문둥이 같은 병자들을 치유해 준 후에 성전에 가서 대제사장에게 이야기하고 결례를 올리라고 당부했습니다.

성전 청소 사건은 희생제사라는 율법 자체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환전과 제물 장사를 통해 폭리를 취하고 또 그곳에서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 상업주의, 기복주의, 형식주의에 빠진 당시 종교 조직을 청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강도의 굴혈로 바뀐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시려 한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여호와를 진정으로 신뢰하는 중심을 바치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대로 된 온전한 십일조와 흠 없고 점 없는 희생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제 역으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바벨론 유수 시절 이후 로마 제국의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내려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그 먼 나라에서 제물이나 십일조로 바칠 곡물과 동물을 들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또 타국에서 오는 그들 중에 농업, 목축 뿐 아니라 목공, 장색, 상업, 무역업, 광업 등 온갖 직업을 가진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땅의 소산물인 생업의 열매를 팔아 현지 돈으로 마련해 갔고 와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이스라엘 돈으로 바꾸어 성전세로 바치거나 희생제물을 사서 바쳤습니다.

그럼 그들이 현지에서부터 땅의 소산을 갖고 와야만 합니까? 상업, 광업 등에 종사하는 자는 제물도 바칠 수 없는 것입니까? 일반적 제물은 제쳐두고 십일조만 그런 규정이 적용된다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외국에서 온 농업과 목축업 종사자들도 결과적으로 돈으로 바친 꼴이 되었지 않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제물의 종류나 절차로 인해 더 많은 성도가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시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장사치들과 이권을 나눠먹지 않고 순수하게 비영리로 환전해 주고 제물을 원가에 팔았더라면 예수님이 성전을 구태여 청소하셨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렇게 온전한 제물을 통해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면 주님이 꼭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바로 이런 상황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신14:24-26) 타국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선 환전상이, 이스라엘 경내의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을 위해선 제물을 파는 사람이 있어야 했으며 그들과 돈으로 거래하는 것을 성경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돈으로 바치는 십일조는 틀렸으니 지금은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논리의 순서가 틀렸습니다.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의미가 지금 살아 있느냐 없느냐를 먼저 따져야 하고 살아 있다면 돈으로 바치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게 됩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생업을 통해 들어 오는 수입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 논리대로 하면 역으로 지금도 헌금과 십일조는 물건으로만 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흠 없고 온전한 것으로 드려야 한다.

제물의 외형적 종류와 바치는 절차는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대로 정확하고 온전해야 한합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율법에서 제물에 관해 그렇게 세밀하고 엄격하게 규정해 놓은 만큼 하나님께 경배하는 의미와 가치를 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종류와 절차만 자꾸 따지는 것은 역으로 무조건 바치기만 하면 복을 주신다고 착각하는 데서 빚어집니다. 하나님께 비나이다만 하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채워주는 이방인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와 보호가 신자에게 미치며 그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어져야 합니다.  

신자가 바치는 십일조는 주님의 선하신 인도와 보호를 통해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 나라가 더 강력하게 이 땅에 펼쳐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바칩니다. 당연히 흠 없고 온전한 것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외형적 모습이 아니라 십일조에 바쳐진 성도의 심정과 믿음의 내용이 흠 없고 온전해야 합니다. 동전 두개를 바쳐 주님께 칭찬 받은 과부의 예를 보면 압니다.

오직 돈만 만지는 것이 생업인 은행원으로선 십일조든 헌금이든 돈으로 바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매주 토요일 한국은행에서 방금 나온 아무도 만지지 않은 새 돈으로 바꾸어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발적으로 그러고 싶은 마음까지 말릴 수는 없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히 자기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은행원이 감기가 들어 결근하는 바람에 한 주는 갖고 있던 더러운 돈으로 드렸다고 하나님이 정성이 부족하구나 하고 야단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기쁘게 받으시고 그 자녀 되는 신자가 몸이 아픈 것을 염려해 주십니다.

십일조는 구약 백성의 죄와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림자이며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성경의 전 구절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내용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각 구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오해해 적용을 잘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신약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는데 구약을 해석할 때에 특별히 그렇습니다. 대체적으로 신약은 명시적으로 복음을 직접 설명하고 있으나 구약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 구절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라고 하는 뜻은 일단 그 구절이 고유로 의미하는 내용을 먼저 살핀 뒤에 그 해석이 맞는지 틀린지를 십자가 원리에 비추어 판단해보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와 문맥상의 주제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드러나는 구절 자체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와 상충이 되지 않으면 그 해석은 옳은 것이며 또한 가장 우선적인 뜻이 됩니다. 반면에 모든 구절을 억지로 복음에 꿰어 맞추어 무조건 복음의 직설적인 내용이 들어가야만 한다는 식으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또  그렇게 한다고 다 옳은 해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비유나 상징의 표현이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 예표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그런 해석은 무리를 낳을 소지가 많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도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대속의 진리를 예표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명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그 말씀 가운데 이미 다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 뜻이 복음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복음으로 심오하게 꿰어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십일조를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앞에서 살펴 본 대로 기업이 없는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한 것입니다.(민18:21-23) 둘째는 안식년을 기준하여 제 3년과 제 6년에 제이의 십일조로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돕는 구제비로 사용했습니다.(신26:12-15) 십일조가 전임 사역자의 생계비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 충당하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과 어긋나지 않으므로 그 자체가 바로 가장 정확한 해석입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그 구속에 관해 직접 연관되는 예물은 아닙니다. 그런 제물에 관해선 율법의 속죄제와 대 속죄일의 규정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레4장, 16장 참조) 십일조에 관한 모든 논쟁과 실제 적용하는 문제에선 하나님이 성경에서 명확하게 밝히신 이 두 가지 뜻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나머지 여려 해석과 적용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며 참고 사항에 해당됩니다.  

십일조가 신약시대에도 유효한가?

간혹 예수님은 십일조를 요구한 적이 없으니 신약 시대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라고 물었을 때에 주님은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21절)고 했습니다. 10%가 아니라 100%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은 그 청년더러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온 힘과 뜻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자신의 인생과 삶과 존재 전부를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도 잘 바치지 않고 또 그것이 옳으냐 그르느냐 논쟁하는 오늘 날의 신자가 과연 이 말씀 앞에 제대로 설 수 있겠습니까? 서로 얼마를 바쳐야 옳으냐 따지고 있는 우리를 보고 주님은 얼마나 한심해 하겠습니까?

나아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고 직접 십일조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를 예수님이 폐한 적이 없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금액이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와 인과 신이 포함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따로 더 생각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성경의 어떠한 규정도 강제적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십계명 중 첫째 가는 계명 “너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도 강제로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특별히 제사장 나라로 선택한 이스라엘에게마저 그랬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 혼자서 안타까워 하고 애타게 기다리며 인도하고 간섭하셨을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2,3)라고 탄식했습니다. 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도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말2:10-17 참조)라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계명에 관하여 의무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사실은 신자가 벌써 속으로 부담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안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십일조의 규정은 두시되 강제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일조의 정신은 버려두고 형식적으로 모양만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의무 규정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무적으로 억지로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은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습니다.(말1:10) 부담을 갖거나, 바치면 복 받고 안 바치면 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드리는 십일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순전히 가정으로 말해 십일조가 성경 규정상 의무적이지 않으며 신약시대에 무효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런 것  따지지 않고 계속해서 십일조를 부담 없이 하는 자는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반면에 신약 시대에도 유효한 강제 규정으로 공인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정확하게 십일조를 하긴 하는데 부담을 느끼며 내는 자의 헌금은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 오면서 율법의 동물 희생제사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영원한 구속이라는 은혜로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폐지된 것은 동물의 희생 제사라는 형식 뿐이지 그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 자체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죄는 피 값으로만 갚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는 영원 불변합니다. 십자가에 주님이 자기 대신  모든 피를 쏟아 내고 죽으셨다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만이 구원 받습니다. 그 믿음은 신자가 자신도 함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으로 거듭 나는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생기는 믿음입니다.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믿어 보기로 해선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구원해 줌에 있어 피흘림의 제사 정신은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가 현대에도 유효한지 알아 보려면 그 계명을 주신 정신이 지금도 살아 있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만약 그 정신이 아직 유효하다면 시대적 상황, 예배의 형식, 현대인의 삶의 조건, 교회의 대형화, 심지어 개인적으로 치부하고 권세를 잡으려는 잘못된 목회자가 있다는 이유로 십일조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먼 희생을 드리고 십일조로 가증한 행위를 했더라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문제는 항상 신자가 하나님 뜻대로 제대로 지키느냐이지 제대로 안 지켜지고 여러 문제점이 파생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는 않습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교사 역할을 하지 제사장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부분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의미의 제사장 역할은 끝났지만 기도로 성도의 죄를 주님께 중보 하는 제사장적 의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라고 하신 하나님의 근본 뜻은 그 맡은 역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레위인들에겐 땅의 상속이 없어 고정수입이 없었다는 현실적 이유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교회 사역만 전담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생활비를 따로 벌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열 가정 당 레위 지파 한 가정을 배당했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열 가정에서 1/10 씩 받게 되면  레위 가정은 정확하게 열 가정의 중간 평균 수입을 갖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지역 사회에 구제활동을 펼쳐야 합니다. 미네소타에 있는 한 미국교회가 급진적으로 부흥한 예가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헌금의 반은 무조건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를 섬기는 활동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반으로 교회 운영과 사역에 사용했습니다. 이 교회는 십일조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한 적이 전혀 없음에도 재정적으로 부족하거나 신자들의 불평으로 사역이 막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만약 모든 교회가 이 교회처럼 하고 있다면 누가 십일조를 문제 삼겠습니까? 문제 삼을 사람도 없고 문제 삼아서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또 자발적으로 십의 이조, 삼조 얼마든지 더 힘에 넘치도록 낸 사람도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럼 십일조의 정신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십일조 논쟁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재의 실정은 어떠합니까? 그렇게 하는 교회는 극히 일부 정말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 십일조의 정신을 교회에서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맞지 않습니까?

현실적인 교회의 재정 문제도 한 번 따져 봅시다. 예를 들어 100 가정이 나오는 교회에 한 분의 전임 사역자가 있다고 칩시다. 단순 산술로는 십일조를 꼭 낼 필요까지 없습니다. 담임 목사 생활비는 최소 열 가정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100가정 중에 십일조를 제대로 내는 가정이 몇 가정 되겠습니까? 거기다 교회란 담임 목회자 사례비만으로 운영되지 않습니다. 벌써 100가정만 되어도 교회 건물 유지비, 부교역자 사례비, 전도, 교육, 교제, 선교 등에 아무리 절제하고 검소하게 지출한다고 해도 상당한 비용이 필요합니다. 십일조 내는 가정이 몇 십 가정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십일조를 강조해도 그렇게 될까말까 아닙니까? 결국 대형 교회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십일조의 실제적인 효용성이 살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또 순전히 역설적으로 따지면 신자들이 십일조 내기 싫어서 대형 교회로 모인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십의 일은 너무 과하지 않는가?

특별히 십일조가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전체 수입의 10%까지 헌금해야 하면 너무 과도하지 않느냐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단된 것 같습니다. 현대 국가는 국민의 최저 생계 뿐 아니라 노후 대책과 건강까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에 국민이 정부에 내는 세금 부담이 상당합니다. 또 갈수록 생활이 복잡 다양화 하면서 준조세 같은 각종 공과금, 범칙금에 기본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경비는 자꾸 늘어납니다. 나아가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문화적 여유가 풍부해져 시대적 조류를 쫓아 뒤쳐지지 않기 위한 비용이 기초 생활비보다 오히려 더 많이 소요됩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하면 수입의 10%는 너무 과한 것 같기에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교인이라고 해서 속세를 떠나 무소유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 뜻에 비추어 비성경적입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다른 어떤 세상사에도 마찬가지지만 부담감과 강제성은 항상 함께 등장합니다. 마치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십일조도 내는 데 부담을 느끼는 쪽과 꼭 받아 내어야 하는 쪽은 서로 상충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꼭 받아 내어야 하는 쪽은 십일조는 율법을 받기 전 아브라함 때부터 항상 있어 온 하나님의 강제적인 규정이라고 주장하고 반면에 부담이 많다고 느끼는 쪽은 어떻게 하든 그에 반대 되는 성경적 근거와 이유를 찾아 냅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대로 하나님은 어떤 계명을 반드시 지키도록 강제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십니다. 그 분은 신자의 외모를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리 선한 신앙적 행동이라도 강제성과 부담감이 내포되면 제사요 외모로 흐르게 됩니다. 따라서 십일조에 아무리 훌륭한 교리적 설명을 갖다 부쳐도 그 실천에 있어 강제성과 부담감이 개입 되어선 안 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강제 규정을 용납할 수 없으니 폐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또 다른 쪽의 강제가 되며 십일조를 잘 하고 있는 분들에게 역으로 부담감을 줄 소지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강제성과 부담감을 제거하고 남는 것이 믿음이며 그 반대로 또 믿음이 바로 서야 부담감과 강제성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바르게 작동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히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절묘한 수치 10%

믿음의 문제이니까 더욱 성경을 잘 따져 어느 것이 맞는지 확정 지어야 한다고 반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구약에서 십일조의 명시적 규정이 10%가 아니라 5%(그 때는 십일조라는 명칭이 아니겠지만) 혹은 그 이하로 되어 있었다면 지금같이 시비가 분분했을까요? 어느 누구도 따지려 들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게 따지는 사람을  더 이상하게 바라 볼지 모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십일조에는 너무나 절묘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누차 지적한 대로 십일조에서 복잡한 교리적 연관성을 따지지 말고 나아가 신자에게 지어지는 강제성과 부담감도 다 제외시켜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십일조란 신자 스스로의 자발적 결정에 맡겨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랬을 때에 마음에 부담을 느끼면서 자기 믿음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하고도 최소의 한계치가 수입의 10%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계명을 신자가 부담을 느끼면 강제로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가 그 계명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 모두 잘 지키지 못하지만 그 계명에 드러난 진리 자체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준수하고자 하는 소망과 과정과 책임을 신자의 믿음에 맡겼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계명을 육신의 부모도 그러듯이 자기 자녀가 기쁨으로 자원해서 따라주길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는 뜻입니다.  

십일조란 처음부터 그 본질상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역으로 부담을 가지고는 절대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 없다는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동원됩니다. 또 어떤 면에선 십일조를 드려보고 믿음의 체험을 하여 흔들림 없는 확신을 체험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즉 십일조 생활을 해 본 자만이 십일조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모순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절묘한 하나님의 신비라고 말씀 드린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일조를 하기 위해선 믿음의 눈이 한 차원 더 높게 뜨여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걸어 주님을 온전히 의뢰할 때에 현실의 삶에서 주님의 세밀한 인도가 절대로 줄거나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이 만나를 공급해주시고 신발과 의복을 헤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확신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자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올 때에만 할 수 있는 100% 온전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기도, 묵상, 금식, 봉사, 성경공부, 찬양 그 어떤 것보다 더 신자의 중심을 볼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신자의 믿음이 가장 잘 흔들리는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금전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신자가 믿음으로 살 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에서 10의 2조, 3조를 바치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의 현실 생활에 큰 주름살이 끼게 됩니다. 아마 신학자, 목사, 평신도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어떤 교리적 논증을 동원하더라도 그 규정을 폐기 시켰을 것입니다. 반면에 앞에서 말한 대로 2% 5% 같은 수치였다면 믿음과 상관 없이 누구나 아무 부담 느끼지 않고 쉽게 낼 것입니다.

그럼 7.5% 8%, 9%, 9.5% 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 데도 왜 꼭 십의 일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물론 첫 째 이유는 기억하기 좋고 계산하기 좋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전에 이미 많은 이방 국가의 우상숭배 종교에서도 십일조가 바쳐졌기에 기독교의 십일조가 이방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십의 일을 바친 것은 인간 상식으로 누구나 그렇게 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단지 십일조를 같이 바쳤다는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 신을 동격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상식적으로 이야기하고 믿고 있는 것들 가운데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진리가 포함 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 있다. 인생 만사 새옹지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 잘 되는 법 없다. 등등”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원리가 모든 시대의 역사와 모든 사람의 삶의 체험 속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영혼 속에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배 의식이 누구에게나 희미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중근동의 모든 종교가 십일조를 바쳤다고 해서 10%라는 수치는 같을지 몰라도 바치는 대상과 그 뜻은 전혀 달랐습니다. 십일조의 내용과 뜻이 다르면 되지 형식이 같다고 해서 금지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모든 종교의 예배가 비슷한 형태를 취하는 것은 이미 사람의 마음 속에 공통적이고 선험적(先驗的)인 종교 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반드시 서로 흉내내고 차용해 온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기독교에는 이방 종교에서 차용해 온 풍습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성탄절(양력12월 25일)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이었습니다.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에게 생일은 인간의 경우와는 달리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에 의한 구원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도 마침 모든 사람들이 지난 일년 간의 삶을 회개하며 새해의 결심을 다지는 년 말에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성탄절이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방 신의 축제일이었으니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제정하자는 운동을 구태여 벌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종교가 십일조를 채택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이 어떤 신이었던 그 신에게 감사의 제물로 바치려면 최소 소득의 10%는 되어야 한다는 공통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 미만이면 계산도 복잡할 뿐 아니라 믿음의 표시로는 약하고 그 이상은 반대가 된다는 것을 종교끼리 의논한 것도 아닌데 기본적 종교심을 가진 인간은 다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십일조는 인간이 갖는 단순한 종교심의 발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도록 하고 당신께서 그 믿음의 중심을 보시고자 직접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금석-십일조      

다윗이 인구조사로 인하여 형벌을 받은 후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할 때에 그 주인 아라우나가 무상으로 그 타작마당을 왕에게 기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24:24)고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자는 아무 희생 없이 값싸게 드려선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신자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으로 신자가 하나님에게 희생을 바쳐 복을 받으려 해도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만사에 형통하여 물질적 축복이 넘칠 때는 믿음의 크기와 상관 없이 누구나 쉽게 감사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인내하고 연단하여 정금 같이 나온 승리의 체험이 없다면 그 은혜의 깊이를 진정으로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그저 받은 것이 많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쉽게 들고 풍성하게 드리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반드시 고난을 만나야만 그 진위 여부와 세기가 판가름 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자만이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하며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롬5:3) 바울 사도가 마게도니야 교회들에 대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했다고 칭찬했습니다.(고후 8:2) 극한 가난 가운데 힘이 넘치도록 연보 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가 신자가 십일조를 해야 하는 참 된 이유입니다. 내 힘에 지나치고, 하나님이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 같고, 내고 나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낄 것 같은 10%를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돈이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신자자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을 때에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했다는 증거가 바로 십일조입니다. 예배가 신자의 희생과 함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증거를 들고 나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는 재삼 재사 말하지만 십일조를 내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10%를 떼고 남은 90%로는 도저히 부족하고 쪼들릴 것 같았던 삶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외의 지출은 막아지고 이전에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사치와 낭비는 없어지고 이제는 신자답게 검소와 절제로 자족하는 생활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 때에 주님이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해결해 주시고 채워 주시는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다음 달부터 사업이 번창해져 수입이 몇 배로 늘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십일조로 시험해 보라고 하면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쌓을 곳 없는 복을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 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3:11)고 했습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과수원 토지의 평수가 두 배 세배로, 포도나무 숫자가 삼십 배 육십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갖고 있는 토지와 과일 나무의 숫자는 이전과 하나 변함 없습니다. 단지 병충해와 이상 기후를 막아 동일한 나무에서 제대로 수확하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공장이 두 배로 확장되는 복이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을 막아 주고 성실히 일한 만큼 수입이 정확하게 나오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믿음으로 주님의 세밀한 인도를 확신하여 십일조를 드린 신자는 현실의 생업에서도 정직과 성실로 일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고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더욱 깊이 더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또 십일조의 축복으로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너무나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자가 경영하는 가정과 기업이 하나님의 향기를 드러내어 주위 불신자들이 부러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자기들로선 감히 상상도 못하는 십일조를 드리고도 저렇게 염려 불안 없이 평강과 기쁨으로 사업을 하고 가정에는 사랑과 화목이 넘치니까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는 다르게 살고 있구나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신자가 십일조가 부담스러워지는 이유는 세금 내기 전 총수입에서 하라고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세금과 비용을 공제한 후의 순 수익에서 십일조 하시면 됩니다. 생활비 다 쓰고 남은 여유 분에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수입이 생기도록 하는 데 들어간 직접 경비는 제하라는 말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의 수익은 항상 경비와 세금을 제외한 것입니다. 그런데 봉급생활자만 세금 전 총액에서 10%를 적용한다는 것은 사업자와 비교해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업가의 경우 매출이 많아도 적자가 날 수 있으며 그런 때는 아무리 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도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사장으로서 월급을 받았다면 그것에서는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또 사업자가 수익에서 십일조를 뗀 후 나머지 소득으로 세금을 계산해선 안됩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뗀 부분 만큼 탈세가 되며 법을 어긴 것입니다. 만약 세금전 십일조의 원칙을 사업자에게 적용시키면 하나님이 탈세를 조장한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럴 수는 없으며 성경의 가르침과도 위배됩니다. 성경에는 국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로 신자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롬13:1-7) 기억하실 것은 십일조보다 국가 세금과 공과금이 먼저입니다. 어떤 형태의 소득도 바로 이 비용과 세금 공제후의 순소득에서 하는 원리를 적용하면 계산이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계산이 복잡해지는 것은 십일조를 좀 줄여서 적게 낼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피흘림의 제사 규정까지 포함하여 구약의 모든 계명이 그러하듯이 십일조의 정신은 신약에 와서도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심지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도 그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지방이 많고 쉽게 부패하는 음식을 피하라는 정신입니다. 대신에 성전 제물 중에 인간의 건강에 나쁜 기름은 전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레3:3-5) 하나님은 우리 연약함은 대신 감당하시되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 전체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뜻이며 십일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정신입니다. 십일조를 선뜻 드리지 못할 만큼 우리 믿음이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 마저 하나님은 감당해 주시고 자원해서 바친 자에게는 황충을 금하여 제 때에 과실이 맺는 복을 허락하십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신자가 부담을 느낄만한 수치의 헌금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 자체가 오히려 신자의 유익입니다. 그래야만 신자가 당신의 진정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그렇게 실천하면 세밀하게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볼 뿐 아니라 10%나 드리고도 더 은혜가 넘치게 되니 나중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주는 것이 일상 생활이 되며 신자 자신은 세상을 향해 주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십일조에 대해 신자가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부분은 십일조의 정신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입니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요구하셨던 뜻이 이제는 완전히 용도 폐기 되었다고 생각되면 안 하셔도 되고 그것이 아니라면 믿음으로 하실 수 있는 만큼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계속 부담이 느껴지면 안 해도 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 시키거나 천국에서 우리를 야단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이 얼마나 연약하며 그 믿음마저도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온전한 마음으로 기꺼이 소산의 10%를 드릴 수 있는 믿음에 이르면 하나님과 신자는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다다르게 됨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여전히 잘못된 가르침과 목회자가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박윤상

2004.09.26 17:55:35
*.204.131.91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정치적인 발언(말씀)을 하고 좌익정권.우익정권 등등 하여서 성도로서 듣기에 민망하게 느꼐지는데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요?

운영자

2005.02.18 01:12:20
*.3.40.248

강대상에서는 당연히 성경 말씀만을 증거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얼나나 크고 풍성한 것에 반하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서고 무지하며 연약한지를 증거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도 당연히 다루어야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동행하는 영성이 자라고 인간관계를 이끌어 가는 인격과 품성이 거룩하게 변하는 부분에 국한해야 합니다. 정치적 의견을 그것도 중립적 의견도 아닌 한 쪽을 편을 들며 강조해선 아니됩니다. 어떤 정권이라도 잘하는 것만 있든지 반대로 못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좌익정권이든 우익정권이든 궁극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으면 그 일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정권하에서도 영원 불변한 하나님의 통치 원리입니다. 박윤상님의 생각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낭여

2018.10.29 05:10:16
*.205.4.86

명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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