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2:34-40) 이웃 사랑 없으면 성화도 없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7)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4-40)

 

궁지에 몰린 유대 당국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 그 신분은 절대 변화 취소되지 않습니다. 성화란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이 자기 친아버지요, 자기는 그분의 친아들이 된 관계를 죽어서 천국 갈 때까지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평생토록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인데 신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신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유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우선 주님과 율법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가게 된 배경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의 장사치와 환전상을 몰아낸 다음 날 성전에서 제자들과 유대인들을 가르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먼저 주님께 무슨 권세로 성전을 청소했는지 따졌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이 맡겨준 권세를 탐욕적으로 악하게 행한다고 훈계했습니다. 화가 난 관원들이 주님을 잡고자 했으나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이 두려워서 분을 참아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음을 인정했으나 그 지도자들은 자기들 자존심과 욕심을 채우려 주님을 해칠 궁리만 했습니다. (마21:12-23)

 

논쟁이 이어지다가 결국 관원 중에 평소 바리새인과 사이가 좋지 않고 종교적으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두개인들까지 나서서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주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마22:23-33) 사두개인들은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므로 부활을 믿지 않았고 현실적 형통만을 목표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자식이 없이 차례로 죽으면 레위기 율법에 따라 형수가 기업을 이어가기 위해 그 시동생들과 번갈아서 재혼해야 하는데 천국에 가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모세 율법대로 하자면 천국에서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경우가 생기니까 부활이 없어야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후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천사같이 되니까 이 땅에서의 관계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죽은 자보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너희 사두개인들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으니까 살아서도 제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 청소 사건과 그로 인해 벌어진 일련의 논쟁을 통해 주님은 시종일관 유대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통치 행태와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 종교를 신랄하게 비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궁에 사두개인들이 대답도 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여 의논했고(34절), 그들 중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는 질문이 어떻게 주님께 올무가 되는지 숨겨진 의도가 궁금합니다. 

 

율법사의 음흉한 모략

 

유대인들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 통칭 토라에는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 계명이 248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365개 합계 613계명이 있다고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 계명들을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수많은 세부적인 방안으로 통칭 장로의 유전을 제정해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아마도 그 모든 규정들을 가장 완벽하게 암기해 가르치고 또 스스로 온전히 지키고 있었던 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만큼 율법을 정확히 알지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과 제자들은 이미 바리새인들로부터 장로의 유전을 어긴다고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성전의 장사치와 환전상을 쫓아낸 사건을 율법에 비추어 잘잘못을 가려보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환전상과 제물 장사치를 쫓아낸 것은 성전에서 동물 희생 제사를 바쳐야 한다는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위반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당시 유대 사회가 철저히 지켰던 안식일 규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밥 먹듯이 위반하니까 도대체 너희 무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계명은 무엇인지 한번 토론해보자고 덤벼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는 것이 첫째가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인 신명기 6:5입니다. 그 첫 마디가 ‘들으라’로 시작하는데 그 히브리어인 ‘쉐마’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그 율법사는 주님이 ‘쉐마’가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하리라고는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바로 이어서 그 ‘쉐마’의 말씀을 자손 대대로 가르치고 집의 문설주와 문에 써서 붙이고, 그 말씀을 적은 작은 두루마리를 손목과 미간에 달아야 한다고 명했습니다.(신6:6-9) 이 율법사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분명히 그렇게 했으나, 유다 북부 갈릴리 출신인 주님과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쉐마가 가장 중요한 줄 알면서도 왜 그것을 적은 두루마리는 손목과 이마에 붙이지 않느냐고 비방 정죄할 작정이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더러 유대교 정통파가 아니라 변방 출신의 실력 없는 랍비라고 비아냥거릴 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사의 의도를 꿰뚫어 아시고 곧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둘째로 중요하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 뜻은 모든 율법의 근본이 되는 십계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내용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를 의롭게 유지하라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지금 율법의 613계명들과 그것들을 세분화하여 만든 실천적인 규정 모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둘로 나뉜다고 못을 박아버렸습니다.(40절) 

 

예수님의 신랄한 꾸중

 

이젠 이스라엘 최고 율법사도 더 이상 꼬투리 잡을 거리가 없어졌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결론은 율법 규정의 우선순위를 따져서 문자적으로 실천하기 전에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신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너희가 이마에 쉐마를 달고 다니고 인간 장로들이 정한 유전까지 철저히 지킬지는 몰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행하는지 너희 신앙 양심에 걸고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모든 정황상 예수님의 이 대답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겼습니다. 

 

“너희가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는 외적 의식에만 급급하여서 저는 것과 병든 것 같은 더러운 제물을 바쳐도 눈을 감아주지 않느냐? 제물 장사치와 환전상들에게 판매 이권을 허락해주고 그들이 취한 폭리를 나눠 먹지 않느냐? 가난한 백성들이 자기들 형편에 맞게 바치도록 도와주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여서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못하게 막고 있지 않느냐? 과연 그러고도 너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율법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따진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서 나는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을 원래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려고 장사치들을 쫓아내었다. 백성들로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순전히 사랑할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위급한 병자를 치료해주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지 너희가 정한 규정을 쫓느라 그들을 방치하여 목숨을 잃으면 오히려 여섯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달성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순전히 너희들의 도덕적 종교적 교만일 뿐이며 하나님은 도리어 너희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예언했지 않느냐?(말1:10) 안식일과 정결례에 관련해 너희가 만든 형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런 사람과 교제도 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게 한 일 때문에 너희야말로 하나님께 외면받을 것이다.”

 

들으라는 히브리어 ‘쉐마’는 단순히 상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유대 최고 율법의 전문가에게 너희가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깨달아서 그대로 순종하고 있는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되돌아보라고 추궁한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대로 살아서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고 피의 맹세까지 했지 않느냐, 그런데 지금 과연 그 맹세를 제대로 지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상 숭배하는 로마 제국과 황제에게 너희의 모든 것을 의탁하며 눈치 보기에 급급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이 대화 후에 주님은 당신이 바로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칭한 그리스도라고(41-45절), 말하자면 말라기가 예언한 성전 문을 닫을 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때부터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6)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직후에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더 이상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철저히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는 그들이 정죄하여 교제 상종하지 않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권력과 재물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신자

 

지금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잘못을 다시 들출 의도는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가 성화에 대해서 그들과 비슷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에 훼방을 놓는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성화를 자신이 더욱 착하고 경건해지는 도덕적 종교적 수양이나 훈련으로만 간주하고 성경에 규정된 계명들에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이 없어진 데다 예수님의 완전한 십자가 제사로 영원한 속죄의 길이 열렸기에 구약의 제사법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또 당시의 사회 환경과 열악한 위생 상황에 맞춘 여러 시민법과 정결례 등도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히9:9,10) 그래도 솔로몬 션펠드라는 신학자는 기독교인이 꼭 지켜야 할 율법으로 긍정적인 계명 33개, 부정적인 계명 135개 도합 168개가 남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물론 그 계명들을 다 기억하고서 매 상황에 일일이 맞춰서 실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 공부로 배운 내용들도 삶에 실현하지 못해서 쩔쩔맵니다. 그래서 성화에 매번 실패하는 나는 아직도 온전한 신자가 아닌가 보다, 제대로 구원받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한탄합니다. 

 

더 큰 문제는 예수님의 본문 가르침 대로 그 계명들을 주신 하나님의 정신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사실상 성화를 이웃 사랑이라고 규정한 셈인데 성화를 그런 방식으로 실천하려는 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기부터 먼저 수양 훈련하여서 상당한 수준의 믿음과 의로움을 달성한 후에,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이웃도 섬기겠다고 작정합니다. 아주 가끔 적절한 기회가 닿으면 이웃에게 교회 나와보시라고 권유하는 정도로 그칩니다. 

 

많은 신자가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을 대적한 악인의 대명사로 여기고 정죄하지만 지금 따져보니까 우리가 그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들에게 우리보다 더 선한 측면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까닭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우상 숭배를 했기 때문이라고 절감하고 율법을 더 잘 지키려고 규정들을 세분화한 것입니다. 환전상과 제물 장사치를 둔 것은 율법 규정대로 따른 것이었으며, 이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즉 우상 숭배를 하는 나라에 굴복하지 않아야 옳지 않느냐고 주님과 토론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암기 낭송하며 세밀하게 지킴으로써 겉으로 악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고 거꾸로 금식, 기도, 구제 등에 아주 열심이어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칭송받았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늘날 신자를 보면 외식하는 자라고 저주는 하지 않아도, 성경을 너무 모른다고 아니 제대로 읽지도 않는다고 야단치지 않을까요? 거기다 율법의 정신은 미처 몰랐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지켜서 의인이라고 칭찬받은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기들보다 더 심하다는 뜻으로 개독교라고 비난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든 목회자들에게 소경 된 인도자라는 바리새인과 똑같은 꾸중의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두 계명

 

모든 율법을 두 개로 정리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겐 성화의 헌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그 두 계명이 두 가지 차원에서 똑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그 두 가지 같은 점을 잘 몰랐기에 율법의 형식만 지키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정신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첫째로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중요도에서 똑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끔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제물 숫자를 맞춰서 성전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에는 문자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선 해선 안 될 말씀 같은데도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같은 격으로 대폭 낮춰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 전체를 다스리고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들의 영혼까지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직접 일일이 하지 않고 먼저 사랑하여서 택하여 구원해 주신 신자를 통해서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신자를 통해서 당신을 모르는 자들도 거룩하게 통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으로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죄에 찌든 인간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정확히 알게 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은혜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당신이 약속한 대로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죄인의 구원 사역을 시행케 하고 당신은 천국 보좌에 오르셔서 지금도 죄인의 중보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즉 성화를 어떻게 이뤄야 하는지 정확히 당신의 삶으로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이도 인간이 만든 규정으로 차별받아선 안 되며, 특별히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절대로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장로의 유전에 따라 죄인이라고 선고하여 교제 상종도 하지 않던 이들을 주님은 오히려 먼저 찾아가서 사랑으로 섬기며 치유 회복 구원해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로 자연히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 지를 실제 삶으로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낼 때부터 이미 율법의 이 두 정신을 분명히 밝혔습니니다.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하나님을 아는 아브라함더러 다른 이를 사랑해서 그들도 당신을 알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뜻을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할 때 제사장 나라 언약으로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따지러 온 율법사에게 너희가 택한 백성이 되고 할례를 하고 율법을 소유한 가장 첫째가는 목적이자 축복이 무엇인지 다시 분명히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너희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절대로 분리해선 안 되며, 둘 중 하나만 혹은 더 우선으로 실천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도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신자가 행할 최우선적인 의무라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꽤 있습니다. 교회에 충성하지 않으면 나머지 무엇을 해도 아무런 형통이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교회를 섬김에 따라 현실적 축복도 달라진다고 하면서 일주일의 삶이 주일 하루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일 내내 깽판 쳐도 주일 하루 교회에서 회개 기도하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봉사하면 다 깨끗이 씻어지고 복을 받는다는 식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신자라면 주일 성수를 빠트리지 않고 경건하게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선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 기도해야 합니다. 소속된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성실히 봉사하고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하루는 엄격히 말해서 나머지 6일간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주일은 복의 근원이 되어 제사장 나라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훈련받는 날이지 주일 자체가 나아가 교회가 신앙의 목적이자 전부가 되어선 절대로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똑같은 두 사랑

 

예수님이 둘째로 바리새인들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똑같다고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내용과 방식이 자기를 사랑하는 내용과 방식과 똑같아야지 서로 달라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지 않습니까?

 

우선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혹시 당신의 제자들더러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과 상충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는 말씀대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바로 자기를 높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계명이 사실상 올바른 자기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선 자기를 사랑하려면 반드시 자기를 높여야만 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으로 나아가 종교적으로도 높아진 자들이 자부심이 높고 사람들 사이의 부러움도 삽니다. 바리새인들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높아지면서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목적과 정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믿음과 열성을 돋보이려고 모든 율법 규정을 철저히 지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너무 사랑했고 또 스스로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에선 정반대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바뀐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고 또 그것이 너무 귀해서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간절한 열정이 생깁니다. 어떤 이를 정말로 사랑하면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그분을 닮고 싶어 합니다. 그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흉내라도 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하려고 최초 인간이 타락할 줄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비록 죄가 이 땅에 들어와서 그의 후손 모두가 현실적 영적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깨달아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님과 함께 교제 동행하는 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1:16)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로 십자가 사형수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고서(빌2:5-8), 또 그들로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전도라는 미련한 방식으로 세상에 전하게 하여서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고전1:21) 창조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만 인간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것이 삼위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자 계획입니다. 그 뜻을 아는 자는 기꺼이 그 계획에 동참하게 되는데 구약시대에는 히브리서 11장에 열거한 믿음의 선진이요, 신약시대에는 예수 믿는 신자입니다. 

 

성화의 올바른 방향

 

예수님이 신자더러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알았고 현재 받아 누리고 있으니 아직 그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귀하고 좋다면 당연히 이웃에게 나눠주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신실하게 섬겼던 이웃 중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모습을 보는 만큼 신자 자신에게 큰 기쁨과 행복이 되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모습은 크기가 각기 달라도 열 손가락 모두가 자기 지체이므로 다 귀하며 그중에서도 아픈 손가락에 더 신경이 쓰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나라 백성이 되는 데는 십자가 보혈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 말고는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신자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데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았으므로 남들에게 그 사랑을 알게 해주는데도 차별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당연히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자기들과 같은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먼저 유대 혈통에 나서, 토라의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고 열세 살 때부터 회당 예배에 참석하면서 장로의 유전을 철저히 지키는 자라야 자기들 이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그것을 어기는 창녀나,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는 그 이웃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과부, 불치병자, 문둥병자, 혈루병 여인, 불구자, 귀신 들린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성전 제사나 안식일 규정을 지킬 수 없었는데도 이웃에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진심으로 이웃으로 대우하며 사랑하였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면서까지 사랑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날의 신자들이 성화를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도덕적인 자기 수양 차원으로 그치는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이웃을 차별 없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성화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약 이후로 예수 믿는 신자가 지켜야 할 성경의 계명 168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둘로 나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방향을 전혀 엉뚱하게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되고 나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첫째 계명은 굳이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이웃 사랑만 잘하면 됩니다. 주님은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본문 말씀에 적용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죽은 후에야 뵙게 되나 살아 있을 때는 항상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에선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도, 형제도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나 형제는 자기를 좋아하니까 반대급부로 자연히 사랑하게 되는데 그런 사랑 이방인들도 잘합니다. 자기가 사랑을 베풀 이웃의 범위에 전혀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화의 솔직한 실상은 교회에서부터 실패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는 것 없이 미운 성도 때문에 종종 시험에 들고 넘어집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끄집어내어서 이웃의 범위를 내가 정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남의 눈에 들보가 있고 내 눈에는 티끌만 있어도 처럼 그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대로 상대의 들보를 최소한 내 수준의 티끌로 축소해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스스로 당신을 낮추었지 않습니까? 본문을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자기가 죄를 범하면 가끔 회개는 해도 스스로 벌을 주지 않고 문제 삼지 않고 너무나 너그럽게 넘어갑니다. 이웃의 잘못에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에 실패한 원인이 노력이 모자라서도, 믿음이 약해서도, 성경의 진리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신자가 지켜야 계명을 일일이 세보지는 않았어도 대충 무엇인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실천하기 전에 정말로 내가 모든 이를 이웃으로 삼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있는지, 내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사랑까지는 몰라도 공평하고도 성실하게 대우하고 있는지 따져보십시오. 정말로 모든 이를 편견, 고집, 선입관, 도덕적 종교적 기준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고만 있어도 성화는 이전과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고 날이 갈수록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8/1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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