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인간이 타락할 줄 알면서 선악과를 두셨는가?

조회 수 15421 추천 수 83 2006.05.14 01:08:45
[질문]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와의 범죄를 방조해서 원죄라는 것을 만드셨는지요, 어쩌면 선악과라는 것을 만들어서 인간의 범죄를 조장하신 것은 아닌지요?

설교시간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대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인간은 로보트이고 모든 프로그램은 하나님께서 작성하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로보트인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작성하신 하나님의 책임이 아닐런지요?  

하와의 범죄나 가롯 유다의 범죄도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들의 잘못은 없는 것이 아닌지요? 비약해서 생각해 보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의미 없이 인간을 시험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하나님 영역 밖의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신지 목사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변]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항상 궁금해 하지만 그 해답을 정확하게 정리해 놓고 있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죄의 기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 나아가 하나님의 예정에까지 이어지는 굉장히 심오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질문하신 가운데 조금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이 있어 답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설교 시간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대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사전에 정해진 절대적인 운명에 무조건 묶여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아마도 목사님이 그런 뜻으로는 결코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틀림없이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지 못해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불신자가 자신의 자유 의지를 동원하여 어떤 선한 행위를 해도 궁극적으로 선하지 못하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한 어떤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요컨대 인간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주팔자처럼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해도 어떤 정해진 방향으로 반드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의미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숙명론을 인정하면 죄를 짓는 것도 숙명이기에 인간에게 귀책사유가 전혀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죄인이라고 탓하는 것이 잘못이 됩니다. 아래 답변에서 따져볼 죄의 기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이 결코 숙명론으로 묶여 있을 존재가 아님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악과와 자유의지에 관해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 상의 오해 내지 이해 부족을 한두 가지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를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런 인간이 하나님과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모릅니다. 둘째는 아담이 행사할 수 있었던 자유의지의 의미에 관해 정확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고 또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한계를 분명하게 안다면 제기하신 질문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이 두 가지 오해부터 명확히 하는 것으로 답변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 주제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인격성을 가진 존재-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지정의로 느끼고 생각하여 결정한 후에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독립성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독립성은 절대적이지 못하며 상대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被造物)로서 모든 삶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인격성 또한 처음 피조 될 때, 즉 범죄 이전의 아담의 경우에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후 심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정의는 하나님의 수준level)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이 완전했습니다. 창조 때의 인간의 지성적 능력과 감정적 깊이와 의지력의 세기는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보다 열등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세 자리 아이큐를 갖고 희로애락을 풍부하게 느끼며 의지를 사용해 마음대로 선택을 한 후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인격성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지정의에 제 삼의 존재가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으며 그래서 그분은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自存)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그 존재의 출생, 성장, 종말에 이르기까지 오직 창조주에게 의존해야 하며 또 그분의 뜻대로 그 모든 과정이 이뤄다는 의미에서 그 인격성은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인격성이 완전하다 해도 결코 피조성을 뛰어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인격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전 우주 가운데 아주 독특한(unique)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닮았지만 100% 같을 수는 결코 없고 마찬가지로 다른 피조물과도 닮았지만 100% 같지 않은 존재입니다.

인간 다음에 고급한 생물인 동물도 아주 초보적이긴 하지만 지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지성과 감정뿐 아니라 심지어 의지력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일관되게 추구하며 서로 의사소통까지 합니다. 갈매기가 조개를 입에 물고 높은 곳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여러 번 떨어트려 그 속을 까먹는다고 합니다. 조개껍질을 깨기 위해 공중에서 딱딱한 바닥에 떨어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그것도 되풀이해서 시도하는 것은 벌써 상당한 수준의 지성과 의지가 동원된 표시입니다.

그러나 동물의 지정의는 어디까지나 생존과 번식이라는 절대적인 틀 안에서 오직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문제로만 연결됩니다. 사자가 사냥해서 배부르게 먹고 나면 누워 자기만 하지  혹시 사냥감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남은 것을 저장해 놓으려고 작정하는 법은 없습니다. 동물은 지정의는 있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인격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학자 안토니오 후크마의 표현대로 인간은 “피조된 인격체(created person)라는 점이 사람의 중심적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Leonard Verduin은 인간을 “선택권을 소유한 피조물(creature of option)”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요컨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자유의지의 한계

인간의 인격성이 창조 때부터 항상 상대적이었다면 그 인격을 구성하는 지정의도 당연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으로 선악과를 따먹도록 이끈 자유의지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내용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배고프면 무조건 사냥하러 나갑니다. “지금 기분도 썩 내키지 않고 한 끼 굶는다고 당장 큰 일 나는 것도 아니니 한 끼 정도 굶어볼까?”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못합니다. 사냥 아니면 금식 둘 중 하나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자도 분명히 사냥하러 갈려고 의지적으로 작정해서 결행했지만 선택을 하지 못했기에 자유 의지가 아닙니다. 그 의지는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놓은 계획안에서만 작동될 뿐이며 100% 하나님 의존적입니다. 동물의 의지는 수동적이며 로봇 같이 프로그램화 된 의지입니다.      

인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배고프면 라면을 먹을까 빵을 먹을까 아니면 한 끼 굶을까 순전히 자신의 지정의로만 판단하여 선택하고 결행합니다. 의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선 어느 누구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물처럼 프로그램화되어 그 의지가 일방적인 선택으로 강요되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의에 의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숨도 쉬지 못합니다. 언제라도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피조물로서 단지 우리는 진흙에 불과하며 하나님 그분이 토기장이입니다. 인간이 아무 장애 없이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그렇게 선택하고 결행할 힘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하긴 하지만 상대적일 뿐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의지만은 완전하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그분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함에 있어 영원토록 어떠한 존재로부터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나는 ‘자유의지’라는 단어 자체가 결코 생겨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말은 성경에도 없는 단어요 아무런 유익이 없는 단어로 마땅히 ‘자아의지’라고 불렸어야 했다. 자유의지는 명백히 신의 용어로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하늘과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바를 행하시기 때문이다.”

본능에 따라 일방적 선택이 강요된 동물의 의지와 달리 인간에게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물과 전혀 다른 모습의 의지를 주셨다면 당신의 특별한 뜻이 따로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나아가 인간이 그 의지를 행사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하고 의지를 행사한 결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만 합니다. 요컨대 아담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선 자유로웠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사했어야 했고 또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져야할 응분의 책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봇도 동물도 하나님도 아닌 인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에 당신을 대신할 관리자로 세우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의 나머지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는 중간적 위치에서만 온전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으로선 인간을 상대적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밖에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다음 세 가지 종류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완전히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또 다시 만들어 이 땅에 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란 그 자체로 하나님일 수 없기에 절대적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럴 가능성은 완전히 제로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자유의지를 갖되 죄는 전혀 선택하지 못하고 오직 선(善)쪽으로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의지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죄도 짓지 않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가 됩니다. 이 또한 따지고 보면 하나님입니다. 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지란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완전히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일종의 로봇 같은 인간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인간이 만들어졌다 해도 이 땅에 선만 있게 되면 벌써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악이 없는 곳에서의 선은 단순히 아무 의미 없는 일상사에 불과합니다. 그 반대로 인간을 죄만 짓도록 의지를 작동하게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라 그런 것을 계획조차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동물처럼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릴 자가 없어집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이 한 명도 없고 사자나 공룡만 군림하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지구를 만들 의미와 목적과 가치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온 천하를 오직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히 하나님 같은 존재나 동물이나 일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같은 존재로는 결코 만들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고 또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그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인간의 정체성을 두고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곧 영화와 존귀로 관을 쒸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시8:4-6)

천사는 아니지만 천사와 거의 방불한 정도의 영적인 존재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비록 상대적이긴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것이 너무나 큰 은혜라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인간된 신비적 중심이자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선택하게 해 놓고 왜 벌을 주는가라는 질문은 그 의지가 과정뿐 아니라 책임까지 절대적으로 자유스러운 의지였다면 합당한 의심이자 불만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기에 마음대로 한 것을  두고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받은 자유의지는 하나님 뜻 안에서만 사용되어지고 또 그 결과도 하나님 뜻 안에서 인간의 책임이 되는 상대적 자유의지였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만 정확히 인식한다면 처음부터 성립 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만약 자꾸 그 문제를 따지고 드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거나 아예 태어나지 말게 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선악과는 오히려 축복

대체로 신자들은 선악과 사건을 보면서 홍시가 주렁주렁 열린 가지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도록 방치 해놓고는 동네 아이들이 따먹기만 기다렸다가 벌을 주는 심술궂은 할아버지를 연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줄 미리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어 놓고는 따먹자마자 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시고선 아담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인간이 자기 의지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만은 따 먹을 수 없다고 그 한계를 분명히 정해 주었습니다. 아담에게 준 의지는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상대적 자유의지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당신의 임재의 상징인 선악과는 역으로 말해 아담에게 자신의 정체성도 깨닫게 해주는 나무였습니다. 다른 과일은 다 먹을 수 있지만(=이 땅의 만물을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릴 수 있는데) 선악과는 먹지 말라.(=어디까지나 나를 대신하는 대리인, 즉 피조물임을 잊지 말라.)

그렇지만 그 금령(禁令)에 벌을 주겠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인간의 활동을 제한시키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만이 참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의 징표이자 약속이었습니다. 비유컨대 복잡한 쇼핑 몰에 엄마가 아기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네가 들어 가보고 싶은 가게는 어디든지 전부 다 가도 되는데 단 엄마 손은 절대 놓으면 안 돼”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 명령에 반항하여 대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엄마 손을 꼭 붙들고 있어야 안전하고 또 엄마랑 함께 즐겁게 쇼핑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처럼 엄마 손을 놓치지 않으면 모든 가게를 다 갈 수 있는 자유였기에 아담의 자유의지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고 표현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의지를 사용하여 그 결과도 하나님의 뜻에 제한을 받는 상대적 자유였지만, 선악과는 인간에게 형벌과 저주로 가는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너무나 귀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은혜를 어떻게 변질 시켰습니까? 자신의 의지를 의도적으로 작동해 사단의 유혹을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 먹어 버렸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은혜라는 약속을 의심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다시 비유컨대 쇼핑몰에서 엄마가 손을 꼭 잡고 있으니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가게를 못 가게 막는다고 오해한 어린 딸이 그 손을 뿌리치고 수많은 쇼핑객 사이를 뚫고 혼자서 쵸코렛 가게로 뛰어 들어 가버린 셈입니다. 단 하나 엄마 손을 놓지 말라는 속박(사실은 축복인데도)조차 귀찮고 싫어서 엄마 품을 뛰쳐나간 것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는 상대적 자유의지가 싫어서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절대적 자유의지로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갖고 또 가질 수 있는 절대적 자유의지가 탐이 났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못 먹게 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 필요 없어! 나는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그 책임도 내가 질꺼야!”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올라서겠다는 극도의 교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엄마가 귀찮고 싫어 쵸코렛 가게로 뛰어 든 어린 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혹시라도 엄마가 자기를 쫓아올까 일부러 인파 속에 숨어버린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처음에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구경하겠지만 막상 사먹으려니 돈이 없어서 단 한개도 살 수 없습니다. 배는 고파 오고 자꾸 시간은 흘러 쇼핑객은 다 빠져 나가고 어두워집니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습니다. 두렵고 떨리기 시작합니다.

아담도 죄를 지은 이후에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면 상대적 자유의지가 절대적 자유의지로 바뀔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부자유스러워졌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심령에 평강과 자유는 완전히 없어지고 대신에 불안과 공허만 가득 찼습니다. 이미 그의 영혼에 사단이 자리 잡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어그스틴의 표현에 따르면 “죄를 짓지 않을 수”(posse non peccare)" 있는 자유가 이제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자유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갖고 있던 상대적 자유의지는 마음대로 선을 택할 수 있고(모든 실과를 따 먹을 수 있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선악과만은 먹어선 안 되는)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여전히 그 의지는 상대적이지만 이제는 사단에게 제한을 받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에서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고(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단 쪽으로 향했으므로), 모든 선한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동산의 다른 실과마저도 못 먹게 에덴에서 추방되었으므로)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선악과를 따 먹느냐 안 먹느냐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분기점이자 죽음의 형벌이 따르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을 벗어나면 사단의 노예가 되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그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자가 됩니다. 나아가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버리고 오로지 악만 행하는 자유를 택했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따먹지 않으면 선을, 따먹으면 악을 철저하게 알게 해주는 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의지적으로 버리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사단의 종이 되어 악을 추구한 인간의 죄악은 크게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또 하나님의 품을 떠났으니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쉽게 말해 쇼핑 몰에서 딸아이가 엄마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엄마랑 그 몰 안에 있는 모든 가게를 다 구경하고 쇼핑하며 너무나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전히 쇼핑 몰 안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을 잃거나 엄마를 놓칠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손을 붙들고 있기에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있고 사단은 항상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만이 자신의 행복과 만족의 근원이라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었다면 그는 선을 행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죄의 무서운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선악과는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이지 인간을 죄악에 빠트리는 걸림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쇼핑 몰에서 엄마 손을 절대 놓지 말라고 당부하는 엄마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방조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 쪽으로 자진해서 뛰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을 알고도 왜 선악과를 두었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먼저 불신자의 경우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우연히 물질에서 진화 되어진 존재로 동물 중에 가장 고급한 동물로 보거나, 자연을 구성하는 한 일부로서 그 구체적 과정은 모르지만 뛰어난 지정의를 갖게 된 특이한 존재로 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이 두 가지 측면에서만 생각합니다.  

첫째는 동물이 갖고 있는 의지와 동일시합니다. 생존과 번식의 본능만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동물의 의지가 작동되듯이, 그들도 자신의 지정의-인격을 오직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만 사용합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동물로 비하시키는 셈입니다. 진화를 믿어 원숭이를 자기들 할아버지로 모시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을 갖춘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본능을 닮은 인격체, 정확히는 조금 고급한 본능을 가진 동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 자연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으로 그 위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마치 절대적 자유의지를 가진 양 행동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이 판단, 선택, 결행하고 그 결과도 인간이 책임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이 독단적으로 이룬 일들이 궁극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을 보더라도 물질적, 기술적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 영적 진보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불안 염려가 인간을 옭아매며 죄의 타락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인간  스스로 절대적 자유의지를 주장한 결과입니다. 인간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때뿐입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오직 피조된 인격체라는 관점에서만 확인합니다. 그에 따라 모든 신자의 삶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껏 살펴본 대로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인격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둘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그분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당신을 대신해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 삶의 피조세계를 향한 하향적 목적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상향적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 삶의 목적을 매일 상기하라는 뜻입니다. 매일 매 순간 동산 중앙에 있어서 자기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고 또 찬양과 감사로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없이 하나님이 모든 실과를 마음 놓고 다 따먹으라고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은 자신이 상대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의지를 받은 양 오해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따로 계심을 알지 못하거나 잊게 됩니다. 하나님으로선 아담에게 당신의 실체를 직접 보여줄 수는 없고 당신의 표상을 심어주어야 했습니다. 환언하면 아담에게 하나님 당신의 임재하심과 또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어떤 시험 내지 훈련의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그 반대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포함한 모든 과일을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명령입니다. 굶어 죽으라는 명령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예 어떤 과일이라도 주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악과를 섭씨 수만 도의 고열을 내뿜는 나무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구태여 말을 안 해도 도저히 접근 할 수 없으므로 금령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케이스는 겉으로는 자유를 준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혀 자유가 없이 인간을 하나님의 노예로 삼은 것입니다. 선악과는 항상 따 먹을 수 있으되 말씀으로만 금하는 형식을 취해야만 시험과 훈련의 목적이 달성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런 형식 대신에 인간의 순종을 어떤 현실적, 육신적 어려운 조건을 붙여서 그것을 지켜내는 지로 테스트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테스트에 아담이 성공한 경우는 자기 스스로의 공적으로 구원을 취득한양 착각하고 자랑이 따르며 하나님에게 감사가 없어집니다. 반대로 아담이 그런 테스트에 실패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 기회는 영영 상실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스스로 뒤집지 못하는 신실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선악과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반드시 있어야 했던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큰 갑부가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집을 맡기고 갔습니다. 차고에는 온갖 차들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벤즈 600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서 다른 차는 다 타도되지만 그 차만은 타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차고와 차의 열쇠를 다 주면서 그 차의 열쇠를 주지 않고 가면 어떻게 됩니까? 순종의 테스트가 아니라 아예 아들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둘 사이에 올바르고 진실 된 관계는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런 말을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타도된다고 완전히 방임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도 타지 말라고 무조건 금지시켜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음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진실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령 아들이 그 벤즈를 몰고 나가 사고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열쇠를 주고 가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안 하고 자기 말대로 잘 따라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설령 자기 말을 위반하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결코 손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악과는 너무나 선하며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영원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으로선 아담이 타락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사단이란 영적 존재가 인간의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고 그보다 영적인 능력이 뒤지는 인간으로선 틀림없이 사단에게 넘어가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미리 알았다면 막아 주실 수 있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전혀 논리적이 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길게 따져 본대로 인간을 하나님이나, 동물이나, 로봇 셋 중에 하나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미리 알았어도 인간을 꼭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만드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태초부터 다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약에 예수가 없었다면 인간의 타락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았고, 아니 인간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대안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이 따를 것을 아시고도 예수가 있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 피조된 인격성을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말하자면 하나님은 잠시 동안 인간을 사단의 수중에 놓아두신 것입니다. 때가 차서 예수님이 구원해 낼 때까지 인간을 죄의 종으로 지내게 했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준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병은 분명히 아담이 잘못해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아담에게 병이 날 것을 아시고 그 구원책까지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지 일부러 병을 준 것이 아닙니다.

쇼핑 몰에서 엄마 손을 뿌리치고 혼자 뛰어간 아이가 어디에 있을지 엄마는 압니다. 그래서  초코렛 가게로 바로 찾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뛰어가 구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엄마 손을 놓고 간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신나고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혼자 두고 봅니다. 그러나 아기 몰래 뒤를 쫓아다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구원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들을 두고 보시다가 때가 차 매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던 인간을 십자가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 질문은 신자가 앞에서 인용했던 시편 기자의 찬양을 진심으로 함께 부를 수 있다면 저절로 해답을 가진 셈입니다. 인간을 인격성을 갖춘 유일한 피조물로 만드시고, 상대적 자유의지를 갖게 해 주고,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이 땅을 다스리게 하고, 비록 아담이 실패했지만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며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준 것들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로봇이나 동물로 만들지 않고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타락할 줄 알고도 자유의지를 주신 뜻은 당신께서 거룩하고 온전하니 그도 거룩하고 온전해지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당신을 닮은 인격성을 심어 주었는데 오히려 죄에 묶이는 일에 그 자유의지를 써버린 인간이 그런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거꾸로 책임을 물을 수는 도저히 없지 않습니까?

5/13/2006


김형주

2006.05.15 12:46:35
*.173.42.18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고보니 매우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됬던 부분들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저로선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어느날 성령이 임하시면 저절로 이해가 되나 하는 생각도 해 봤고요.
하지만 이렇게 목사님으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태광

2011.03.17 15:45:39
*.32.182.220

목사님. 글이 중간에 깨져서 잘 안보입니다.

운영자

2011.03.18 05:45:12
*.108.161.206

하태광님
오늘 깨진 글 부분을 고쳐서 다시 올렸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

사라의 웃음

2012.11.07 22:43:58
*.109.85.156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상대적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군요. 동물과 같지 않은 특별한 축복을 주심은 하나님 임재안에 있음의 행복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우리가 깨달아 알아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품속에서 거하길 소원하고 소원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따신 맘에서 비롯된 것임을 소상하게 조근 조근 참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시려고 이미 계획하여 놓으시곤, 선악과 금령을 어겨버린 자들을 위해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시어 대신 죽으시어 대속하여 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으로 이루어 놓으신, 아담 때로 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올 세대들 까지 모두 다 품으시어, 그 품 안에서 구원해 주시고...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하나님 품 속이 좋은지를, 그러하기에 절대로 떠밀더라도 이젠 떠나가기 싫다고 고백하게되는 하나님 임재 가운데 있음의 복을... 그 복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서 얻게된 복이기에 찬양치 않을 수가 없는 자녀로 지어가심이... 이처럼 놀라운 사랑 가운데 있는 우리이기에 엎드리어 감사만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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